德崇禪學 4-7 제7주제 발표; 知訥 ‘마음철학’에 대한 硏究
이덕진 (고려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原始佛敎에서 붓다가 ‘마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후대의 大乘佛敎에서처럼 ‘마음’을 거의 絶對者와 버금가는 것으로, 그러한 설명 방식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설명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붓다의 주된 관심은 딴 곳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B. C 6세기까지의 인도라는 카스트적 세계에서 Brahman[梵我]이나 Ātman[個我]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形而上學的 思惟體系의 극복이다. 붓다는 어떤 形而上學的인 實體에서 나오는 神秘한 그 무엇을, 그것이 마음이라 불리던 아니면 이성 혹은 성품이라고 불리던 간에,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緣起하여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자 했을 뿐이다. 붓다의 窮極的인 關心은 存在 自體에 대한 穿鑿이 아니다. 그는 衆生의 解脫을 窮極的인 目的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마음에 대한 관심은 解脫을 위한 實用的인 方便안에 있다. 다시 말해서 具體的인 個體들은 스스로 獨立的인 存在가 아니다. 相互依存을 통해 비로소 ‘自我’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我는 經驗我일 뿐이며, 마음은 經驗我가 가지고 있는 屬性이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自我’는 形而上學的인 實體로 종종 설명되어지고, 당연한 결과로 ‘마음’ 역시 本體論的인 意味가 덧붙여져서 해석되어지며, 종종 絶對者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다. 즉 ‘마음’이 不變의 實體라는 存在者에 本體論的으로 連累되어 해석되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교 사상의 역사적 전개가 꼭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불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역사는 絶對者가 目的을 가지고 意志대로 진행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인 법칙은 있을 수 없다. 역사는 그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며, 관계 속에서 엮어져가고, 형성되어 지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붓다가 자기 시대의 난 문제를 ‘緣起’로 풀었듯이 후대인 들도 다른 해결책을 가지고 자기 시대의 문제를 풀어 나갈 수도 있음을 示唆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당대의 시대적 난 문제에 대한 해답들이 ‘華嚴敎學’이고 ‘禪佛敎’이며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華嚴敎學이나 禪佛敎 안에서의 ‘마음’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華嚴이나 禪에서 강조되고 있는 새로운 마음에 대한 주장들이 非佛敎的인 어떤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佛敎的이며, 오히려 더욱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불교를 살찌우는 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假我인 經驗我의 屬性인 ‘마음’이 원시불교와는 다르게, 實體論的으로 설명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實體論的으로 설명되어진다면 마음은, 붓다와 그 의미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그토록 빠져 나오기를 추구하였던, Brahman이나 Ātman안에 다시 갇히게 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絶對的 存在者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固定化하고 有形化하여 窮極的인 實在나 萬物의 根據로서의 眞我의 役割을 담당하게 만든다면, 이것은 새로운 觀念的인 實在論을 만드는 것이 된다. 이런 식의 견해는 아무리 양보하여도 原始佛敎의 정신과는 다른 獨自的인 思惟體系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구자는 고려의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지눌의 불교 철학적 입장이 상기한 여러 문제와 복합적으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눌의 철학 체계 내에서는 간과해서 넘어가서는 안될 주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중시이다. 지눌 禪思想의 要諦는 佛性으로서의 自性과, 그 自性을 둘러싼 心城인 自心에 있다. 이때 自心이라는 心城안에 있는 自性의 空寂靈知에 대한 지눌의 독특한 견해는 그의 禪思想의 根幹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눌은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一貫性있게 그의 선사상을 전개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지눌의 마음에 대한 思惟體系에서, 서로 矛盾되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을 종종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실제로 모순되는 것일 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는 것 뿐 일까. 만일 지눌이 마음에 대해서, 그의 저작들에서,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면, 이 문제는 지눌 談論의 전체적인 구조의 결정적인 缺格事由가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이 문제에 대한 연구자 나름의 천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논문은 大乘佛敎徒이자 禪師인 지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철학이, 원시불교에서 붓다가 설파한 經驗我 안에서의 마음에 대한 사유체계와, 어느 정도의 접점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거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지눌 사상의 전체체계에 대한 憂慮를 拂拭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서술되었다.
이 논문은 이 들어가는 글에 이어 Ⅱ에서는 지눌의 마음철학을 전체적으로 논구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Ⅱ-1에서는 自心이 망령된 마음의 원천이 되는 경우에 대한 지눌의 논구를, Ⅱ-2에서는 지눌에 의해 제시된 ‘망령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법’인 ‘無心法’을, Ⅱ-3에서는 自心이 ‘참 마음[眞心]’인 경우에 대한 지눌의 설명을 體와 用의 측면으로 나누어 논구하려 한다. 그리고 이어서 Ⅱ-4에서는 지눌 마음철학의 핵심인 ‘비어있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空寂靈知心]’에 대한 자세한 논구를 하게 될 것이다. Ⅱ장 전체를 통해서 지눌의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Ⅲ은 이 논문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Ⅱ를 통해 알게된 지눌의 마음철학을 토대로, 그의 마음철학이 가지고 있는 實在論的인 傾向과 反實在論的인 傾向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지눌의 마음철학이,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反實在論的 思惟體系를 一貫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Ⅳ는 결론 부분이다. 연구자는 여기서 지눌 마음철학이 가지고 있는 存在論的․時代的 含意를 考察하려한다. 그리고 그 吟味를 통하여 그의 철학이 동아시아에서 胎動된 大乘佛敎 정신을 훌륭하게 이어받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禪師들이나 敎學者 들이 종종 빠지는 實體論的인 連累라는 함정을 훌륭하게 피한다는 것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눌의 사유체계가,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붓다의 원시불교 정신을 배반하지 않는 뛰어난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불교적 사유체계를 더 넓고 더 깊게 만드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점을 認知하게 될 것이다.
Ⅱ. 知訥 마음철학
지눌에 의하면 마음은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서울: 普照思想硏究院, 1989), 31쪽左.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따라서 虛空과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49쪽右.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舍, 所以不如.”
또한 마음은 과거에 난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나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본래부터 일체의 공덕을 그 본성에 만족하게 갖추고 있으며, 같은 책, 51쪽中.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
더 나아가서 十方의 모든 공간에 다 사무쳐 있다. 같은 책, 52쪽中. “非中非外, 洞轍十方.”
따라서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마음에 대해서, 마음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마음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지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허공이 맑은 하늘도 되고 비오고 바람 부는 하늘도 되듯이, 마음도 方便으로는 眞心과 妄心으로 나누어서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지눌에 의하면 虛妄을 여윈 것이 眞이고 神靈하게 밝은 것은 心이다. 같은 책, 50쪽右. “離妄名眞, 靈鑑曰心.”
다시 말해서 虛妄을 여의지 않은 마음은 妄心이고 虛妄을 여윈 마음은 眞心이다. 지눌은 말한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迷惑해온지 오래되어서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性品이 참 眞理[法]인 줄 몰라서 진리를 구하려 하면서도 멀리 성인들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하려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보지 않는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1쪽右. “嗟夫! 今之人, 迷來久矣.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欲求法而, 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지눌에 의하면 참 부처, 참 진리는 다름 아닌 우리들 존재의 바탕인 마음 그 자체이다. 그에 의하면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마음을 밝히신 분들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이 마음을 밝히신 분들이기 때문에, 미래에 배울 사람들도 마땅히 이러한 法을 의지해야 해야 한다. 같은 책, 31쪽左.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따라서 凡夫가 迷했을 때에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몸을 삼고 妄想으로 마음을 삼아 自性이 참 法身임을 모르며 自己의 神靈하게 아는 그것이 참 부처인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은 妄心의 源泉이기도 하고 동시에 眞心의 根源이기도 하다. 같은 책, 34쪽中.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
지눌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個別者인 인간의 自心속에 佛性으로써의 自性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눌은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마음이 妄心인 것처럼 오해되어지는 경우에 대한, 지눌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다.
1. 망령된 마음
마음이 妄心인 경우는 어떠한 때인가? 첫째, 마음밖에 부처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견해이다. ꡔ圓頓成佛論ꡕ, ꡔ普照全書ꡕ, 86쪽左. “心外有佛, 不名爲信, 名爲大邪見人也.”
왜냐하면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성품 밖에 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바탕은 물듦이 없어서 다만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니 다만 망령된 攀緣을 여의면 곧 어엿한 부처가 된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1쪽左.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즉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서 이리 저리 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같은 책, 34쪽中. “心外覓佛, 波波浪走.”
둘째, 神通變化를 구하는 것이다. 신통변화는 오히려 妖怪스러운 일이요, 성인에게는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衆生들의 경우에는 신통변화를 구하게되고 그것은 결국 앞뒤를 알지 못하고 本末을 분간치 못하는 것에 불과해서 妄心을 내게되니, 그것은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과 같다. 같은 책, 33쪽左-34쪽右. “況事上神通, 於達人分上, 猶爲妖怪之事, 亦是聖末邊事, 雖或現之, 不可要用. 今時迷癡輩, 妄謂一念悟時, 卽隨現無量妙用神通變化. 若作是解, 所謂不知先後亦不分本末也. 旣不知先後本末, 欲求佛道, 如將方木逗圓孔也. 豈非大錯.”
굳이 신통변화를 말한다면, 물을 운반하고 나무를 나르는 것이 신통변화이다. 같은 책, 36쪽右. “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
셋째, 妄心의 근본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그 자체이다. 즉 妄心을 끊으려는 그 마음 자체가 妄心이다. ꡔ華嚴論節要ꡕ, ꡔ普照全書ꡕ, 153쪽右. “惑有疑云, 豈不斷煩惱. 解云但諦觀殺盜淫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다시 말해서 眞心의 本體와 作用은 相으로 본다면 같은 것이 아니고, 性으로 본다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眞心의 本體와 作用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53쪽左-54쪽右. “又用從體發, 用不離體, 體能發用, 體不離用, 約此不相離理,故 非異也.”
眞心의 本體는 본래 空寂하고 不動하며 일체의 상대적인 것이 끊어진 바탕이다. 반면에 眞心은 作用의 측면에서는 밝고 神靈스럽게 아는 것을 갖추고 있기에 對象에 따라 갖가지 모습을 다 비추어 내며 움직여 虛像을 이룬다. 같은 책, 53쪽左. “妙體不動, 絶諸對待, 離一切相, 非達性契證者, 莫測其理也. 妙用隨緣, 應諸萬類, 妄立虛相.”
즉 眞心의 本體는 일체의 상대적인 것이 끊어지고, 그 반면 眞心의 作用은 일체의 활동을 일으킨다. 따라서 眞心의 體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와는 다르게 眞心의 用은 眞心의 體를 바탕으로 하고, 眞心의 體는 眞心의 用을 일으키므로 眞心의 本體와 作用은 不二이다. 즉 本體卽作用이고 作用卽本體이다.
넷째, 順境이나 逆境이거나 혹은 中間境界에 대해서 對象으로부터 일어나는 感覺的․知覺的 마음, 즉 貪嗔痴의 마음을 내는 것이나, 몸과 마음을 억지로 눌러 調伏하기를 돌로 풀을 누르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같은 책, 65쪽右. “眞心與妄心對境時, 如何辨別眞妄耶. 曰 妄心對境, 有知而知, 於順違境, 起貪嗔心, 又於中容境, 起癡心也. 旣於境上, 起貪嗔癡三毒, 足見是妄心也.”
이것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心地가 어지럽지 않음이 自性의 定이고, 心地가 어리석지 않음이 自性의 慧일 뿐이기 때문이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9쪽中.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다섯째, 自己 눈을 보고자 하는 이는 잘못된 견해에 빠진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한다 하여 눈이 없다고 하며 눈을 찾아보려는 것과 같다. 같은 책, 34쪽左-35쪽右.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이것은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自心이 自心을 볼 수 없는 것은 칼이나 손가락 등이 스스로 자르거나 가리키지 못함과 같다. 이미 볼 만한 對象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볼 수도 없으니 客觀對象[所見]이 없기 때문에 認識主觀[能見]도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殷貞姬 譯註, ꡔ대승기신론 소․별기ꡕ(서울: 一志社, 1992), 228쪽. (ꡔ起信論疏ꡕ卷上, ꡔ大正藏 ꡕ44卷, 214쪽中. “而就自心不能自見, 如刀指等, 故言心不見心. 旣無他可見, 亦不能自見, 所見無故, 能見不成.”)
그렇기 때문에 지눌은 道는 知에도 속하지 아니하고, 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知는 妄想이고 不知는 無記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무쳐서 의심치 않는 경지는 탁 터인 虛空과 같아서 是非라는 分別智나 對象智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47쪽右.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想,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地, 猶如太虛寬廓. 豈可强是非耶.”
지눌에 의하면 現象界는 물거품 같고 공중에 핀 꽃과 같다. ꡔ勤修定慧結社文ꡕ, ꡔ普照全書ꡕ, 22쪽中. “四大如泡幻, 六塵似空花.”
만일 우리가 이 세계가 空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는 空寂靈知한 自性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空寂靈知인 自性이 우리의 本來面目이며 三世諸佛과 歷代祖師와 天下善知識이 은밀하게 서로 전한 진리인 것이지 마음 이외에 따로 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5쪽中. “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 歷代祖師, 天下善知識, 密密相傳底法印也”
여섯째, 相對的이고 二元的인 마음이다.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65쪽左-65쪽右. “聖人 處有不有, 居無不無. 雖不取於有無, 然 不捨於有無.”
이는 禪門과 敎門의 공통된 병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性品과 모습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마음의 性品에는 全揀門과 全收門이 있다. ꡔ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ꡕ, ꡔ普照全書ꡕ, 147쪽左. “此心性, 有全揀門全收門.”(이하 ꡔ節要ꡕ로 표기)
따라서 마음을 닦는 사람은 이 마음의 두 門을 절실하게 반드시 살펴야만 한다. 지눌이 말하는 바의 全揀門, 즉 완전히 가려내는 문이란, 다만 마음의 本體를 밝힘이야말로 神靈스러운 앎이며 곧 이것이 마음의 性品이고 그 밖의 것은 다 虛妄한 것임을 가려내는 문이다. 또 全收門, 즉 완전히 거두는 문이란, 더럽고 깨끗한 모든 法이 이 마음 아닌 것이 없는 문이다. 따라서 똑바로 참마음의 本體를 나타내어야만 비로소 능히 그 가운데서 일체를 가려내고 일체를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두고 가려내는 일에 自在하고 性品과 모습에 걸림이 없음으로써 비로소 능히 一切法에 모두 머무르는 바가 없어지는 것이다. 같은 책, 148쪽左. “直現出眞心之體, 方能於中, 揀一切收一切也. 如是收揀自在, 性相無碍 方能於一切法, 悉無所住.”
그런데 禪家에서는 全揀門에 머무르고, 敎家에서는 全收門에 머무르니 그 본래의 뜻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눌이 보기에 敎學者이건 禪家이건 모두 문제가 있다. 우선 敎學者의 병은 文字에만 執着할 뿐 마음 닦는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언어적 설명인 文字에 얽매여서, 文字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敎學者들은 權敎의 말에 걸리어 眞實과 虛妄을 따로 따로 執着함으로써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며, 혹은 입으로 事事無碍를 말하지만 觀行을 닦지 않으며, 제 마음이 깨달아 들어가는 비밀한 法이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같은 책, 117쪽右. “予見敎學者, 滯於權敎所說, 眞妄別執, 自生退屈, 或口談事事無碍, 不修觀行, 不信有自心悟入之秘訣.”
그 다음으로는 이른바 癡禪으로 禪學者의 병폐 중의 하나이다. 깨침과 닦음의 앞과 뒤를 구분하지 못하고 덮어놓고 앉아 있는 것을 禪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지눌이 보기에는 당시의 마음 닦는 사람들은 文字가 가리키는 바에 의지하지 않고 비밀한 뜻을 서로 전한 것만을 道라 하여 헛되이 수고하며 앉아 졸기도 하고 혹은 觀行함에 있어서 마음을 잃고 錯亂상태에 있다. 같은 책, 103쪽右. “予觀今時修心人, 不依文字指歸, 直以密意相傳處爲道, 則溟涬然, 徒勞坐睡, 或於觀行, 失心錯亂.”
결과적으로 지눌이 힐난하는 이는 다름이 아니라 敎外別傳과 不立文字를 잘못 이해하여 文字나 敎說을 무조건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暗中禪客과 ‘狂慧’와 ‘乾慧’에 떨어진 世間文字法師인 敎學者들이다.
일곱째, 잘못된 念佛의 實踐이다. 지눌에 의하면 당시의 敎學을 배우는 많은 沙門들은 道를 구함에 모두 外部의 相에 執着하여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소리높이 부처님을 부르는 것으로 道의 實踐을 삼는다. ꡔ勤修定慧結社文ꡕ, ꡔ普照全書ꡕ, 24쪽左. “近世, 多有義學沙門, 捨名求道, 皆着外相, 面向西方, 揚聲喚佛, 以爲道行.”
이러한 修行의 방법은 지눌의 시각에서 본다면 두 가지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 한가지는 淨土를 마치 서쪽 어디에 있는 것인 양 對象化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名號나 부르면서 往生을 원하는 것은 方便으로 베푼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같은 책, 8쪽左. “不依勸學方便之說.”
또 다른 한가지는 밖을 향한 修行이다. 지눌은 우리들 앞앞이 空寂靈知한 부처와 같은 마음을 다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 그가 念佛을 警戒하여 ‘절대로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1쪽左.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라고 강조한 것은 밖의 對象을 향한 背心取相의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自心을 등진 修行은 옳을 수가 없다.
2. 망령된 마음을 다스림
지눌은 마음이 妄心의 源泉이 되는 경우가 어떤 때인가를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妄心을 다스리는 공부법을 제시한다. 지눌에 의하면 妄心을 다스리는 공부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無心法’이다. 지눌에 의하면 無心이란 마음의 體가 없다고 하는 無心이 아니라 다만 마음 가운데 잘못된 생각[物]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마치 空甁이라 할 때 甁 속에 物件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空甁이라 하고, 甁 自體가 없는 것을 空甁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55쪽中. “曰 今云無心, 非無心體, 名無心也. 但心中無物, 名曰無心. 如言空甁, 甁中無物, 名曰空甁, 非甁體無, 名空甁也.”
지눌은 ꡔ眞心直說ꡕ에서 妄心을 다스리는 無心 공부를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ꡔ眞心直說ꡕ이 지눌의 저작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연구자도 이 지적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결과로는 ꡔ眞心直說ꡕ이 지눌의 저작이 아니라는 단정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지눌의 저작이라는 증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즉 ꡔ眞心直說ꡕ이 지눌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은 아직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ꡔ眞心直說ꡕ을 지눌의 저작으로 간주하고 논지를 전개하기로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덕진 편저, ꡔ지눌ꡕ(서울: 예문서원, 2002)>에 수록되어있는 다음 논문들을 참고. <최연식, 「ꡔ眞心直說ꡕ의 저자에 대한 재고찰」>, <김방룡, 「ꡔ眞心直說ꡕ의 저서에 대한 고찰」>
하지만 크게 본다면 대개 3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되어진다.
첫째, 妄念을 내려놓는 공부로써 ‘깨달아 살피는 것[覺察]’ ꡔ眞心直說ꡕ, ꡔ普照全書ꡕ, 55쪽左. “一曰 覺察.”
과 ‘쉬는 것[休歇]’ 같은 책, 56쪽右. “二曰 休歇.”
이 그것이다. ‘覺察’은 공부할 때에 항상 생각을 끊고 일어나는 생각을 막는 것이다. 이때 나는 생각을 막았다든지 혹은 妄念을 끊었다 하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생각이 막 일어나면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다. 妄念이 부수어 깨어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깨달은 지혜마저도 버려야 한다. 妄念과 깨달음을 함께 잃어버리면 無心이라 한다. 같은 책, 55쪽左-56쪽右. “謂做工夫時, 平常絶念, 堤防念起, 一念纔生, 便與覺破, 妄念破覺, 後念不生, 此之覺智, 亦不須用, 妄覺俱忘, 名曰無心.”
‘休歇’은 공부할 때에 善도 惡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면 쉬고 因緣을 만나도 쉬는 것이다. 지눌에 의하면 공부하는 이는, 마치 옛 祠堂의 香爐에서 煙氣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고요해서, 妄想을 끊기를 마치 말뚝인 듯 하면 조금 공부가 相應한다고 하였다. 같은 책, 56쪽右. “謂做功夫時, 不思善, 不思惡, 心起便休, 遇緣便歇. 古人云 「一條自練去, 冷湫湫地去, 古廟裏香爐去.」 直得絶廉纖離分別, 如痴似兀, 方有少分相應. 此休歇妄心功夫也.”
결국 지눌은 集中力, 單純性, 黙黙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主․客에 머무르지 않는 공부로써, ‘마음을 없애고 對象을 두는 것[泯心存境]’ 같은 책, 56쪽中. “三 泯心存境.”
과, ‘對象을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泯境存心]’ 같은 책, 56쪽左. “四 泯境存心.”
과 ‘마음과 對象을 모두 없애는 것[泯心泯境]’ 같은 책, 56쪽左. “五 泯心泯境.”
과 ‘마음도 두고 對象도 두는 것[存境存心]’ 같은 책, 57쪽右. “六 存境存心.”
이 그것이다. ‘泯心存境’은 공부할 때에 모든 妄念을 다 쉬어 바깥 경계도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다. 같은 책, 56쪽中. “謂做功夫時, 於一切妄念俱息, 不顧外境, 但自息心, 妄心已息, 何害有境.”
客觀對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無心 상태에 두어, 내가 萬物을 無心하게 대하여 萬物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방해될 것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泯境存心’은 공부할 때에 안과 밖의 모든 對象이 다 空寂하다고 觀하고 다만 一心만 두어 외로이 뛰어나고 홀로 섰는 것이다. 같은 책, 56쪽中.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諸境, 悉觀爲空寂, 只存一心, 孤標獨立.”
이 공부는 모든 客觀世界의 것들이 한결같이 實體가 없고 헛되고 妄靈된 것임을 살펴본 뒤에 마음 하나만 오롯하게 밝혀 놓는 공부를 말한다. ‘泯心泯境’은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對象을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생각을 없애는 것이다. 같은 책, 56쪽左. “謂做功夫時, 先空寂外境, 次滅內心, 旣內外心境俱寂, 畢竟妄從何有.”
다시 말해서 對象이 實體가 없고 헛되고 妄靈된 것임을 살펴본 뒤에 마음 또한 그와 같은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存境存心’은 공부할 때에 마음은 마음 자리에 머무르고 對象은 對象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때로 마음과 對象이 상대하게 되더라도, 마음이 對象을 취하지 않고 對象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각각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 저절로 妄念이 생기지 않아서, 道에 장애 됨이 없게 되는 것이다. 같은 책, 57쪽左. “謂做功夫時, 心住心位, 境住境位, 有時, 心境相對則心不取境, 境不臨心, 各不相到, 自然妄念不生, 於道無碍.”
즉 一切世界가 눈앞에 存在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눈앞에 있는 세계를 헛되고 妄靈된 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설자리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一切世界의 차별의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 모두가 本體世界의 모습이 된다. 이것이 마음도 두고 對象도 그대로 둔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 眞心에 透徹한 공부로써, ‘안과 밖이 모두 眞心의 體[內外全體]’ 같은 책, 57쪽中. “七 內外全體.”
이고, ‘안과 밖이 모두 眞心의 用[內外全用]’ 같은 책, 57쪽左. “八 內外全用.”
이며, ‘體이면서 用[卽體卽用]’ 같은 책, 58쪽右. “九 卽體卽用.”
이고, ‘體와 用이 함께 드러난 道理[透出體用]’ 같은 책, 58쪽中. “十 透出體用.”
가 그러하다. ‘內外全體’는 공부할 때에 山河大地와 日月星辰, 안의 몸과 바깥의 경계 등 온갖 法이 다 眞心의 體이기 때문에,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서 大千世界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쳐 부셔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라서 妄心이 올 데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책, 57쪽中. “謂做功夫時, 於山河大地, 日月星辰, 內身外器, 一切諸法, 同眞心體, 湛然虛明, 無一毫異, 大千沙界, 打成一片, 更於何處, 得妄心來. ”
즉 一切世界가 하나인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內外全用’은 공부할 때에 一切內外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法과, 또 일체 행동과 베풂이 모두 다 眞心의 妙用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57쪽左.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 身心器界諸法, 及一切動用施爲, 悉觀作眞心妙用, 一切心念纔生, 便是妙用現前, 旣一切皆是妙用, 妄心向甚麽處安着.”
물질과 정신, 사람과 천지, 衆生과 부처, 낱낱의 個體와 宇宙 全體가 모두 全體가 個體요 個體가 全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存在가 差別的인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일체의 세계는 眞心의 妙用이 앞에 나타난 것이니 제거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卽體卽用’은 공부할 때에 비록 眞心의 體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空寂하나, 그 가운데 靈明이 숨어 있어 體가 그대로 用이라는 것이다. 또한 靈明가운데 그 안에 空寂이 숨어 있어 用이 그대로 體인 것이다. 같은 책, 58쪽右. “謂做功夫時, 雖冥合眞體, 一味空寂, 而於中, 內隱靈明, 乃體卽用也. 靈明中, 內隱空寂, 用卽體也.”
다시 말해서 衆生이 無明에 가려져 있다 할지라도, 衆生의 참된 性品은 다름 아닌 佛性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眞心의 妙用과 本體의 관계는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眞心의 體에 고요히 합하여 비고 고요하지만[空寂], 그 空寂한 가운데 일체 사물의 神靈스럽게 밝은 用[靈知]이 숨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일체 사물의 神靈스럽게 밝은 用[靈知] 가운데 眞心의 비고 고요한 體[空寂]가 있는 것이다. 즉 ‘體이면서 用’이고, ‘用이면서 體’이다. ‘透出體用’은 공부할 때에 안과 밖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고 四方 八面을 다만 하나의 큰 解脫門으로 만들어 圓滿한 자리에서 體와 用을 나누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 몸을 한 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體니 用이니 하는 일체의 것들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일체의 次元을 무시하고 그대로 대번에 無心의 경지로 뛰어드는 門이 바로 ‘體와 用이 (함께) 드러나 妄念을 없애는 공부[透出體用滅妄功夫]’의 門이다. 같은 책, 58쪽中. “不分內外 亦不辨東西南北 將四方八面 只作一箇大解脫門 圓陀陀地 體用不分 無分毫滲漏 通身打成一片 其妄何處得起. 古人云, 「通身無縫罅. 上下忒團圝.」是乃透出體用滅妄功夫也.”
하지만 지눌에 의하면 이상의 열 가지 공부 방법을 전부 다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에게 맞는 한 가지의 공부 방법만이라도 선택하여 지속적으로 修行하면 妄心이 저절로 사라지고 眞心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책, 58쪽左. “已上十種做功夫法, 不須全用, 但得一門, 功夫成就, 其妄自滅, 眞心卽現. 隨根寂習, 曾於何法有緣, 卽便習之. 此之功夫, 乃無功之功, 非有心功力也. 此箇休歇忘心法門, 最緊要, 故 偏多說無文緊也.“
즉 지눌이 의미하는 바의 無心法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妄念을 돌이켜 보아서 자기를 制御하는 工夫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참 마음
지금까지 우리는 망령된 마음[妄心]을 설명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추론해보는 방식으로 참 마음[眞心]에 대한 지눌의 견해를 보았다. 그렇다면 마음이 眞心인 경우를 지눌은 직접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지눌에 의하면 眞心은 우선 體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因果의 現象世界를 超越해있고 時間的으로 古今을 꿰뚫어서, 모든 生滅變化하는 것이 시간적 제약을 받는 것과는 다르게 온갖 相對를 넘어서 있다. 둘째, 고요하게 모여져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항상 고요히 머문다. 즉 空劫 이전의 自己[本來面目]이다. 셋째, 온 山河大地와 草木叢林과 森羅萬象과 물들고 깨끗한 것 등 모든 法이 다 여기서 나온다. 넷째, 三世의 菩薩이 배운 것도 이 마음을 배운 것이요, 三世의 부처가 證得한 것도 다 이 마음을 證得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사무치면 모두가 다 옳고 物件마다 온전히 드러나며, 이 마음을 모르면 곳곳마다 어디서나 넘어지고 엎어지며, 생각생각 잘못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마음은 一切衆生이 가진 佛性이요, 또 一切世界가 發生되는 根源이다. 같은 책, 51쪽中-52쪽中. “眞心本體, 超出因果, 通貫古今, 不立凡聖, 無諸對待, 如太虛空, 徧一切處, 妙體凝寂, 絶諸戱論, 不生不滅, 非有非無, 不動不搖, 湛然常住, 喚作舊曰主人翁 名曰, 威音那畔人, 又名 空劫前自已. 一種平懷, 無纖毫瑕翳, 一切山河大地, 草木叢林, 萬象森羅, 染淨諸法, 皆從中出. …… 信之則三世菩薩同學, 盖學此心也. 三世諸佛同證, 盖證此心也. 一大藏敎詮顯, 盖顯此心也. 一切衆生迷妄, 盖迷此心也. 一切行人發悟, 盖悟此心也. 一切諸祖相傳, 盖傳此心也. 天下納僧參訪, 盖參此心也. 達此心則, 頭頭皆是, 物物全彰, 迷此心則, 處處顚倒, 念念痴狂. 此體, 是一切衆生本有之佛性, 乃一切世界生發之根源.”
위와 같은 眞心의 本質上 體의 측면은 存在者들이 살고있는 現象世界에서는 方便上 用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설명되어진다. 우선 부처의 가르침으로는, 菩薩戒에서는 心地라고 하니 이는 온갖 善을 내기 때문이며, 般若經에서는 菩提라고 하니 깨달음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고, 華嚴經에서는 法界라고 하니 서로 사무치고 融通하여 包含되기 때문이며, 金剛經에서는 如來라고 하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고, 또 般若經에서는 涅槃이라 하니 모든 성인들의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며, 金光明經에서는 如如라고 하니 眞實하고 恒常되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고, 淨名經에서는 法身이라 했으니 報身과 化身의 의지하는 때문이며, 起信論에서는 眞如라고 하니 生滅이 없기 때문이고, 또 涅槃經에서는 佛性이라 하니 三身의 本體이기 때문이며, 圓覺經에서는 摠持라 하니 功德이 나오기 때문이고, 勝鬘經에서는 如來藏이라 하니 숨기고 덮어 抱擁하였기 때문이며, 了義經에서는 圓覺이라고 설명되어지니 어두움을 깨드리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같은 책, 50쪽右. “曰 佛敎祖敎, 立名不同, 且佛敎者, 菩薩戒 呼爲心地, 發生萬善故. 般若經 喚作菩提, 與覺爲體故. 華嚴經 立爲法界, 交徹融攝故. 金剛經 號爲如來, 無所從來故. 般若經 呼爲涅槃, 衆聖所歸故. 金光明 號曰如如, 眞常不變故. 淨名經 號曰法身, 報化依止故. 起信論 名曰眞如, 不生不滅故. 涅槃經 呼爲佛性, 三身本體故. 圓覺中 名曰總持, 流出功德故. 勝鬘經 號曰如來藏, 隱覆含攝故. 了義經 名爲圓覺, 破暗獨照故. 由是 壽禪師唯心訣云 「一法千名, 應緣立號.」 備在衆經, 不能具引.”
더 나아가서 祖師들의 가르침으로는 眞心은, 어느 때는 自己라고 부르는데 이는 衆生의 本性이기 때문이고, 어느 때는 正眼이라 하는데 이는 온갖 모양을 바로 보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妙心이라 부르는데 이는 텅 비고 神靈스러우며 고요하고 비추기 때문이고, 어느 때는 主人翁이라 하는데 이는 옛날부터 걸머지고 온 것이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無底鉢이라 하는데 이는 곳을 따라 生活하기 때문이고, 어느 때는 沒絃琴이라 하는데 今時를 소리내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無盡燈이라 하니 그릇된 생각을 비추어 부수기 때문이고, 어느 때는 無根樹라 하니 뿌리와 꼭지가 堅固하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吹毛劍이라 하니 感官과 對象을 끊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無爲國이라 하니 바다가 고요하고 강물이 맑기 때문이고, 어느 때는 牟尼珠라 하니 貧窮한 者를 救濟하고 利益을 주기 때문이며, 어느 때는 無鑐鏁라 하니 여섯 感官을 잠그기 때문이고, 또 그밖에도 泥牛, 木馬, 心源, 心印, 心鏡, 心月, 心珠라고도 불려 진다. 같은 책, 50쪽左-51쪽右. “曰 祖師門下, 杜絶名言, 一名不立, 何更多名. 應感隨機, 具名亦衆. 有時 呼爲自已, 衆生本性故. 有時 名爲政眼, 鑑諸有相故. 有時 號曰妙心, 虛靈寂照故. 有時 名曰主人翁, 從來荷負故. 有時 呼爲無底鉢, 隨處生涯故. 有時 喚作沒絃琴, 韻出今時故. 有時 號曰無盡燈, 照破迷情故. 有時 名曰無根樹, 根蔕堅牢故. 有是 呼爲吹毛劒, 截斷塵根故. 有時 喚作無爲國, 海晏何淸故. 有時 號曰牟尼珠, 濟益貧窮故. 有時 名曰無鑐鎖, 關閉六情故. 乃至 名泥牛, 木馬, 心源, 心印, 心鏡, 心月, 心珠, 種種異名, 不可具錄. 若達眞心, 諸名盡曉, 昧此眞心, 諸名皆滯. 故 於眞心, 切宜子細.”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지눌은 佛敎 經典과 祖師들의 가르침을 예로 들어서, 眞心이 用의 측면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體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內包하고 있는 내용은 동일함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언급한 모든 표현 방식은, 그 것이 體라고 言表되던 혹은 用이라고 言表되던, 사실상 眞心을 설명하는데 用의 측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눌의 眞心에 대한 설명은 궁극적으로 到達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그것은, 眞心에 대한 모든 方便的인 體와 用을 뛰어 넘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眞心의 體인 空寂靈知이다.
4. 비어있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
지눌에 의하면, 마음의 性品은 본래 淸淨하고 煩惱가 空 ꡔ勤修定慧結社文ꡕ, ꡔ普照全書ꡕ, 13쪽左. “心性本淨, 煩惱本空之義.”
할 뿐 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비어있고 고요하며 신령스러운 앎[空寂靈知]이라는 지혜가 본래 갖추어져 있으며, 이것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기도 하고 또한 衆生의 본 바탕인 깨친 性品이다. 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6쪽左-37쪽右. “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自神解, 此是 汝空寂靈知, 淸淨心體. 而此淸淨空寂之心, 是三世諸佛, 勝淨明心, 亦是衆生本源覺性.”
부처와 祖師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다르지 않은 것은 마음을 우리와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 마음을 잘 保護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비고 고요하면서도 동시에 神靈스럽게 알고, 絶對不變하면서도 환경에 따라 가지가지의 작용을 다툰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동시에 우리의 바탕이기도 하다. 단지 부처는 이 마음을 밝게 안 사람이며 우리는 그것에 어두울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밝게 아는 방법은 ‘自己가 곧 부처’라는 믿음이 그 토대가 된다.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선 자기가 곧 부처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그 마음을 잘 保護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잘 保護한다 라고 말할 때의 마음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적극적인 작용, 즉 空寂靈知의 活潑潑함을 의미한다. 지눌에 의하면 그대로 작용하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 아니라 空寂靈知의 마음이 부처인 것이다. 지눌은 말한다.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고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空寂靈知한 마음인데, 어찌하여 돌이켜서 비추어 보지 않고 도리어 밖에서 찾는 것인가? 네가 지금 그대의 입장에 의거하여, 곧바로 本心을 가리켜서 그대를 곧 깨닫게 하겠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깨끗한 마음으로 나의 말을 들으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화내고 기뻐하고 옳다하고 그르다 하고 가지가지의 행위와 움직임을 하니, 말하라 마침내 이 누가 능히 이렇게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인가? 같은 책, 35쪽左. “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 我今據汝分上, 直指本心, 令汝便悟, 汝須淨心, 聽我言說. 從朝至暮, 十二時中, 或見或聞, 或笑或語, 或瞋或喜, 或是或非, 種種施爲運轉. 且道 畢竟 是誰 能伊麽運轉施爲耶.”
몰록 깨침[頓悟]이란 凡夫가 迷했을 때에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몸을 삼고 妄想으로 마음을 삼아 自性이 참 法身인 줄 모르며 自己의 神靈스럽게 아는 知[靈知]가 참 부처인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 이리 저리 달리다가 忽然히 善知識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光明을 돌려[一念廻光] 自己 本性을 보면, 이 性品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煩惱가 없고 無漏智性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頓悟라 한다. 같은 책, 34쪽中.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時眞佛,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 云頓悟也.”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평상의 마음이 곧 부처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므로 그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하지만 그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는 돌이켜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같은 책, 36쪽右. “汝還聞鴉嗚鵲噪之聲麽.”
라는 지눌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의 執着된 分別相을 곧 佛性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눌이 보기엔 性品은 ‘見聞覺知하나 萬象(對象)에 물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와 祖師가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마음을 잘 保護하는 것뿐이다. 같은 책, 37쪽中. “佛祖奚以異於人, 而所以異於人者, 能自護心念耳.”
지눌은 올곧게 마음을 닦는 공부[修心]를 비결[訣]로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眞心工夫란 마음을 가지고 있는 衆生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으며 그리고 그 마음을 잘 保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지눌의 眞心에 대한 모든 언급의 궁극적 목적지가 다름 아닌 空寂靈知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지눌에게 있어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現象世界는 그대로 佛이 펼쳐진 세계이다. 佛法은 걸어다니고 서고 앉고 눕는 곳,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 말하고 서고 묻고 대답하는 곳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는 것도 禪이고 앉아 있는 것도 禪이며, 말하거나 침묵을 지키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것이 모두 禪이 된다. 곧 現象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낱낱의 일상생활이 곧 그대로 佛性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또한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신통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물을 운반하고 나무를 나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통변화를 따로 설정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를 그르칠 뿐 아니라 남까지도 그르치게 만드는 것으로써 부정된다. 또한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더불어서 현실세계를 배제하고는 부처의 경지를 논할 수가 없다. 동시에 眞心은 평상한 마음이요 妄心은 곧 평상하지 못한 마음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의 分上에서는 비록 밖에 煩惱가 있을지라도 다 醍醐라는 최고 품질의 우유를 만든다. 다시 말해서 自己 마음 안의 부처의 普光明智로써 一切衆生을 비추면 衆生의 相이 곧 如來의 相이며 衆生의 말이 곧 如來의 말이며 衆生의 마음이 곧 如來의 마음이 된다. 하지만 衆生이 自己의 業을 따라서 스스로 속아서 分別相을 내면 곧 그때부터 고통의 바다가 앞에 펼쳐진다. 따라서 衆生은 끊임없이 용맹심을 내어서 自己無明의 본래 신기롭고 본래 참되어 空없는 큰 작용이 항상 그러한 줄 깨달으면 바로 그러한 마음이 곧 모든 부처의 不動智가 되는 것이다. 지눌에게서는 눈앞의 現象世界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그리고 그 現象世界에 存在하는 存在者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主體的인 能力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엿보인다.
지눌의 ‘마음’이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自心속에 佛性 혹은 如來藏으로서의 眞心[自性]을 無始以來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自心은 自己 자신 내부에 있는 佛性으로서의 自性의 存在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空寂靈知에 의한 直觀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廻光返照할 수 있다. 그리고 자성은 다름 아닌 ‘자심에 의한 자심의 부름’이다. 따라서 자성[MIND]은 세계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고, 그 목적대로 움직이는 신적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그 신적 존재로부터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이 말하는 바의 자성은 우주적 이성이긴 하지만 그것은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전지전능하며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기 보다는, ‘자기에게서부터 나오는 존재[mind]’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넘어서 있는 존재[MIND]‘이기도 하다. 김형효, 「知訥사상의 실존성과 본질성」, ꡔ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ꡕ,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32쪽
그렇기 때문에 지눌이 말하는 바의 佛性으로서의 自性은 先驗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先驗的이라는 용어는 Kant의 용어이다. Kant는 先天的[a priori]이면서 동시에 경험적 지식을 가능케 하는 것을 선험적[transcendental]이라 한다. 이때 그가 의미하는 바의 先天的이라는 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神的 능력으로서의 超經驗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Kant는 普遍性을 認識에 주는 形式을 지닌 성질을 先天的이라고 말한다. 즉 Kant는 경험과 무관계하지만 그러면서도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질료에 관여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구성하는 기능을 先驗的인 形式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Kant의 先驗的이라는 용어를 借用하기로 한다. 그리고 先驗的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自性[自心]은 원래부터 존재한다. 그것의 始原은 묻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自性은 세계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고, 그 목적대로 움직이게 하는 大宇宙的 自我가 아니다. 동시에 그 大宇宙的 自我로부터 유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佛性으로서의 自性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衆生의 普遍的이며 本來的인 특징이기도 하며, 동시에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個別的이고 主體的인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自性의 根源에 대해서 물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Ⅲ. 知訥 마음철학과 實在論
마음에 대한 지눌 선사상은 특별하다. 왜냐하면 正統 華嚴學者들이나 혹은 禪師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現存在로서의 自心 혹은 더 本質的인 의미에서의 自性을 體得하기 위해서 때때로 自心 自體를 抛棄하여 自心을 잊어버릴 것[忘我}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自心을 그 자체로 어떤 實體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 本體論的인 連累에 빠지는데, 지눌은 그 함정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눌이 마음에 대하여 언급할 때, 마음이 가지고 있는 주체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마음에 대하여 實在論的 立場에서 絶對者로서의 역할을 주장하는 경우처럼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實在論[本體論, 實體論]이라 함은 現象의 根底에 있다고 여겨지는 實體를 상정하여 現象界를 설명하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를 말한다. 힌두적 세계관에서의 Ātman과 Brahma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反實在論[反本體論, 反實體論]이라 함은 모든 認識은 시간 공간에 있어서의 사물이나 사건에 한정된다고 보는 입장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아는 것은 現象, 즉 直接的으로나 反省的으로나 意識에 나타난 實在라고 보는 것도 反實在論의 범주에 집어넣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때 意識에 나타난 實在는 名目이자 記號이기 때문이다.
지눌의 마음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이 문제를 좀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
지눌의 사상에서 永遠不變하는 主體로서의 自我를 인정하는 듯한 견해인 實在論的인 경향은 상대적으로 초기 저작이라고 여겨지는ꡔ修心訣ꡕ(아마 41세 이후의 저술)과 ꡔ眞心直說ꡕ(아마 45세 때의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金浩星의 논의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金浩星에 의하면 지눌의ꡔ修心訣ꡕ에서의 實在論的 立場은, 후기 저작인 ꡔ法寶壇經跋ꡕ(아마 50세 때의 글)과 ꡔ節要ꡕ(아마 52세 때의 저술)에서 극복되어 진다고 한다. 연구자는 金浩星의 이러한 입장에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고. <金浩星,「普照禪의 實在論的 傾向과 그 克服」(ꡔ東西哲學硏究ꡕ7號, 1990), 111-131쪽>
다음을 보자.
㉠ 色身은 거짓이라 나고 滅함이 있지만, 眞心은 虛空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온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物件[마음]은 길이 神靈하여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ꡔ修心訣ꡕ,ꡔ普照全書ꡕ, 31쪽右. “ 色身是假, 有生有滅,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 「百骸潰散, 歸火歸風, 一物長靈, 蓋天蓋地.」”
㉡ 眞心의 本體는 因果를 超越했고 古今을 꿰뚫어서 凡夫와 성인을 세우지 않고 온갖 상대를 넘어서 허공이 어디에나 두루 한 것과 같다. …… 일체의 山河大地와 草木叢林과 森羅萬象과 물들고 깨끗한 것 등 모든 法이 다 여기서 나온다. ꡔ眞心直說ꡕ,ꡔ普照全書ꡕ, 51쪽中-52쪽中. “眞心本體, 超出因果, 通貫古今, 不立凡聖, 無諸對待, 如太虛空, 偏一切處, …… 一切山河大地, 草木叢林, 萬象森羅, 染淨諸法, 皆從中出.”
인용문 ㉠에서 一物은 主語이다. 主語인 一物에 ‘길이 신령스럽다’ 라는 述語的 表現을 붙인 것이다. 만일 一物이 實在가 아니라 存在를 言語로 표현하고자 붙인 假名이라면 肯定的 敍述은 곤란하다. 다시 말해서 一物이 存在 그 자체를 象徵하는 것에 그치는 표현이라면 否定的 言表로 그쳐야지, 肯定的 敍述은 붙일 수가 없다. 또 지눌은 몸과 마음을 대비한다. 百骸는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마음만은 長靈하다고 한다. 身心을 二元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지눌의 초기 사상을 볼 때에, 거기에 實在論的인 면이 없다고는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金浩星, 「普照禪의 實在論的 傾向과 그 克服」, 120-121쪽
또 인용문 ㉡에서 지눌은 眞心의 本體는 因果를 超越했고 古今을 꿰뚫어서 온갖 상대를 넘어서 두루 하다고 하면서, 일체의 山河大地와 草木叢林과 森羅萬象 등이 다 眞心의 本體에서 나온다고 한다. 原始佛敎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눌의 이러한 표현 역시, 그 표현의 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實在論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晩年에 이르러 이러한 초기의 실재론적 경향을 극복해나간 듯이 보이며, 이러한 모습은 晩年의ꡔ六祖法寶壇經跋ꡕ과 ꡔ節要ꡕ에서 보인다. 다음을 보자.
㉠ 만일 마음을 不生滅한다고 보고, 몸에는 生滅이 있다고 본다면, 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를 내는 것이니, (그것은) 性相融會를 모르는 것이다. ꡔ六祖法寶壇經跋ꡕ,ꡔ普照全書ꡕ, 172쪽中, “若觀心不生滅, 而見身有生滅, 則於法上, 以生二見. 非性相融會者也.”
㉡ 갑자기 신령스럽고 밝은 知見이 바로 자기의 眞心이고, 마음은 본래부터 항상 고요하여 가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바로 法身이며,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그것이 바로 眞我로서 여러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悟] 때문에 몰록[頓]이라 하는 것이다. ꡔ節要ꡕ,ꡔ普照全書ꡕ, 116쪽右, “忽悟靈明知見, 是自眞心心本恒寂, 無邊無相, 卽是法身, 身心不二, 是爲眞我,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也.”
인용문 ㉠의 지눌에 의하면 마음을 不生滅한다고 보고 몸에는 生滅이 있다고 보면, 이러한 견해는 身心의 相對性을 인정하는 二元論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性相融會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견해[二元論]를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ꡔ修心訣ꡕ의 견해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ꡔ修心訣ꡕ과 ꡔ眞心直說ꡕ에서 보였던 實在論的인 경향이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인용문 ㉡에서도 나타난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그것이 바로 眞我라는 표현이 그러하다. 金浩星, 「普照禪의 實在論的 傾向과 그 克服」, 125-121쪽
그러나 다른 한편 연구자는 이 문제를 약간 다르게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눌이 비록 ꡔ修心訣ꡕ이나 ꡔ眞心直說ꡕ에서 自心을 永遠不變하는 自我로 해석되기 쉬운 표현을 했고, 우리가 그 글들에서 Upaniṣad에서 말하는 心身二元論的인 면을 부분적으로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가 생애의 전반부에 實在論的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지눌이 自心을 우리에게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自心을 인간을 넘어서 해석한 적은, 인용한 몇 개의 문구를 제외하고는, 지눌 저작 전체에서 보이지 않는다. 또 지눌은 自心을 인간을 넘어선 어떤 存在者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한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는 상기한 인용문에서의 一物에 대한 해석도 存在者 自體에 대한 言表라기 보다는 象徵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지눌 사상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에 一物은 方便으로, 다시 말해서 體의 측면이 아니라 用의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눌 사상의 實在論的 경향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原始佛敎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눌의 사유체계는 一面 實在論이란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눌의 사유체계는 諸法無我의 입장을 주장하는 原始佛敎의 잣대로 본다면 實在論的인 면이 있다. 하지만 엄격하게 본다면 지눌의 사유체계는 諸法實相의 의미이다. 이때 諸法이라 함은 差別의 現象, 實相이라 함은 진실의 體相을 뜻한다. 이것은 認識主觀이 空觀에 의하여 萬有의 諸相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實在와 實相은 그 뜻에 있어 차이가 있다. 眞心이라는 主體가 있어 對象을 파악하는 것을 實相이라고 한다면, 認識의 對象이 認識主觀인 眞心에서 독립하여 存在한다고 보는 입장을 實在라고 할 수 있다. 결국 眞心의 自律性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他律性을 수용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實在를 주장함은 諸法無我를 부정하고 有我를 주장하는 것이 되지만, 實相을 주장함은 諸法無我를 보완하는 개념이 된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중국과 한국의 불교 사상가들과 비교해본다면, 그들에 비해서 지눌의 사유체계는 反實在論的이며, 오히려 原始佛敎와 상당 부분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지눌의 사유체계가 原始佛敎와 中國佛敎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양쪽을 연결하는 共通因數를 含意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연구자는 그 중에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지눌 사유의 특색이면서 장점이며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지눌 사상 전체를 일관하는 흐름을 反實在論的[反本體論的] 思惟로 본다. 이 점에서 연구자는 한편으로는, 주)67에서 언급했듯이, 金浩星과 견해를 같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견해를 약간 달리한다.
단지 생애 전반부에서는 약하게 생애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면이 강하게 나타났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눌이 自性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 전체를 原始佛敎의 입장에서 본다면, 實在論에 기울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본다면 性宗이라 불리는 禪思想은 모두 原始佛敎의 입장에서는 實在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눌은 自性의 始原을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禪師들 가운데에서 가장 實在論的 경향이 없는 禪師에 속한다. 오히려 중국과 한국의 불교 사상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原始佛敎의 정신에 근접해있는 이가 지눌이라 말할 수 있다. 지눌을 反實在論者라고 定義하는 것은 自性에 根源에 대해서 묻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눌에게서 약간의 實在論的 사유가 보인다고 하는 것은 自性을 人間 一般 모두에게 無始 以來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눌을 反實在論者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은 眞心[自性]의 自律性이다. 지눌에게 있어서 眞心은 세계를 主宰하지만, 어떤 超越的 存在者에 의해 좌우되는 他律的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自律性을 가진 主體로서의 自我를 인정하는 견해는 大乘佛敎 사상의 核心이다. 이 점은 原始佛敎로부터 약간의 詰難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눌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中國佛敎에 漫然한 實在論的인 사고에 대한 克服이다. 하지만 지눌은 胎生的으로 東亞細亞에서 胎動한 禪佛敎 哲學者이다. 즉 그 자신 내부에 깃들여있는 문화적 입장을 완전히 극복하여 原始佛敎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며 또 그 자신 그런 태도를 견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이 가지고 있는 實在論的 입장을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는 原始佛敎와 상당할 정도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佛性으로서의 自性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原始佛敎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禪佛敎와 그 특징을 같이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눌은 마음을 不生滅한다고 보고, 몸에는 生滅이 있다고 본다면, 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를 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性相融會’를 주장한다고 볼 수도 있다. 지눌의 경우에 性과 相은 모두 버릴 수 없는 사상적 특징이 되는 것이다. 주)71을 참고
Ⅳ. 知訥 마음철학의 含意
붓다는 形而上學的인 질문에 대해 無記로 答을 대신하였다. 다시 말해서 原始佛敎에서의 붓다의 論辨은 形而上學的인 主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붓다로부터 2500 여 년 떨어져 있는 오늘, 우리는 붓다가 전혀 顯示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인간 知性史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形而上學的인 세계에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宇宙에 하나의 法則이 存在한다고 보는 것이다. 宇宙 自體 內에 內在的 價値가 存在한다면? 그렇다면, 이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 즉 衆生의 自性과, 宇宙가 가지고 있는 自性 즉 宇宙의 本性과는 어떠한 관계일까? Upaniṣad에서 言表하는 Brahman과 Ātman의 관계[梵我一如]나, 性理學에서 말하는 人性과 天理의 관계[性卽理]처럼 ‘衆生의 自性’과 ‘宇宙의 本性’은 같은 것일까? 宇宙의 本性이 인간의 性善을 보장해주는 것일까? 이때 宇宙의 本性이 바로 衆生의 自性이라면, 우리는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 宇宙의 本性이 現象世界에서 事實命題로 證明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信仰’이나 ‘宣言’ 혹은 ‘宇宙論的 에세이’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觀點의 문제나 根據없는 주장에 불과하게 된다. 반대로 宇宙의 本性이 衆生의 自性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본다면, 이때는 衆生의 自性을 설명함에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宇宙의 本性을 도입해서 인간이 본래 純善하다고 주장할 때는 宇宙的 本性의 存在를 證明할 길이 없으므로 本質主義의 늪에 빠지고, 반대로 宇宙의 本性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自性의 本來的 純善함을 證明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超越的 存在를 전제하던 혹은 아니던 인간의 마음을 斷定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긴 하지만 그 기원이 어떠하던지 간에 인간에게 마음 혹은 自性이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는 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탐구되어지고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붓다가 緣起의 法則으로 현상간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의미가 있는 만큼이나, 禪佛敎가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마음을 主人公으로 내세우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그것은 佛敎 思想史의 전개에서 결코 非佛敎的인 것이 될 수 없는, 오히려 佛敎 全體의 내용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이때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우선 本體論的인 입장에서의 宇宙的 本性이 否定되고 排除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經驗論的인 입장에서는 마음[自性]이 存在한다는 이유 自體만으로 肯定되어져야 한다. 즉 마음이 원래 善한지는 모르겠지만 善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고, 그것은 形而上學的인 存在를 전제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本質主義의 늪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설명하는데 성공한 붓다의 ‘緣起說’과 같은 방법은, 禪佛敎가 ‘마음’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때 佛敎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禪佛敎는 本質主義의 늪에 빠지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要件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일단 대전제로서 原始佛敎의 ‘緣起說’이 가지고 있는 무게 정도로 중시되고 있는, 禪佛敎가 내세운 가장 중요한 주제인 ‘마음’을 설명함에 마음을 本質主義化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놓여나야 한다. 自心은 理的이라기 보다는 事的으로 설명되어져야하며, 自我는 宇宙的인 自我가 아니라 經驗的인 自我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은 純善함을 원래 가지고 있다’ 라는 命題를 계속 털어서, 마음을 固定시키거나, 마음의 純善함에 執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마음의 純善함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지 지금 현재의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純善은 사실로 實行되어지는 순간 과거의 일이 되고 우리는 또다시 純善이라는 執着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우리는 미래에 純善을 실행하기 위해서 계속 執着을 털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는 마음을 설명함에 있어 善과 惡, 혹은 참과 거짓의 문제는 本質主義의 손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脈絡’ 속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純善은 시대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서, 다른 맥락 아래에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 마음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은 靜的 의미에서의 善 혹은 惡의 性質보다는 ‘動的 活潑潑함’이 된다. 즉 自心은 停止해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변하고 움직이는 그 무엇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붓다는 梵我一如로 설명되는 인도 세계의 客觀的 存在者에의 存在論的인 連累로부터 인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고, 이때 그 方便으로서의 道具는 緣起說이다. 하지만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온 이후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지눌의 시대에 이르게 된 때에는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또한 많은 文化的 衝突을 이미 경험한 뒤였다. 그리고 그 결과, 緣起的 世界觀인 불교는 동아시아 사회의 영향과 동아시아인 들의 개인적 습관에 물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緣起의 法則으로만 동아시아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동아시아인 들은 인간을 진정으로 解放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되었고, 인간 내부에 자리잡고있는 客觀世界에 대한 幻想과,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즉 동아시아인 들은 인간의 해방을 가로막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對象世界와 그 對象世界를 표현하는 도구적 존재인 언어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執着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각을 가지고 지눌은 言語에의 連累, 즉 言語로 비롯되는 存在에의 連累, 더 나아가서 對象, 혹은 存在自體에의 連累로부터의 解放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눌은 이에 모든 인간의 말은 一定한 修行的 目的이라는, 다시 말해서 方便으로서만, 相對的 地平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이제 붓다의 緣起에 대신할 만한 새로운 時代的 解法으로서 個別的인 各者 누구에게나 있으며 동시에 그 個別的인 各者를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絶對的인 超越者는 아닌 存在로서의 ‘眞心’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言語와 對象世界에 대한 人間의 根據없는 期待를 解體하고, 그 자리에 普遍的인 意味에서의 ‘自性’과 個體的인 現存在的 意味로서의 ‘眞心’을 構築하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지눌 存在論의 시각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특별하다. 왜냐하면 精通 華嚴學者들이나 혹은 禪師들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現存在로서의 自心 혹은 더 本質的인 意味에서의 自性을 體得하기 위해서 때때로 自心 자체를 抛棄하여 自心을 잊어버릴 것[忘我}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마음’을 그 자체로 어떤 實體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여 存在論的인 連累에 빠지는데, 지눌은 그 함정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禪師인 지눌은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禪佛敎가 가지고 있는 時代的 召命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눌이 가지고 있는 눈앞의 現象世界에 대한 無限한 肯定과 그리고 인간 마음의 主體的인 能力에 대한 無限한 信賴가 바로 그것이다. ‘緣起’가 人間의 解放을 위한 方便이라면, ‘眞心’ 혹은 ‘自性’도 人間의 解放을 위한 方便이다. 근본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方便이 여러 개가 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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