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4 제4주제 발표; 道生의 頓悟成佛論 批判

淸潭 2008. 2. 22. 18:12
 

德崇禪學 4-4 제4주제 발표; 道生의 頓悟成佛論 批判

 

차차석 (동국대학교)


1. 緖  言

道生(372-434)은 위진 시기의 대표적 불교사상가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처음 여산혜원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장안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며, 僧肇와 더불어 구마라집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도생은 석도안, 여산혜원으로 이어지는 전통 한족출신들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구마라집의 대승불교사상을 수용하여 불교사상이 중국사상과 융합하여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생애를 통해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 중에서도 돈오성불론은 당시까지 전개되고 있었던 漸悟와 頓悟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까지 전개되고 있었던 깨달음의 문제는 漸悟論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의 돈오성불론이 제기된 이후로 점오론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선종의 발전과 함께 頓悟論은 선종에 융합되어 선종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도생의 돈오론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돈오론의 핵심이 理不可分說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의 無我說과 背馳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일 논자의 주장대로 그의 돈오사상이 무아설과 상반된 입장을 주장하는 實有論에 치우쳐 있다면 그의 사상과 그의 강한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는 이후의 선종이론 역시 실유론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사상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도생의 돈오성불론이 어떠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돈오성불론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한계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頓悟成佛論의 論理的 基礎

道生이 주장하고 있는 돈오성불론의 논리적 토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특징을 분석하기 위하여 편의상 다음의 두 항목으로 세분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도생 당시의 頓漸論
도생 당시는 이미 頓漸論爭이 많은 승려들 내지 지식인들의 관심사로 부상되어 있었다고 본다        湯用彤, ꡔ漢魏兩晉南北朝佛敎史ꡕ(北京大出版社,1997), pp.461-462
. 남제시대의 劉虯는 ꡔ무량의경서ꡕ에서 頓漸論爭이 道安과 支遁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대정장9, 384上. “尋得旨之匠 起自支安”
. 여기서 지둔은 七住로 道慧陰足(得無生法忍)을 삼고, 도안은 지둔과 달리 근기에 따라 3승으로 나누고 入解하면 그 慧는 不二라 말한다. 특히 ꡔ世說 문학편주ꡕ의 ꡔ지법사전ꡕ에서 “법사는 十地를 연구했으니 바로 七住서 頓悟를 안다”는 구절에서 돈오설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은 지둔이라고 말한다        탕용동, 앞의책, p.462에서 재인용
. 이외에도 慧達의 ꡔ肇論疏ꡕ에 의하면 도안의 제자인 여산혜원과 승조도 돈오설을 주장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卍續藏經 150冊 858下 “第二小頓悟者 支道林師云 七地始見無生. 彌天釋道安師云 大乘初無漏惠 稱摩訶般若 卽是七地. 遠師云 二乘未得無有. 始於七地 方能得也. 埵法師云 三界諸結 七地初得無生. 一時頓斷爲菩薩見諦也. 肇法師亦同小頓悟義”
.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十地 중에서 칠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무생법인을 얻게 된다고 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통칭 小頓悟論者들이라 언급하고 있다. 수나라 시대의 碩法師가 저술한 ꡔ삼론유의ꡕ 중에서도 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소돈오론자가 6명 있는데 바로 승조법사, 支道林법사, 眞安埵법사, 邪通법사, 匡山遠법사, 道安법사 등이며, 이들은 모두 7지 이상에서 무생법인을 깨닫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대정장45, 121下. “用小頓悟師有六家也. 一肇師 二支道林師 三眞安埵師 四邪通師 五理山遠師 六道安師也. 此師等云 七地以上悟無生忍也”. 여기서 理山의 遠법사를 지칭할 때의 理는 匡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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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화엄십지를 古譯에서는 십주로 번역하고 있다. 동진시대에 십주 내지 십지사상에 대해 밝히고 있었던 경론으로는 반야계 경전들과 ꡔ점비일체지덕경ꡕ, 축법호역의 ꡔ십주경ꡕ, 라집역의 ꡔ대지도론ꡕ발취품, ꡔ십주비바사론ꡕ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했던 소돈오론자들은 모두 십지사상의 영향 아래서 각자의 頓悟論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승조, 지도림, 도안 등은 다른 법사들과 달리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7지 이상에서 무생법인을 깨닫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10단계의 수행과정 중에서 有無의 二邊을 여읜 中道實相을 體證했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세속을 벗어날 수 있으며 遠行하여 돌아오지 않게 되므로 不退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6지 이하에서는 차례대로 漸修해야 하며, 有無의 兩邊을 頓悟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완전한 깨달음(頓悟)과 중생들의 잠재된 佛性을 현현하는 것(成佛)의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선 제7지에서 무생법인을 얻은 이후에 다시 가일층 수행하여 第十地에 도달해야 비로소 성불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탕용동, 앞의책, p.465 참조.
        陳沛然, ꡔ竺道生ꡕ(臺北, 東大圖書, 民國77), pp.146-147 참조.
. 이런 점에서 이른바 소돈오론자들의 頓悟는 진정한 의미의 頓悟라 말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그들은 漸悟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初地에서 七地까지는 “漸除煩惱”에 속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頓悟라 말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十地에 도달하여 십지보살이 되었을 때 금강삼매의 禪定力으로 번뇌와 習氣를 타파하고 佛智에 들어가게 된다        ꡔ法華經疏ꡕ(卍속장경150, 807下). “初住至十住 漸除煩惱......十住菩薩 以金剛三昧 散壞塵習 轉入佛智”
고 말한다. 전술한 수나라의 碩法師와 삼론종의 吉藏은 도생의 영향을 받아 십지 이전에는 모두 大夢일뿐 大覺이 아니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ꡔ삼론유의ꡕ(대정장45, 121下). “金剛以還 皆是大夢. 金剛以後 皆是大覺也”
        ꡔ二諦義ꡕ(대정장45, 111中). “從生死至金剛心 皆是大夢. 金剛後心 豁然大悟 無復見也”
그리고 이전의 소돈오론과 구분하기 위해 도생의 돈오론을 大頓悟論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2) 道生說 頓悟成佛論의 槪要
도생의 돈오성불론은 그의 般若實相觀 내지 法理觀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도생은 우주의 진리가 바로 實相法性이며, 중생들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佛性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을 한마디로 진리 혹은 理法이라 지칭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완전무결한 것이므로 分割할 수 없는 것이며, 理法을 깨닫는데는 단계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理는 말했듯이 유일무이한 것이다”        ꡔ대반열반경집해ꡕ (대정장37, 487) “理如所談。唯一無二”

“理는 없어질을 수 없는 것이다”        ꡔ법화경소ꡕ(卍續藏經150冊, 827下). “理不可亡”

“理는 異趣가 없으니 함께 一極으로 돌아간다”        ꡔ법화경소ꡕ(卍續藏經 150冊, 801上). “平等者 謂理無異趣 同歸一極也”


이상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理는 실상의 理法을 지칭하는 것이다. 어디에나 편만하기 때문에 없어질 수도 없으며, 일체의 만물을 평등하게 만드는 원리라 보기도 한다. 나아가 도생은 제일의제를 理로 해석하거나 理를 諸佛의 産生者로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第一空義는 理에 二極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佛은 理에 연유하여 생긴다. 理가 이미 둘이 아닌데 어찌 셋을 포용하리요. 이렇기 때문에 一乘을 설할 뿐이다”        ꡔ법화경소ꡕ(상동, 808下). “知法常無性第一空義 明理無二極矣....佛種從緣起 佛緣理生. 理旣無二 豈容有三. 是故說一乘耳”
는 해석에서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도생이 말하고자 하는 理의 개념에는 유일무이한 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때의 唯一은 절대의 유일이므로 경험세계의 사물이나 수량을 초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理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다. 그러나 理는 항상 존재하지만 이것과 경험적 사물이 동일하다던가 혹은 동일하지 않다던가의 一과는 다르므로 구체적인 존재의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즉 초월성)도 가능하다.
또한 도생이 말하고자 하는 理의 개념 속에는 부처의 성질이란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을 그는 “부처는 悟理의 體”        ꡔ주유마힐경ꡕ(대정장38, 360上). “佛爲悟理之體 超越其域”
라 말하는데서 알 수 있다. 즉 부처는 理로써 성불의 준거를 삼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理의 성질 역시 부처의 성질과 마찬가지이며, 常一, 妙一, 道一, 一極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성불의 전제조건 중의 하나가 理를 깨닫는 것이며, 悟理해야 비로소 성불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ꡔ법화경소ꡕ 서품에서 “대승이란 평등한 大慧를 말하는 것이다. 순일한 善에서 시작하여, 極慧에서 끝나는 것이 이것이다”        상동, 800下-801上. “大乘者 謂平等大慧 始終一善 終乎極慧是也”
라고 하거나 “중생은 모두 大悟之分을 지니고 있다”        상동, 826上. “衆生悉有大悟之分”
고 한다.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大慧나 極慧 혹은 大悟之分은 頓悟를 지칭하는 것이다        탕용동, 앞으책, p.468참조.
. 이른바 극혜나 대오의 체득이란 우주의 진리에 대한 통달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後人들은 이것을 大頓悟라 명명한다. 진나라시대의 혜달은 ꡔ조론소ꡕ에서 도생이 주장하는 돈오성불론에 대해 “첫째 축도생법사께서 大頓悟에서 말하길 ‘대저 頓이라 하는 것은 理不可分을 밝히는 것이요 悟는 極照를 말하는 것이다. 不二의 깨달음으로 不二의 理에 부합한다. 理智가 모두 풀어진 것 이것을 頓悟라 한다”        상동, 858上. “第一竺道生法師大頓悟云. 夫稱頓者 明理不可分 悟語極照. 以不二之悟 符不二之理. 理智悉釋 謂之頓悟”
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도생의 돈오성불론은 대략 4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그것은 (1)理不可分, (2)悟不可分, (3)悟는 내적인 自悟를 말하는 것, (4)悟解는 목적이며, 信解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陳沛然, 앞의책, p.143 참조.
. 이 중에서 (1)과 (2)는 전술한 바가 있으므로 재론을 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3)과 (4)는 혜달의 ꡔ조론소ꡕ에 나오는 도생의 대돈오에 대한 설명에서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즉 “見解를 悟라 이름하고, 聞解를 信이라 이름한다. 信解는 진실한 것이 아니며, 悟는 信謝에서 펼쳐진다. 理는 自然을 헤아리는 것이니 마치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悟는 自生이 아니며, 반드시 信漸에 의지한다”        卍續藏經150冊, 858上. “見解名悟 聞解名信. 信解非眞 悟發信謝. 理數自然 如果熟自零. 悟不自生 必藉信漸”
는 설명이 그것이다. 도생은 悟의 상대적 개념으로 信을 시설하고 있다. 悟가 내향적이라면 信은 외향적이다. 悟와 信은 본질상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信에게 의지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信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단계에선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나 지침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체험에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선 信은 과도기적 혹은 도구로서의 작용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도생은 그의 ꡔ법화경소ꡕ에서 “안으로 懷悟하고, 밖으로 發解한다”        卍속장경150, 809上. “懷悟於內 發解於外”
고 표현하고 있으며, ꡔ주유마힐경ꡕ에서는 반야지혜가 바깥의 信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혜는 內解로써 작용을 삼는다”        대정장38, 393上. “智慧以內解爲用”
고 말한다.
도생은 이상에서 언급한 理와 悟의 不可分이란 전제 아래 두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할 뿐이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悟理이고 둘째는 未悟理이다. 즉 理를 깨닫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아직 理를 깨우치지 못했다면 悟理를 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한다면 결국 悟理와 未悟理의 사이에는 중간상태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頓悟를 분석하자면 未悟理의 범주 안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갑작스럽게 未悟理의 범주로부터 벗어나서 질적으로 또 다른 범주에 돌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특질 때문에 도생은 悟를 다른 말로 極照        앞서 인용한 혜달의 ꡔ조론소ꡕ 참조
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생은 悟의 내적 속성을 指示하기 위하여 悟는 순전히 一念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ꡔ주유마힐경ꡕ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一念無不知는 大悟할 때에 시작된다. 일체의 行에 대해서 끝내 이 일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에 이름한다. 直心으로 行의 初義를 삼고, 지극한 一念으로 일체법을 認知한다. 이 또한 부처를 얻는 곳이 아닌가!”        대정장38, 365上. “一念無不知者 始乎大悟時也. 以向諸行 終得此事 故以名焉. 以直心爲行初義 極一念知一切法 不亦是得佛之處乎”

이상의 인용문에서 一念無不知는 大悟를 말하는 것이며, 大悟할 때가 바로 得佛之處임을 천명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頓悟만이 成佛할 수 있는 길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도생의 스승인 구마라집도 역시 “대승 중에는 오직 일념으로 豁然大悟하여 一切智를 구비할 뿐”        ꡔ주유마힐경ꡕ(상동, 365上) “大乘中唯以一念則豁然大悟 具一切智也”
이라 하며 성불은 一念에 이룩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劉虯도 ꡔ무량의경서ꡕ에서 도생의 大頓悟義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生公께서 말하길 ‘道品은 泥洹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라한의 이름이 아니다. 六度는 佛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 樹王의 일컫움이 아니다. 斬木의 비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에 길이에 따라 나눌 수 있다. 無生의 깨달음은 生盡이므로 그 비춤이 반드시 순간이다”        ꡔ무량의경서ꡕ(대정장9, 384上) “生公云。道品可以泥洹。非羅漢之名。六度可以至佛。非樹王之謂。斬木之喩。木存故 尺寸可漸。無生之證。生盡故其照必頓“


이상에서 37助道品이나 6바라밀은 수행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아가 無生의 實相은 生盡하면 頓顯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盡은 그 온전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탕용동, 앞의책, p.469참조.
. 결국 無生의 實相은 分割할 수 없는 것이며, 無生을 證得하면 반드시 無生의 온전함을 얻어야 하고, 그것은 頓悟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頓悟는 無生에서 끝나며, 生이 다하면 바로 無生이다. 그렇다고 無生은 현실적인 삶을 의미하는 生死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의 깨달음은 본래 가까이는 생사를 버리지 않고, 멀리서 다시 그것을 찾는다”고 하거나 “不易之體는 맑아서 항상 비추인다. 다만 미혹에 따라 그것과 어긋나므로 事[佛性]가 아직 나에게 있지 않을 뿐이다”        ꡔ열반경집해ꡕ(대정장37, 377中). “不易之體爲湛然常照 但從迷乖之 事未在我耳”
라 말한다. 특정한 수행방도나 悟理를 위한 수단이 깨달움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궁극적인 理法의 세계가 현실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인식하므로써 형이상의 관념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


3. 頓悟成佛論의 批判的 接近

이상에서 도생이 주장하고 있는 돈오성불론의 개요에 대하여 개괄하여 보았다. 도생이 돈오성불론을 주장하므로써 이후의 중국불교사상사에서 깨달움에 대한 頓漸論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頓悟 이외에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선종의 등장은 더더욱 頓悟論을 심화시켰다.
여하튼 도생의 頓悟論의 사상적 기반은 반야실상관과 열반사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들 사상을 도생은 理란 용어로 정립하여 理의 철학을 수립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頓悟란 理를 깨닫는 것, 理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이며, 더구나 그 理는 不可分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따라서 理의 개념에 대한 분명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理의 개념을 정확하게 분석하게 된다면 도생이 추구했던 頓悟의 세계는 보다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頓悟사상이 지니고 있는 특징과 한계를 분명하게 露呈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점에 착안하여 도생이 사용하고 있는 理란 용어의 개념 분석과 그가 돈오성불론에서 사상적 기저로 삼고 있는 불성사상 내지 반야실상에 대한 사상적 분석을 통해 그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1) 理의 개념분석을 통한 비판
理는 원래 중국전통철학의 기본 개념 중의 하나이며, 그것은 대부분 道理, 法則, 准則, 規律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ꡔ韓非子ꡕ의 경우 依據와 規律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李道湘, 앞의책, p. 328
. 적어도 先秦時代 이래 道生이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기 이전까지는 의미상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Young-ho Kim, ꡔTao - sheng’s Commentary on the Lotus Sutraꡕ(1990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p. 124-134 참조. 선진시대의 중국전통철학에서 사용하던 理의 개념과 道生의 理의 개념에 대하여 상세한 연구를 덧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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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生의 저술에 나타난 理의 개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菅野博史저,ꡔ中國法花思想の硏究ꡕ(春秋社, 1994), pp.99-104 참조. 기타 Young Ho Kim의 앞의책 참고. 菅野씨는 그의 저서에서 理의 개념을 다섯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세분한 감이 있다. 理의 초월성과 보편성, 유일성을 밝히고자 하는 차원에서 언어와 理, 事와 理는 부수적으로 설명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理의 개념 속에는 佛性, 般若實相, 緣起法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拙論에서는 현학사상의 영향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기 위해 그의 학설을 토대로 理의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차차석, 「도생의 理의 개념에 반영된 현학사상」(한국불교학 27집,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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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事의 대립 개념으로서의 理이다. 事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일이나 事象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용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理는 심오해서 한 귀퉁이를 가지고는 어렵다. 그러므로 상세하게 事像에 의지하여 遠旨를 그린다. 事를 빌려서 理를 견주는 것, 이것을 비유라 한다”(ꡔ법화경소ꡕ)        卍續藏經 150, 809上. “理旣幽邃 難以一隅 故曲寄事像 以寫遠旨 借事況理 謂之譬喩”

“몰래 事로 인해서 理에 통하되 生死를 두려워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에 비록 들어가나 물들지 않는다”(ꡔ주유마힐경ꡕ)        대정장38, 387上. “密欲因事暢理 以明不畏生死 故雖入而不染也”

“가까운 事를 들어 멀리 理를 비유한다”(ꡔ열반경집해ꡕ)        대정장37, 461上. “擧近事 以譬遠理也”


둘째 理의 唯一性이다. 用例는 다음과 같다.

“평등이란 理는 異趣가 없으며, 동일하게 一極에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ꡔ법화경소ꡕ)        앞의책, p.801上. “平等者 謂理無異趣 同歸一極也”

“理는 一極 뿐이니 말이 理에 부합하기 때문에 말에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상동)        앞의책, p.806下. “理唯一極 言符乎理 故云語無異”

“理는 두 개의 씨앗이 없어서 두 개의 이름이 없다”(ꡔ열반경집해ꡕ)        대정장37, 487上. “理無二實 而無二名”

“理는 말한 바처럼 유일무이하다”(상동)        상동, 487中. “理如所談 唯一無二”


셋째 理의 超越性(普遍性) 내지 絶對性이다. 그 用例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道는 높고 理는 심원하다”(ꡔ법화경소ꡕ)        앞의책, p.807上. “道高理遠”

“至理는 玄遠하다”(상동)        앞의책, p.819下. “至理玄遠”

“理는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평등하지 않음이 없다”(ꡔ주유마힐경ꡕ)        대정장37, 368中. “理無不周 亦無不等”

“참다운 理는 自然이다. 悟 역시 冥府한다”(ꡔ열반경집해ꡕ)        대정장37, 377中. “夫眞理自然 悟亦冥府”


보다 직접적으로 理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묘한 理는 幽淵해서 數域의 표면을 벗어난다”(ꡔ법화경소ꡕ)        앞의책, p.804下. “夫玄理幽淵 出乎數域之表”

“理는 情을 넘어선다”(상동)        앞의책, p.820上. “理踰情外”

이상의 인용문은 數의 領域, 혹은 數表라는 말을 써서 理가 분석과 언어의 세계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理를 깨달을 수 있는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에 대해 道生은 초월성은 본래 언어와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어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앞의책, p.803上. “執文乖旨”
.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언어를 초월한 세계에 존재하는 理를 깨닫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사다리를 통하지 않으면 그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도생은 이러한 모순은 信解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佛 내지 法身으로서의 理이다. 대표적인 것을 摘示하면 다음과 같다.

“佛種은 緣으로부터 生起한다. 佛은 理를 반연으로 삼아 생긴다”(ꡔ법화경소ꡕ)        앞의책, p.808下. “佛種從緣起 佛緣理生”

“理는 法身이라 머무는 바에 두려움이 없다”(상동)        앞의책, p.815下. “理爲法身”


그러나 道生의 기타 저서 가운데서는 理를 佛因, 佛性의 의미로 사용되는 用例가 많다        이에 관한 참고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方立天 저, ꡔ위진남북조불교논총ꡕ(中華書局, 1982), p.172.
        賴永海 저, ꡔ중국불성론ꡕ(中國靑年出版社, 1999), p.71-72.
        위 두 사람은 湯用彤의 ꡔ한위양진남북조불교사ꡕ를 기초로 道生의 불성론을 연구하는 과정에 理의 개념 속에 佛性義가 있음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외에 타이페이에서 발간된 陳沛然 저, ꡔ竺道生ꡕ이 있다. 이 책은 道生의 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적이며, pp.48-49, pp.113-114에서 理와 佛性의 연관성을 간략하게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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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은 窮理로 주체를 삼는다”(ꡔ주유마힐경ꡕ)        僧肇 찬, ꡔ주유마힐경ꡕ(大正藏38, p.353下). “佛以窮理爲主”


그러나 道生이 말하고자 했던 理의 개념이 이상과 같이 多義的이라 해도 그것들은 般若實相, 眞如本體, 涅槃, 佛性 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 본다. 이들을 표현하기 위한 논리형식을 玄學에서 빌려 格義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陳沛然, ꡔ竺道生ꡕ(三民書局, 民國77), pp.29-59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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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대략 4가지로 구분하여 理와 관련된 문구들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다시 성격에 따라 요약하면 첫째 유일하면서도 보편적 절대이다. 둘째 무한한 평등성과 편만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항상 불변이다. 넷째 무위자연이다. 다섯째 깨달음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들을 총합하여 불성이란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개념 속에서 理를 깨달음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깨달아야만 하는 理를 노장사상의 道의 개념을 應用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 불교의 佛性이란 개념 속에도 법신의 편만성, 진여의 무차별성, 種姓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호영, ꡔ여래장사상ꡕ(대원정사, 1993), p.158참조.
. 그렇다고 본다면 도생이 사용하고 있는 理의 개념과 상통점이 없지는 않지만 唯一者라든가 저절로 존재하면서 만물을 생성하는 원리라든가 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생의 사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개념인 理는 어디에서 사상적 연원을 찾을 수 있는가.
우선 그의 理의 개념을 노장사상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자는 노장사상에서 道란 용어 속에 다음의 개념이 있다고 말한다        김항배, ꡔ노자철학의 연구ꡕ(사사연, 1985), pp.50-88 참조.
. 첫째는 근원적 존재이다. 둘째는 원리적 통일자이다. 셋째는 순수현상의 활동을 의미하는 生成者이다. 넷째는 도는 궁극적 운동방식인 無爲자연이다. 혹자는 ꡔ노자ꡕ에서 말하는 도의 특질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伊藤隆壽, ꡔ中國佛敎の批判的硏究ꡕ(大藏出版, 1992), p.22 참조.
. 즉 첫째 항상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無名(不可言), 絶對, 無限이다. 셋째 만물의 근원인 唯一의 실재이다. 넷째 생성의 원리이다. 이상 이들의 분석 중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道라는 것은 생성자, 내지 근원적 유일자, 보편자, 초월자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道와 天地萬物은 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천지의 근원인 도와 도에 의해서 생성된 천지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有限, 有名, 相對, 有二의 세계인 현상계 속에서 無名, 無限, 絶對, 唯一의 세계인 道에 합일하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노장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道의 개념과 道生이 言及하고 있는 理의 개념 사이에는 상통점이 많다는 점이다. 理의 유일성, 무위자연성, 能生性 등은 노장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도의 개념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특히 理를 근원적이고 유일절대의 대상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理不可分說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道의 개념을 교묘하게 불교에 수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은 불교의 토착화과정에서 이질적인 전통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필연적인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도생의 불교 사상과 현학사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졸론 「도생의 理의 개념에 반영된 현학사상」을 참고할 것.
. 왜냐하면 有名, 有限으로 표현되는 현상계에서 無名, 無限으로 표현되는 반야실상, 내지 佛性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言語와 事象을 수단화하는 사유형식은 노장사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유사한 사유형식이 이미 대승불교경전에도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釋尊께서 成道 이후 설법을 주저한 사건이나 유마거사의 黙然은 진리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표현 내지 ꡔ중론ꡕ의 「관법품」에서 말하는 “제법실상 중에는 我도 非我도 없으며, 心行과 言語가 단절된다”        대정장30, 24상.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 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는 설명이 그것이다. 기타 이후의 선종에서 수많은 선사들에 의해 이용된 ꡔ대지도론ꡕ에 나오는 제불성현은 범부중생을 위해 설법을 하지만 범부중생은 언어와 음성에 사로잡혀 성인의 뜻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指月에 비유한 것        대정장25, 375上. “如人以指示月 愚者但看指不看月...而凡夫着音聲言語 不取聖人意”
        대정장16, 582中의 ꡔ입능가경ꡕ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문자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뜻에 의지하여 제법실상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점에서 노장사상과 쉽게 융합할 여지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ꡔ유마경ꡕ은 도생이 활약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에 소개되며, ꡔ중론ꡕ과 ꡔ대지도론ꡕ은 도생의 스승인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에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도생도 이미 이들의 사상에 대해 익숙해져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유사한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는 노장사상의 도의 개념을 수용하여 理의 개념을 실체화하고 있으며, 그러한 理의 개념을 적극활용하여 頓悟成佛論의 논리적 기초를 수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불성론을 통한 비판
도생의 돈오성불론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사상의 또 다른 축이 불성론이다. 도생은 ꡔ열반경ꡕ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상적 지평을 확장하고 있으며, 그의 철학 중에서 중요한 개념인 理를 佛性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가 말하고 있는 佛性我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도생은 ꡔ주유마힐경ꡕ에서 다음과 같이 佛性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理는 이미 我에 따르지 않는 것으로 空을 삼는다. 어찌 내가 그것을 통제할 수 있으리오? 바로 無我이다. 無我는 본래 生死가 없는 가운데의 我이니 佛性我 아님이 없다”        대정장38. 354中. “理旣不從我爲空。豈有我能制之哉。則無我矣。無我本無生死中我。非不有佛性我也”
. 理와 佛性我가 동일한 개념의 다른 표현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또한 도생은 佛性我를 假我의 반대개념인 眞我로 상정하여 “無我의 가르침을 설하기 때문에 바로 眞我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정장37, 453中. “菩薩說無我之敎。表如來眞我”
라 인식한다. 그리고 이 眞我는 항상하는 我이며, 時刻에 상응할 수 있고, 천만가지의 활동에 부응하기도 한다        대정장37, 453下. “常我之理。應萬行之時”
고 말한다. 모두 我의 영원성과 보편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我는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도생은 매우 다양한 개념으로 佛性 내지 佛性我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본 뒤에 그 특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학자인 湯用彤은 일찍이 도생이 말하고 있는 佛性이란 용어에 첫째 理, 둘째 自然(=法), 셋째 本有(=佛性我, 眞我) 등 세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분석한 바가 있다        湯用彤, 앞의책, pp.447-454 참조. 이 논문에서 저자는 상세한 논증과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경전을 예로 드는 것은 생략한다.
. 方立天은 다섯가지의 개념이 있다고 분석하여 발표한 바가 있다        方立天, ꡔ魏晉南北朝佛敎論叢ꡕ(中華書局, 1995), pp.171-172 참조.
. 그에 따르면 첫째 本性, 둘째 善性, 셋째 自然, 넷째 法, 다섯째 理 등의 다섯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두 사람의 견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善性은 涅槃八德의 하나이므로 새로운 개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本性은 理의 개념 속에 이미 含有되어 있으므로 별도로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대비해 보면 湯用彤의 학설을 기초로 보다 세밀하게 분석한 것이 방립천의 논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방립천이 분석한 佛性의 개념 중에서 理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가 있으므로 本性과 自然의 개념이 實體化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도생은 法性을 法의 本分으로 파악하고, 佛性은 중생의 本分 즉 중생의 본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ꡔ열반경집해ꡕ에서 “만일 涉求할 수 있다면 문득 미혹을 돌리고 極에 돌아가며, 極에 돌아가서 本을 얻는다”        대정장37, 377中. “苟能涉求 便反迷歸極 歸極得本”
고 하거나 “이미 佛性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것은) 種生으로 의미를 삼는다”        대정장37, 543中. “旣問佛性 以種生爲義”
고 대답한다. 또한 “種相이란 自然之性이다. 불성은 반드시 諸佛에서 생긴다”        대정장37, 448中. “種相者。自然之性也。佛性必生於諸佛。向云。我卽佛藏。今云。佛性卽我。互其辭耳”
고 하거나 “비록 오음이 파괴되더라도 불성은 훼손되지 않는다”        상동, 454中. “雖壞五陰。無損佛性。傷五陰故。名曰殺生。不可以佛性無損。謂無不善業也”
고 말한다. 佛性은 斷絶되지도 않는 것이요 常存하는 것이라 분명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自然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물론 佛性의 다른 표현임에는 분명하지만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自然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佛性은 常存하는 것이며, 훼손할 수도 훼손되지도 않는 것이라는 점 이외에 저절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無爲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法도 그렇다고 보았기 때문에 法과 자연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도생은 ꡔ열반경집해ꡕ에서 “진정한 理는 自然”이라 언급한다. 또한 “대저 법을 체득하면 自然에 冥合한다. 일체의 諸佛은 그렇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法으로 佛을 삼는다”        상동, 549中.“夫體法者。冥合自然一切諸佛。莫不皆然。所以法爲佛性也”
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被造性이 있어서도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불성은 種生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因이요 果가 아니라”        상동, 548上. “佛性是種生義 故是因非果也”
말한다. 바로 無爲自然의 관념이 佛性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도생의 불성사상의 본질에 대하여 탐색해 보았다. 그것은 불성이 보편성과 일관성과 편만성, 그리고 무위자연의 속성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은 ꡔ열반경ꡕ이나 ꡔ유마경ꡕ, 그리고 ꡔ중론ꡕ이나 ꡔ대지도론ꡕ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더라도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道의 개념과 너무나 상통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불성=理=眞我라는 등식 속에서 이들을 대상화 내지 실체화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그의 돈오성불론이 6권 ꡔ대승열반경ꡕ이 중국에 소개되기 이전인 37세 무렵에 주창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스승인 구마라집이나 여산혜원, 내지는 여산에서 번역에 종사했던 僧伽提婆에게 유부의 학설 내지 法性사상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理不可分 내지 悟不可斷의 논리적 기초를 그들에게서 찾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闡提成佛論 역시 ꡔ대승열반경ꡕ이 남쪽 지방에 소개되기 이전에 제창되었으며, 그러한 논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理(=道)의 常住性, 唯一性 내지 편만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가 노장사상을 어떻게 불교에 활용하고 있는가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4. 結  語

이상에서 도생의 돈오성불론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서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돈오성불론의 사상적 핵심은 그의 理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전통사상의 중요한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 理란 용어를 불교에 수용하여 다양한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돈오성불론의 논리적 핵심이 理의 不可分에 있기 때문에 悟 역시 不可分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悟의 대상은 理이며, 理는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頓悟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정교하며, 더하여 불교의 반야사상이나 열반사상을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후의 사상가들은 그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하고, 그의 頓悟論에 의거하여 중국선사상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의 理 철학은 대상화, 실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의 무아설에 의하면 대상화, 실체화는 비불교란 비난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했듯이 그가 아무리 반야실상이나 법성, 혹은 불성론에 입각하여 理의 개념을 포장하고 있더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理의 개념은 실체화되어 있으며, 그 사유체계의 형식이나 내용이 노장사상에서 주장하는 道의 개념과 상통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일 理가 悟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불교에서 추구하는 頓悟의 대상은 다름 아닌 理의 편만성, 유일성, 생성성, 무위자연성인 것이다. 이것은 유한과 유명의 세계로 표현되는 현실을 벗어나 無限과 無名으로 표현되는 理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교를 관념화, 내지 형이상의 세계로 오도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