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8 제8주제 발표; 禪佛敎에서 본 深層心理學의 自我實現論

淸潭 2008. 2. 22. 18:16
 

德崇禪學 4-8 제8주제 발표; 禪佛敎에서 본 深層心理學의 自我實現論

 

김용표 (동국대학교)


I. 논의의 방향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불안(malaise)이나 내면적인 생명의 상실증 (inner deadness)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휩싸여 살고 있다. 이러한 불안한 정신 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복합되어 있다. 외적인 요인으로는 이른 바 세기의 병(mal de siecle)으로 불리우는 산업화로 인한 공해, 자원고갈, 환경 오염, 핵전쟁의 공포, 인구와 식량문제, 인간의 기계화, 시장거래적 인간 관계 등에서 오는 괴로움이 있다. 내적인 요인으로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삶의 무의미성과 목적의 상실로 인한 불안, 우울(ennui), 자기 자신과 동료, 그라고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감, 죄책감, 고독, 죽음의 공포, 생기의 상실, 허무의식 등과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적인 동인 등을 들 수 있다.        Erich Fromm, D.T.Suzuki, Rechard De Martino, Zen and Psycoanalysis (New York: harper & Row,1970), 김용정 역, ꡔ선과 정신분석ꡕ(정음사. 1978), p. 15-18 참조.

바람직한 인간의 정신적 기능에는 자유, 자주, 책임, 평화, 희망, 사랑 등이 있으나, 이와 반대되는 억압, 집착, 의존, 포악, 불안, 절망, 오만같은 비본래적 정신상태에 놓여있는 데에 현대인의 정신 건강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평화와 안온한 상태(well-being)’를 지향하는 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떻게 해도 제거시킬 수 없는 강박 관념이나 노이로제 징후를 안고 있다. 선과 심층심리학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 괴로움을 치료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데 주된 관심이 있다. 인간의 불안의식과 억압의 소멸을 위해 심층심리학은 인간의 무의식에 근원한 심층적 자아의 발견과 그 온전한 실현을 추구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무명과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에 선불교와 심층심리학의 종교적 성격이 있다 할 것이다.
본 논고는 무의식의 힘에 기인된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대치(對治) 방법에 대해 프롬을 중심으로 한 신 프로이드학파의 정신분석학 (psychoanalysis)과 융의 분석심리학 (analytical psychology)등의 현대의 심층심리학적 접근 방법에 대해 고찰해 보고, 참다운 자아실현의 이론과 방법에 대한 비교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선불교를 통한 심층심리학의 한계의 극복 가능성과 그 과제를 밝혀 보고자 한다.


II. 인간의 불안의식에 대한 심층심리학적 접근

1. 정신분석학의 평안한 상태의 성격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본성과 일치된 ‘평안한 상태’로 환원 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Sigmond Freud, 1856-1939)는 자아를 초자아로 부터 더욱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 관찰의 영향을 확장하는 데서 인간은 해방과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는 처방을 제시하였다. 프로이트의 계승자인 에리히 (Erich Fromm, 1900-1980)은 정신분석학은 정신적 환자만을 위한 치료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구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프롬은 치료 (cure)의 개념을 사회적응에 두는 정신분석과 영혼의 치유에 두는 정신분석의 두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후자의 경우 치료의 목적을 적응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잠재성과 개성을 충분히 실현시키는 데에 두기 때문이다. 이 때의 정신 분석의는 적응 상담자가가 아니라 플라톤이 표현한 ‘영혼의 의사’ (physician of the soul)가 된다는 것이다.        Erich Fromm, ꡔ정신분석과 종교ꡕ (문학과 사회연구소, 1992), p.85.
이는 정신분석학의 의의를 단순한 정신분열증의 의학적 치료보다 더 높은 종교적 구원학으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의미까지 담은 이 선언은 본능 (id)이 있는 곳에 자아 (ego)가 있다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그 숨은 뜻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프로이트의 목적은 이성에 의하여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정념을 지배하여, 인간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힘으로부터 해방함에 있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가 모든 종교의식을 신경증세로 본 프로이트와는 달리 그는 인본적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인본적 종교는 인간과 인간의 힘의 능력에 중점을 두는 종교이다.        Ibid, pp. 54-59 참조 .“Humanistic religion is concerned around man and his strength. Man must develop his power of reason in order to understand himself, his relationship to his fellow man and his position in the universe.”
반대로 전제적 종교는 전제적 사회 체제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인간의 피학대음란증적(masochistic) 인격구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적 종교의 기원을 그는 절대타자에 의한 누미노제 (numinose)체험에서 찾았다. 강력한 타자에 의한 종교체험이 정신건강에 해로운 이유는 인간에게 완전한 복종과 자아의 폐기를 주장한 유일신의 권위에 인간을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Ibid, p.52-53 참조.

프롬은 인간의 종교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고립,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교통과 통합에 대한 욕구 좌절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았으며, 종교는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사고와 행위의 체계로서, 개인에게 정향(定向)의 준거와 헌신의 대상을 제공하는 것”        Ibid, p.38.
이므로 누구나 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종교사상에 기초하여 ‘이성’과 ‘자유’와 ‘사랑’의 능력의 발현을 돕는 사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고, 이러한 종교론은 그의 정신분석학적 정신요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프롬이 생각한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인간이 평안한 상태에 도달하는 데 있었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평안한 상태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이성의 충분한 발달에 도달되는 상태이다”.        Erich Fromm, D.T.Suzuki, Rechard De Martino, Zen and Psycoanalysis (New York: harper & Row,1970), 김용정 역, ꡔ선과 정신분석ꡕ(정음사. 1978), p.29.
여기에서 이성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파악한다” Ibid, pp.36-37.
는 의미라고 해석하였다. 평안한 상태란 충분히 탄생하는 것, 인간이 가능적 존재가 되이며, 그것은 기쁨이나 슬픔에 대하여 최대한 수용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일반이 살고 있는 반수면의 상태로부터 깨어나, 완전히 깨닫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Ibid, p.37.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자기애를 극복한 차원, 즉 인간의 마음이 열려 각성된 空으로 되는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있는 그대로의 全人으로서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든 사람과 사물의 현실성 과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응으로서의 행위는 창조성에 는 창조성의 영역이 존재한다.        Ibid, p.37.


프롬을 비롯한 신프로이트학파에서는 무의식속의 ‘억압’(verdrangung)의 요소의 제거에서 오는 ‘평안한 상태’에서 인간의 소외와 분리는 극복된다고 보았다. 인간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근본적인 접근방법은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본능(id)을 자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2. 분석심리학의 개성화 과정의 종교성

(1) 보편적 종교성의 근원과 원형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Carl Jung, 1875-1961) 종교가 하나의 경전이나 교리를 믿는다는 데 있지 않다고 보았으며, 무의식이 가지고 있는 힘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성이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종교관에서 그는 기성 종교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종교를 정의하게 되었다.

내가 말하는 ‘종교’란 하나의 신조(Creed)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 고백이란 누미노제 (numinose)의 체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동시에, 누미노제의 효과를 지니는 ‘신앙’ (pistis)라는 어떤 특정한 체험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의식 의 변화를 향한 절대복종심과 신뢰의 마음에서도 유래한다.        Carl Gustav Jung, tr. R.F.G. Hull. The Collected Works of C..G.Jung.(1954-79) Ed. William McGuire, Bollingen Series. 20 Volum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1 edition), vol. 11, p. 4.


융이 생각한 종교의 개념        융은 종교 (Religion)의 개념을 종파(Konfession)와 구분하여 해석한다. 종파란 기존의 불교, 기독교, 도교, 힌두교와 같이 “하나의 조직된 공동체로의 정형화된 신앙, 또는 일정한 윤리적 행동양식을 집단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종파란 “종교체험이 교의와 도그마 형태로 변화한 것”. Carl Gustav Jung, tr. R.F.G. Hull. The Collected Works of C..G.Jung.(1954- 79) Ed. William McGuire, Bollingen Series. 20 Volum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1 edition), vol. 11, p. 228. p. 5.
은 회심과 변화를 일으키게 된 독특한 태도이며, 그것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나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구유한 한 조건이며, 인간정신의 특수한 자세였던 것이다.        종교의 라틴어 어의인 ‘religio’의 본래 개념과 같이 종교란 어떤 동적인 요소들에 대한 주의 깊은 고려와 관조의 태도이다. 이 동적인 요소란 힘, 정령, 신령, 신들, 법, 이념, 이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이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이 세 상에 힘이 있는 것이고,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인간에게 도 움을 주는 것들이다. 그것은 또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위대하고 아름답고 의미 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경건한 태도로 기도하고 사랑하게끔 되는 것이다.(Jung, 1961: vol. 11, 4).

이와 같이 융의 종교 심리학은 도그마 형태로 변화된 종파적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선험적 종교에서 출발한다. 종교를 특정 교의를 믿는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어떤 무엇인가에 공명을 가지고 헌신하는 포괄적 자세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융의 종교에 대한 개념은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6)가 종교를 “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 (the state of being ultimately concerned)”라고 규정한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Tillich, Dynamic of Faith, 1957, p.1).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사와 거기에 대한 전인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태도를 종교적인 것으로 본다. 그것은 “중심적인 자아에 있어서 모든 요소를 통합 (the unity of every element in the centered self)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의식과 무의식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Ibid, p.8). 융과 같이 틸리히도 종교를 인간정신의 「깊이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총체성에 있어서 깊이의 영역”(Ibid, p.7)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 무한과 유한등의 변증법적 갈등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융은 인간의 종교 경험은 역동적인 에너지인 집합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에서 솟아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집합무의식에는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 무의식은 인간의 지식의 영역 밖에 있으나 신비적이고 잠재적인 가능성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적 방법은 이 무의식의 성향을 활용하여 그 자체가 지닌 힘을 창조적 자기실현이라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데 특징이 있다.
융은 집합무의식의 개념을 인류의 과거와 연결된 정신 진화과정의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융이 규정한 집합무의식은 그가 ‘원시적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잠재적 이미지의 저장고이다. 이 원시적 이미지는 정신의 첫 발달 단계와 관련이 있다. 인간은 이러한 이미지를 조상 대대로 물려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획득형질 진화설은 생물학자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나, 융은 “개인이 태어난 세계의 형태는 이미 잠재적 이미지로서 태어나면서부터 그에게 갖춰져 있다”(Jung, vol. 7, p.188)고 주장한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자아는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보다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미래적 인간의 형인 全人”(Jung, vol. 12, p.6)으로 우리 안에 활동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집합무의식의 내용은 원형(archetype, prototype)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원형은 다른 비슷한 것들의 원 모형이 되는 것이다. 원형 가운데에서 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기(Selbst) 원형이다. 자기는 집단무의식속의 중심적인 원형으로 마치 태양계의 태양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자기는 질서와 통일과 조직의 원형으로 인격을 통합하고 일체성을 주는 역할을 한다. 석가모니나 예수와 같은 위대한 종교지도자는 이 자기원형을 가장 잘 실현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융은 이 자기실현에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자기는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숙명적 통일체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토마스(James Thomas)는 이러한 ‘자기’의 성격은 개방된 체계로 운용되는 것으로 보고 있고, 융의 자기의 개념을 초종속적인 체계, 목표, 반대의 중심, 통합된 상징, 動因, 原型의 표현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Jame Thomas, “The Bodhisattva as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함께 존재해 있는 것이다. 융의 자기 개념은 이러한 여섯 가지 요소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각 측면들은 초종속적인 체계 내에서 다른 측면에 상호 의존적이며, 또한 자아의 다양한 모습과 측면간에는 서로 겹치는 부분도 많이 있다. 정신의 총체로서의 자기는 모든 정신적 과정과 내용뿐만 아니라 부정적, 긍정적, 건설적, 파괴적인 제 성격들도 하나로 결합시키는 작용이 있으나, 이러한 내용들은 혼돈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 全人의 발달을 위한 패턴의 한 부분으로 있는 것이다.

(2) 개성화를 통한 자아실현
융은 자기는 의식의 상태에서 주어진 조건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원형과 무의식은 선천적인 내재적 가능성이다. 그들은 집단적 경험을 뒤로 반추하며 특정한 가능성을 지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는 하나의 원형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조직된 원형이나 질서의 원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융은 이 주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술에서 자기를 “무의식의 실제의 조직적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Jung, 1961: vol.9, 204). ‘자기’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자아는 보다 높은 조직의 힘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역할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미약한 자아 의식은 확장이나 소멸로 인도할 자기에 흡수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Jung, 1961: vol. 9 part 2, 24-25). 융이 생각한 인격의 통합이란 이러한 자아의 확장이지 개성의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편적 세계의 영혼과는 먼 인격은 아직 긴장을 지닌 개인적인 것이며 균형된 마그네틱 장과 같이 조화로운 전체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융은 “자기의 절대적 개성화”의 필요성을 제창한다.
융이 생각한 자기는 “영원성과 보편적인 개인의 유일성을 묶은 것”(Jung, 1961: vol. 12, 19)이었다. 그것은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나 영혼의 형이상학적 주체가 아니라 그것은 본질적으로 창조적 에너지였다. 내적인 중심 원과 자기결정의 힘으로서의 자기는 그 속성상 큰 에너지와 매혹적이고 두려운 신비와 영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의 무한한 확장은 “지적 형태에 의해 붙잡히거나 또는 과학적 도그마의 수단에 의해 실행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그 자체의 무엇으로 운명적인 집착의 어떤 것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Jung, 1961: vol. 11, 556). 이같이 자기는 자아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자아는 주관적인 것에 반해 자기는 객관적인 심리로 성격 지을 수 있다. 자기는 상상과 개념을 생성하는 그것의 힘 안에서 비개인적인 것으로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의 자기원형론은 신이나 궁극적 실재의 여러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부분이 있다.        문제에 대해 Paul Knitter는 융의 사상이 종교다원론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첫째, 우리 안에 숨어서 인간을 인도하는 자기는 우리의 이성의 능력 과 개념을 초월한 것이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신비 이면서도 실재하는 것이다. 둘째, 자기는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실재이다. 자기는 우리와 함께 존재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능가한다. 셋째, 루돌프 오토가 신에 대한 누미노스의 요소로 말한 ‘두려움과 매혹과 신비’와 같은 신비한 능력이 있다. 넷째, 우리 안에 있는 분화되지 않은 에너지는 수 많은 세계종교들이 신에게 돌렸던 동일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형성하고 명령한다 Paul Knitter, No Other Name? (Maryknoo, New York: orbis Book, 1989), pp.58-59 참조.
그는 종교적 신비를 증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래 자기원형이라는 신비적 실재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영혼을 신성화했다고 비난 받아왔다. 그러나 영혼에 종교적인 기능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나는 영혼은 본래부터 종교적(naturaliter religiosa)기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전거를 이끌어 냈을 뿐이다.        Jung, 1961: vol.12, p.10.


이와 같이 신이나 종교적 실재를 원형으로 환원시켜 이해한 그의 입장은 가능한 한 매우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심리가의 입장에 서려고 한 점을 볼 수 있다.
융은 그의 정신치료의 목표를 정신적 조화와 통합에 두고 이를 개성화 (individuation)라고 이름하였다. 그는 개성화 과정을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대한 인격성취의 한 수단으로 확신한다. 개성화의 동화와 통합화의 한 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인생의 목적은 전체의 자각, 즉 자아의 실현에 있다”(Jung, 1961: vol. 7, 330). 그것은 상징에 의한 자기원형의 활동에 의한 무의식과 의식과의 상호 조화와 통합을 성취된다. 자아실현은 전체로의 다양한 힘들을 통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융의 자기실현이론은 이 개성화라는 주제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융의 개성화는 어떤 심리적 전체성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심리적 과정이다. 개성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인격적 통합에 의한 조화된 완전함과 비분리된 전체성으로 인도한다. 개성화의 과정은 원형적 내용의 경험을 통해 진행된다. 이 내용에는 모든 의식 무의식의 요소가 포함된다. 예를 들면, 그림자, 페르조나 (persona), 아니무스(animus), 아니마(anima), 잘 드러나지 않는 태도나 기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Selbst)가 있다. 이러한 각 원형의 내용들은 의식의 확대와 심화와 함께 조우된다.        James Mattoon, op.cit. p. 187.
이와같이 개성화의 일은 자신의 내적 상이 현현되도록 하는 개인의 투사를 깨닫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개성화는 하나의 과정이지 정신의 통합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성화는 정적인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개인의 일생 안에서 완전함의 성취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형체를 만들었다가 형체를 바꾸는 영원한 의미의 영속적인 환희일 뿐이라고 융도 그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이 과정은 개인의 환경이나 심리적 구조, 노력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융은 “원력”이나 “자신의 법에의 복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Jung, 1961: vol. 17, 300).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에 의해 인격의 통일성과 완전성에로 인도하는 개성화의 과정은 평생을 통한 점진적 자기 변화의 과정이다. 이러한 자기변환의 과정은 결코 미리 조건 되어진 것이나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와 교육분석가의 노력에 의해 참된 자아실현의 이상이 달성되는 것이다. 개성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에 의해 인격의 통일성과 완전성에로 인도하는 과정으로, 한 개인의 일생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융은 인격의 완성보다는 인격의 온전화(vollstandigkeit)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III. 선불교에서 본 심층심리학의 자아실현론

1. 불교의 정신분석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중생은 온전한 정신을 상실한 채 살아 가고 있는 정신병적 존재라고 진단할 수 있다. 부처님은 중생의 이러한 병을 치료해준 마음의 의사였으며, 수 많은 법문들은 그 치유의 처방이었다. 붓다는 스스로 인간의 내면의 정신적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밝힌바 있다.        ꡔ木奈女祗域因緣經ꡕ,《大正藏》卷14, p. 899下. “俱當救護天下 我治內病 汝治外病”
의사들이 외적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에 대해 붓다는 내적 번뇌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마음의 의사이므로 大醫王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으로 평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인격에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을 불교의 여러 경론에서는        인간적 정신적 장애를 의학적으로 설하고 있는 경에는 ꡔ治禪病秘要法ꡕ(大正藏 卷15); ꡔ摩訶止觀ꡕ卷8 (大正藏 권46); 般若 奉 詔譯, ꡔ大乘本生心地觀經ꡕ卷6, 「厭身品」第7 (大正藏 卷3) 등이 있다.
諸行無常의 도리를 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생과 사에 대한 바로 보지 못하는 無明에 기인되고 있음을 잘 밝히고 있다.        졸고. 「불교적 인격교육의 이념과 방법」 ꡔ종교교육학연구ꡕ제 2집 (1996), pp. 33-54 참조.
무명(無明․avidyā)이란 사물의 실상을 덮고 있는 관념과 분별 의식이다. 월칭(月稱․ Candrakīrti, 600-650 C.E.)은 무명의 의미를 “사물의 본래 모습(tattvam)을 잘못 이해하는 것(mithyāpra- tipatti)이거나 이해하지 못함(apratipatti)”이라고 정의하였다(Candrakīrti, 1960: Prasannapadā 564.7).        Prasannapadā Commentaire de Candrakīrti.(564.7) Bibliothica Budhica 4. (St. Petersburg, 1960)
이러한 무지나 잘못된 이해는 사물의 본성을 가리는 것(saṃ-vṛ)이다. 용수(龍樹․Nāgārjuna, 150-250 C.E.)는 “탐욕과 진에와 우치는 분별된 사유로부터 생겨난다”        龍樹, ꡔ中論頌ꡕ 23:1
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전도는 존재의 실체(ātman)와 실체가 없음(anātman)을 동일시하는 인식의 혼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월칭은 이러한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철학적 환상이라고 규정하였다.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실체론적 신앙은 나약한 인간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은 무와 유를 자기의 영상(atmiyakara)에 투영하여 자기 존재의 안전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실재를 자기 자신의 것(upādayāt)으로 만들려는 자기애적 의도”        Candrakīrti, Prasannapadā TR. Mervyn Sprung, Lucid exposition of the middle way: The essential chapters from the Prasannapadā of Candrakīrti(London & Henley: Routledge & Kegen Paul, 1979), p.197.
에서 기인된 어리석음이다. 이러한 자기애의 집착에서 인간은 환상적 언어유희에 빠져들어 윤회의 삶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본성에 대한 심리-언어학적 분석은 자기애가 희론적 고착증을 만들어 냄을 보여준다. 자기 존재가 무로 환원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에서 인간은 실체론자가 되고 영혼불멸설이나 영원한 실재를 상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체론이란 인간의 기원은 어떤 실체에서 나왔다고 믿는 사유 체제로, 세계는 영원히 실재하며 자신의 구원도 이러한 발생론적 존재로 회귀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믿는 이론이다. 중관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형이상학은 해탈을 위한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신앙이나 철학은 자기애에 속박된 생사 윤회의 실존을 자초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인격의 장애가 되는 여러 마음 작용을 번뇌(煩惱․kleśa, 隨眠, 漏, 結縛, 暴流)라고 이름한다. 번뇌는 선의 의지를 방해하고 인간을 미혹된 마음으로 빠뜨리는 작용이다. 마음의 작용이 무한한 것처럼 번뇌의 작용도 끝이 없다. 대승불교의 논서인 ꡔ大智度論ꡕ에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이상적인 평온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안과 번뇌에 쌓이게 되는 이유를 ① 착한 마음이 엷거나 악한 습성에 빠짐 ② 제행무상의 도리를 바로 인지하지 못함 ③ 죽음에 대해 바로 관하지 못함 ④ 세계의 空함을 관하지 못함 ⑤ 수명에 애착함 ⑥ 불법에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않고 외부에서 구하려 하는 마음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ꡔ대지도론ꡕ 8. T. 25, p.119a

世親 (Vasubandhu, 320-400 C.E.)은 ꡔ阿毘達磨俱舍論ꡕ에서 인간의 불안한 마음의 근원이 되는 번뇌의 종류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업의 종류 그리고 번뇌를 끊고 닦아 가는 방법과 그 차례를 밝혀 지혜로운 삶을 사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ꡔ아비달마구사론ꡕ, Abhidharma-kośabhāṣya 19장 「분별수면품」, T.29. p.98b.
번뇌는 크게 근본 번뇌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지말번뇌로 분류된다. 근본 번뇌에는 ① 탐욕 ② 진심 ③ 아만심 ④ 의심 ⑤ 무명 ⑥ 악견 등의 6종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의 작용이다. 이 무명은 무아의 원리를 모르고 아집을 야기한다. 지말 번뇌는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전도된 마음의 작용으로 108번뇌와 8만4천번뇌 등으로 나눈다. 이를 煩惱障과 所知障으로 나누기도 한다. 번뇌장은 인간의 몸이 오온의 화합인지 모르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는 아집에서 오는 번뇌이다. 이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며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를 유전하게 한다. 소지장은 참다운 지혜의 발현을 장애 하는 번뇌로 법집에서 오는 것이다.        번뇌 가운데 26종의 바람직하지 못한 심리적 요인이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여 열거하고 있다. 大不善地法: 無慘과 無愧가 있다. 大煩惱地法: ① 어리석음(痴) ② 함부로 제 멋대로 놈(放逸) ③ 몹시 게으름(懈怠) ④ 믿지 못함(不信) ⑤ 혼미함에 빠짐(昏沈) ⑥ 들뜬 상태에 빠짐(掉擧) 등이 있다. 小煩惱地法: ① 어떤 상대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품는 것(念) ② 자기의 죄악을 감추고 덮는 것(覆) ③ 제것을 인색하게 아끼는 것(慳) ④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시기하는 것(嫉) ⑤ 남의 바른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고 스스로 민망히 여기는 것(惱) ⑥ 남을 해치려는 것(害) ⑦ 원한의 마음을 갖는 것(恨) ⑧ 남을 농락하려고 아첨하는 것(諂) ⑨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誑) ⑩ 제 잘난 체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것(憍) 등이 있다. 不定地法에는 ① 무엇을 멋대로 생각하는 추리 작용(尋) ② 매우 세밀하게 사색하는 분별심(伺) ③ 정신의 혼미한 상태(搖眠) ④ 이미 지은 선악의 업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고 기억하는 것(惡作) ⑤ 탐욕(貪) ⑥ 성냄(瞋) ⑦ 아만심(慢) ⑧ 사성제의 인과에 대한 의심(疑) 등이다. ( ꡔ아비달마구사론ꡕ, 4장 「분별근품」, T.29. pp.18b-23c)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본 작용은 제7말나식(manas)의 미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생각에서 기인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으로 我癡, 我見, 我慢, 我愛 등이 있다. 아치란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자아에 대한 무지이며, 아견이란 나에 대한 집착의 마음이다. 아만이란 나에 애착하여 자신을 높이는 거만한 마음이며, 아애란 나에 집착하여 나에게 탐착하는 마음을 가르키는 것이다.
즉 이것들은 눈앞의 고와 락에 미혹되어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케 하는 정신작용이다. ꡔ唯識三十頌, Triṃśikā- vijñaptimātratā-sidhiꡕ에는 “아라한의 聖位와 滅盡定의 선정과 출세도의 경지에서만이 말나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고 한다.        T.31, pp.60a-61b.
선가에서는 말나식의 思量心과 掉拒心을 정화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고 말나식의 번뇌를 완전히 제거해야 견성의 길을 열 수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이와같이 무명에서 비롯된 我愛와 戱論은 수많은 지적(邪見), 감정적(愛慾, 성냄), 의지적(貪慾) 번뇌를 만들고 그것은 곧 정신적 불안과 괴로움의 반복을 자초하는 것이다.

2. 에릭 프롬의 개오체험 해석

ꡔ선불교에 관한 강연ꡕ에서 스즈키 (D. T. Suzuki)는 선의 개오(開悟)체험의 근본적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 자기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다.
ⓑ 속박으로 부터 자유에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 선은 우리들 각자 내면에 본래 자연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모든 에네르기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네르기는 보통 속박되고 왜곡되어 있어 자유롭게 활동하는 통로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이 미치거나 정신적 불구가 되는 것으로 부터 구해주는 데에 선의 목적이 있다. 선불교는 이러한 창조적 자유와 사랑의 능력을 발현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Erich Fromm, D.T.Suzuki, Rechard De Martino, Zen and Psycoanalysis(New York: harper & Row,1970), 김용정 역, ꡔ선과 정신분석ꡕ(정음사. 1978), p.23.


이에 대해 프롬은 깨달음의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내부와 외부의 실상에 완전한 조화를 이룬 상태라고 이해하고, 분열이나 황홀의 상태도 아닌 “실상에 대한 전체적 인격의 완전한 깨어남”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Ibid, pp.75-77.
이러한 의미에서 프롬은 스즈키가 말한 선의 목표에 정신분석학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선불교의 자기본성의 통찰, 자유, 행복, 사랑의 성취, 에네르기의 해방, 정신이상으로부터의 구제등은 정신분석학의 목표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애의 부정, 반권위주의적 태도, 자기자신에 대한 책임, 지도자의 안내등 양자간에는 방법론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프롬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보다 선불교적으로 발전시킨데 있다 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ꡔ선과 정신분석ꡕ을 통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신분석적 치료방법은 불교, 특히 선불교의 참된 진면목의 발견 방법과 유사점과 상호 접근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와 정신분석학은 다음과 같은 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에서 불교는 본래 구유된 자성의 청정성을 말하는 반면, 프로이트는 본능에의한 잠재력의 부정적인 측면을 말한다.
둘째, 문제의 해결방법에 있어서 불교에서는 근원적인 해소(解消, dis-solve)라는 용해의 방법을 가르치지만, 정신분석학은 해결(解決, solve)라는 단계적 분석적 방법에 의존한다.
셋째, 자아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불교는 자아를 무자성 공적으로 이해하는 데 비해, 정신분석학은 자아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이와같이 두 사상 모두가 자기애와 집착의 방기를 주장하지만 그 이론적 차원이 다름을 우리는 명백히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적 관점에서 볼때 정신분석학적 치료방법은 불교적 인간구원의 방법에 근접하려는 한 예비적 정신요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칼 융에 대한 불교의 응답

융은 그의 생애를 통해 동양사상에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Carl G. Jung과 동양사상에 대한 연구로는, 李符永, ꡔ분석심리학ꡕ(일조각, 1978); 「종교현상의 분석심리학적 접근」, 김승혜 편 ꡔ종교학의 이해ꡕ(왜관: 분도출판사, 1986); 「불교와 분석심리학」, ꡔ동국대학교 개교 80주년 기념논집ꡕ(1987), 李恩奉, ꡔ종교와 상징ꡕ(세계일보, 1992); Abe, Masao (1985), “The Self in Jung and Zen,” Eastern Buddhist Vol.17; Bechtle, Regina (1973), “C.G. Jung and Religion”, in Psyche and Spirit, John Heaney, ed. New york: Paulist, 1973; Champbell, Joseph, ed. (1971) The Partable Jung. New York: Viking; Coward, Harold (1983), “Jung and Karma,” The Journal of Analytical psychology 28,4.Coward, Harold (1985), Jung and Eastern Thought.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s. Daniel, Meckel J. ed. (1992), Self and Liberation: New York: Paulist press. Jung, Carl Gustav (1938), Psychology and Relig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이은봉역(1980) 심리학과 종교, 서울: 경문사.Mary, Matton A. (1981), Jungian Psychology in Perspective. New York: Free Press. Thomas. J. (1982), “The Bodhisattva as 실제로 여기에 대한 많은 연구도 있다.        융은 1929년 R. Wilhel과 함께 도교경서인 <太乙金華宗旨>를 역주하였다. 1939년에는 <티벳 死書>를 번역하고, 스즈키의 <선불교입론> 서문도 썼다. 1943년에는 요가와 명상에 대한 논문인 <동양적 명상의 심리학>에서 분석심리학과 선불교의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다. 융과 동양종교에 대한 연구로, 李符永 (1978). 분석심리학. 서울: 일조각. 李符永 (1986).“종교현상의 분석심리학적 접근,” 김승혜 편 종교학의 이해. 분도출판사. Coward Harold(1985). Jung and Eastern Thought.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s. Jones, Richard Hubert(1979). “Jung and Eastern Religious Traditions,” Religion 9. (2). Meckel Daniel J.ed.(1992). Self and Liberation: New York: Paulist press 등 참조할 것.
그는 불교의 유식과 밀교전통에서 자신의 무의식이론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고 동양적 무의식 사상과 수행법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학자였다. 만다라나 붓다의 이미지는 온전한 상징의 목표로 분석심리의 정신치료의 목표와 일치한다고 보았으므로 융은 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융은 만다라는 모든 길과 진리의 표현이고, 중심으로 통하는 길이며, 자기실현의 과정이라고 보고 티베트의 만다라의 도형을 보고 거기에서 인간의 자기원형의 상징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Amitāyur-dhyāna-sūtra)        T.12; K.11; SBE, vol 49.
에 나오는 ‘16관법’의 상징과 명상방법에도 깊이 동조하고, ‘16관법’에 나오는 태양이나 물, 대지 등은 아미타불의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빛을 상징하므로 이를 관상하므로써 만다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징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근원에 내재하는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융이 동양적 명상이나 수행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는 볼 수 없다. 융은 다만 서양적 정신분석의 방법의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양종교의 수행 법을 원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융의 분석심리요법과 불교, 특히 유식불교와 선 불교는 인간의 고와 정신적 갈등을 그 무의식으로부터 해소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공동의 목표와 일치점이 있다. 또한 자아의 문제를 인간문제의 근본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된 주제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상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융이 변두리의 의식을 자아 (Ich)라 하고 전체정신의 중심을 자기(Selbst)라는 용어로 표현한데 반해, 불교의 유식학(唯識學)        불교의 심식설(心識說)은 초기불교의 18계설에서부터 발달한 것인데, 6근, 6경, 6식이라는 인식의 주관 (noesis)과 인식대상 (noema), 인식작용의 분석으로 지각심리학의 기초이론을 세웠고, 나아가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식에 대한 심층적 탐색에서 대승유식학에서는 제 8식에 대한 이론을 확립하였다. 유식학의 아라야식은 개인이 과거에서부터 누적시켜 온 모든 행위와 역사를 함장하고 있는 식이다. 잠재의식 가운데는 제7 마나식도 있는데 이는 평소에는 의식할 수 없는 식으로, 자기에 대한 애착이나 아만심 등과 상응하여 활동하는 무의식적인 자아의식이다. 제6식 이하가 보통 의식이라고 불리는 식이다.
에서는 무의식의 개념으로 제8식인 아라야식(Ālaya vijñāna)을 말한다.        유식설을 설한 해심밀경(解心密經, Saṃdhi-nirmocana-sūtra) (T.16, K. 10) 에는 아나다식이라는 것을 상정하는데 이 식은 인간의 자율신경이나 생리기능과 같은 것으로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식이다. .
잠재의식에는 숨겨진 세력인 삼스카라(samskara)가 있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불교에서 마음(citta)의 개념은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이 쌓여 뒤섞인 과거에서부터의 누적된 것의 총집결체라는 의미가 있다. 아라야식 가운데에는 일체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어 이 종자가 말라식의 자아의식과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형성해가고 있다. 아라야식 연기설은 잠재심인 아라야식의 인연작용으로 개인의 몸, 마음, 환경 등 현재의 세계가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하는 이론이다.
둘째,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리비도라는 힘의 성향을 활용하여 그 자체가 지닌 창조적 힘을 재현하려고하는 데 반해, 유식불교에서는 아라야식까지도 전환 (asrayapravrtti)에 의해 부처의 경지에 오입(悟入)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Maitreyanātha의 ꡔ現觀莊嚴論, Abhisamayalamkāraꡕ에는 이러한 轉識을 위한 유가행의 5단계 수행법이 설해져 있다. 그것은 ⓐ 등류법(等流法)의 증득, ⓑ 이치에 합당한 사유 (yonisōmanaskāra), ⓒ 마음이 자계(自界)에 안주함. ⓓ 존재나 비존재를 있는 그대로 (tathata)관함, ⓔ 전환 뒤의 성스러운 씨앗 등의 단계이다(Th. Stcherbatsky & E. Obermiller ed., Abhisamayalamkāra. Bibl. Buddism 23, 1929, 11장 42-43게). 여기에서 전환 뒤의 성스러운 씨앗 (種性)이란 평등성, 무구(無垢), 수승함, 조화, 부증불멸(不增不滅)의 특성이 있다. 이 단계에서 아라야식중에 있는 번뇌장과 주체와 객체의 잠재세력도 다 끊어 의지할 근원까지 전환할 때 허망분별(abhūta-parikalpa)은 사라지고 둥글고 가득한 지혜와 평온을 성취하여 인격의 통합과 완성을 이루게 된다는 설이다.
즉 자기존재의 근거인 무의식까지도 완전하게 전환하여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합일하여 존재하는 일체 만유와 평등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셋째, 융은 불교의 선정 (samādhi) 사상을 깨달음의 맥락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삼매의 경지를 무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명상과 선정을 자기 몰입에 의한 집단무의식에의 복종으로 보았다 (Jung, 1958: Vol. 11, 774; John, 1979: 147).
넷째, 융의 만다라 해석은 불교적 만다라의 개념과 차이가 있다. 융은 만다라의 의미를 “무의식의 연구에 의해 모든 신화적 동기는 그 다원적 구조의 막바지에는 중점을 중심부에 둔 장사선적 체계이며 바로 그것이 집합적 무의식의 중심이자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중심적 상징의 명칭으로 ‘원’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용어인 만다라라는 말을 그는 취했다고 한다.(Jung, 1958. vol.11. 252) 그러나 불교에서는 만나라가 부처의 위없는 깨달음과 덕의 상징체계이며 우주삼라만상이 다 만다라라고 보는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섯째, 특히 융의 자기의 개념은 불교의 본래 입장인 무아설과의 상충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융의 자기의 개념은 불교보다는 오히려 부라만교의 ātman의 실재설과 더 가깝다. 불교의 여래장설과 자기원형설의 유사점을 논하기도 하나,        이부영, 「불교와 분석심리학」 ꡔ동국대학교 80주년기념논문집ꡕ(1987) 참조.
여래장사상은 힌두교의 실재사상에 영향을 받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如來藏 사상이 불교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음을 비판한 논서로는 宋本史郞, 緣起와 空: 여래장사상비판( 1989, 동경:厚德社), 헤원역,(운주사, 1994)을 참조할 것.
선불교에서 眞我의 개념 無我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Richard Demartino는 “禪에서의 眞我는 無我이다. 선의 자기 표현은 자기가 없는 자아 (selfless-self), 형상이 없는 자아 (formless-self)의 표현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Richard Demartino, Zen Understanging of Man (Temple University Ph.D Dissrtation, 1969), p 278.



IV. 결론: 선을 통한 심층심리학의 극복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참된 자아의 실현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선불교의 견성과 분석심리학의 개성화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1958년 5월, 융은 일본의 경도학파, 기타로 니시다의 제자로 경도대학의 교수를 지낸 선철학자인 久松眞一(Shin’ichi Hisamatsu, 1889-1980)과 대좌를 하여 토론을 한 일이 있다. 융의 사후에 공개된 이 대화록        Psychologia 11, 1968, pp. 25-32.
을 중심으로 하여 선불교의 견성과 분석심리학의 자아실현의 개념과 방법을 비교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찻째, 선불교의 입장에서는 융이 말한 자아와 개성화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융은 자아중 무의식 부분은 잘 알려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의 견성체험에 있어서 깨달음이란 진아를 완전히 그 자체로서 요달하는 요요상지(了了常知)이므로 자아를 깨닫는다는 것에 무의식이 완전히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미완의 수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즈키는 무의식의 본성을 대원경지 (adarsanajñāna)로 볼 수 있다는 제안하고 있다.
둘째, 선불교의 자성은 모든 중생에게 내재된 열려진 성취에의 가능성으로 삼세에 제한이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자기원형은 무의식에 저장되어있는 개성화와 온전화의 가능태로서 인간의 일생에 제한된다는 것이 분석심리학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융도 만년에는 인도의 카르마와 윤회의 개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융 자신의 꿈이 그를 정신적 유전질의 완전한 이해로 인도하는 경험을 한 후 이 카르마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Harold Coward, “Jung and Karma”, The Journal Analytical Psychology 28 (1983), pp. 367-75.

셋째, 분석심리학은 오랜 분석의 단계를 통해서 개성화와 자기실현이 달성되는 데 비해 선의 개오는 이원적 분별심을 넘은 직관적 돈오체험에서 얻어진다.
넷째, 분석심리학의 개성화에는 최고의 통합단계에 이르러서도 주관과 객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근본적인 이원론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선 불교는 자아의 완전한 잊음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선 불교에서의 견성체험은 자아라는 어떤 개념이나 범주, 주관과 객관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분석심리학의 정신요법의 목적은 인간의 정신분열이나 노이로제의 한시적 치료에 있다. 즉 한 질병이 사라지면 다른 질병이 도래할 가능성을 항시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깨달음은 인간고의 완전한 해탈과 생사에의 자유까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불교의 선지식은 정신분석 의사에게 ‘정신치료를 하는 의사도 아직 환자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선불교과 분석심리학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선 불교와 심층심리학적 정신요법은 모두 인간의 깊은 마음에 대한 성찰에서 그 수행과 치료의 방법을 찾고 있다. 또 자기 깨달음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정신적 자유와 평안함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목적을 갖고 있다. 융은 이 두 수행 체제는 서로 배움으로써 자체의 수행을 더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제안한 바와 같이,        융은 “깨달음이나 삼매 (samadhi)가 서양의 위인들이 넘어간 산봉우리보다 낮은 아래쪽 어느 곳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Jung, Vol.11, 632)라고 경고하였으며, 융은 스스로 “영혼이 있는 심리학(Psychologie mit Seele)”이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입장과 사상적 맥락은 불교나 동양종교와는 뚜렷하게 다르다는 점도 스스로 인정하였다.
이 두 수행 체제는 서로 배움으로서 자체의 수행을 더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