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4-9 제9주제 발표; 정신치료와 불교의 선수행
최훈동 (한별신경정신병원장)
Ⅰ. 머리말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정신치료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사성제에서 볼 수 있듯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인생을 고통으로 파악하고 이 고통의 근원이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깊이 성찰하여 삼법인과 12연기를 밝혀내고 팔정도를 실천하여 고통을 해결하고 있다. 정신치료는 자신이 앓고 있는 분노와 욕망, 불안과 공포, 우울과 긴장, 좌절과 비탄 등 정신적 고통이 사회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뿐만 아니고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겪은 정서적 상처와 내면적 갈등에서 비롯된다 것을 통찰해내어 현재와 미래의 생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두운 힘을 제거하여 건강한 밝은 마음으로 전환시킨다. 특히 어두운 무명의 상태에서 밝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불교의 선수행의 과정은 마음의 미지의 영역인 무의식을 탐색하고 이를 깨달아 가는 정신치료의 통찰요법에 비견할 수 있다. 특히 위빠사나 참선에 의해 성성하게 집중된 알아차림과 면밀한 관찰에 의한 지혜로 닙빠나(Nibbana; Nirbana; 열반)에 이르는 것은, 정신치료에서 내면의 주의깊은 성찰에 의해 통찰을 얻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과정과 흡사하다.
인간은 욕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욕망이 좌절되면 성내고 괴로워한다. 우리의 생각은 감각대상을 좇아 일어나고 마음은 집착과 걱정으로 불행해지고 괴로움에 빠진다. 이러한 마음을 성찰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동양의 직관적인 불교와 서양의 분석적인 정신치료를 비교해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신치료와 불교를 연관지어 고찰한 본격적인 연구들이 많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양자를 다 정통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고, 둘째, 이론적으로 비교를 해서는 양자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정신치료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임상 치료기법이고, 불교 또한 철학이라기보다 실천 수행이기 때문이다. 양자를 이론과 실제에 정통하기 전에 양자를 비교 논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선수행에 일가를 이뤘다는 분도 ‘정신치료나 정신분석은 자아를 영구적인 실체로 보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현재의 고통이 기인한다는 가설에 입각하여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라고 혹평하고, 정신분석가는 ‘수행자도 치료받기 전에는 자신의 성격이나 심리적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본고는 이런 대립된 시각을 가능한 배제하면서 정신치료 이론과 불교의 수행법인 선수행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Ⅱ. 정신치료
1. 정신치료란? 졸저, ꡔ정신의학 이야기ꡕ,서울, 한울, 2001, p. 48-51
정신치료는 한마디로 대화를 통하여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무의식적인 것은 어떤 충동, 감정, 욕망 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욕망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음으로써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데 정신치료는 그러한 요소들을 자신 안에서 통찰하여 자각하고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치료 상황에서 환자는 떠오르는 모든 상념이나 감정들을 조금도 숨기거나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꿈도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치료자는 또한 솔직하고 진지한 자세로 환자의 연상(association)을 촉진시켜 환자 스스로 자신의 내적 갈등의 상징적 의미를 깨닫도록 해석(interpretation)을 통하여 도와준다. 정신치료의 한 종류인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는 조금 더 적극적이어서 과거의 상처 등을 다루기보다 ‘지금 현재’와 ‘바로 여기’를 강조하고 환자가 자신도 모르게 왜곡시키고 있는 인지내용을 분석하여 건강한 생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다.
정신치료는 치료자와 환자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주로 환자가 말하고 치료자는 듣는 편인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저항에 부딪히고 애증이 교차한다. 정신치료는 몇 가지 점에서 일반 상담과는 다르다. 카운슬링이나 상담은 인생에 대한 조언이나 위로, 격려, 전문 지식을 알려주거나 경험인에게 다른 시각을 배우는 수직적 관계이다. 반면 정신치료는 치료자가 환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표현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서 환자의 신뢰감을 높인다. 환자가 지지받고 인정받는 느낌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깨달아가고 교정된 정서 체험을 통해 현실에서 반복되는 행동 문제를 시정해 나감으로써 왜곡된 성격구조와 대인 관계를 수정해나가는 수평적 관계이다.
정신치료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환자와 치료자 사이에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신뢰를 쌓지 못하면 깊은 속내를 내놓기가 어렵다. 환자가 생각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가감하거나 은폐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신치료의 제1원칙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기억들은 자라면서 잊혀지지만 공중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성장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어느 순간 꿈 등을 통하여 의식세계로 떠오르기도 한다. 무의식의 내용은 정신병이나 신경증을 정신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이나 연상의 증폭(amplification)을 통하여 의식세계로 떠오르는데, 드러난 내용의 심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증상을 호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신치료는 환자가 부모나 환경, 타인 등 바깥으로 향하던 관심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힘을 배양시킴으로써 환자의 능력을 방해했던 장애들을 제거하고 환자가 왜곡된 자기로부터 진정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몇 마디 훌륭한 말을 나누어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하여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성장과정에서 입은 정서적 상처와 왜곡된 행동반응들을 수정하고 환자 스스로 깨달아가야 하므로 개인마다 다르지만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선 새롭게 인격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고 새롭게 재교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치료자는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데 너무 가까워서도 안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관으로부터 중립적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 말은 환자를 차별하거나 환자에게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목석 같이 냉정하게 대하라는 뜻은 아니다. 중립적이라는 말에는 절제와 익명성(anonimosity)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진정으로 환자를 이해하고 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요하고 환자의 욕구를 절제할 수 있는 훈련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초심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환자를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이끌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부모가 자기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아이로 키우려는 것과 같아서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막게 된다. 분석적 정신치료에서 치료자는 자신을 잘 성찰할 수 있어야 하고 안내자의 역할에 머물러야 하며 환자의 능력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환자가 욕구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하듯이 치료자 또한 욕구를 잘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충족되지 않은 전이 욕구를 통해 환자는 자신의 내면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욕구가 충족되면 고통과 불안이 사라지는 대신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치료자는 환자를 쉽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유혹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 호전 외에는 효율적인 인격 성숙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치료자는 가능한 익명성을 유지한다. 익명성이란 환자가 궁금해하는 치료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치료자를 잘 몰라야 대상을 투사하기 쉬워져서 전이(transference)가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맺은 대상관계(주로 부모)를 내재화하였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 관계 방식을 되풀이한다. 따라서 현재 삶에서 대인관계의 문제나 갈등은 어린 시절의 관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정신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자에게 느끼는 전이감정이 바로 이 어린 시절 내재화된 대상관계가 현재 치료 상황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현재 삶 속에서 겪고 있는 문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치료는 무르익게 된다.
2. 정신치료의 이론 기반
정신치료를 불교 유식사상 및 선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론기반으로서의 심층 심리학의 양대 산맥인 Freud의 정신분석학과 Jung의 분석심리학을 간략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은 무의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심리학과 구분된다.
1)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 Brenner, C., ꡔAn elementary textbook of psychoanalysisꡕ, New York, International university press, 1955, p. 25-67
무의식을 현대적 개념으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은 프로이드이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계속 활동한다. 꿈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고, 최면을 걸었을 경우 최면자의 지시를 기억은 못하면서도 최면에서 깨어나면 지시대로 행동하는 것도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몽유증 환자가 자다가 일어나 버젓이 행동하는데도 본인은 전혀 기억을 못한다. 그밖에 약물이나 환각제 복용으로 나타나는 환각이나 정신병의 망상 내용들이 사람마다 독특한데, 이것도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프로이드는 마음의 구조를 의식,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의 3층으로 파악한다. 의식은 우리가 늘 접하는 잘 알고 있는 부분이고, 전의식은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조금 집중하면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이고, 무의식은 우리가 알지 못하며 의식에 의해 파악될 수 없으나, 일생을 통하여 우리의 행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무의식을 직접 알 수는 없으나 신화, 전설, 민담, 환상, 동화와 정신병 환자의 망상이나 환상과 꿈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정신병 환자와 마찬가지로 화가, 작가, 음악가, 과학 발명가들 역시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창조적인 일로 변형시킨다. 이 가운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모든 신경증 환자의 공통된 심리적 핵심 갈등으로 프로이드는 본다. 기나긴 분석의 목표는 증상의 해소와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이며 성숙한 인격으로의 전환이다.
2) 분석심리학 (Analytical psychology)
융은 무의식의 내용을 프로이드보다 좀더 세밀하게 분석하여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 자아(ego)의 개념을 좀더 확장시켜 자기(self)의 개념을 도입하고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집단적 무의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역사를 통해 여러 형태로 반복되어 여러 민족들의 신화 속에 표현된다고 하였다. 융은 무의식 속에 어떤 기본적 원형(archetype)들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것들에 의해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우리 마음의 통일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는데 그 全一的 原型을 융은 자기라고 불렀다. 자기 원형은 예언자, 구원자, 진리, 산신령, 원, 만달라상 등 인격적 또는 비인격적 상으로 나타난다. 자기 원형은 분리된 몸을 마음과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정신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외부 사회와 관계하는 얼굴인 페르조나(persona)에 너무 집중되어 자기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분열된 마음을 극복하도록 자기 원형이 출현한다. 신경증이나 정신병은 본래 전일적인 자기와의 분열된 결과이면서 동시에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목적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부영, ꡔ分析心理學ꡕ, 서울, 일조각, 1978, p.51-55, p.83-97
분석심리학에서는 객관적 사물이나 주관적 정신현상을 모두 정신적 현실(psychic reality)로 보며, 또한 정신적 현실-정신현상을 상징으로 본다. 즉, 분석심리학에서 보는 정신현상은 상징으로서의 정신현상이다. 상징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체험할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Jung 분석심리학에서 이해의 주체는 개념상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기로 나눌 수 있다. 의식의 특성이 분별성이라면 무의식의 특성은 초월성에 있다. 자기는 무의식의 중심에 위치한 근원적 원형이다. 이죽내, 「원효가 본 지관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고찰」, ꡔ心性硏究ꡕ 제8권 제1,2호, 韓國分析心理學會,1993, p.46-48
Ⅲ. 불교의 선수행
현재 불교는 북방 대승불교, 남방 테라바다불교와 티벳 라마교로 크게 나눠볼 수 있고, 불교의 선은 크게 남방선(위빠사나선; 여래선)과 북방선(간화선; 조사선)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한․중․일 삼국에 전파된 불교는 주로 중국의 불교 학자 및 승려들이 중국화시킨 불교로 한역경전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고, 참선법도 六祖 慧能 이후 馬祖 道一에 의해 꽃을 피운 간화선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선수행을 논하고자 할 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이 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인 것이다. 이유는 한국 불교가 굳이 정통선을 조사선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몰록깨침(頓悟)을 강조하고 털끝만한 분별이나 알음알이를 허용치 않으며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으로 특징되는 조사선은 소의경전인 능가경이나 금강경을 보아도 수행의 구체적인 차제의 설명이 없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조사선의 학문적 접근은 봉쇄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불교는 붇다의 수행과 그에 따른 깨달음의 내용을 대중에게 설파한 내용으로 요약된다. 부처님의 마음인 禪과 부처님의 말씀인 敎는 불교의 양대 수레바퀴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마음의 내용을 언어화시킨 것이 교이므로 선과 교는 둘이 아니다. 선과 교로 나누고 거기에 교를 낮추고 선을 높이는 흐름은 선수행에서 가장 경계하는 분별심 僧璨/이청담역, ꡔ신심명ꡕ, 서울, 보성문화사, 1979, p.11, “至道無難 唯嫌揀擇”
의 결과로 불교의 본지와 크게 어긋난다. 선을 교보다 중시하는 것은 중국인의 문화적 우월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오늘날 선불교는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중국화시키는 과정에서 도가적인 독특한 간화선을 탄생시키면서 선교를 양분시킨 것으로 선교가 미분화된 본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로운 불교가 되었다. 중국의 조사선을 여래선 위에 놓고 심지어는 부처님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처럼 폄하까지 한 것도 모두 차별적인 문화적 에고이즘의 소산이다.
禪은 산스크리트어로 Dhyana, 빠알리어로 Jhana를 음역한 것(의역한 것은 定; 서구에서는 보통 meditation으로 번역)으로 아함경에 나타난 사선과 사념처 수행을 일컫는다. 붇다가 인생의 고통을 체험 또는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출가하여 여러 명상(사마타) 스승으로부터 수련하였으나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보리수아래에서 위빠사나 명상에 돌입하여 구경각을 얻으니 그 내용은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이다. 즉 위빠사나를 통하여 드러난 지견이 불교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바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제자들도 많았다. 불교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구사론俱舍論과 유식불교에서 보듯이 불교의 핵심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로 압축되며 이를 다스리는 수행법이 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붇다의 가르침은 당시 빠알리어로 설해졌고 남방불교는 현재까지 빠알리어 경전이 상속되어 붇다 생존당시의 원음을 비교적 왜곡시키지 않은 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인 유식불교와 함께 빠알리어 경전 가운데 ꡔ쌍윳따 니까야ꡕ(Samyutta-Nikaya; 한역 잡아함경)와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참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행하게도 육조 혜능의 법제자인 영가 현각도 ꡔ禪宗永嘉集ꡕ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설명 永嘉玄覺, ꡔ선종영가집ꡕ, 서울, 대각회출판부, 1977, p. 46-48, p.111-184
하고 있으나 자세한 수행법은 언급이 없으므로 최근의 남방선(위빠사나 참선)을 선택한다.
1. 유식불교
불교심리학인 유식불교의 개요를 김동화의ꡔ唯識佛敎ꡕ 김동화 : ꡔ唯識哲學ꡕ, 서울, 보련각, 1973
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유식불교는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아함경등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이 五位七十五法의 俱舍論으로 발전하고 A.D. 4-5세기 경 무착, 세친, 호법에 의해 五位百法으로 체계화된 불교이다. 마음의 주체(心王法)로 識을 이야기하고 초기불교의 6식(안․이․비․설․신․의식)에 제7식인 ‘말라식’과 제8식인 ‘아뢰야식’을 추가한다. 제 6의식이 늘 생각하고 분별하면서도 의식할 때를 제외하고는 끊어지는 반면, 말라식과 아뢰야식은 시작과 끝이 없이 항상 지속된다고 한다.
말라식manas-vijnana은 ‘나’라는 생각의 4가지 번뇌(我痴, 我見, 我慢, 我愛)를 가지고 있는 자아의식으로 고정된 실체로서 ‘나’를 집착하여 자아의식․자기중심성을 특징으로 한다. manas란 ‘이것 저것 생각한다’는 뜻으로 항상 자세히 생각하고 분별한다 하여 제7식을 思量識이라고도 한다. 제7식은 제8식에 의지한다. 말라식은 아뢰야식과 함께 항상 시작과 끝이 없이 작용한다 하여 相續識이라고도 한다. 수행을 통해 멸진정(滅盡定; 아라한과)에 도달해야 비로소 사라진다고 하였다.
아뢰야식alaya-vijnana은 만법이 이로부터 출현하는 근본식이다. 모든 법의 씨앗이 된다하여 種子識이라고도 부르고, 모든 경험이 사라지지 않고 간직된다 하여 藏識이라고도 한다. 종자에는 선험적인 본유종자와 후천적인 신훈종자, 모든 번뇌망상의 원인으로 有漏종자와 진여자성의 원인이 되는 無漏종자로 나누기도 한다. 이들 종자가 여러 인연과 작용하여 모든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유식불교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망집을 깨는 중도의 이치를 설명하는 三性論이다. 변계소집성遍界所集性은 무명에 의해 나와 세계가 따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의타기성依他起性은 현상계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이치이며,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만법의 본질로서 진여자성은 모든 법에 두루 원만하고(圓), 모두 갖추어져 있고(成), 진실되어 거짓이 없다(實)는 것이다.
유식불교를 간단히 요약하면 제8식속에 진여자성의 무루종자를 갖추고 있으면서 시작도 없는 처음부터 제7식의 작용에 의해 무명에 덮여(세계가 마음밖에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모르고) 유루종자가 발현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을 당한다. 수행을 관찰하여 나와 남을 분별하고 나와 세계를 구별하는 변계소집성은 망상이고 그 현상은 의타기성에 의한 것이며 그 본질은 원성실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위빠사나 참선
선수행의 종류에는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a로 대별된다. 사마타는 마음을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으로 집중하는 전 시간 동안 그 대상을 견지한다. 위빠사나는 주관 의식과 객관 대상을 순간 순간 꿰뚫어 보는 수행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대상으로 삼는다. 사마타는 지止또는 정定, 위빠사나는 관觀 또는 혜慧로 번역된다. 불교의 선정은 이 둘을 함께 수행하는 것(정혜쌍수)을 의미하며 그 9단계를 구차제정이라 한다. 이중표, ꡔ불교의 이해와 실천 2ꡕ, 대원정사, 1996, p.152-153
조준호는 止觀을 논하면서 팔정도의 正定은 四禪으로, 正念은 四念處觀으로서 사선은 사념처 수행으로 가는 준비단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감각적 행위와 신구의 삼업의 행위가 그친 상태를 初禪이라 하였고 第四禪에서 완성된 삼매가 정정이고, 念(sati)의 발현과 완성이 사선의 목적이라 하였다. 일상적인 사유작용과 주관적인 감정이 그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수동적 주의집중상태로 정념을 정의하고 있다.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 ꡔ韓國禪學ꡕ 제1호, 한국선학회, 200.12, p. 322-326
ꡔ대념처경(Maha-Sattipatthana Sutta)ꡕ에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붇다께서 강조하신 위빠사나 참선을 ꡔ위빠사나Ⅱꡕ 김열권, ꡔ위빠사나Ⅱꡕ, 서울 불광출판부, 1993
)와 ꡔ위빠사나를 위한 아홉요인ꡕ 우 쿤다라 비왐사/ 혜조 역, ꡔ위빠사나를 위한 아홉 요인ꡕ, 자유아카데미, 1997
에서 간단히 요약해본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한다. 처음에는 호흡에 주의를 모은다. 호흡에 따라 배의 기복을 느끼면서 배가 부를 때 ‘일어남’하고 알아 차리고 배가 꺼질 때 ‘사라짐’하고 알아 차린다. 명상이 진행되면서 일어남과 그것을 알아차림, 사라짐과 그것을 알아차림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으로서 물질적인 과정과 알아차리는 정신적 과정만 관찰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하고 알아차리고 도중에 소리가 들리면 ‘들음’하고 알아챈다. 좀 더 나아가면 몸의 움직임에 선행하는 의도를 ‘하려고 함’이라고 분명히 알아챈다. ‘하려고 함’을 알아차리다 보면 모든 움직임마다 의도하는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몸의 행위가 알아차리는 마음보다 빨라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지만 집중력이 커지면서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채고 움직임 전에 마음이 선행함을 알아채게 된다. 도중에 몸의 가려움, 아픔, 뜨거움 등을 느끼자마자 관찰하고 관찰하면 그냥 사라지는 체험이 반복되면서 화날 경우 바로 알아 차리고 화가 바로 사라지고 욕구도 쾌감도 그렇게 일어나서 사라짐을 관찰하며 찰라지간의 일어남-사라짐 사이에 영속성이 없음(無常)과 실체적 자아가 없음(無我)을 분명하게 깨달아 가고, 영혼이나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덧없고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울 수 밖에 없음(苦)을 깨닫게 된다. 불교의 三法印(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은 이론으로 이해되어지는 교리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体得智이다. 수련이 진보되면 일어나는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만 관찰하게 된다. 초기단계에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이름이나 대상의 특징이다. 지혜가 커지면 대상의 사라짐이 알아차려진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삼단계(대상을 알아차림-대상이 사라짐-사라짐을 알아채는 의식도 사라짐)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 삼단계가 모두 빠르게 연속해서 일어남을 안다.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모든 일상 생활에서 알아차림이 계속되면 잠드는 순간과 깨어나는 순간도 알아채게 되고 나아가서 잠 가운데에서도 계속 알아차림이 끊이지 않는 수준까지 간다. 이런 가운데 빛이 나타나기도 하고 환희가 일어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점점 경쾌해지고 편안해지며 행복해진다. 이렇게 수행을 계속 하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불안과 근심, 분노와 성욕 등 감관적인 욕구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며 수련이 보다 진전되면 대상과 둘이 아닌 상태를 체험하고 지극히 자애로워지고 지혜로워져, 모든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의 마음(慈), 모든 존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연민(悲),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온함(捨)이 저절로 생긴다.
이와같은 위빠사나는 단순히 관찰 지혜만 일컫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 정념과 정정, 그리고 정혜를 포괄하고 있고 사마타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골드스타인은 “위빠사나는 통찰력과 집중력을 동시에 계발하는 수행” 골드스타인/현음, 이금주 공역, ꡔ통찰의 체험ꡕ, 한길, 1998, p.41
이라고 주장한다.
Ⅳ. 정신치료와 불교
정신치료 이론으로서 정신분석학 및 분석심리학과, 유식불교를 간단히 살펴보았으며, 또한 정신치료나 불교 모두 인간의 심적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적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 참선을 알아 본 것을 토대로 정신치료와 불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1. 마음과 자아의 개념
불교의 마음은 인간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마음이고 세계가 곧 마음이다. 물적원리를 포함하여 마음밖에 따로 세계가 없고(心外無法), 주관과 객관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을 망념으로 보고 둘이 아니라는 不二의 입장이다. 분석심리학의 자기는 이러한 이원적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인상을 주지만 서구의 정신치료의 마음은 어디까지나 고대 서양철학이래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구조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이다.
정신치료에서 중시하는 자아의 개념은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유아는 성장하면서 쾌락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쾌락은 집착하고 추구하며 고통은 회피하고 두려워한다. 성장하면서 안정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정한 수준의 ‘나’를 유지해야 되나 ‘나’는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실과 좌절에 의해 집착을 포기하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안주하게 된다. 이러한 수많은 「집착-상실-새로운 집착」의 과정을 반복하여 일정한 고정된 자아정체성(ego identity)이 확립된다. 이분법적인 데까르트적 자아 개념이 확고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에릭슨(Erik Erickson)은 자아정체성을 두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 동질성인데, 개인 내부에 흔들리지 않는 알맹이(core self)가 존재하는 것, 둘째, 연속성으로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이어주는 동시에 나와 사회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통합적 자아 개념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정된 자아의 개념이 실체가 없다고 본다. 대상을 파악하는 힘으로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관찰자처럼 하나의 의식이 자리잡고 있고, 몸과 마음 속에 뭔가 영구적인 어떤 실체(자아)가 있다는 믿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 믿음(집착)이 고통과 부자유를 낳고 무지(무명)와 욕망으로 인하여 윤회 생멸하게 되며 영원한 자아라는 믿음은 환상일 뿐이라고 파악한다. 의식 자체는 순간 순간 소멸하여 모든 현상을 지켜보고 있는 유일한 마음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ꡔ쌍윳따 니까야ꡕ에서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수행승 케마까와 존자 수행승들과의 대화를 살펴 보면 위빠사나의 관찰을 통하여 무아를 체득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전재성역주, ꡔ쌍윳따 니까야ꡕ 제4권,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p.303- 312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오온)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물질의 다발, 감수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의 다발, 의식의 다발에 관해 설명하셨는데, 저는 이들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번뇌를 부순 아라한이 아닙니다. 벗들이여, 저는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을 나라고 여기지 않을 뿐 실제로는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 가운데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들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면,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들에 섬세하게 발견되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나라는 자만’, ‘나라는 욕망’, ‘나라는 잠재의식’은 두루 소멸된다.”
2. 치료와 수행의 지도
정신치료와 위빠사나 명상은 양자 모두 치료자와 환자, 스승과 수행자 사이에 긴밀한 대화와 지도 점검이 필요하다. 정신치료는 치료자-환자의 일대일 구조 속에서 중요한 변화(통찰)가 일어난다. 마침내 모든 심리적 갈등을 외부에 투사하지 않고 항상 내관introspection하는 자기분석autoanalysis을 할 수 있다면 치료자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불교의 참선은 간화선이건 위빠사나 참선이건 스승의 지도가 필수적이다. 특히 위빠사나는 매일 또는 정기적 면담으로 명상 수행의 경과를 스승에게 보고하고 점검 받는다. 이 면담은 수행의 진전에 매우 중요하여 수행도중에 겪는 여러 신비한 체험이나 위험한 과정이나 수행의 장벽 등을 다루는데 필수적이다. 붇다께서도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조한다. 위의 경전 제2권, p.369-377, “수행승들이여, 늙고 죽음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늙고 죽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위하여 스승을 찾아 다녀야 한다. 늙고 죽음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늙고 죽음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위해 스승을 찾아 다녀야 한다 늙고 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늙고 죽음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위하여 스승을 찾아 다녀야 한다.”
정신치료도 단순히 정신분석 이론이나 심리학 교과서를 암기하여 정신치료를 시행할 수 없고 치료되지도 않는다. 정신치료의 과정을 맛보고 지도 감독을 통해 실제 치료장면에서 부딪치는 여러 변화와 갈등(전이와 저항)을 겪어야 되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되며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반복하여 확실히 체득되어 마침내 자기분석(치료)이 가능해야 된다. 불교도 붇다의 가르침(경전)이나 스승의 지도에 의해 실천 수행하고 수행과정의 경험을 스승으로부터 점검 받으면서 반복하여 명료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지루하리 만큼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도 양자가 흡사하다. 정신치료(분석)기간도 목표에 따라 수개월에서 수년 이상 장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불교는 철저한 자기 수행과 정진에 보다 비중을 두며 마침내 붇다(아라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 정신치료와 다르다.
3. 정신치료와 위빠사나 수행
정신치료와 위빠사나 수행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집중과 관찰이다. 정신치료는 환자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경청하고 따뜻한 관심으로 지켜보며 환자를 비난하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환자의 고통에 휩쓸리지 않는다. 치료자의 선입견이나 신념을 투사하지 않고 환자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환자도 치료자처럼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여 고통에 함몰되지 않는 힘을 키우게 된다. 이 과정은 위빠사나 참선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할 뿐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신경증 환자에 있어서 자신이 병적 세계에 고착되어 고통을 받으면서도 고착된 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은 실체가 없는 나를 집착하여 무수한 번뇌에 시달린다. 유아는 성장하면서 순간순간 항상 일정한 수준의 나를 유지하려 애를 쓰는데, 어떤 한 수준의 상태를 강하게 집착하여 객관성을 상실하면 신경증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정신치료가 이 같은 어떤 한 수준의 고착된 상태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여 명료하게 깨달으면 갈등을 해소할 수 있고 유아적 반복 양식인 투사(projection)와 부정(denial)을 수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위빠사나 참선 수행으로 매순간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하는 동안 로바(lobha;탐냄)도 일어나지 않고 도사(dosa;성냄)도 일어나지 않으며 모하(moha;무지)도 일어나지 않아 욕정과 분노와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앞의 책(통찰의 체험) p. 238
과 같다.
또한 정신치료에서 중요한 치료기법가운데 연상(association)이 있다.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시키는 기법으로 적절한 질문을 통하여 연상을 촉진시키는데 정신치료의 핵심 기법에 해당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유연상을, 분석심리학에서는 연상의 확충을 강조하는데, 흥미롭게도 부처님의 육성이 베어 있는 ꡔ쌍윳따 니까야ꡕ의 부처님 전생 수행과정 부분 위의 경전 제2권, p.35-80, “수행승들이여, 옛날 내가 아직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주의 깊게 이와 같이 생각했다.....(중략) 그 때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중략) 그 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중략)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과 함께 나에게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가르침에 대한 눈이 생겨나고 앎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밝음이 생겨 나고 빛이 생겨났다.”
에서 연상과 숙고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위빠사나 수행에서 숙고와 연상과 올바른 사유에 의해 지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정신치료의 연상에 따른 통찰 과정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정신질환 가운데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자신이 병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점점 자신의 병을 어렴풋하게 짐작하다가 점점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는데 이렇게 병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병식(insight;병에 대한 통찰)이 생겼다고 한다. 병식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론적이고 지적 수준의 병식(intellectual insight)과 정서적이고 체험적 수준의 병식 (emotional insight)으로 구별한다. 지적 병식은 병을 머리로만 이해한 수준이고, 정서적 병식은 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다. 지적 병식만 얻은 환자는 조만간 자신의 병을 부정하고 치료를 중단할 위험이 많으나 정서적 병식을 얻은 환자는 자신이 그동안 “꿈속에 있었던 것같다. 긴 꿈을 꾼 느낌이다.”고 술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참선의 解悟와 證悟에 비견할 수 있다.
4. 무의식 이론과 유식론
정신분석학에서는 가능한 한 인간을 무의식적인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본능이 있는 곳에 자아가 있다’는 말이 대변하듯이 무의식의 의식화에 목표를 둔다. 분석심리학에서도 무의식의 영역을 의식화하여 자기실현을 목표로 한다. 양자 모두 자아의 주도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지향하는데 반해, 불교는 주객의 이분법적 분별은 변계소집의 착각이며 자아 또는 자기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 집착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1) 정신분석학과 유식불교
먼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드가 발견한 무의식의 개념과 「아뢰야식」의 개념은 매우 공통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초자아(superego)의 작용으로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본능(id)의 내용들은 자아(ego)를 통하여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억압(suppression, repression)되어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쫓겨나고 무의식에 억압된 내용들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제약하여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경증을 야기 시킨다고 하였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 감정, 생각들이 인간의 의식 여부와 무관하게 「제8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연綠을 만나 변형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아뢰야식」의 개념은 정신분석학의 억압된 내용들의 집합소로서 그리고 그 내용들이 지속하여 의식에 영향을 행사하는 무의식의 개념과 방불하다고 하겠다. 다만 유식의 「제8식」은 좀 더 포괄적이어서 종자의 내용이 선한 것과 악한 것, 선악을 초월한 것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자가 보존되는 것이고 보존된 종자들은 인연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행위, 감정, 생각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내용 중 이드(id; 본능, 충동, 욕동)의 양대 요소로서 성적 욕동(libidinal drive)과 공격적 욕동(aggressive drive)을 프로이드는 통찰하였는데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의 내용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고 보완되기도 하였지만 프로이드가 두 가지 본능을 주장한 것은 그것만이 무의식의 내용 전부라고 했다기보다는 신경증의 원인을 추구하는 병인론적 입장에 의해 인간의 두 본능을 특히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식불교도 오위백법에서 6가지 근본번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貪이고 두 번째는 嗔이다. 탐번뇌는 욕망 특히 애욕을 일컫고 진번뇌는 분노를 일컫는 것으로 정신분석학의 양대 본능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양자가 차이 있는 점은 억압(repression)과 보존의 개념 차이이다.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서는 억압되는 근거가 자아(ego)로서 무의식 밖에 있는 반면, 唯識에서는 아뢰야식이 종자의 보존의 주체(能藏)이면서 동시에 보존되는 곳(所藏)이라는 이론으로 따로이 억압시킬 주체로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아의 이론은 불교의 독특한 논법으로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근거로 하여 거짓 주체로 我를 분별할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자아(ego)는 단순한 의식의 주체일 뿐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 성숙하고 강화되는 자아(ego)는 「의식-무의식)의 전체적인 주체이며 이는 본능(id)이 있는 곳에 자아(ego)가 있을 것이다’는 프로이드의 말이 웅변해 주고 있다. 허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2) 분석심리학과 유식불교
분석심리학의 무의식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내용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창조적이고 건강한 내용이 추가되고 있고 개인적인 무의식에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 새로이 설정되고 있다. 또 의식의 주체로서 자아의 무의식적인 측면의 그림자(shadow)와 무의식의 중심에 위치하는 자기(self)의 개념 등이 Jung에 의해서 새롭게 주장되고 있는데, 이러한 분석심리학의 이론은 유식불교와 보다 깊게 공명한다. 우선 자아(ego)의 외적인격으로서 페르조나와 자아의 무의식적 측면으로서 그림자(shadow)의 개념은 「말나식」의 아집작용으로 인하여 ‘나’를 고집하는 변계소집성으로서의 假我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단적 무의식’은 선험적이고 인류에 보편적인 원형(archetype)들의 집합으로, 신화를 산출하고 종교의 원천이 되는 그릇으로 부각되는데 이것은 「아뢰야식」의 후천적인 신훈종자만이 아니라 선천적인 본유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과 부합되는 것 같다. 원형중의 원형으로서 자기(self)의 개념은 진여자성과 비길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목표는 증상의 해소보다는 자기실현self actuali- zation 또는 개성화individuation에 있다. 모든 페르조나와 그림자의 껍질을 벗겨내고 실현되는,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이면서 동시에 중심으로서의 자기(self)는 말나식의 아집작용으로 인해 그릇되게 믿고 있는 ‘나’라는 집착을 여의고 드러나는 본래 청정한 진여자성으로서의 아뢰야식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아뢰야식은 주관이면서 대상(세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Jung은 ‘자아(ego)가 없으면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도 불가능하다’하여 무의식의 의식화에 있어서 자아(ego)의 중심 역할을 강조했고 꿈과 상징의 해석을 통한 무의식의 의식화로써 의식이 무의식을 점진적으로 동화(同化)하여 의식의 영역을 확대한다고 하였으며 무의식을 완전히 의식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가 남는다는 무의식의 무변성(無邊性)을 주장하였다. 이 점은 불교와 분석심리학이 다른 입장에 있는 부분인데 불교는 수행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구경각)에 이르면 모든 어두움(무명)이 사라진다고 하여 覺의 완전성을 주장한다. Jung이 동양명상에서 삼매를 자아가 완전 소멸되는 망아경(ecstasy)이라 규정하고 의식이 무의식화된 상태로 보아 위험시하면서 서양인이 동양의 명상을 함부로 흉내내지 말 것을 경고 Jung, C. G, ꡔConscious, Unconscious, and Indiviuationꡕ, The Collected works of C. G. Jung vol.9, part 1, p.287-289
까지 한 점 등은 명상 수행을 깊이 있게 해보지 못한 증거이며 명상을 이론적으로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Ⅴ. 맺는 말
인간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나 정서적 상처 등에 의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여 인지하고 있다. 선수행이나 정신치료는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어 성찰(廻光返照)함으로써 왜곡시킨 인지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돌려 놓고 무의식적으로 구속받는 마음을 자유롭고 평안하게 만든다. 정신치료가 위빠사나 명상 수련과 목표가 다를 뿐 원리가 흡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불교의 명상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과 심리 상태를 집중하여 성찰하도록 하는 것은 마침내 의식의 차원을 넘어 미세의식으로 들어가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는 삼매의 상태로 이르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꿈을 꿔도 꿈에 함몰되지 않고 꿈과 분리되어 조용히 관찰만 하는 상태가 되고 꿈의 내용에 동요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용히 관찰하며 내면적인 평온함을 유지한다. 관찰만 점점 넓어져 꿈의 감각적인 느낌들이 사라지고 광대무변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 광대무변함은 의식의 빛과 같다 하였다. 명상 수행을 통하여 자아의식이 확장되면 자아를 초월하여 세계 및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정신치료의 무의식의 의식화 수준과는 차이가 크다 하겠다. 정신치료에서는 자아의 상실 또는 무의식의 범람 등을 위험시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의식화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정신치료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대화에 의해 자신의 심리적 특질을 터득하며 자아의 한계를 초월하기 어렵다. 반면 불교의 선수행 과정은 붇다와의 대화나 가르침을 통해 깨달아 가는 아홉 단계의 선정에서 보듯이 초선에서는 사유와 숙고를 통해 희열과 행복을 느끼지만 두 번째 선정단계 이후는 언어와 생각이 사라지고(言語道斷 心行處滅) 마침내 아홉 번째 단계인 멸진정에 도달한다. 위의 경전, 제3권, p.194-202,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마음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든다...... (중략) 나는 번뇌가 부서져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현실에서 스스로 알고 깨닫고 거기에 도달한다.”
그러나 수행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아의 확장 과정에서 무의식의 영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이나 정신분열에 이르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정신치료와 불교를 이론의 유사함만으로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양자의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다분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불교는 수행과정에서 정신치료의 도움이 필요하며 정신치료 또한 불교 특히 선정 수련의 도움을 받아 고요함과 집중력을 보완한 명상-정신치료의 등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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