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6 제6주제 발표; 선학과 논증

淸潭 2008. 2. 22. 18:14
 

德崇禪學 4-6 제6주제 발표; 선학과 논증

 

박영록 (충주대학교)


I.  머리말

화두 해설은 ‘禪’에서 異端에 속하지만 화두 해설은 일종의 풍조가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화두를 해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黑白의 논쟁이 아니라 그 발생 원인, 기존 화두 해설들의 방법론, 화두 해설의 일정한 필요성 및 그 문제점 등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학술논문은 ‘주장과 논증’이 기본 구조인 것으로 전제할 때, 이 글은 기존의 화두 해설들이 ‘해설’이라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는 지를 살펴본 것이다. 논의전개를 위해 ‘논증’에 대한 개념 정리 및 선에서도 논증형식의 언급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먼저 보일 것이다. 그리고 화두 해설은 필연성 및 필요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해설서들에서 적절한 논증 과정에 고민이 없다는 것을 화두 해설의 한 문제점으로 지적할 것이다.


II.  어록 속의 논증

1.  용어와 분류

‘논증’이란 ‘~이다. …이기 때문이다’의 형식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추론은 ‘…이므로 ~이다’로 어떤 근거에 의해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말하며, 귀류법은 ‘A가 아니라면 B인데 B는 틀렸으므로 A가 옳다’로서 증명하고자 하는 주장의 부정이 성립되지 않음을 보여 증명하는 것이다. ‘傍證’은 직접 증명은 아니지만 간접적 관련 자료를 제시하여 증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증명’에 관하여 엄격히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며 ‘論述’이라는 어감도 슬쩍 담고 있으므로 ‘논증’ 속에 위의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한다.
선어 속에 어떤 논증이 있는지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며, 어떤 형식으로든 선어 속에도 논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장의 중요 목적이다. 따라서 이 장의 ‘분류’는 총체적이라기 보다는 ‘예’를 제시하는 정도로 할 것이다.

1) 비유논증

마치 겨울에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봄이 되면 얼음이 풀리어 물이 되는 것 같이, 중생이 미혹할 때엔 성품을 묶어 마음을 이루고, 중생이 깨달을 때엔 마음이 풀려 성품이 된다.        “(1), (2), (3)은 모두 이어지는 내용으로 하나의 각주에 표시함”
        ꡔ祖堂集ꡕ(3권 11~12張, 日本 : 中文出版社, 1972년 영인본) 61~62p. ① 譬如寒月結水爲氷, 及至暖時釋氷爲水, 衆生迷時結性成心, 衆生悟時釋心成性. ② 汝若定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三界唯心万法唯識, 故ꡔ華嚴經ꡕ曰: ‘三界所有法一切唯心造.’ …… ③ 汝豈不見 ꡔ弥陁經ꡕ云: ‘水鳥樹林皆是念佛念法念僧.’ 鳥是有情, 水及樹豈是有情乎? 又ꡔ華嚴經ꡕ云: ‘刹說,衆生說,三世一切說.’ 衆生是有情, 刹豈是有情乎?”


2) 존경에의 논증

그대가 만일 무정물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꼭 집착한다면 경전에서도 ‘삼계가 마음 뿐이요 만법이 식(識) 뿐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ꡔ화엄경ꡕ에 말씀하시기를 ‘삼계의 모든 법이 모두가 마음으로 지어진 것 뿐이라’ 하였느니라.

3) 상식에의 논증

ꡔ아미타경ꡕ에 말씀하기를 ‘물, 새, 나무, 숲이 모두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고 스님네를 생각한다’고 하였으니, 새는 유정이거니와 물과 나무는 어찌 유정이겠는가? 또 ꡔ화엄경ꡕ에 말씀하시기를 ‘국토(刹)의 말씀과 중생의 말씀이 삼세 일체의 말씀이라’고 했으니 중생은 유정이거니와 국토야 어찌 유정이겠는가?        ꡔ祖堂集ꡕ(3권 11~12張, 日本 : 中文出版社, 1972년 영인본) 61~62p. ① 譬如寒月結水爲氷, 及至暖時釋氷爲水, 衆生迷時結性成心, 衆生悟時釋心成性. ② 汝若定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三界唯心万法唯識, 故ꡔ華嚴經ꡕ曰: ‘三界所有法一切唯心造.’ …… ③ 汝豈不見ꡔ弥陁經ꡕ云: ‘水鳥樹林皆是念佛念法念僧.’ 鳥是有情, 水及樹豈是有情乎? 又ꡔ華嚴經ꡕ云: ‘刹說,衆生說,三世一切說.’ 衆生是有情, 刹豈是有情乎?”


4) 귀류법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다.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다.        성철스님, ꡔ돈황본 육조단경ꡕ, 합천 : 장경각, 1987. 122p. 道順(須)通流,何以卻滯, 心〔不〕住在卽通流, 住卽彼(被)縛. 若座不動是, 維摩詰不合呵舍利弗宴座林中. *〔不〕는 빠진 글자 보충, ( )는 틀린 글자 수정


2.  성격과 의의

1)  오류논증

이상의 논증 예는 형식논리학상의 오류논증들이다. 때문에 때로는 논리성에 동의할 수 없거나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비유논증의 경우 비유와 비유대상간에 최소한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강변’이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신회는 ‘왜 한 세대에 꼭 한 사람의 적통이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비유컨대 한 나라에는 단지 한 사람의 왕이 있을 뿐이며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음과 같다. 비유컨대 하나의 사방천하에 단지 한 전륜성왕이 있을 뿐이며 두 전륜성왕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음과 같다. 비유컨대 한 세계에서는 단지 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실 뿐이며 두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다는 것은 옳지 않음과 같다.        정성본, ꡔ중국선종의 성립사연구ꡕ, 서울: 민족사, 1993년 (3판) 522p 재인용 : 譬如一國唯有一王, 言有二者, 無有是處. 譬如一四天下 唯有一轉輪王, 言有二轉輪王者 無有是處. 譬如一世界 唯有一佛出世, 言有二佛出世者 無有是處.


이 비유의 전제는 佛法에 적자와 서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논하지 않을 것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논증이 훌륭한지 아닌지의 문제를 떠나 이후의 傳燈書에서 받아들여져 지금와서 고칠 수도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경전에 근거하는 논증의 예를 보자. 위 ‘혜충국사’의 인용문 바로 앞에서 그 대화를 이끌어 내는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남방에서 온 선객 하나가 물었다. “어떤 것이 옛부처의 마음입니까?” 국사께서 대답하셨다. “담․벽․기왓쪽 무정 물건 모두가 옛부처의 마음이니라.” “경전의 말씀과 매우 어긋나는군요. 그러므로 ꡔ열반경ꡕ에 말씀하시기를 ‘담․벽․기왓쪽 등 무정물을 여의었으므로 불성이다㉠’했는데 이제는 말씀하시기를 ‘온갖 무정물이 모두가 불심이라’하시니, 마음과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미혹한 사람에게는 다르거니와 깨달은 사람에게는 다르지 않느니라.” 선객이 또 말했다. “또 경과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항상함이요, 마음은 무상하니라.㉡’하셨는데 오늘은 다르지 않다 하시니, 이 이치가 어떻습니까?” “그대는 말에만 의지하고, 뜻에는 의지하지 않는구나.㉢”        ꡔ祖堂集ꡕ(3권 11장, 日本 : 中文出版社, 1972년 영인본) 61p. 有南方禪客問:“如何是古佛心.” 師曰:“廧壁瓦礫無情之物並是古佛心.” 禪客曰:“與經太相違. 故ꡔ涅槃經ꡕ曰: ‘離廧壁瓦礫無情之物故名佛性’, 今云一切無情皆是佛心, 未審心與性爲別不別.” 師曰: “迷人卽別, 悟人卽不別.” 禪客曰: “又与經相違, 故經曰: ‘善男子,心非佛性, 佛性是常,心是無常.’ 今曰不別, 未審此義如何?” 師曰: “汝依語而不依義, … ”


위 인용문에서도 ㉠, ㉡ 두 곳에서 경전을 인용하고 있다. 물론 남방선객의 관점에서는 이 역시 일종의 ‘경전 근거 논증’이라 생각했겠지만 ㉢에서 ‘字面을 떠나 속뜻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경전 근거 논증은 ‘經’이라는 이름을 가진 불교의 수많은 문헌이 동등한 권위로 대우 받을 수 있는지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귀류법’의 예에서도 내용을 떠나 형식논리로 따진다면 육조스님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흐름’과 ‘앉아 있는 것’은 내면과 외형의 문제이므로 서로 별개이기 때문이다.

2)  논증의 실용성

이상과 어록의 논증은 형식논리로 볼 때 ‘오류논증’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의의들은 있다.
① 조사스님들이 논증 형식을 빌어 주장을 펼친다는 점.
② 체험을 중시하는 선학의 특성상 이러한 논증도 인정될 수 있다는 점.
③ 현대 선학에서도 주장에 대한 논증은 필요하다는 점.
따라서 증명과정의 논리적 엄밀함 여부를 떠나 상대방을 이해시키거나 굴복시키는 실용적 목적은 달성하고 있으므로 ‘실용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3)  논증과 설명

위의 예들을 형식상 엄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증’이 아니라 ‘부연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

① 도는 수행(修)의 범위에 속하는 게 아니다. (주장) 만약 도를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도는 완성되고 나면 다시 파괴되게 마련이니 성문과 다를 게 없다. 수행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결국은 범부이다.(증명)        백련선서간행회, ꡔ마조록․백장록ꡕ(선림고경총서11), 합천 : 장경각, 불기 2533. (원문) 8p. 道不屬修, 若言修得修成還壞卽同聲聞, 若言不修卽同凡夫.


② “마조는 ……홍주 개원사를 중심으로 널리 교화하였기 때문에 일명 홍주종이라고도 불리운다.”

③ “왜 개에게만 불성이 없습니까?” “그대에게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宋) 普濟, ꡔ五燈會元ꡕ, 중국 북경 : 중화서국, 1997 (6쇄), 204p 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曰: “無.” 曰: “上至諸佛, 下至螻蟻, 皆有佛性, 狗子爲什麽却無?” 師曰: “爲伊有業識在.”
(유명한 예이므로 요약함)

위 예 ①에서 마조스님의 言明을 ‘주장-논증’으로 본다면 일정한 조건아래에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므로 마조스님이 조건부로 주장을 펼친다는 결과가 되는데, 이런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우므로 위 ‘증명’부분은 ‘증명’이 아니라 단순히 ‘부연설명’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나는 사실 이러한 관점이 禪旨에 더 부합된다고 본다. 다만 중요한 것은 형식상으로 보아 ‘논증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설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②가 ‘설명’의 예이다. ①과 ②의 차이는 증명을 필요로 하는 명제인지의 문제인 듯하다. ③은 ‘왜~’에 대한 대답이고 ‘~때문이다’로 답했기 때문에 논증 형식이긴 하지만 논리적 관계 파악이 어려운 단계에 들어서 있으므로 논증인지 설명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선어록의 ‘논증’을 ‘실용적 논증’으로 이해하기로 한 만큼 선어록 속에 논증적 형식의 언급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알아보는 작업인 것이다.


III.  화두 해설과 논증

1.  선학과 화두

선에서 화두의 중요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선학의 논의에서 화두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예를 보자.

① 김동화, ꡔ선종사상사ꡕ, 서울: 보련각, 1985.
② 정성본, ꡔ중국선종의 성립사연구ꡕ, 서울: 민족사, 1993년 (3판)
③ 印順, ꡔ中國禪宗史ꡕ, 中國 南昌 : 江西人民出版社, 1999.
④ 야나기다 세이잔, 추만호․안영길 역, ꡔ선의 사상과 역사ꡕ, 서울: 민족사, 1989.
⑤ 아베 쵸이치 외, 최현각 역, ꡔ인도의 선, 중국의 선ꡕ, 서울: 민족사, 1991 (재판).
⑥ 이향봉, ꡔ生活禪,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ꡕ, 서울 : 밀알, 1998.
이청, ꡔ이뭣고, 현대 한국 불교 선의 세계 탐험ꡕ, 서울 : 불교영상회보사, 1998.
⑦ 변상섭, ꡔ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ꡕ, 서울 : 시공사, 2000.

위 ①서적은 한마디로 원칙에 가장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록을 연구 대상으로 하여 선종사상사를 서술하면서 사상사를 분류하고 제목을 잡고 원문에 懸吐 하는 것 이상의 아무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돌려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편집한다면 서적들이 모두 비슷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문제이다.
②, ③의 서적에서 거의 모든 논의는 ‘설법’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그 속에서 화두는 빠져있다. 결국 선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화두’가 정작 선사상사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④, ⑤의 서적은 ‘사상’ 부분과 ‘사상사’ 부분이 나뉘어 있는데 ‘사상사’에서는 역시 ‘화두’가 거의 취재되지 않고 ‘사상’에서는 반대로 ‘화두’만 거의 다루고 있다. 이처럼 ‘설법’과 ‘감변(≒화두)’을 구분하여 다루는 것을 선학의 방법론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타당한 방법론이 아니라고 본다.
⑥의 두 서적은 화두를 적절히 인용하면서도 해설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한 예라고 본다. 문제가 있다면, 화두에 대한 정보 제시가 별반 없으므로 화두를 응용하여 다른 논의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⑦은 화두를 해설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강조를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논의 과정에서 “청소한다”는 명분으로 화두에 대해 다소간 해설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필자가 ‘화두를 해설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상과 같이 화두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잘못된 번역이 고착되는 문제, 화두가 인접 학문에서 활용될 수 없는 문제 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2.  화두 해설의 기원

1)  선어의 논리적 이해 가능성

a) 객관적으로 소통되는 대화
화두의 해설이 불가능하려면 그것의 ‘초논리성’이 대화 자체에서 계속 나타나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청은 “공안 그 자체에 진리가 숨어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비밀이 발견된다. 공안을 해부하여 그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는 노력은 헛된 짓이라는 얘기”        이청, 위의 책. 128p.
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의미가 없다’면 서로 대화가 소통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대화가 대화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3자들이 듣고서 그에 반응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의미가 없다’면 ‘전달’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예들로 볼 때 禪旨를 담은 대화는 그 대화 자체의 논리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선어를 ‘상징언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禪語를 상징어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몇가지 문제점이 있다. 이에 대해 “박영록, 「禪語錄 解釋의 몇가지 問題點」, ꡔ白蓮佛敎論集ꡕ 9輯, 합천 : 白蓮佛敎文化財團, 1999.”에서 논의한 바 있다.

서산대사는 「禪敎訣」에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禪是佛心 敎是佛語也)”이라고 하였다.        西山大師, 「禪敎訣」, (성철스님 찬, ꡔ돈황본 육조단경ꡕ, 합천 : 장경각, 불기 2539. 293p.)
물론 ‘禪敎’를 일치시키고자하는 의도이지만 스님의 말씀을 조금만 왜곡하기로 한다면 말씀은 마음의 표현이므로 말씀으로 미루어 마음을 파악하려는 것도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을까.

b) 일상언어로 이해될 듯한 선어들
실제로 어록을 읽다 보면 일상언어로도 대화가 진행되어 가는 양상이 이해되는 문답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설봉스님이 한 행각승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불일산입니다.” “올 때 해가 나왔던가?” “만약 해가 떴다면 설봉을 녹여 버렸겠죠.” 설봉스님은 그만 두어 버렸다가 다시 물었다. “사리는 이름이 무엇이오?” “현깁니다.” “하루에 베는 얼마나 짜내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습니다.” 설봉스님은 “큰방에 가서 참구를 하게나.”하고 처분했다. 그 행각승이 서너걸음 떼자 설봉스님이 “가사가 땅에 끌리쟎아.”라고 했다. 그 행각승이 고개를 돌리자 설봉스님이 곧 때리면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것 좋아하네.”        백련선서간행회, ꡔ雪峰錄ꡕ 합천 : 장경각 선림고경총서19 불기2537 (재판) 원문 134~135pp. 師問僧, “近離什麽處?” 僧云, “佛日.㉠” 師云, “來時日出也未?” 僧云, “日若出卽鎔卻雪峰.” 師便休去, 復㉡問僧云, “闍梨名什麽?” 僧云, “玄機.” 師云, “日織多少?” 僧云, “寸絲不掛.” 師云, “參堂去.” 僧行三五步, 師云, “袈裟落地也.㉢” 僧回首, 師便打云, “大好寸絲不掛.”
        *밑줄 친 ㉠㉡㉢에 대해 고경총서의 번역(번역문148~149pp)은 “㉠불일스님 회화에서 왔습니다.”와 “㉡또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 가사가 땅에 떨어졌다”이지만, ꡔ오등회원ꡕ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佛日’은 ‘大日(山)’의 오기인 듯하고, ‘復’은 ‘다른 스님’이 아니라 ‘그만두었다가 다시~’의 의미이며, ‘落地’는 ‘옷 전체가 땅에 떨어졌다’가 아니라 ‘옷자락이 땅에 끌리다’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의 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이해가 될 것 같은 예이다. 물론 전혀 요령부득인 일화들도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 선문답 속에는 이처럼 자초지종이 이해가 되는 예들도 많은 것이고, 이러한 예들에 대한 접촉이 누적되면서 일상언어로 선어를 해석할 수 있다는 관념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2)  선에서 언어관의 변화

이 부분은 于谷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하겠다. ‘不立文字’를 표방하지만 선에서 언어는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葛藤禪’, ‘老婆禪’이나 “曲指人心, 說性成佛”같은 비판의 말이 생겨날 만큼 언어문자를 중시하는 것이 일반 풍조로 되어갔던 것이다.        于谷, ꡔ禪宗語言和文獻ꡕ, 中國 江西 : 江西人民出版社, 1996년 2쇄, 9~15pp.
이처럼 문자로 설명하는 것이 점차 중요시되고, 또 관련 문헌이 증가하는 발전 과정에서 화두에 대한 해설도 대두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아래 (3)번 항목을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해설은 정도성의 문제

변상섭은 “ꡔ벽암록ꡕ은 해설해서는 안되는 책이다.”        변상섭, ꡔ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ꡕ, 서울 : 시공사, 2000. 13~14pp.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엄격하게 따지자면 ꡔ벽암록ꡕ을 해설해선 안되는 것인지, ꡔ벽암록ꡕ에 실린 화두를 해설해선 안되는 것인지는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사실 ꡔ벽암록ꡕ의 ‘평창’은 그 화두의 발화 문맥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 아무 예나 드는 의미에서, 제 1칙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들을 제시하면 이러하다.        백련선서간행회, ꡔ碧巖錄ꡕ(上) (선림고경총서 37), 합천 : 장경각, 1993.


㉠ ‘본칙’은 양무제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어떻게 이 질문이 가능했는가? → 첫째, 달마가 (우연이 아니라) 작심하고 중국으로 건너 왔음. 둘째, 양무제는 많은 공덕을 베풀었고 佛心天子로 불리우며 그 예를 제시함. 셋째, 누약법사, 부대사, 소명태자와 함께 진속이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본칙’의 질문인 교학의 성스러운 진리가 대두됨.
㉡ ‘본칙’ 대화 이후 달마의 행적과 ‘본칙’이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이것이 관건은 아님.

이상을 보면 ‘평창’이 ‘본칙’에 대해 요즘처럼 ‘해설’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화두는 해설해선 안된다’라는 것이 ‘원칙’이라면 그에 대한 어떠한 토도 달지 않는 것이 또한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어떠한 토도 달지 않는다’는 것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해설’의 정도성에 의해 배열할 수 있다.
① 최초 대화 ② 개인 어록
③ 어록집 : ꡔ조당집ꡕ, ꡔ전등록ꡕ, ꡔ선림보훈ꡕ
④ 원칙 속의 1차 풀이: ꡔ벽암록ꡕ, ꡔ무문관ꡕ, ꡔ선가귀감ꡕ, ꡔ본지풍광ꡕ,
⑤ 원칙 속의 2차 풀이 : 李喜益 해설, ꡔ無門關ꡕ, 서울 : 기린원, 1979.
⑥ 원칙 존중 2차 풀이 : 한형조, ꡔ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ꡕ, 서울: 여시아문, 1999.
⑦ 원칙 인정 자유 해설 : 현대의 해설서
논리학의 오류론에서 엄격히 따질 경우 특정하게 ‘강조’하거나 ‘인용’하는 것도 오류에 속한다. 즉 ③어록집 역시 ‘불립문자’의 정신과는 이미 약간씩 멀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⑤번 정도 까지는 ‘해설않음’에 포함시키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미 ⑦의 출현을 배태하고 있다는 점이다.

4)  해설 대상의 정도성 문제

변상섭은 “(ꡔ벽암록ꡕ은 해설해선 안되지만) 선어록은 당연히 해설을 해야 한다. ‘卽心卽佛’이라고 나왔다면 그 경지가 어떤 경지에서 나왔는가를 당연히 해설해주어야 한다.”        변상섭, ꡔ불교춘추ꡕ, 서울 : 불교춘추사 2000년 4․5월 (17호) 189p.
고 말하고 있다. ‘선어록’과 ꡔ벽암록ꡕ이 별개가 아님은 차치하고, ‘즉심즉불’이 해설의 대상이 되는지가 문제이다. 대개 변상섭처럼 ‘상당법문’은 해설할 수 있는 것, ‘감변’은 해설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平常心是道’에 대해서는 누구나 ‘해설’을 하고 있고 이에 대해 원칙론에서 이의제기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卽心卽佛’은 ꡔ무문관ꡕ 30칙에 실려 있고, ‘非心非佛’은 ꡔ무문관ꡕ 33칙에, ‘平常是道’는 ꡔ무문관ꡕ 19칙에 실려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화두인가 아닌가? 이것이 ꡔ조주록ꡕ에 있을 때는 ‘선어록’이므로 해설해도 되고 ꡔ무문관ꡕ에 있을 때는 ‘화두’이므로 해설해선 안되는 것일까? 결국 해설을 해오고 있는 ‘상당법문’으로부터 해설하면 안 되는 ‘화두’는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은 것이다. 나의 기본 관점은 ‘상당법문’과 ‘화두’는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즉, 둘 다 해설하지 말자는 것), 일단 현재의 논지에 맞추어 말하자면 상당법문을 해설하는 선에서 조금만 연장되면 언제든지 ‘화두’의 해설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5)  해설의 필요성 - 번역

화두 해설이 등장한 것은 당연히 필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화두는 학술적인 논의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해설이 없다면 학제간 교차 연구에서도 화두는 응용되기 어렵고, 불교의 정신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화두가 거론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번역’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하고자 한다.

(1)  비논리적 번역
화두의 해설이 문제시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화두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물론 화두에 있어 이러한 접근은 용납되기 어렵겠지만 한편으로 잘못된 번역과 이에 근거하여 선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위에서 제시한 ‘설봉스님과 현기비구니’의 예를 보면 원문의 ‘落地’를 대개는 ‘땅에 떨어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이 화두 해설의 관점과 만나게 되면, ‘옷이 땅에 떨어졌다 = 옷이 벗겨졌다 = 알몸’으로 발전하여, 이은윤의 경우 “진정으로 ‘무심의 알몸’이라면 옷이 벗겨져 나체가 되었다는 지적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이은윤, ꡔ밥그릇이나 씻어라ꡕ, 서울 : 자작나무, 1997. 153p
라고 하면서 한 페이지에 ‘알몸, 나체’라는 단어를 무려 14번이나 사용하는 예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입고 있는 옷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옷 입은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비상식적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는 번역이다. 이것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마 ‘선은 비논리적인 것’이라는 관념 때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한편 이런 예문을 비논리적으로 번역하여 비논리성이 확대재생산 되는 것일 수도 있다.

(2)  번역의 방법론
여기에서는 ꡔ마조록ꡕ에 보이는 “自從胡亂後, 三十年不少鹽醬”        백련선서간행위원회, ꡔ馬祖錄․百丈錄ꡕ(선림고경총서 11), 합천 : 장경각, 불기 2533. 번역문 20p. 원문 6p.
이란 구절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이것은 대개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이 없다’ 로 번역하는데 신규탁은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요약하면,

‘胡亂’은 ‘허둥버둥대다’ …… 이 대화는 마조스님이 깨친 기연(벽돌 이야기)을 바탕으로, ‘胡亂’이란 “좌선해서 부처가 되려는 ‘허둥버둥거리는 수행’,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수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30년은 수행에 필요한 기본 연수로 세간의 한 세대에 해당하는 말이니 ‘평생’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생활 필수품으로 땔나무, 쌀, 기름, 소금, 장, 식초, 차 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는데, ‘염장’은 바로 그 생활 필수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허둥버둥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행하다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 마음이 활짝 열리고 난 뒤로) 평생 먹을 것을 줄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신규탁, ꡔ선사들이 가려는 세상ꡕ, 합천 : 장경각, 1998. 194p


신규탁은 번역의 방법론에 대해 “철학적 내지는 사상적 논의에 앞서 문헌학적인 고증과 사상사적인 인식을 충분히 하자”        신규탁, 「중국선서의 번역을 위한 문헌학적 접근(2)」, ꡔ백련불교논집ꡕ(2집), 합천 : 백련불교문화재단. 1992. 114p.
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위 번역의 근거로 唐宋시대 속어어휘의 의미, 唐宋시대 사회 제도 및 풍속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 김태완은 “이러한 연구가 선어록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장점은 있지만, 선의 본질인 체험을 무시하고 선을 지식활동(知識活動)의 일종으로 규정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들의 학문은 선학이라기 보다는 선문헌 혹은 선승과 관련한 고증학(考證學)․사회학(社會學)․역사학(歷史學)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김태완, <선, 언어, 선학>, 한국선학회, 2001년 3월 발표문
        (우선 중국학자들의 번역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내가 찾은 두 곳의 자료에서는 모두 ‘胡亂’을 글자 그대로 ‘난리’로 번역하고 있는데, 진백야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라 적시하고 있고, ꡔ白話全譯․五燈會元ꡕ는 ‘오랑캐의 난리(胡人擾亂)’라고 번역하고 있다.        陳白夜, ꡔ禪宗公案的現代闡釋ꡕ, 中國 杭州 : 杭州出版社, 1998. 92p
        蔣宗福 外 今譯, ꡔ白話全譯․五燈會元ꡕ, 中國 重慶 : 西南師範大學出版社, 1997. 118p
물론 중국학자들이 ‘胡亂’을 잘못 읽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 곤란한 점들이 있다. 중국학자들이 당송대 ‘胡亂’에 대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대충대충’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袁賓 外 編著, ꡔ宋語言詞典ꡕ, 上海 : 上海敎育出版社, 1997, 126p 將就(그럭저럭 참고 쓰다), 隨便(좋을대로 하다, 마음대로, 좋을대로) ꡔ張協狀元ꡕ10척, “張丈, 你胡亂去供床下睡一宵.” 12척, “解元, 你去西廊, 胡亂吃些子飯了, 睡休.”
        徐時儀, ꡔ古白話詞彙硏究論稿ꡕ, 上海 : 上海敎育出版社, 2000. 430p
        胡, ‘隨意亂來(마음대로 함부로 굴다)’의 의미, ‘胡’와 ‘亂’ 동의로서 병렬 복합어. ꡔ朱子語類ꡕ(卷130) “如庸醫不識病, 只胡亂下那沒緊要底藥, 便不至於殺人.”(ꡔ주자어류ꡕ3097p)
현대 중국어에서도 ‘胡亂’은 ‘대충대충’의 의미이므로 중국인들이 이 문장을 볼 때 제일감은 신규탁이 말하듯이 ‘허둥버둥’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난리’라고 번역한 것은 아마 ‘품사’의 문제 때문일 듯하다. ‘自從’이라는 개사(전치사) 다음에 부사나 동사가 나와서 명사로 전성되어 쓰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나는 잠정적으로 여기에서 ‘胡亂’은 오히려 현재 일반적인 번역대로 ‘난리’가 옳은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서 ‘胡亂’을 ‘허둥대다’로 해석하고 있는 ꡔ禪學大詞典ꡕ        駒澤大學 禪學大辭典編纂所, ꡔ禪學大辭典ꡕ, 日本 東京 : 大修館書店, 昭和 60年(신판1쇄), 70p.
은 좀 잘못 집은 것이 아닐까한다.
내가 ‘胡亂’의 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의 예에서 어떤 번역이 옳다는 문제가 아니라 신규탁의 방법론 자체가 옳으며 그러한 방법론으로 번역에 관한 토론이 가능하고, 위의 토론은 그 예이며, 이런 토론의 경우에 화두에 대한 ‘해설’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3)  譯文과 해설
위의 예에서, ‘胡亂’은 ‘난리’라고 번역하건 ‘허둥버둥대다’라고 번역하건 둘 다 결국 ‘허둥버둥대다’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신규탁은 이 점에 주의하지 않은 혐의가 있긴 하지만 만약 신규탁이 제시한 번역이 옳다면 독자들에게 있어 처음에 ‘난리’라고 읽은 것과 단지 ‘허둥버둥대다’로 읽은 것은 선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상 통할 수 있다는 것과 어떤 어휘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은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용 파악은 번역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신규탁의 예를 하나 더 보기로 하는데 요약하면 이러하다.        신규탁, 위의 논문, 115~116p


“삼승십이분교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친 풀밭에는 호미질을 하지 않는 것이니라.㉠”
→ 원래 역자의 주: “荒草不曾鋤㉠” 무명 망상의 거친 풀 그대로. 번뇌의 근본 성질이 곧 불성임을 선언하는 말.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부처님이 어디 있느냐?” 좌주가 대답을 못했다.        有座主問, 三乘十二分敎豈不是明佛性. 師云, 荒草不曾鋤.㉠ 主云, 佛豈賺人也. 師云, 佛在什麽處. 主無語. (ꡔ臨濟錄, 上堂ꡕ) 신규탁, 위의 논문, 115p 재인용.

(신규탁의 반론→) ㉠앞에 ‘以三乘十二分敎’ 정도가 생략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이 문장은 “삼승십이분교 그 따위 연장을 가지고는 번뇌의 거친 풀을 제거한적이 없다.”라는 ‘의미’가 되며, 이렇게 풀 때 그 아래에 이어지는 “부처님이 사람을 속이시겠는가?”와 “부처님이 어디 계시는데?”라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풀이’에 관한 한 나는 신규탁의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문제는 실제로 ‘번역’에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하여 ‘삼승십이분교 그 따위 연장을 가지고는’이라는 말을 첨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는 개인의 주관이 너무 많이 첨가 될 수 있으므로 번역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는데, 만약 이 부분을 제외시킨다면 결국 번역된 문장 자체는 원래 번역이나 신규탁의 번역이나 큰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역자의 관점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이런 부분은 결국 ‘註, 解說’에서 채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3.  해설과 논증

제목은 ‘화두 해설과 논증’이지만 주로 화두 해설에 논증이 없으며 이것의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1)  논증형

명백히 ‘화두’인 예는 아니지만 가장 많이 언급된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평상심’을 소재로 살펴 보기로 한다. 평상심에 대해 성철스님과 김태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곧 양변을 여윈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철스님, ꡔ백일법문ꡕ(하), 합천 : 장경각, 불기 2545 (5쇄) 204p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일상적 마음은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조작하고 시비하고 취사하고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중생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은 곧 평등심과 같은 뜻일 것이다. 평등심은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진일원의 부처의 마음이다. ……이 때의 마음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마음이며, 만법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기도 하다.        김태완, ꡔ조사선의 실천과 사상ꡕ, 합천 : 장경각, 2001. .196~198pp


위의 두 예는 평상심을 ‘중도’, ‘평등심’으로 설명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성철스님의 법문은 매 주장마다 철저히 논증하는 형식을 취하며, ‘中道’에 대해서는 이미 백일법문 冒頭에 충분히 밝히고 있고, 김태완 역시 ‘평등심’에 대해 비교적 일관된 설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화두 해설에서 이처럼 논증의 형식을 취하는 예는 오히려 많지 않다.

2)  無論證

두 가지가 있다. ① 화두와 관련하여 해설 없이 직접 어떤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과, ② 화두를 해설하면서 그 해설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서명석의 예를 보기로 한다.

주장 : 두 말할 것도 없이 선불교의 교육장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자잘한 삶의 언저리에 걸쳐있었다.㉠
논증→ 각주 75, ‘선불교의 일상성’㉡ 무엇이 평상심(어떤 걸림도 없는 순수 의식의 상태㉢)입니까? 잠자고 싶으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아무래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울 때는 서늘한 곳으로 가고, 추울 때는 불을 쬔다.        서명석, ꡔ선문답의 탈근대교육ꡕ, 서울 : 아름다운 세상, 1999. 75p 僧問 “如何是平常心?” 師云 “要眠卽眠要坐卽坐.” 僧云 “學人不會.” 師云 “熱卽取涼寒卽向火.”(ꡔ景德傳燈錄ꡕ卷10 長沙景岑大師)

위 서명석은 자신의 주장 ‘㉠’에 대해 각주 (75)를 달고 있다. 각주 (75)는 ‘㉡’과 같이 ‘선불교의 일상성’이라는 표제를 달고 선문답 하나를 예로 제시하고 있다. 괄호 속의 ‘㉢’은 서명석이 ‘평상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75)는 ‘평상심’이란 어휘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면 별다른 ‘해설’을 붙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 ‘㉠’에 대해 각주 (75)를 달았다는 것은 각주 (75)가 주장 ‘㉠’에 대한 ‘논증’이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며, 이것은 각주 (75)의 인용문이 해설할 필요 없이 누구나 ‘객관적’으로 ‘일상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무논증’의 예이다.
그리고 ‘평상심’에 대한 설명 ‘㉢’은 ‘평상심’을 그렇게 해석할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순수 의식’은 또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연 설명이 전혀 없어 두 번째 ‘무논증’의 예가 된다. 다른 수필류의 해설은 차치하고 정성본 역시 평상심에 대해 ‘보통 예사의 마음’, ‘소박한 일상생활의 마음’, ‘작위성이 없는 근원적 마음’, ‘본래 구족한 자성청정심’        정성본. ꡔ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ꡕ, 서울 : 민족사, 842p, 874p. 875p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태완과 비슷한 듯하지만 논증이 없고 ‘일상’과 ‘초월’을 단순 代置시키면서도 서로 반대되는 이 두 개념을 연결시킬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말만 가지고는 원래의 ‘평상심’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체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3)  奇怪 論證

앞에서 어록의 논증도 오류논증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명제와 증명 사이의 관계상의 오류이며 이것은 증명하기 어려운 선의 세계를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실용적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해설의 경우에는 일일이 오류를 지적하기도 어려운 ‘엽기적인’ 논증들의 예가 보인다.

주장 : 선은 침묵의 세계이다
인용 : 막스 피카트 ꡔ침묵의 세계ꡕ “침묵이란 하나의 존재이다.”
비유 : 요한 전복음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라고 고칠 수 있음
대치 : 피카트의 ‘침묵’에 해당하는 불교 용어는 ‘적멸(寂滅)’, ‘공(空)’, ‘열반(涅槃)’
대치의 근거 : 숫자의 ‘0’과 ‘1’
인용 : 조주스님 “세계가 미처 생겨나기 전에도 性이 있었고, 세계가 파괴될 때에도 성은 파괴되지 않는다. 노승이 한번 이를 보고 난 후에도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인용에 대한 첨언 : 조주스님의 性 = 空 = 피카트의 침묵
결론 : 조주선사가 말한 대로 선이란 이 침묵과 직접 관련된다. 이를 떠나서 선은 있을 수 없다.        기노 가즈요시, 양기봉 옮김, 「선, 현대를 살아가는 길」, ꡔ현대인과 禪ꡕ, 서울 : 대원정사, 1998 (개정판) 179pp~184pp


대략 여섯 페이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위와 같은 식이다. 여기에는 삼단논법이 하나 등장하는데 “피카트의 침묵 = 空, 空 = 性 ∴피카트의 침묵 = 조주스님의 性 ”이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에서 유추되어 자신이 ‘선은 침묵의 세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곧 조주스님의 말씀에서 근거한 것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IV.  맺음말

나는 ‘선’, ‘선학’, ‘화두해설’, ‘논증’의 몇 가지 개념을 다소 약한 상호관련 속에서 고찰하였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글은 전반적으로 논점절취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지만 그러므로 실용논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학문으로서 ‘선학’의 객관성에 관한 문제이며, 이것은 연구 대상에 따라 어록에서 ‘설법’을 다룰 때와 ‘감변’을 다룰 때가 각기 다르며, 역사를 다루느냐 사상을 다루느냐, 학술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에 따라 그 ‘논술’ 형식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선이 논리를 초월한다고 해서 선의 전통이 비논리적인 것은 아님을 보였다. 이것은 선학에서 객관성 추구에 대한 방향제시라고 본다. 물론 현대의 화두 해설에서도 주장과 논증이 분명한 예들도 많이 있지만 적지 않은 해설에서 논증 없는 선언들이나 아주 ‘엽기적인’ 논리들까지 동원되고 있어 문제가 된다. 이러한 해설들은 ‘평상심’이나 ‘침묵’의 예에서와 같이 禪語를 일상의 언어로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어도 일상언어도 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면 관계상 현대 선학 서적의 ‘논증’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하였는데, 一瞥하자면 예를 들어 ‘선학사상사’의 경우 선의 개념을 지나치게 객관화시킨다는 혐의를 둘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논리를 부정하는 ‘선’과 학문이 지향해야할 ‘객관성’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