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5 제5주제 발표; [黙照銘] 考察

淸潭 2008. 2. 22. 18:13
 

德崇禪學 4-5 제5주제 발표; [黙照銘] 考察

 

김호귀 9 (동국대학교)


1. 서  언

당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선종은 唐 五代 宋을 거치면서 가장 세력있는 불교 종파로 등장하였다. 특히 송대에는 소위 5가 7종으로 대변되는 많은 종파와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여 선종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교단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수행방식에 있어서도 大慧宗杲(1089-1163)의 看話禪과 宏智正覺(1091- 1157)의 黙照禪을 비롯하여 선과 염불의 習合 내지 천태사상과의 교섭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조동종의 경우 당 말기에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제9대 芙蓉道楷에 이르러 중흥을 보이면서 다시 종파의 명성을 떨쳤다. 芙蓉道楷의 제자에 丹霞子淳이 있다. 단하자순에게는 특히 三賢孫이라 불리우는 뛰어난 세 제자 곧 眞歇淸了와 宏智正覺과 慧照慶預가 있었다. 이들 단하의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黙照의 선풍을 제창하여 송대에 새롭게 조동의 종지를 되살려 나아갔다. 이 가운데 굉지정각은 일찍이 「黙照銘」이라는 짤막한 글을 남겨 묵조의 의의와 특징을 고스란히 함축하여 이후 본격적인 묵조선의 전개에 그 틀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黙照銘」의 내용은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구조를 통하여 「黙照銘」의 의의와 가치를 살피고 그것이 본격적인 묵조선의 형성에 끼친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黙照銘」과 그 구조

1) 「黙照銘」의 출현
이 「黙照銘」        ꡔ宏智錄ꡕ 卷8, (大正藏48, p.100上-中)
은 宏智의 나이 39세(혹은 40세) 때 天童山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찬술된 것이다. 이후 굉지 44세 때 법형제 사이였던 眞歇淸了는 雪峰山 崇聖禪寺의 주지로 주석하고 있으면서 黙照의 선풍을 널리 펴고 있었다. 그리고 대혜는 紹興 4년(1134. 굉지 44세) 3월에 이 곳을 방문하여 진헐청료가 베풀어 준 법회에서 상당설법을 하기도 하였다. 그 직후 眞歇淸了는 법형제인 慧照慶預에게 崇聖禪寺의 주지를 계승시켰다. 이 무렵부터 대혜는 黙照禪風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拙著, ꡔ黙照禪硏究ꡕ pp.129-139.

따라서 宏智正覺이 「黙照銘」을 찬술한 것은 대혜가 진헐청료의 묵조선을 공격하기 4-5년 전에 해당한다. 그래서 대혜가 진헐의 선을 향해 黙照邪禪이라는 배격한 것은 굉지의 「黙照銘」이 될 수가 없다. 때문에 대혜의 묵조선 비판은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굉지의 묵조선에 대하여 설령 대혜가 비판을 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紹興 元年(1131) 富直柔가 序를 붙인 「長蘆覺和尙語錄」        6卷本 ꡔ宏智錄ꡕ, (禪籍善本古注集成 ꡔ宏智錄ꡕ 卷上. p.1上. 1984年)
에 한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ꡔ宏智錄ꡕ 卷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진헐의 묵조선풍과 가장 유사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도 직접적으로 비판의 대상에 오른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대혜의 묵조선을 향한 비판이 宏智와 大慧의 사이에 宗旨의 대립이라고 보는 기존의 견해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굉지와 대혜는 서로간에 인간적인 교감이 먼저 발휘되었던 것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佐藤秀孝, 「宏智晩年の行實について」-「天童宏智老人像」の大慧贊をめぐつて- ꡔ曹洞宗硏究員硏究生紀要ꡕ16, 1984. 이러한 내용은 또한 逸亭居士 徐繼恩이 붙인 「天童宏智正覺禪師語錄序」(石井修道 編, ꡔ禪籍善本古注集成 宏智錄ꡕ 卷上, p.469上. 名著普及會. 1985)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나아가서 이와 같은 근거에 대한 더욱 단적인 예로는 대혜가 굉지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비판 내지 공격한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黙照銘」의 직접적인 출현이 대혜의 묵조선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때문에 「黙照銘」의 내용은 당시 丹霞子淳의 문하에서 진헐과 굉지 등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묵조수행에 대하여 굉지가 개인적으로 묵조선의 특징을 현창하기 위하여 이전부터 전승해 내려온 조동의 가풍을 응용하여 자기수행의 성격을 묵조에 맞추어 드러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黙照銘」 속에는 묵조의 관계가 조동의 기본적인 교의인 五位의 回互와 不回互에 근거하여 나타나 있다. 따라서 「黙照銘」의 내용을 살펴보는데 있어 대혜가 가한 묵조선 비판의 사실은 배제되어야 한다.        대혜가 설봉의 진헐을 처음 방문한 것은 대혜 나이 46세 때이다. 대혜가 묵조선풍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가한 것은 그 이후부터이다. 그런데 굉지의 「黙照銘」이 등장한 것은 대혜가 설봉의 眞歇淸了를 방문하기 4-5년 이전이기 때문이다.


2) 「黙照銘」의 構造
「黙照銘」은 4언 72구 288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속에서 굉지는 法과 比喩와 그 屬性과 功能을 자유자재하게 활용하여 한편의 멋드러진 비단을 짜 내듯이 黙照의 의의를 토해내고 있다. 마치 造化翁이 삼라만상을 만들어내듯 걸림없이 奇妙하고 深奧한 모습을 일상의 자연물과 언설을 곁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온갖 양념과 재료가 뒤섞인 산채 비빔밥과 같은 모습으로 한편의 글을 엮어내고 있다. 곧 시비분별을 떠난 그윽한 진리의 모습은 黙을 통해 은근하게 비유로 나타나고, 하나도 감춰진 것이 없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진리를 표현한 현성의 공능은 照를 의지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 있다. 黙과 照의 용어를 각각 이제 10회씩 활용하여 묵조의 作用과 묵조의 正體와 묵조의 現成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묵조에 대한 속성을 두 가지로 나타내어 묵조가 지니고 있는 공능을 세 가지로 표현하여 묵조가 지니고 있는 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묵조의 작용을 앞세운 것은 묵조의 黙가 단순히 寂黙 내지 고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이미 黙照는 처음부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작용은 黙을 통한 照로, 그리고 照를 통한 黙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黙과 照가 어우러지지 않은 곳에서는 黙照의 작용이 간파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작용이 바탕하고 있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묵조의 작용은 다름아닌 黙은 좌선의 黙이고 照는 깨달음의 照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黙은 침묵의 黙이면서 동시에 몸으로 올바른 자세로 앉아서 행하는 좌선의 黙이다. 곧 언설로 말하면 至言으로서 언어표현의 극치이고, 몸의 행위로 말하면 좌선삼매에 들어 있는 가부좌의 모습 그대로이다. 照는 본래부터 작용하고 있는 진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黙을 통해서 나타나는 깨달음의 빛이다. 그래서 照는 黙을 제대로 黙이게끔 하는 照로서 온갖 세계에 널리 응하면서 방편에 떨어지지 않는 妙用으로서의 照아이다.
이와 같은 黙照의 정체는 단순히 정체라는 속성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정체이면서 어디에나 드러나 있는 진리의 현성으로서의 정체이다. 이것을 現成公案이라 한다. 곧 黙照는 黙과 照의 작용과 정체가 서로 回互하고 不回互하면서 그것을 자각으로 현성시켜 놓고 있다. 그 묵조가 현성하는 모습은 曹洞宗家의 본래모습으로서 작용으로 말하면 허공신처럼 자유자재하고, 그 정체로 말하면 화씨의 구슬이 함유하고 있는 본래의 빛처럼 凝然不動하여 動卽靜하다.
이처럼 묵조의 작용과 정체와 현성이 제각각이면서도 모두 서로를 거스르지 않는 中道의 規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에 묵조의 가치와 의의가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黙照의 종가에서는 어설픈 교리나 수행을 드러내어 남에게 강요하거나 선전할 필요가 없다. 중도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자각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가면 된다. 宗家의 黙照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이 물씬 배어 있다. 이제 묵조의 작용과 정체와 현성의 세 가지 입장에서 黙照의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구조가 어떻게 짜여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黙照銘」의 단순한 해석을 통하여 그 구조를 도식화하는 기초 내용으로 삼고자 한다.        일련번호는 내용을 도식화하는데 있어 필요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1. 黙黙忘言        묵묵하게 시비분별의 언어를 떠나니
2. 昭昭現前        밝고 밝게 깨달음의 모습이 현전한다
3. 鑒時廓爾        되짚어 보면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4. 體處靈然        그 본체자리는 본래자리에 그대로이다
5. 靈然獨照        그대로의 세계는 깨달음을 우뚝 드러내 있고
6. 照中還妙        깨달음이 비추어 내는 세계는 언어분별을 초월한다
7. 露月星河        그 모습은 마치 맑게 개인 하늘의 달과 같고 별과 같으며
8. 雪松雲嶠        눈 덮인 소나무와 구름속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와  같다
9. 晦而彌明        어둠과 밝음을 뛰어 넘고 숨음[隱]과 나타남[顯]을 초월하여
10. 隱而愈顯        어두워도 더욱 밝고 숨어도 더욱 드러난다
11. 鶴夢煙寒        학이 잠자는 것은 학이 아니면 추운 지 알 수가 없고
12. 水含秋遠        시냇물은 가을이 되어야 물이 마르지 않는지 알 수 있다.
13. 浩劫空空        좌선하는 사람은 영겁에 空하고
14. 相與雷同        만물도 서로 和하여 모두 空이 된다.
15. 妙存黙處        언어분별을 초월한 세계[깨달음]는 좌선[黙] 속에 있고
16. 功忘照中        그 속에서 나온 깨달음이 끝없이 세계를 비춘다.
17. 妙存何存        언어분별을 초월한 세계의 존재모습은
18. 惺惺破昏        반야지혜가 밝게 드러나 어둠을 물리치는 모습이다.
19. 黙照之道        黙照의 道는
20. 離微之根        離微가 그 근본이다
21. 徹見離微        離微의 도리를 철견하고 보면
22. 金梭玉機        피차가 회호한다
23. 正偏宛轉        正과 偏이 막힘없이 回互하고
24. 明暗因依        밝음과 어둠이 서로 의지한다
25. 依無能所        서로 의지하지만 能所가 따로 없고
26. 底時回互        그러한 때에 相卽하게 된다
27. 飮善見藥        마치 선견왕의 약이 모든 병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것과 같고
28. 撾塗毒鼓        독을 바른 큰 북이 온갖 번뇌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29. 回互底時        회호한 그 때에는
30. 殺活在我        殺活이 자유자재하게 된다
31. 門裡出身        그러한 경지는 좌선이 六根의 작용을 초월하여
32. 枝頭結果        어디에서나 깨달음의 결과를 드러낸다
33. 黙唯至言        좌선이야말로 언어표현의 극치이며
34. 照唯普應        깨달음이 비추어낸 세계야말로 널리 通應한다
35. 應不墮功        널리 通應하지만 妙해서 방편에 떨어지지 않고
36. 言不涉聽        언어로써 표현되어 있지만 분별로써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7. 萬象森羅        삼매 속에 端坐할 때에 삼라만상이
38. 放光說法        빛을 내어 설법한다
39. 彼彼證明        그리하여 서로가 증명하고
40. 各各問答        각각이 문답한다
41. 問答證明        그 문답과 증명이
42. 恰恰相應        딱 들어맞아 하나가 된다 하더라도
43. 照中失黙        깨달음이 비추어 낸 세계에 좌선이 없다면
44. 便見侵凌        그 즉시 미혹에 휩쓸리고 만다
45. 證明問答        그 증명과 문답이
46. 相應恰恰        딱 들어맞아 하나가 된다 하더라도,
47. 黙中失照        좌선속에 깨달음이 비추어 낸 세계가 없다면
48. 渾成剩法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49. 黙照理圓        좌선과 깨달음이 비추어 낸 세계는 이치적으로 宛轉하여
50. 蓮開夢覺        마치 연꽃이 피고 꿈에서 깨어나는 모습이다
51. 百川赴海        그리하여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고
52. 千峰向岳        모든 산봉우리가 수미산을 향하는 것과 같다
53. 如鵝擇乳        또한 鵝王이 물을 마시지 않고 우유만을 가려먹는 것과 같고
54. 如蜂採花        꿀벌이 꽃을 다치지 않고 꿀을 모으는 것과 같다
55. 黙照至得        이와 같은 黙照一如의 세계에 이르러야만
56. 輸我宗家        비로소 우리 宗家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57. 宗家黙照        우리 宗家의 黙照一如의 세계야말로
58. 透頂透底        위로는 有頂天으로부터 아래로는 阿鼻地獄에 이르기까지 통한다
59. 舜若多身        그 모습은 어디에나 자유로이 다다를 수 있는 虛空神의 몸과 같고
60. 母陀羅臂        모든 것을 거머쥐는 母陀羅의 손과 같다
61. 始終一揆        또한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돌아가기도 하고
62. 變態萬差        더욱이 모든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63. 和氏獻璞        그 모습은 和氏가 玉을 헌납한 것과 같고(黙中照)
64. 相如指瑕        藺相이 흠집을 지적해 낸 것과 같다(照中黙)
65. 當機有準        또한 그것은 수행자에 따라 가르치는 바이기는 하나
66. 大用不勤        軌則을 초월한 無爲無作의 작용이다
67. 寰中天子        그 모습은 하늘을 다스리는 천자와 같이 위엄 있고
68. 塞外將軍        변방을 지키는 장군처럼 당당하다
69. 吾家底事        우리 宗家의 黙照의 大事는
70. 中規中矩        中道의 길을 추구한다.
71. 傳去諸方        때문에 제방에 전파함에 있어서도
72. 不要賺擧        거짓으로 남을 속일 필요가 없다.

이제 위의 해석을 내용으로 삼아 黙照의 作用과 正體와 現成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각각의 屬性과 比喩와 그 功能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묵조의 作用이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종가의 수행과 특징이 묵조 바로 그것의 작용으로 나타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또한 正體는 그 作用의 바탕이면서 동시에 現成과는 상호간에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回互하고 不回互의 관계성에 있기 때문에 나란히 병렬관계로 도식하였다. 또한 이 作用과 正體와 現成의 세 가지는 黙照의 가풍을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곧 묵조의 가풍은 黙으로서는 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照로서는 規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한다. 또한 規와 矩는 黙과 照이고 正과 偏이며, 功과 德이고 眞如와 隨緣이다. 이것이야말로 黙照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久遠의 本證임을 설파한 말이다. 일체의 양단을 떠나 있어서 黙의 樞機에만 떨어지지도 않고, 照의 傍參으로만 치우치지도 않는 宛轉이다. 이것은 宗通과 說通의 兼帶를 말하는 것으로 「黙照銘」 전체에 대한 총결을 나타낸다.

比喩(22)        比喩(32)                比喩(11·12)        比喩(7·8)

功能(21)        功能(29·30)        功能(15-18)        功能(9·10)        功能(3-6)
                               屬性(1·2)

        屬性(23·26)        屬性(13·14)

               <黙照의 作用(19·20)>


        比喩(50·54)        比喩(63·64)        比喩(67·68)        比喩(59·60)
功能(37-48)
                功能(61·62)        功能(65·66)
屬性(35·36)  屬性(49)                        屬性(57·58)

<黙照의 正體(33·34)>               <黙照의 現成(55·56)>

        總結(69·70)        遺囑(71·72)
3. 「黙照銘」과 黙照禪

1) 「黙照銘」의 내용
「黙照銘」의 제목에 있는 「黙」이라는 글자는 그 형태를 보면 깜깜한 밤에 똥개 한 마리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짖어대는 모습이고, 「照」라는 글자는 日과 召와 火를 모아 놓은 형태로서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광명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法으로 말하자면 좌선하는 사람이 삼매에 들어가서 불경계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혓바닥으로 입 천정을 떠받치고 있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언어도단의 상태를 「黙」라 한 것이다. 이것이 몸에 배어 좌선속에서 산란과 혼침이 없이 了了常知하여 자기의 본래광명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照」라 한다. 이와 같은 黙과 照를 감각과 몸과 마음으로까지 체험하는 것을 感覺脫落 身心脫落이라 한다.
이와 같은 黙照의 경지는 ꡔ涅槃經ꡕ의 「제불세존은 定과 慧를 골고루 익혀서 밝게 불성을 보아 了了하게 걸림이 없다」        ꡔ大般涅槃經ꡕ 卷13, (大正藏12, p,547上)
        “諸佛世尊定慧等故明見佛性了了無礙”
라는 설명이 여기서의 黙[定]과 照[慧]이다. 범어 奢摩他는 定의 의미로서 산란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곧 일체번뇌를 멸하는 것이고, 諸根의 惡과 不善을 調伏하는 것이며, 삼업이 寂靜한 것이고, 오욕을 여의는 것이며 삼독을 청정케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범어의 毘鉢舍那는 慧의 의미로서 혼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곧 생사의 악한 과보를 관하는 것이고, 모든 선근을 증장하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를 파괴하는 것이다. ꡔ金剛經ꡕ에서 말한 세존의 如是知 라는 것은 定의 의미이며, 如是見이라는 것은 照의 의미이다. 洞上[洞山]은 이것을 正과 偏이라 불렀으며, 曹山이 말한 「正位空界 本來無物」 은 黙의 경계로서 한 티끌도 일어나지 않는[一塵不立] 것이며, 「偏位色界 有萬物形」 은 照의 경계로서 한 티끌도 숨어있는 것이 없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黙과 照는 도리를 설할 때에는 두 모습이지만 이에 안주할 때에는 분별이 없어 마치 「印紙同時 讀時前後」와 같다. 이렇게 부합되어 있는 것을 三昧 또는 三摩地라고 한다. 이것을 조동의 교의 가운데 五位의 位次로 말하자면 제오위에 해당하는 兼中到의 지위이다. 또한 필경에는 佛佛祖祖 嫡嫡相承의 大法으로서 般若會上에서의 여래의 三昧王三昧에 들어 初祖로부터 28傳한 菩提達磨의 凝住壁觀 凡聖等一의 결가부좌라 할 수 있다. 이것을 銘으로 서술한 것이 「黙照銘」이다.
銘은 警戒의 뜻이다. 후인을 훈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黙照銘」도 正傳의 삼매에 안주한 자에게는 마찬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馬鳴祖師의 「마음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곧 大智慧光明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見을 일으키면 그것은 곧 不見의 相이 되기 때문이다」        ꡔ大乘起信論ꡕ, (大正藏32, p.579上)
라는 말에서 위의 「心性不起」 는 「黙」의 뜻이고, 그 다음 「卽是大智慧光明義」는 「照」의 뜻이다. 「若心有見卽 有不見之相」 은 黙照에 어두운 것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馬鳴이 말한 「마음의 본성이 見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만약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참된 識知가 아니다」        위의 책, (大正藏32, p.579上-中)
에서 위의 「心性離見」은 「黙」의 뜻이고, 「卽是遍照法界義」 는 「照」의 뜻이다. 「若心有動 非眞識知」 는 黙照에 어두운 것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굉지는 「坐禪箴」에서 말하기를 「佛佛要機 祖祖機要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 라고 했는데, 위의 「佛佛要機 祖祖機要」는 佛祖를 들어 黙照의 증거로 삼은 것이며, 「不觸事而知」는 「黙」이고 不對緣而照는 照이다. 「證道歌」에서 말한 「定慧圓明 不滯空」 도 같은 의미이다. ꡔ法華經ꡕ에서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라 하였는데 그 「一大事因緣」 이란 開示悟入의 네 가지 불지견인데 이 「知見」의 「知」는 黙이고 「見」은 「照」를 말한 것이다. 「黙照銘」은 위와 같은 黙과 照의 의미를 통하여 납자가 필경에 자각해야 하는 본분의 도리를 설한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黙黙忘言 黙黙하여 言을 잊고
2. 昭昭現前 昭昭하여 現前한다.

제1․2구는 묵조명의 總序로서 묵조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ꡔ宏智廣錄ꡕ에서는 「묵묵하여 神이 澄하고 棱棱하여 氣가 淸하다」        ꡔ宏智錄ꡕ 卷9, (大正藏48, p.113上)
        “黙黙神澄 棱棱氣淸”
혹은 「묵묵하여 思가 없고 間間하여 얽매이지[羈] 않는다」        ꡔ宏智錄ꡕ 卷9, (大正藏48, p.113下)
        “黙黙無思 閒閒不羈”
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純粹我인 불성이 사려가 끊긴 곳에서 고요하게[寂] 된 상태로서 精神이 淸澄한 경지이다. 그래서 오직 그것을 체험적으로 맛볼 뿐이지 그것을 記述的으로 설할 수가 없다. 실로 달마선의 골수 그대로이다. 때문에 ꡔ宏智廣錄ꡕ에서 「묵묵하게 少林을 배우고 고요하게 본심을 온전케 한다」        ꡔ宏智錄ꡕ 卷9, (大正藏48, p.115下)
        “黙學少林 靜全本心”
고 말한다.
黙黙忘言은 만법과 我가 일여가 되면 삼세제불의 舌頭도 억지가 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昭昭現前은 제법의 실상이 진진찰찰에 털끝만큼도 숨음이 없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宏智에게 있어 黙照의 현성 그것이다. 이것은 삼매속에서 맛보는 昭昭한 경험이다. 이와 같이 밝고 밝은 昭昭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황제가 澄觀國師에게 물었다.
“華嚴經에서는 법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국사가 말했다.
“법계라는 것은 일체중생의 몸과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래서 근본이래로부터 신령스레 밝고 텅 비어 있으며, 광대하고 확연히 고요하여 유일한 참 경계입니다. 그래서 이미 형태와 모양이 없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지만 가이 없고, 만유를 품고 있어 마음의 눈에는 밝고 밝지만 모양으로는 볼 수가 없으며, 色塵 속에서는 밝고 밝지만 이치로는 분석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에 투철한 慧와 생각을 떠난 明이 아니라면 智로도 능히 볼 수가 없다. 자기의 마음은 이와 같이 靈通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처음 정각을 이루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기하도다. 내 지금 일체중생을 널리 살펴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모두 구비하고 있구나. 그러나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하여 그것을 증득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에 법계의 성품을 華嚴經에서 설하셨습니다”        ꡔ佛祖歷代通載ꡕ (卍續藏132. p.545上)


이와 같은 심경은 無一物의 경지와 같아서 실은 위대한 체험적 소득이다. 이것을 ꡔ宏智廣錄ꡕ에서는 「禪床에 묵묵히 앉아 있노라면 얻을 바 없는 것을 얻는다」        ꡔ宏智錄ꡕ 卷7, (大正藏48, p.81下)
        “禪床黙黙 無得之得”
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묵조의 소득 곧 沈着(無住의 住)으로서 불가사의한 妙用의 전개이다. 그것을 제2구에서 昭昭現前이라 말했다. 또한 「淵黙하여 明하고 湛存하여 妙하다」        ꡔ宏智錄ꡕ 卷9, (大正藏48, p.118中)
        淵黙而明 湛存而妙
는 말은 곧 昭昭現前을 가리킨 말이다. 혹은 「黙黙하여 은밀한 작용을 구비하고 있고, 智慧로와 이치를 터득함에 있어서 空하다」        ꡔ宏智錄ꡕ 卷9, (大正藏48, p.115中)
        “黙成用密 智空理得”
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洞然明白」한 자기는 곧 말로 설할 수 없는 자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실현하려면 오직 黙할 밖에 없다. 「현전에서 성취하고자 하면 순역의 경계를 따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ꡔ信心銘ꡕ (大正藏48, p.376中)
        “現前欲得 莫存順逆”
라는 것은 일체의 順逆과 是非의 사려를 버리는 곳에서만 나타나는 黙의 강조이다. 黙에 의한 자기의 현전 바로 그 곳에 천진자연스러운 자기가 빛을 내는 것이다. ꡔ信心銘ꡕ에서 「虛明하고 自然하니 心力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        ꡔ信心銘ꡕ (大正藏48, p.376下)
        虛明自然 不勞心力
는 것은 계획적으로 企圖되는 노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작용이 천하의 법칙에 들어맞는 것에 위대한 점이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無我라 한다. 무아란 我의 死滅이 아니라 我나의 淨化이고 純化이다. 무아의 이상적인 발전 그것이 성불이고 대오이다. 이것이 곧 黙하여 照하는 바로 그것이다. 大慧의 다음과 같은 말은 묵조적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대가 正信을 갖추고 正志를 세운 그것이 곧 成佛作祖의 기본입니다. 이런 까닭에 산승이 그대의 호를 湛然이라 했습니다. 마치 물이 담연하고 부동하면 虛明自照하여 애써 수고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담연상태를 유지하여 털끝만치도 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담연이라는 도장을 일체처에 찍어두면 시비를 초월하여 낱낱이 解脫이고 낱낱이 明妙이며 낱낱이 진실합니다. 그리하여 用이나 不用의 경우가 모두 담연합니다. 달마조사께서 ‘有心으로 분별계교하면 자심으로 見量하는 것이 모두 꿈과 같게 된다. 그러나 만약 심의식이 그치고 한생각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을 正覺이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깨달음이 바르면 하루 24시간 내내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냄새 맡고 맛보며 만져서 알고 도리를 아는 것 내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담연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전도상을 내지 않고 有想과 無想에 다 청정합니다. 이미 이와 같이 청정하면 활동할 때는 담연한 작용이 드러나고, 활동하지 않을 때는 담연한 체성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체와 용이 다르지만 담연한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ꡔ大慧語錄ꡕ 卷26, (大正藏47, p.924下)
        “左右 具正信立正志 此乃成佛作祖基本也 山野 因以湛然 名公道號 如水之湛然 不動則虛明自照 不勞心力 世間出世間法 不離湛然 無纖毫透漏 只以此印 於一切處 印定 無是無不是 一一解脫 一一明妙 一一實頭 用時 亦湛然 不用時 亦湛然 祖師云但有心分別計較 自心見量者 悉皆是夢 若心識 寂滅 無一動念處 是名正覺 覺旣正則於日用二六時中 見色聞聲 齅香了味 覺觸知法 行住坐臥 語黙動靜 無不湛然 亦自不作顚倒想 有想無想 悉皆淸淨 旣得淸淨 動時 顯湛然之用 不動時 歸湛然之體 體用 雖殊 而湛然則一也”

3. 鑒時廓爾 비추어볼 때는 廓爾하나
4. 體處靈然 체험(본체)하는 곳은 靈然하다.

앞의 제1․2구가 總序로써 묵조의 의의를 말했다면 제3․4구는 總序에 대한 구체적인 주석이다. 鑑은 鏡으로서 사물을 비추어보는 작용이다. 廓爾는 明朗하게 맑게 개인 새벽녘의 하늘과 같은 상태이다. 따라서 鑒時廓爾는 昭昭現前한 大主觀이 客觀의 사물에 상대하여 명랑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것은 主로서의 心의 묘용을 설한 것이다. 여기에서 體는 주관 그 자체로서 心이 그 자체의 생생하고[靈然] 불가사의한 상태이다.
鑒時廓爾의 鑒時는 廻光返照하는 때이다. 여기서의 때라는 것은 去來今을 초월한 때이다. 이른바 경전에서 말하는 「한 찰나의 마음이 반야에 상응하여 삼세의 법을 깨치고 나면 곧 그것이 다름아닌 大甲의 현전이다」        ꡔ大乘本生心地觀經ꡕ 卷8, (大正藏3, p.330中)
와 같은 경우이다. 體處靈然의 體는 身으로서 四大六根과 八萬毛孔의 모두를 가리킨다. 體處는 體가 존재하는 盡十方世界 모두를 가리킨다. 그 體處가 신령스럽다는 것은 體處가 不可思議 不可稱量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확연하게 黙照로써 비추어 볼 때에는 티끌하나 없이 黙이 이루어내는 照의 경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廓爾는 用으로서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부셔버리는 것이고, 靈然은 體로서 十世古今에 걸쳐 沒巴鼻한 것이다.

5. 靈然獨照 靈然하여 홀로 비추는데
6. 照中還妙 그 비춤 가운데 妙가 있다.

제5구는 靈然한 세계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獨照는 단지 유일무이한 하나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제6구는 그 광명세계가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靈然한 心의 광명세계는 「一心이 일어나면 만법에 허물이 생긴다」는 말처럼 상대관념에 계박되지 않은 순수한 心의 광명은 만법을 남김없이 모두 비추기 때문에 피차의 대림이 없어 우주는 유일한 광명만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광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은 상호감에 표리를 이루어 융통무애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靈然獨照는 黙照가 非思量으로서 照할 때에는 아래로는 지옥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는 阿伽尼陀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진시방세계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다만 한 줄기 광명뿐이므로 獨이라 하는 것이다. 그 한줄기 광명속에 도리어 불가사의한 경계가 있다. 그 불가사의의 경계는 鑒時廓爾하는 작용 속에서만 훤칠하게 드러나 있다. 照中還妙는 靈然獨照와 같은 상황속에서 다시 妙의 盡十方世界가 正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妙라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이하에서는 비유로써 설명되고 있다.
7. 露月星河 드러난 달과 은하수
8. 雪松雲嶠 눈 덮힌 솔과 구름 낀 봉우리

제7구는 풀잎에 하늘의 달이 잠들어 있듯이 어려비치고 무수한 별이 나열하여 은하에 목욕하는 광경이다. 제8구는 하얗게 뒤덮인 눈 위에 푸른 소나무가 우뚝하게 서 있고 안개 자욱한 곳에 높은 산봉우리가 홀로 솟아 있는 광경이다. 제7구는 밤이고 제8구는 낮이다. 따라서 露月星河는 照中還妙의 모습이 마치 풀끝의 이슬이 달을 머금고 별들이 은하에서 목욕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雪松雲嶠는 또한 솔가지에 쌓인 눈과 산을 덮은 하얀 구름처럼 깨끗함을 비유한 것이다. 하다. 이것이 곧 黙照의 昭昭現前의 모습이다. 어느 것 하나 감춤이 없이 가식도 없이 그냥 나타나 있는 모습은 黙照의 좌선 속에서만 가능하다. 위의 露月星河와 雪松雲嶠는 黙照의 傍參을 형용한 말이다.
이처럼 개개가 낱낱으로 독립되어 있는 현상으로서 露月은 서로 침범하지[相犯] 않고 星河도 서로 반하지[相反] 않으면서 상호간에 融通無碍하다. 눈도 소나무도 구름도 산봉우리도 서로 表가 되고 裏가 되면서 동시에 서로의 존재의식을 傷하지 않는 것은 실로 「照中還妙」를 말해주는 것이다. 실로 서로 대립하되 서로 범하지 않는 도리를 明暗과 隱顯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더욱 밝고 바른 곳에 있으면 더욱 치우친다. 久遠劫에 머물러 있으면서 今時를 直指하고 見聞에 卽해 있으면서 劫外를 살피고 있다.

9. 晦而彌明 어두우면 더욱 밝고
10. 隱而愈顯 감추면 더욱 드러난다.

제9구는 제7구 露月星河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고, 제10구는 제8구 雪松雲嶠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다. ꡔ參同契ꡕ의 「暗中有明」과 「明中有暗」이고, ꡔ寶鏡三昧ꡕ의 「夜半正明」과 「天曉不露」와 동일한 설명방식이다.
晦而彌明은 靈然獨照하는 공능이 回互와 不回互의 경계를 자유로이 현전시키는 공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습은 어두워도 더욱 밝아 明과 暗의 回互로 나타난다. 隱而愈顯은 숨어도 훤히 드러나는 경지로서 위의 晦而彌明과 더불어 回互의 소식을 말해준다. 그래서 끝내는 回互와 不回互의 宛轉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明暗이 一合하고 正偏이 不二한 것이다. 그러니 冷暖自知할 뿐이어서 곁엣 사람조차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봉사가 꿈속에서 눈을 뜬 것과 같다.
이것은 黙照의 脫體現成한 속성을 말한 것으로서 五位의 위로 비교하자면 兼帶의 密用이다. 만약 그것을 ꡔ寶鏡三昧ꡕ의 오미자로 비유하면 쓴맛 속에 단맛이 있고 단맛 속에 쓴맛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晦明과 隱顯을 다음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11. 鶴夢煙寒 학이 煙 속에서 잠들어 춥고
12. 水含秋遠 물은 가을에도 투명하게 깊이 비춘다.

제11구 안개[煙] 속에서 잠들어 춥다는 것은 寒暖과 晦明이 存한다는 뜻이고, 제12구 가을이라서 투명하게 깊이 비춘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다. 그러나 卍山은 「세존의 삼매를 가섭이 알지 못하고, 가섭의 삼매를 아난이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학이 안개속에 잠들어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춥고 따뜻함을 알지 못하고, 물이 가을이라서 투명하게 물속 깊이까지 비추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가을이 되어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학의 춥고 따끗함은 학 이외에는 不明(晦)하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事實[明]로 확인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晦와 明이 相卽하여 不離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情과 非情을 초월하고 作과 無作을 투과하는 것이다.
鶴夢煙寒은 晦而彌明과 隱而愈顯의 경지를 비유한 것으로서 그 모습은 마치 학이 꿈속에서 안개 때문에 추워하는 모습이다. 곧 직접 학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水含秋遠은 또한 시냇물은 가을날처럼 가뭄이 되어봐야 그 물이 마르지 않는 샘 깊은 물인지 알 수가 있다. 이에서 학과 물의 비유는 宏智에게 있어서 黙而常照하는 黙照의 傍參을 말한 것으로서 곧 宏智 자신의 모습을 형용한 용어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상은 黙과 照의 관계에 대하여 종횡으로 상관관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음부터는 黙照의 功能[功德]에 대한 설명이다.

13. 浩劫空空 호겁은 공공하고
14. 相與雷同 서로에 걸쳐 뇌동한다.

제13구의 호겁은 한량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곧 까마득한 大劫을 말하는 것으로서 경전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의 광명은 그 밝기가 끝이 없다. 그래서 劫後無數劫 그리고 無數劫重複無數劫 그리고 無數劫無央數토록 끝끝내 어둠이 없다」        ꡔ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ꡕ 卷上, (大正藏12, p.308中-下)
는 無數劫과 같다. 空空은 그것이 가이 없다는 의미로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무제한의 시간이다. 곧 空空이란 ꡔ大品般若經ꡕ의 20空 가운데 하나로서 一切法空으로서 그 空도 또한 空한 것을 말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內空 · 外空 · 內外空 · 空空 · 大空 · 勝義空 · 有爲空 · 無爲空 · 畢竟空 · 無際空 · 散空 · 無變異空 · 本性空 · 自相空 · 共相空 · 一切法空 · 不可得空 · 無性空 · 自性空 · 無性自性空 등을 통달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반야바라밀다를 배워야 한다」.        ꡔ大般若經ꡕ 卷3, (大正藏5, p.13中)

相與雷同은 뇌성이 원근에 울려퍼져 사람들의 꿈을 깨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위의 靈然獨照와 照中還妙는 시간적으로는 浩劫에 통하고 공간적으로는 空空에까지 통하는 密用과 傍參을 兼帶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雷同의 두 글자는 마치 우뢰가 치면서 소리를 내면 만물이 동시에 그것에 응한다는 의미로서 위의 浩劫空空과 함께 黙照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道家의 ꡔ度人經ꡕ에서 말한 애시당초의 浩劫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인데, 그것은 뜻은 한량없는 劫이라는 뜻이다. 雷同이라는 말은 유교경전에서 나온 말로서 우뢰소리가 십 리 밖에까지 들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위의 浩劫空空과 相與雷同은 法의 大義이다. 이러한 삼매에 안주하게 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공덕은 盡過去際로부터 盡未來際에 이르기까지 일체군생의 미몽을 각성시키는 것이 마치 뇌성과 같아서 각각의 안목을 일깨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제13․14구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 묵조삼매의 공능이 보급되어 사람들의 미몽을 일소하고 身心을 明淨하게 하여 해탈시킨다는 뜻이다.

15. 妙存黙處 妙는 黙한 곳에 있지만
16. 功忘照中 功은 照 가운데 있으면서 스스로를 忘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능은 無我로 행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妙는 공능의 주체이다. 주체로서의 妙는 廓爾한 空(黙) 속에 있으므로 存한다 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有이면서 無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 功用도 또한 오직 일광명으로만 비추기 때문에 어떤 조작도 어떤 과장이나 자랑도 없다. 그 경지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굳이 妙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는 설법에 있어 斷滅相을 설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굳이 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功은 造作에 속한다. 그러나 虛明하고 自照하여 心力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 忘이라 한다.
妙存黙處는 앞의 照中還妙에서와 같이 妙는 言思不到하는 黙處에서 나타나는 妙여서 조금도 功에 걸리지 않는다. 黙而妙이다. 그리고 功忘照中은 照로 나타나는 功이건만 그 照는 功을 잊은 照라서 어떠한 조작으로도 엿볼 수가 없는 곳이다. 곧 黙 가운데에 나타나는 照의 妙는 照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라서 일체의 공능을 假藉하지 않는 獨照이다.
17. 妙存何存 그렇다면 妙한 存이란 어떤 存인가.
18. 惺惺破昏 그것은 惺惺하여 昏을 파한 存이다.

妙의 존재상태는 어떤가. 그것은 惺惺한 心에 광명이 드러나 昏迷한 暗이 破해진 存이다. 그래서 妙存何存은 위의 妙存黙處에서 黙處에 存하는 妙는 어떠한 격별도 없는 존재이다. 곧 묘용으로 나투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용되는 惺惺破昏은 단지 惺惺하게 마음에 광명이 생기면 그대로 혼침의 어둠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지 어둠과 광명의 상대적인 惺惺일 수 없는 것이다. 黙의 妙存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照의 공능을 통하기 때문이다.

19. 黙照之道 黙照의 道는
20. 離微之根 離微의 근본이다.

이미 惺惺하여 斷惑된 자기라면 그 出息[微]과 그 入息[離]에 눈꼽만치도 오염되지 않는다. 이것이 곧 出息이 衆緣에 끄달리지 않고 入息이 蘊界에 居하지 않는 소식이다. 따라서 黙照之道는 이 黙과 照는 그대로 보리이므로 黙照의 道는 바로 定과 慧를 균등히 하여 佛性을 밝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이 근거로서 止와 觀을 함께 수행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止라는 선정을 수행하면 지혜로운 觀이 성취된다. 그리고 지혜로운 관을 수습하면 또한 선정의 지가 성취된다. 그래서 이른바 성스러운 제자들은 지와 관을 함께 닦아 해탈의 경계를 얻는다」        ꡔ雜阿含經ꡕ 卷17, (大正藏2. p.118中)
. 이와 같은 치우침이 없는 지관수행은 바로 좌선의 密用으로서 黙照의 근본이 離微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離微之根의 離와 微는 僧肇가 ꡔ寶藏論ꡕ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요체는 곧 「入離와 出微는 入離를 알면 밖의 대상에 의지할 바가 없고, 出微를 알면 안으로 마음에 행할 바가 없다. 안으로 행할 바가 없으니 모든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밖으로 의지할 바가 없으니 만유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고요하여 모든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적멸하여 부사의하다. 그러므로 본래의 청정한 체성은 離微로부터 나온다 할 수 있다. 入에 의거하기 때문에 離이고, 用에 의거하기 때문에 微이다」        ꡔ寶藏論ꡕ, (大正藏45, p.145下)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래 천태의 「六妙門」 가운데 隨息에 관계되는 말로서, 入息 때에 「지금 숨을 들이마신다」 라고 알면 외부의 육진이 마음에 의지할 틈이 없고, 출식 때에 「지금 숨을 내쉰다」 라고 알면 내부의 四蘊이 움직일 틈이 없어진다. 이 곳이 바로 至極妙細한 장소로서 色 · 受 · 想 · 行 · 識의 五蘊으로 나뉘어지기 이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入離와 出微를 안다면 외부의 육진과 내부의 四蘊이 我로부터 곧 벗어나게 된다. 般若多羅의 설법 가운데 「숨을 들이쉴 때에도 모든 반연에 따르지 않고, 숨을 내쉴 때에도 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와 같이 백천 만억 권의 경전을 굴리지만 실은 한 권도 굴리지 않습니다」        ꡔ五燈會元ꡕ 卷1, (卍續藏138, p.26上)
에서 「숨을 들이쉴 때에도 모든 반연에 따르지 않고」 는 出微이고, 「숨을 내쉴 때에도 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라는 것은 入離로서 出도 入도 모두 왕삼매의 유희이다. 그리고 菩提達磨가 二祖慧可를 위하여 설법한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을 방벽과 같이 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        ꡔ傳燈錄ꡕ 卷3, (大正藏51, p.199下)
라고 말한 것도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라는 것은 出微이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 라는 것은 入離이다. 따라서 이 離微는 黙照의 傍參으로 나타난 묘용이라 할 수 있다.
ꡔ信心銘ꡕ에서 「性에 맡겨 道에 합치하고 逍遙하여 煩惱를 絶한다」는 ‘任性’처럼 본성에 맡겨진 我이고, ‘合道’처럼 道를 자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는 我이다. 따라서 出도 入도 모두 근본의 心律에 의하고 大道의 車에 따른다.

21. 徹見離微 離微를 徹見하면
22. 金梭玉機 金梭와 玉機처럼

밖으로는 만유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고 안으로는 망상의 미몽이 끊어진 이상 金梭와 玉機에 의하여 직물이 짜여지듯 엮어져 있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한 필의 비단은 어떤가. 曹洞의 錦繡와 黙照의 文彩는 설령 千佛이 출세한다 해도 그 가치를 알 수가 없다. 앉아서 六妙門을 잊는 그 자리에서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부처도 접근하지 못하고 조사도 접근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지가 곧 「徹見」의 시절이다. 「微」가 動하기로는 梭와 같고, 「離」가 靜하기로는 機와 같다. 이 機와 梭로 말미암아 洞上의 비단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비단의 문채는 染汚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서 五色․五位․五佛․五智輪이다. 어떤 때는 미륵의 손아귀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수의 머리 위에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僧肇는 「微를 철견하는 것이 佛이고, 離를 아는 것이 법이다」고 말했다.
徹見離微는 法으로서 아래의 金梭玉機는 비유이다. 入離를 철견한다면 외부의 육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순역의 二緣이 녹아 없어지고 애증의 분별이 사라져 出微가 그대로 入離가 되고 入離가 그대로 出微가 된다. 離와 微의 傍參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아래의 비유와 같이 같은 듯 다른 듯 傍提의 관계로 나타난다. 金梭玉機는 베틀의 날줄과 북의 씨줄에 비유한 것이다. 離는 베틀의 날줄처럼 靜하고 微는 북의 씨줄처럼 動한다. 이것이 洞上宗의 비유로서 離의 正과 微의 偏이 서로 宛轉하여 머물러 있지[守住] 않으므로 한 필의 비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玉과 金이라는 말을 쓴 것은 世俗의 機와 梭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宛轉 속에서의 機이고 梭이기 때문이다.

23. 正偏宛轉 正과 偏은 宛轉하고
24. 明暗因依 明과 暗은 서로 因하여 의지한다.

이미 조동의 錦繡綾羅인 이상 그것은 실로 중국 조동선의 비조인 동산의 正偏의 機梭로써 자여진 布가 아니면 안된다. 正은 본체이고 偏은 현상이다. 正은 空하여 有로 발전되어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초인식의 세계로서 暗에 속하고, 偏은 有로서 空을 기본으로 하는 形而下의 萬有이므로 인식의 대상으로서 明에 해당된다. 正位는 空界로서 本來無物이고, 偏位는 色界로서 삼라만상의 형태이다. 그리고 正中之來와 偏中之至는 각각 當位를 고집하지 않고 宛轉하여 結節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속의 상황은 五眼으로도 변별화기가 어려우니 三目으로 어찌 판별할 수 있겠는가. 화엄경에서 말하는 항포법문과 원융사상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고, 반야경에서 말하는 諸相非相의 도리도 이에 의하여 출현한 것이다.
機의 正과 梭의 偏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게 작용하여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宛轉이라고 한다. 宛은 宛曲이고 轉은 循環이다. 곧 回互이면서 不回互를 자재하게 원융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曹洞宗旨의 한 機關이다. 그것이 明의 偏과 暗의 正으로서 서로 因依하여 치우치지 않는 것을 兼到의 本位라고 한다. 곧 正偏宛轉 · 明暗因依가 兼帶로서 현성한 것이다. 이 正偏이란 經緯에 의하여 우주라는 한 필의 布가 짜여진 이상 正偏은 서로 宛轉하고 明暗은 서로 因하여 의지하는 것이다.

25. 依無能所 의지하면서도 능소가 없는데
26. 底時回互 그러한 때가 곧 회호이다.

正과 偏이 서로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正과 偏은 결국 하나로서 正 외에 偏이 없고 偏 외에 正이 없다. 만약 正 외에 偏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적인 일원론이고 초월적인 일신론이다. 불교는 그와 같은 일원론은 아니다.
依無能所는 明이 暗에 因하고 暗이 明에 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能에 의존하는 것과 所에 의존되는 것의 이원적이 아니다. 더 이상의 능소관계가 아니라 宛轉한 傍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底時回互하는 그러한 때에는 어떤 것이 先이고 어떤 것이 後라는 개념이 없이 이것과 저것이 回互한다. 가령 물의 소용돌이처럼 앞뒤가 없다. 다만 물의 소용돌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 물인지 그리고 그 회전은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能所가 宛轉의 상태가 되어 원융한 모습이다. 그러면 의지하지 않을 때는 어떤가. 能은 所에 의지하여 성립되고 所는 能에 의지하여 형성된다. 그리하여 그 근원을 따져가다 보면 본래 동일한 공[一空」이다. 一空은 兩과 같은 것이라서 모두 萬像을 머금고 있다. 이런 까닭에 펼치면 법계를 두루 뒤덮고 거두면 터럭과 실 끝보다도 작다.
이 점은 ꡔ信心銘ꡕ에서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객관은 조관을 말미암아 객관이고,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알고자 하면 원래 그것은 一空이다. 一空은 양쪽에 똑같고 나란하여 萬像(象)을 포함한다」        ꡔ信心銘ꡕ, (大正藏48, p.376下)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段 元是一空 一空同兩 齊含萬像”
요컨대 이 의미는 주관과 객관, 본체와 현상, 正과 偏은 동일물의 兩面觀이기 때문에 양자는 곧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相卽된 상태를 一空이라 하면 어떨까. 그 一空에 正偏이 있고 色空이 있다. 그 一空을 현실의 세계로 보면 바로 거기에 본체의 이상이 있는가 하면 현상의 實義도 있다. 이것이 반야의 空卽是色 色卽是空의 도리이다. 이것이 곧 제26구의 底時回互이다.

27. 飮善見藥 선견약을 마시고
28. 撾塗毒鼓 도독고를 두드린다.

正偏이 回互하고 明暗이 因依하는 조동의 가풍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殺活에 자재하다. 善見藥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공능이 있다. 곧 善見藥은 이 약을 복용하면 죽어가는 사람도 곧 살아난다는 약으로 死가 홀연히 活이 되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선견약이란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즉 「나무왕이 있는데 이름이 선견이다. 그 선견나무왕은 뿌리 · 큰 줄기 · 잎 · 가는 가지 · 그리고 모든 꽃과 과일 · 색 · 향기 · 맛 · 촉감 등이 다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된다」        ꡔ大般若經ꡕ 卷569, (大正藏7, p.941上) ; ꡔ華嚴經ꡕ 卷59, (大正藏9, p.777上)
는 영약이다. 塗毒鼓는 일체를 죽이는 힘이 있다. 곧 塗毒鼓는 이 북소리를 듣기만 해도 곧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북으로서 앞의 先見藥에 상대되는 것으로서 活이 홀연히 死가 되는 소식을 말한다. 곧 경전에서는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독약을 사용하여 큰 북에 바른다. 그리고서 대중 가운데서 그 북을 쳐서 소리를 낸다. 그러면 아무런 생각없이 그 소리를 듣고자 하여 소리를 듣게 되면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다만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게 된다. 그 한 사람은 곧 대승경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ꡔ大般涅槃經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 속에서도 이 경전의 이름만 들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등이 다 사라져 없어지고 만다」        ꡔ大般涅槃經ꡕ 卷9, (大正藏12. p.420上)
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앞의 제26구의 回互의 관념을 연상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飮善見藥과 撾塗毒鼓는 黙照坐禪의 傍提를 나타낸 표현이다.

29. 回互底時 회호하는 때는
30. 殺活在我 살활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

제29구는 앞의 底時回互와 같은 의미로서 묵조삼매이고, 제30구는 善見藥과 塗毒鼓를 가지고 殺[黙]과 活[照]을 자유자재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말한다. 黙과 照가 黙이 黙에만 떨어지지 않고 照가 照에만 떨어지지 않는 도리를 回互底時의 正按과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가운데 은밀하게 진리를 현성시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살활자재가 묵조삼매에 든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통의 예는 다반사이다. 兢伽神女는 萬里에 떨어져 있어도 땅강아지와 개미가 싸우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고, 阿那律陀는 千山이 막혀 있어도 또한 나방유충과 파리가 춤추는 것을 보았다.

31. 門裡出身 門裡에서 몸을 벗어나고
32. 枝頭結果 가지마다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용이하게 살활자재함을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제31구는 옛말에 「門裡에서 몸을 벗어나기는 쉬워도 身裡에서 문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의미를 응용하여 용이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드러낸 용어이다. 門裡란 일체제법이고 出身이란 그 제법에 오염되지 않는 것으로서 향상의 極地이다. 이미 불도수행에 의한 향상의 極位에 도달하면 주관에 객관에 끄달리는 분별취사에 빠지지 않고 일체를 여실하게 인식하는 곳에 제법의 실상이 나타나 일법 일법이 모두 중대한 의의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門裏出身은 雲居道膺의 「得者는 사소한 것[微]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明者는 用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識者는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解者는 厭惡가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면 貧寒하고,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면 부귀하게 된다. 門 속에서 身을 벗어나는 것은 쉬우나 身 속에서 門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動하면 천 길 땅 속에 몸이 묻히고, 不動하면 그자리에서 곧 싹이 튼다. 一言을 逈脫하면 초연히 卽今의 時를 떠나게 된다. 말은 굳이 많을 필요가 없다. 말이 많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ꡔ五燈會元ꡕ 卷13, (卍續藏138, p.479下)
라는 示衆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빈한하다는 것은 귀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고,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면 부귀하게 된다는 것은 無 가운데에서 홀연히 有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좌선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黙照의 묘용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 「門 속에서 身을 벗어나는 것은 쉽다[門裏出身易]」 이라는 뜻을 취하여 살활이 내 손아귀에서 자유자재하다는 것에 결부시켜 이것을 아래의 「가지 끝마다 열매가 달렸다[枝頭結果]」 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곧 黙照의 공능이 두두물물에 현성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을 비유로써 가지마다 아름답고 충실한 과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과 같음을 말하고 있다. 그 과실 하나하나가 모두 대표적인 가치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枝頭結果는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六根門으로부터 벗어나 色 · 聲 · 香 · 味 · 觸 · 法의 六塵에 대하게 될 때 非思量에 안주하게 되면 全身의 출입이 根에도 塵에도 떨어지지 않아 塵塵法法에 모두 全體現成을 말한다. 곧 가지 끝마다 과일이 익어가는 것과 같다. 원래 나무 한 그루는 이 열매 하나의 전체현성으로 根莖枝葉이다. 곧 黙照의 傍參을 말하고 있다.

33. 黙唯至言 黙은 지극한 언어이고
34. 照唯普應 照는 널리 응한다.

이미 그렇다면 黙照禪의 黙은 소극적 표현이 아니라 黙이 도리어 뇌성과 같이 지극히 적극적인 내용을 불러일으키는 至言이다. 비로자나금강여래의 설법 속에는 온갖 삼매 속에 묵묵하게 응주[黙然而住]해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그 黙然이기도 하다.        ꡔ一切如來金剛三業最上秘密大敎王經ꡕ 卷7, (大正藏18, pp.505下-506上)
따라서 佛語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서 금강여래의 말은 이른바 언성이 없음을 말한다. 다만 마음으로 묵연할 뿐이다. 바로 이 보리심은 본래 色相이 따로 없는 법을 가리킨다. 이것이 아래의 「照는 오직 널리 응하여 비추는 것을 말할 뿐이다[照唯普應]」 에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 黙으로부터 드러난 照는 지극히 보편적인 應現性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照唯普應은 위의 黙唯至言과 짝을 이루어 黙은 言의 黙이고 照는 應緣의 照임을 말한 것이다. 곧 앞의 ꡔ大乘起信論ꡕ에서 법계를 두루두루 비춘다는 뜻을 근본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근본 이래로부터 性은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性 그 자체에 대지혜의 광명의 뜻과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과 진실하게 아는 뜻과 자성이 청정하다는 뜻과 常樂我淨의 뜻이 있다」        ꡔ大乘起信論ꡕ, (大正藏32, p.579上)
곧 黙照의 樞機가 宛轉 속에서 密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ꡔ起信論ꡕ의 離言眞如와 不變眞如를 제33구에, 그리고 依言眞如와 隨緣眞如는 제34구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35. 應不墮功 應해도 功에 떨어지지 않고
36. 言不涉聽 言에 대하여 聽이 간섭받지 않는다.

제35구 應不墮功은 照할 때는 盡十方法界에 두루 應하면서도 조금도 功에 떨어지지 않는 無作의 妙用으로서 아래의 言不涉聽과 호응관계를 이룬다. 곧 功用이 자연스러우면 그 공은 곧 無功(用)의 大功(用)이다. 제36구 言不涉聽는 우레와 같은 말이더라도 肉耳가 아닌 心耳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黙할 때는 大千世界에 두루 울려 퍼지는 大雷의 설법이면서도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소위 洞山良价의 悟道頌에서 말하는 「눈으로 소리를 듣는 마음[眼處聞聲]」 바로 그것과 같다. 이 도리는 版齒生毛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춘하추동이 허공을 무너뜨리고, 궁상각치우가 風水를 노래한다. 그러므로 「물새가 나무에서 念佛하고 念法한다」고 말했다.

37. 萬象森羅 삼라만상이 모두
38. 放光說法 빛을 내어 설법하여

만약 心耳와 心眼으로 듣고 본다면 유정과 무정이 모두 道를 설하고 一草와 一木도 모두 불광명을 내는 줄을 알 것이다. 이 萬象森羅는 體이며, 아래의 放光說法은 그 用으로서 위에서 言不涉聽이라고 말한 이유는 삼매에 들 때에는 삼라만상이 쉼없이 그 본체로서의 位를 互融하면서 放光說法을 한다. 그리고 放光說法은 위의 만상삼라가 주야로 대광명을 내어 팔만사천 다라니문을 설하는데 그 광명은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그 설법도 귀로는 들을 수 없음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이것은 깨침의 分上에서 일어나는 黙과 照의 正按이기 때문이다.

39. 彼彼證明 서로가 증명하고
40. 各各問答 각각이 문답한다.

우주는 하나의 법계이다. 일법 일법이 모두 等質 等價値한 존재이다. 마치 무수한 보배가 연결되어 있어 서로가 빛을 비추듯이 事事無碍한 묘미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만상이 설법하면 삼라가 듣고 삼라가 설법하면 만상이 들으며, 산의 설법을 바다가 듣고 바다의 설법을 산이 들으며, 모기의 설법을 개미가 듣고 개미의 설법을 모기가 듣는 것을 말한다. 一塵도 설하지 않음이 없고 一塵도 듣지 않음이 없다. 곧 恰恰相應하는 黙과 照의 傍提를 말한다. 따라서 산이 물으면 바다가 답하고 바다가 물으면 산이 답한다. 이런 것은 塵塵法法이 모두 같다. 이것은 곧 「부처가 설법하며 보살이 설법하고 국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十方三世 一切가 설법을 한다」        ꡔ華嚴經ꡕ 卷33, (大正藏9, p.611上)
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洞山良价의 「寶鏡三昧歌」에서 말하는 鼓唱雙擧의 뜻도 이러한 의미이다. 위의 彼彼證明과 함께 현성공안을 傍提와 함께 傍參을 말한다.

41. 問答證明 서로 문답하고 증명하는 것이
42. 恰恰相應 딱 맞게 상응한다.

恰恰은 心을 활용하는 모습을 말한 것으로 사물에 대하여 적절하게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一事와 一物 사이에도 하등의 우열이 없고, 낱낱 우주법계의 구성요소로서 完全하게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피피증명과 각각문답을 이어받아 이 문답증명은 그 問과 答이 조금도 차별이 없어 마치 函蓋처럼 딱 들어맞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黙照에서의 묵과 조가 서로 宛轉한 回互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恰恰相應은 앞의 問答證明이 黙과 照의 宛轉한 回互임을 현성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서 恰恰相應은 곧 黙照의 傍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恰恰相應은 黙照에서의 用心의 모습에 주목하여 心과 心이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음을 말하는데 그런 까닭에 상응이라고 한다.그리하여 函과 蓋가 一合하고 箭과 鋒이 相拄하는 도리를 사사무애법계라 이름한다. 28대 조사가 모두 提綱한 것으로서 言과 黙으로 복장하지 않은 바가 없다.

43. 照中失黙 照에 黙이 없으면
44. 便見侵凌 곧 侵凌을 받는다.

이상은 黙과 照가 回互한 것으로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장애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영악하게 잘못 흐르는 것과 같다. 黙의 존재가치를 말한다. 이 照中失黙과 아래의 便見侵凌은 瑕[흠이나 허물]를 警戒시키는 구절이다. 즉 黙照의 좌선에서 照가 黙을 상실한 照라면 그 照는 虛像으로서 邪魔와 같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위의 照中失黙은 洞山良价가 말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        「寶鏡三昧歌」, (大正藏47, p.515中)
과 같다. 여기에서 侵凌은 邪摩가 얼굴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45. 證明問答 서로 증명하고 문답하는 것이
46. 相應恰恰 딱 맞게 상응한다.

이 證明問答과 相應恰恰은 위의 問答證明과 恰恰相應을 뒤집어 보인 것으로서 서로 그 의미가 같다. 곧 黙照에서의 黙과 照의 宛轉한 回互를 말하는데 아래의 黙中失照를 이끌어내기 위한 암시를 주고 있다.

47. 黙中失照 黙에 照가 없으면
48. 渾成剩法 어지럽게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黙과 照가 회호하는 것으로서 照 없는 黙은 마치 지혜가 없는 黙과 같아서 헛된 노력이 되어 결과가 없는 것을 말한다. 照의 존재가치를 말한다. 47. 48.은 43. 44.와 함께 黙照의 互融을 말한 것이다. 黙中失照와 渾成剩法은 앞의 照中失黙하면 便見侵凌한다는 것과 구조의 관계는 같지만 그 내용은 반대이다. 즉 黙照 가운데에서 照를 상실한 黙이라면 그것은 바로 大慧宗杲가 비판한 黙照邪禪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黙과 照의 좌선에서 黙과 照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黙照라면 아래에서 말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照中失黙과 黙中失照는 좌선에 있어서 서로 宛轉한 傍提의 관계로 작용하고 있다.

49. 黙照理圓 黙照의 도리가 원만하기로는
50. 蓮開夢覺 마치 연꽃이 피고 꿈을 깨는 것과 같다.

黙照의 합일상태를 말한다. 49.는 黙照의 도리를 설명한 法이고, 50.은 黙照의 비유를 설명한 喩이다. ꡔ佛地經論ꡕ에 「一切種智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마치 잠과 꿈에서 깨어난 듯하고, 연꽃이 벙그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좌선에 있어서 黙과 照가 一合하게 되면 그 경지는 圓滿報身盧舍那佛의 경지가 되어 아래에서 말하는 비유와 같이 현성한다. 黙照좌선을 하는 當人의 경지는 곧 蓮이라면 연화를 피우고 夢이라면 꿈을 깨는 경지처럼 위없는 경계가 된다. 그리하여 그 경지는 「불지의 경계는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갖추어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다. 그리하여 一切法과 一切種相에서 능히 스스로 깨달음을 열며, 또한 능히 일체유정까지도 깨닫게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잠에서 꿈을 깨듯하고 蓮이 그 꽃을 피우듯 한다. 그러므로 불지라 한다」        ꡔ佛地經論ꡕ 卷1, (大正藏27, p.291中)
        “佛地境者 具一切智 一切種智 離煩惱障及所知障 於一切法一切種相 能自開覺 亦能開覺一切有情 如睡夢覺 如蓮華開 故名爲佛地”
와 같게 된다. 그리하여 正傳의 삼매에 안주하여 곧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永嘉玄覺이 말하는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        「證道歌」, (大正藏48, p.396上)
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51. 百川赴海 그 모습은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여들고
52. 千峰向岳 온갖 봉우리가 岳을 끼고 솟아 있는 것과 같다.

黙照의 숭고함과 원만함을 비유한 것이다. 불경계는 육도만행이 다 묵조삼매로 朝宗을 삼고, 모든 수행계위도 묵조삼매에 바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黙照의 一合相의 경계가 향상함을 비유로써 예찬한다면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즉 入佛地의 경계는 六道萬行의 百川이 이 삼매의 香水海 속에 흘러들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봉우리가 수미봉을 향하고 있는 바와 같다. ꡔ證道歌ꡕ의 「一超直入如來地」와 ꡔ信心銘ꡕ의 「眼若不眠 諸夢自除」와도 같다. 곧 黙照의 원만함을 표현한 것이다. 온갖 千峰 곧 대승의 수행계위 52位가 이 왕삼매인 수미산 봉우리에 고개숙이지 않음이 없다. 위 百川赴海의 赴와 千峰向岳의 向은 공손함을 표시하면서 다가선다는 의미로서 黙照가 이루어내는 세계에 百千 가지의 三昧가 현성함을 말한다. 곧 黙照의 속성을 傍參으로 나타낸 것이다. ꡔ信心銘ꡕ의 「十方智者 皆入此宗」과 같다.

53. 如鵝擇乳 그 모습은 또한 거위왕이 우유만 가려먹과 같고
54. 如蜂採花 벌이 꽃에서 꿀을 따는 것과 같다.

대혜는 묵조선을 下下의 禪이라 폄하하여 「묵조의 무리는 無言하면서 空空寂寂하여 귀신굴속에 빠져 있으면서 구경안락을 찾고 있다」고 하였고, 혹은 「오늘날 학도자들이 대부분 한정처에 앉아 있기만 한다. 근래 총림에서는 콧구멍 없는 무리들이 있는데 그것은 묵조를 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묵조선을 죽은 선과 같이 좌선을 한다고 하였다.
如鵝擇乳는 鵝王이 우유만을 골라 마시듯 하는 이 구절은 黙照의 功能을 傍提의 입장에서 비유하여 나타낸 것으로서 경전에서 「비유하자면 물과 우유가 같은 그릇에 섞여 있을 때 鵝王은 그것을 마심에 있어 우유즙만 골라 마시고 물은 마시지 않고 남겨 놓는 것과 같다」        ꡔ正法染處經ꡕ 卷64, (大正藏17, p.379下)
        “譬如水乳同置一器 鵝王飮之 但食其乳汁 其水猶存”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如蜂採花는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하는 이 구절도 위의 如鵝擇乳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비유를 인용한 것이다. 위의 如鵝擇乳와 如蜂採花는 삼매의 昏散을 제거한 黙照의 광명은 한 모금의 우유맛을 보는데 있어서도 함부로 선택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며, 벌이 꽃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 색과 향은 조금도 다치지 않듯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재물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마치 벌이 여러 가지의 맛을 끌어 모으듯 하고, 밤낮으로 재물을 늘리기를 마치 개미가 먹이를 쌓듯이 한다」        ꡔ雜阿含經ꡕ 卷48, (大正藏2. p.353中)
        “如是財饒益 如蜂集衆味 晝夜財增長 猶如蟻積堆”
라고 말한다. 黙照의 좌선에 있어서의 주도면밀함을 말한 것이다.
53.과 54.는 이처럼 묵조를 좌선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을 일소시켜 버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묵조좌선은 순수아를 자각하는 佛行의 坐이고, 불성의 광명속에 安坐하는 明朗透徹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굴과 같은 암흑일랑은 눈꼽만치도 없고 깨침에조차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을 자각하는 黙과 照의 세계이므로 坐에 집착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이다. 坐하지만 坐를 잊고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마치 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처럼 用意周到하고, 꿀만을 따면서 꽃의 향과 색깔에 사로잡히지 않는 周到綿密함을 말한다. 이것을 굉지는 「坐處에 갇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55. 黙照至得 묵조의 극치를 터득하면
56. 輸我宗家 우리의 본래고향에 주한다.

묵조의 공부가 원숙하여 그 궁극처에 이르게 되면 실로 불조정전의 왕삼매에 주하는 주인공이 된다. 곧 黙照의 공부는 至極의 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黙照至得의 경지를 터득하여 우리 종가에서 말하는 불조정전의 왕삼매요, 正宗家의 주인이 되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굉지의 말을 빌리자면 구원겁이 무너지고 금시찰나가 부서져야 비로소 삼세제불이 허공에다 鐵船을 띄우는 꼴이다. 이러한 경지가 되어야 黙이 이르고 照에 이르고, 黙을 초월하고 照를 초월한다. 이것을 곧 佛佛要機 祖祖機要라 하였다.

57. 宗家黙照 그 종가에 다다른 묵조는
58. 透頂透底 위로는 가장 높이 아래로는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른다.

종가의 묵조라는 말은 굉지가 得意滿面하게 천하를 삼켜버린 기개를 나타낸 말이다. 透頂透底는 묵조삼매에 들어 있는 자기의 광명이 천지에 충만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가의 가풍인 黙照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 宗家黙照와 아래의 透頂透底는 우리 黙照의 광명이 위로는 有頂天으로부터 아래로는 那落伽에 이르기까지 꿰뚫는 黙照의 密用이 현성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저 有頂天의 가장 높은 꼭대기로부터 나락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일체처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黙照의 功能을 비유를 들어 표현한 모습이다. 경전에서 「여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고 결가부좌하여 無量義處三昧에 드셔 몸과 마음이 움직임이 없었다. …… 그 때 부처님께서 眉間白毫相光을 내어 동방 만 팔천 세계를 비추어 주변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에서 다 그 국토의 六趣衆生을 보았다」        ꡔ法華經ꡕ 卷1, (大正藏9, p.2中)
        “佛說此經已 結跏趺坐 入於無量義處三昧 身心不動 ... ... 爾時佛放眉間白毫相光 照東方萬八千世界 靡不周遍 下至阿鼻地獄 上至阿迦尼吒天 於世界盡見彼土六趣衆生”
라고 말한 경지를 말한다. 또한 「江州廬山圓通崇勝禪院」의 상당설법 가운데 「철저하게 근원에 사무치고 구석구석 應하지 않는 곳이 없다」        ꡔ宏智錄ꡕ 卷1, (大正藏48, p.13上)
는 사람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黙照의 속성을 터득한 주인공의 경계는 아래의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舜若多神 곧 허공신과 같이 온 법계에 전체의 작용으로 두루하여 응용한다. 마치 세존의 미간에서 나온 백호광명이 팔만사천의 온갖 불국토를 비추는 無量義處三昧의 광경과 같다. 이 앞에서는 대혜도 안색을 잃어버렸다. 위로는 有頂天에 이르고 아래로는 阿鼻地獄에 이르는 경지는 시방과 삼세가 築著磕著하여 도무지 송곳 꽂을 곳조차 없다.
그래서 승이 동산에게 “어떤 것이 佛向上事입니까” 라고 묻자 동산은 “佛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운문이 말했다. “명칭으로도 언급할 수 없고 모양으로도 그릴 수가 없다. 그래서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법안이 말했다. “방편상으로 佛이라 할 뿐이다”        ꡔ洞山錄ꡕ, (大正藏47, p.510中)


59. 舜若多身 그 경지는 마치 순야다의 몸이고
60. 母陀羅臂 모다라의 팔과 같다.

순야다와 모다라는 모두 자유자재한 활동을 말한다. 여기에서 舜若多의 몸과 아래의 母陀羅의 팔은 앞의 宗家黙照와 透頂透底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즉 그 우리 종가의 黙照의 가풍의 경지는 舜若多神[虛空身]과 같아서 법계에 두루하고, 母陀羅神의 팔과 같아서 온 몸이 그대로 손과 눈[通身是手眼]이요, 온 법계의 몸이 손과 눈[徧身是手眼]으로 작용한다. 범어 순야다는 허공신이다. 허공으로 체를 삼고 몸이 없이 촉감으로 覺하여 불광의 照를 得하여 바야흐로 그 몸을 나툰다. 범어 모다라는 印으로서 광명진언의 摩訶母陀羅는 大印으로 경전에서는 관세음에게 팔만 사천의 모다라의 팔과 눈 등이 있음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ꡔ楞嚴經ꡕ 卷6, (大正藏19, p.129下)
이 圓照三昧의 공덕이 법계에 두루 應現할 때의 경계를 말한다. 즉 머리[首]의 수는 하나인데 그 하나의 머리에서 팔만 사천의 머리가, 하나의 손[手]에서 팔만 사천 개의 손이, 두 어깨[臂]에서 팔만 사천의 모다라신의 팔이, 하나의 눈에서 팔만 사천의 淸淨寶眼이 각각 나타나서 慈 · 悲 · 定 · 慧 등이 있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자재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이 왕삼매에 안주하는 공덕이 두루 중생의 근기에 感하여 應現하고 이익을 주는 것이 舜若多와 母陀羅의 비유이다. 黙照坐禪에 현성하는 모습은 樞機와 密用의 온갖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묵조삼매의 공덕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나투면서 광대한 이익을 주는 공은이 마치 허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