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2-5 제5주제:滿空의 禪世界와 미래문명의 비전

淸潭 2008. 2. 22. 17:41
 

德崇禪學 2-5 제5주제:滿空의 禪世界와 미래문명의 비전

 

이은윤(한국불교선학연구원 원장)

Ⅰ. 서 언

  만공월면선사(1871~1946)는 현대 한국 불교의 우뚝한 禪匠이다. 그의 선장 다운 진면목은 祖師禪林의 각 가풍을 폭넓게 傳燈하고 있는 광활한 禪旨와 살활 자재한 大機大用의 喝로써 日帝  미나미총독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광활한 滿空禪은 그 선지를 출세간에서 세간으로 끌고나와 독창적인 慧眼의 문명관과 자연관을 제시하는 등 뜨거운 세상구원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흔히 衲子들의 선방 안에만 머물면서 個人濟度의 心地法門으로 일관하기 일쑤인 선을 이처럼 사회화 시켜 세계구원과 社會濟度의 횃불을 밝힌 만공의 선풍은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그는 「3대 발원」의 제3항으로 ‘세계문화 개척’ ꡔ만공법어ꡕ(만공문도회 편), 1982, p.222
의 원력을 서원하는등 남다른 사회구원의 선사상을 전개했다.
  또 그는 「발원문」을 통해 “내부에 부패가 극도에 이르고 외계에 풍운이 또한 시급함” 앞의 책, p.216
을 통탄하면서 正法眼藏에 따른 破邪顯正의 강력한 현실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그가 처했던 일제 식민통치라는 비통한 정치사회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Now), 여기(Here), 자신(Self)의 문제를 우선적 명제로 하는 강렬한 현실구원의 의지를 담은 조사선의 ‘此生成佛’ 此生成佛:금생의 세상 현실 속에서 성불을 이루어 정의로운 불국정토를 건설하겠다는 철저한 頓悟論에 입각한 조사선의 실천불교․생활불교가 전개한 성불론.
이라는 선사상에서 한 티끌도 어긋남이 없는 만공의 선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문은 만공선의 선지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건설되고 있는 뉴 밀레니엄의 인류 문명과 연결시켜 보는 試論이다. 논리의 전개는 우선 만공선을 일별하고 그의 선지와 家風을 브레인스토밍식으로 21세기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서 조명해 보는 귀납적 방법을 택했다. 따라서 문제 접근의 논리상 그의 선지를 깊히 천착하는 게 마땅한 순서다. 그러나 만공의 선사상에 대한 천착은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에 뒤로 미루고 몇가지 특징적인 부분만을 앞세워 그의 선지와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패러다임이 어떤 상관성을 가질 수 있는 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만공의 禪風이 인류문명의 진로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넓게는 동아시아 선사상이 앞으로의 인류 문명사에서 세계구원의 代案思想(Alternative thought)이 될수 있는 가를 조망하는 데 있다.

Ⅱ. 만공 가풍의 특징

  만공의 선지와 가풍은 한마디로 祖師禪 祖師禪:6조 조계혜능대사로부터 分燈禪의 5가7종 개산조들까지 250여년 동안(8세기~10세기중반)중국 선종의 황금시대를 이룬 남종선의 선장들이 超佛越祖의 기봉으로 전개한 선
의 선맥을 傳燈한 돈오 남종선의 정통성을 지닌 禪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공선의 선사상은 남악-마조-백장-황벽․위산-임제․앙산선사로 전등된 南嶽法系의 임제․위앙 宗風과 남전-조주․경잠 법맥의 趙州 禪風이 주류를 이룬다. 이밖에 청원-석두-운암-동산으로 이어진 靑原法系의 曹洞 종풍도 아우르고 있어 가히 동아시아 선불교의 핵심인 남종선의 양대 법맥과 각 종풍의 선법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핵심 선지는 慧能禪의 종지인 무념․무상․무주 頓漸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楊曾文 校寫, ꡔ敦惶新本 六祖壇經ꡕ, 上海古籍出版社, 1995, p.16)
를 더욱 발전시킨 임제종 鼻祖인 황벽선사(?~850)의 선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흔히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무심이 곧 불도라는 '卽心卽佛 無心是道' 但能無心便是究境 供養十方諸佛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任継愈 주편, ꡔ중국불교총서 禪宗編ꡕ 권11, 「傳心法要」 ,江蘇古籍, 1992, p.2
여덟 글자로 요약되는 황벽의 선지는 中唐 조사선의 선학 이론을 총괄한 것이기도 하다. ꡔ만공법어ꡕ의 상당법어․거량․게송․방함록서․법훈등을 관통하고 있는 禪理는 이같은 황벽의 禪法과 일치한다.
  만공선에 녹아 들어와 있는 남전-조주선의 가풍으로는 다음과 같은 단적인 3가지 예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初關 화두와 重關 화두가 모두 조주의 공안인 「萬法歸一 一歸何處(所)」와 狗子無佛性의 「無」자라는 점이다. ꡔ만공법어ꡕ<行狀>, pp.302~305
뿐만 아니라 만공은 <참선정진법>․<無字 화두 드는법>등에서 조주의 「無」자 화두를 그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滿空法語」, p.229, p.236
<禪林稧序>에서는 조주스님을 석존․달마와 같은 성인의 반열 앞의 책, p.208
에 올려 그들의 수행 증득을 모범으로 제시했다.
둘째는 만공의 법거량들 중에는 남전과 조주 父子의 거량과 똑같은 구도를 가진 법거량이 많다는 점이다. 만공이 수좌와 거량한 ‘목욕’ 禪話 앞의 책, p.154
와 매미 소리로 수좌들의 안목을 가린 ‘堪辯蟬子’거량 앞의 책, p.90
은 모두가 남전-조주의 ‘水牯牛 沐浴’ 졸저, ꡔ중국불교답사기ꡕ 권2, 자작나무, 1997, pp.43~44
, ‘南泉塹猫 趙州頭戴草鞋’ 禮山 江峰편저, ꡔ禪宗燈錄釋解ꡕ, 山東人民出版社, 1996, pp.138~140
거량과 동일한 구도다. 거량들이 지향하는 선리 역시 다같이 平常心是道와 分別心 타파를 일깨우려는 조사선의 선법을 설파하고 있다. 유명한 만공의 법거량중 하나인 오대산에서 한암스님과 나눈 ‘台山投石’ ꡔ滿空法語ꡕ, p.101
거량도 평상심을 일깨우고자 했던 남전선사의 ‘擲瓦교足’ 袁賓 편저, ꡔ中國禪宗語錄大觀ꡕ, 百花洲文藝出版社, 1994(3쇄), p.90
화두와 같은 맥락의 구도다.

  만공스님이 오대산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암스님이 산문밖 까지 전송을 나왔다. 앞서 가던 만공이 문득 돌멩이 하나를 주워 가지고는 뒤돌아 서더니 한암스님 앞에다 던졌다. 한암은 그 돌을 주워서 개울에 던져 버렸다.
  만공스님은 혼잣말로 “이번 걸음에는 손해가 적지 않도다”하였다.

  한국 선림에 회자하는 만공과 한암의 ‘台山投石’ 거량이다. 그 구도가 남전 보원선사(748~834)의 ‘척와교족’과 닮은 데가 많다.

  남전이 어느날 밭을 둘러보러 나갔다가 한 중이 있는걸 보고 깨진 기왓장을 던져 그를 때렸다. 중이 고개를 반쯤 돌려 돌아보자 남전은 한쪽 다리를 올렸다 내리고 절로 돌아가니 중이 따라가 가르침을 청했다.
“화상께서 방금 기왓장을 던져 저를 때리신 것은 저를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전이 중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왼쪽 다리를 치켜든 일은 어떠한가.”
  남전이 다리를 들고 내려 入聖(부처)과 入俗(중생)을 연출한 것이나 만공-한암이 겨룬 ‘台山投石’이나 다 같은 소식을 전하는 거량이다. 만공의 선지는 이처럼 조사선이 거듭 설파하는 중생이 곧 부처(衆生是佛)고, 聖俗一如인 回互 自在한 일원론적 선지의 연장선 상에 위치한다.
  셋째는 만공이 역시 남전의 제자인 장사경잠선사(?~868)가 록산사 개당설법에서 설파했던 ‘草深一丈’ 화두를 법문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ꡔ滿空法語ꡕ, p.57, p.138, p.152 禮山 江峰 편저, ꡔ禪宗燈錄釋解ꡕ, 山東人民出版社, 1996, p.229
이 화두는 노자의 진리관인 ‘道可道 非常道’와 상통하는 조사선의 불법진리관으로  불가언설의 불법 妙道를 상징한다. 따라서 만공의 불법관은 현대 서양철학의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도 인정하는 廣域․會域에 속하는 언어도단․심행처멸의 우주밖 진리인 ‘劫外歌’로 수용하는 철저한 조사선의 선풍이다. 景岑과 만공이 ‘草深一丈’ 草深一丈:人爲가 전혀 미치지 않아 풀이 한길이나 자란 天地未分前 태초의 풀숲으로 우주 생성 이전부터 있어온 불법진리를 상징한다. 이같은 究竟의 불도는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不立文字의 세계로 오직 직관적 감지만이 가능한 범부가 성인의 경지에 오른 凡入聖의 세계이며 그같은 불법을 입을 빌어 설명하게 되면 양민이 도둑이 되는 落草爲寇고 聖入凡이 되고 만다.
을 묘도의 불법 진리 설파에 활용한 것은 모방이나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만공의 境界가 남전-경잠의 가풍이 지향한 선지와 같은 것이었다고 봐야 한다.
  만공선에는 이밖에도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영우-앙산혜적선사의 가풍이 짙게 배어있다. 師家와 제자의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가는 父慈子孝하고 體用一如論과 圓相 활용이 뛰어난 위앙종풍은 ꡔ만공법어ꡕ에 ○○ 등과 같은 원상이 10여회나 등장하고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다. 衲子의 제접도 임제 가풍과 위앙 가풍이 병존하면서 때로는 과격하지만 또 때로는 아주 자상하고 사제간의 知音이 물흐르듯 막힘 없이 흘러간다.
  또 주목을 끄는 대목의 하나는 師家와 도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동종 개산조 洞山의 가풍인 師友倫理學이다. 이처럼 만공선은 임제 정맥의 6조 혜능-남악-마조-백장-황벽․위산-임제가풍과 조동 가풍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필자가 만공 가풍의 특징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그가 거듭 강조하고 있는 師友倫理論과 다른 선지식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人格論, 風狂의 철학(喝), 文明觀, 자연관이다. 또 만공이 木鳥․鐵牛․石虎등을 통해 선지를 갈파하고 있는 ‘逆說의 논리’와 창의력 강조도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과 관련해 조명해 보고자 하는 대목이다. 역설의 논리는 조사선의 선장들이 흔히 언어도단의 선지를 설파하고자 하는 데 줄겨 활용한 선학 논리의 특징인 ‘초논리의 논리’이고 창의력과 직관력 고양도 곧 선수행의 핵심 내용이다. 만공선에도 역시 이같은 조사선의 가풍이 그 저류를 도도히 흐르고 있다.

Ⅲ. 道伴윤리와 근대 民間會社

  선림의 師弟관계와 도반의식은 혈연관계를 넘어선 것이면서 학업의 탁마와 피부접촉(Skinship)의 공동생활에서 피를 나눈 부자관계나 형제애 이상의 믿음과 우정을 갖는 특이한 전통적 師友倫理다. 이같은 선가의 도반의식이 근대 산업사회 회사제도 성립의 윤리적 바탕이 됐다는 선학계의 견해도 있다. 특히 선림의 도반의식은 과거 혈연관계 중심의 노동력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대기업의 대량 고용에서 심리적인 믿음의 윤리를 제공해 사돈의 8촌을 넘어선 전혀 일면식도 없고, 피 한 방울 섞이지도 않은 他人을 믿고 고용할 수 있게 했으며 사내 직원간의 유기적인 신뢰관계와 동지애를 이끄는 중요한 動因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선가의 師友倫理는 사회적인 일체 관계를 초월한 최고의 윤리로서 후대에 출현한 각종 會社와 민간의 비밀 結社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杜繼文․魏道儒, ꡔ中國禪宗通史ꡕ, 江蘇古籍出版社, 1995, pp.336~337
는 견해는 크게 괄목할 만한 사회학적인 선불교 조명이다.
그러면 우선 만공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師家와 도반의 중요성을 살펴 보자. 그는 「발원문」에서 네가지 중요한 은혜(四重恩惠)의 하나로 ‘도반’을 나라․부모․施主등에 포함시켜 제시하면서 ꡔ滿空法語ꡕ, p.218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강조했다. 이어 「四弘誓願」에서도 “서로 탁마하는 대중의 은혜” 앞의책, p.219
를 일깨워 역시 도반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만공의 도반윤리론은 「法訓」편의 <참선법>장에서 절정을 이루어 견성의 3대 조건으로 道場․道師와 함께 도반을 제시하면서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 보다도 강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앞의 책, p.253
.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만공의 가풍은 도반을 견성의 3대 요건으로 까지 중시한다. 만공이 도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 밑바닥에는 당연히 혈연관계의 형제애를 능가하는 師兄師弟간의 사랑과 믿음․탁마 같은 선림 傳來의 윤리의식이 전제돼 있다고 봐야 한다.
  승려가 되고자 부모 형제는 물론 때로는 처자 까지의 모든 세속적 혈연관계와 일체의 사회적 반연을 끊고 집을 떠나는 것을 ‘出家’라 한다. 그래서 出家僧은 세속의 혈연관계 상징인 姓氏도 버리고 석가모니의 ‘釋’씨가 되거나 竺大仙(석가모니의 별칭)의 ‘竺’씨가 된다. 선종에서는 따라서 성씨가 하나로 통일돼 있기 때문에 통상 법명만을 사용해 오고 있다. 이처럼 승려의 출가는 세속 문제아의 ‘家出’에서 글자를 한자 뒤집은 것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객소리를 한마디하고 넘어 가자면 자타가 공인하는 선종인 우리나라 불교 조계종단이 근래 대덕들까지도 흔히 속성을 법명 앞에 붙여 사용하는 데 출가의 의미와 오랜 선림의 전통에서 볼 때 크게 잘못된 作法이 아닐 수 없다.
  출가자들이 모인 僧伽는 전혀 혈연관계와 知面識이 없는 남남의 집합체다. 그러면서도 승가 공동체가 세속 가족관계 이상의 윤리의식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師友윤리 때문이다. 세속 형제애 이상의 믿음과 우정을 갖는 도반윤리는 참으로 경탄할 만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전혀 남남이면서도 서로를 의지하고 이끌어 주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도반의식은 어떠한 윤리적 가치 보다도 고귀한 것이며 선림에서 ‘진리의 길을 같이 가는 반려자’인 道伴들이 다져 온 값진 전통의 하나다.
  이러한 도반윤리가 인류 문명사에 끼친 심대한 영향중의 하나가 바로 근․현대 산업사회에서 경제 주체의 하나로 각광을 받아 온 民間會社의 타인 고용과 직장윤리 확립의 기초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과거 농경시대의 경제 규모에서는 자녀를 많이 낳고 혈연관계를 동원하는 등의 수단으로 노동력을 해결했다. 그 밑바닥에는 남은 믿을 수 없고 피붙이라야만 신임할 수 있는 인지상정의 원초적인 인간 본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식당․술집같은 소규모 자영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흔히 카운터를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가족이나 피붙이를 앉혀 금전 출납에 대한 심적인 신뢰감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러나 농업 중심의 산업사회에서도 장원경제체제가 생겨나고 나아가 대량생산체제의 근대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경제 규모가 크게 확대되자 혈연관계 만으로는 노동력을 해결할 수 없는 대기업과 각종 회사가 출현했다. 이러한 대기업들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고용해 믿고 하루에도 수백억원씩 출납되는 금고를 맡기고 전혀 남남이 모인 회사 조직을 받쳐주는 社友愛와 운명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워야만 했다. 서양 경제학은 이런 문제들을 계약사상과 법에 의한 기강으로 해결해 왔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심리적 측면의 신뢰관계 까지를 완전 해결하긴 어렵다, 바로 선가의 도반윤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상적 寶庫가 되기에 충분했고 구체적인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수 있었다. 

  1990년대말 IMF사태가 아시아를 강타할 때 서양인들은 아시아 경제의 병폐 중 하나로 혈연자본주의을 질타했다.
  동아시아인들의 인생과 철학․종교가 어우러져 빚어낸 선사상은 오히려 서양보다 철저한 脫혈연주의가 도반윤리를 통해 오랜 전통을 이어 왔다. 그리고 師友倫理가 오히려 근대 會社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면 오늘의 아시아 혈연자본주의는 훌륭한 전통을 져버린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선림의 師友倫理學은 조동종 개산조인 동산양개선사(807~869)가 남달리 강조한 조동 가풍의 특징이기도 하다. 선가의 도반윤리는 “산속 선승 집단에 도적․불순분자등이 들어와 선승들의 遊歷에 편승하는 폐단을 막기위해 스승을 택하고 친구를 사귀는 데 유의해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 杜繼文․魏道編, ꡔ中國禪宗通史ꡕ, 江蘇古籍出版社, 1995, p.238
이 그 출발의 배경이다. 그래서 동산은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는 반드시 좋은 친구와 동행을 하고 머물 때도 반드시 도반을 택해 함께 하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선종의 師友관계 중시 전통은 여기서부터 하나의 새로운 선종 윤리로 정착됐다.
동산의 사법 제자중 한 사람인 운거 도응선사는 ‘마음의 부(心足)’를 요체로 하는 자신의 禪觀을 통해 “다투면 모자라고 양보하면 남아 돈다(爭則不足 讓則有餘)” 앞의 책, p.337
는 心足無爭의 도반윤리와 安分守己하고 少欲知足함으로서 안심입명을 도모하는 사회윤리를 제시했다.
  선림의 도반윤리가 민간의 비밀 결사에 영향을 끼친 점은 크나큰 정치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結社의 생명끈인 비밀과 신의는 곧 도반윤리의 핵심 내용과 일치한다. 결사는 목숨까지를 같이 나눌 수 있는 동지애가 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공의 스승인 경허선사도 구한말 修禪社 결사를 통해 禪風을 새삼 진작시키고자 했다. 한국불교선학연구원, ꡔ德崇禪學ꡕ <鏡虛集>, 대명문화인쇄사, 2000, p.238

  조동 가풍의 사우윤리는 선림 안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동산양개는 晩唐의 정치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이상을 제시했고 그 가풍이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승돼 禪理에 입각한 나름의 사회윤리를 펼쳐 보였다. 민권사상에 기초한 지방자치제와 君臣道合을 통한 ‘상하평등’ 杜繼文․魏道儒, ꡔ中國禪宗通史ꡕ, 강소고적출판사, 1995, p.341
을 핵심 내용으로 한 조동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론 세상과 단절한 선리를 펼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對社會的 발언과 비판을 서슴치 않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했다.
  만공은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실존하는 현실 人身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ꡔ만공법어ꡕ, p.259
관청의 부패와 제국 열강의 침략이 자행되고 있는 국내외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정법안장의 정의구현 의지를 다지는 발원 앞의 책, pp.216~217
을 했다. 만공의 도반윤리 강조는 얼핏 보기엔 선방 수좌들의 수행에만 초점을 맞춘 대내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미나미총독을 면전에서 통렬히 비판한 사실에서 보듯이 그 구체적 내용인 신의와 정의 같은 가치들이 선림 밖 對사회인식으로도 연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경허․만공의 선지를 보다 깊히 살피기 위해서는 글자에 매달리는 逐字的인 해석보다는 이들이 傳燈하고 있는 광활한 조사 선림의 가풍과 연결된 글자 뒤편의 함축된 사상적 心地를 폭넓게 천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만공의 윤리관과 관련해 하나 꼭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선불교 본래면목의 한 축인 ‘실천불교’의 강조다. 그는 「1941년 선학원 고승대회 법어」 ꡔ만공법어ꡕ, p.73
에서 다음과 같은 간곡한 당부를 했다.

  “그러나 듣는 분들이 듣고 실행하면 일언 일구가 다 좋은 법문이 될 것이요, 듣는 분들이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비록 좋은 법문이라도 헛되게 돌아가고 말 것이니, 오직 원컨대 대중은 듣고 실행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평범한 구어체의 법문이고 내용도 승속간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쉽다고 생각하는 ‘당연지사’야 말로 禪家가 거듭 警策해 온 실천윤리다. 선어록에 보면 선불교의 실천윤리를 강조한 「太守危險」이라는 거량이 나온다.
  어느날 항주 자사 白居易가 고산 영복사에 주석하면서 낮에는 늘 소나무위에 올라 앉아 좌선을 하는 牛頭宗의 鳥窠道林선사(741~824)를 참문했다. 백거이가 佛法大意를 묻자 도림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어떤 것이 불법의 근본 대의입니까.”
  “일체의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그건 세 살 짜리 아이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살 먹은 아이도 말은 할 수 있으나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힘들다.” ꡔ禪宗編ꡕ, 권3 <「五燈會元」, 권2>, 강소고적출판사, 1993, p.93


  도림은 당대의 대지식인이고 문장가였으며 선림 거사였던 백거이에게 불교 입문 초보자들도 다 아는 ‘七佛通偈’ 七佛通偈:일명 ‘諸佛通偈’라고도 하는데 그내용은 衆善奉行 諸行莫作 自淨其意 是諸佛敎
의 실천을 강조해 禪法이 지향하는 실천윤리를 일깨워 주었다.
  만공의 평범한 법문은 오늘에도 거듭 되새겨 볼만한 선불교의 실천윤리가 아닐 수 없다.

Ⅳ. 逆說의 논리와 新과학이론

  근래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새 패러다임의 과학 이론과 세계관이 풍미하고 있다. 이들 新과학이론은 정보화 시대라는 새로운 인류 문명사의 흐름과 軌를 같이 하는 것으로 사물을 보는 방법의 근본적인 변화와 패러다임의 혁명을 주장한다. 카오스 이론, 복잡화 이론, 홀로그래피 이론, 사이버 이론등이 이른바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신과학 이론들이다. 대표적 저술로는 토머스 새뮤얼 쿤의 ꡔ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ꡕ, 존 카스티의 ꡔ복잡성 과학이란 무엇인가ꡕ 「문화일보」, 1997년 9월 27일자, 「한겨레신문」, 1997년 12월 9일자.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신과학은 서양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二元論的 논리를 배격하고 고저․장단․빈부․勞使와 같은 상대적 대립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원론적인 통합론을 지향한다. 과학 혁명 구조의 논리적 배경은 ‘逆說’인데 구체적으론 ‘러셀의 역설’이 제시된다. 김상일, ꡔ러셀역설과 과학혁명의 구조ꡕ, 솔, 1997, p.25
상대성이론․퍼지이론․불확정성 이론등 ‘패러다임의 혁명’(Paradigm shift)을 통해 과학의 틀을 바꾼 현대 과학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논리는 모두 러셀 역설이라는 것이다.
  버틀란트 러셀이 스페인 한 마을 우화에서 찾아낸 역설의 내용은 그 마을의 이발사가 선언한 “자기 집에서 자기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만 수염을 깎아준다”는 원칙을 이발사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발사는 자기 집에서 수염을 깎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자기 수염을 스스로 깎아야 하는 모순과 역설이 생겨난다. 즉 깎아야 하면서 깎지 말아야 하는 역설이다. ‘러셀 역설’이란 말은 그가 20세기 초반 수학의 集合論에서도 이러한 역설을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러셀 역설은 거슬러 올라가면 크레타사람의 ‘거짓말쟁이 역설’ 앞의 책, p.15
과 같은 맥락이다. 이 역설은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면 참말이 되는 현상으로 이발사의 경우와 같다. 이는 “甲이면서 동시에 甲이 아닐 수는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정과 부정이 이분법적으로 양립하는 矛盾律과는 전혀 상반된다.
  서양 신과학의 이론적 배경인 ‘逆說’은 동양사상에서는 보편화 된 논리적 배경으로 사용돼 왔고 특히 선불교 선장들은 禪旨를 설파하는 ‘초논리의 논리’로 역설을 자기들의 전유물 처럼 사용해 왔다. 그래서 선어록들은 ‘역설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동양의 道․無․氣 같은 개념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一卽多 多卽一)’며, 生과 死가 같은 것이라는 역설에 그 논리적 기초를 두고 있다. 신과학 이론을 비롯한 20세기 서양 知性史는 異端視 돼온 이같은 역설의 논리에 영향을 입지 않은 분야가 없다. 그래서 카프라․쥬커브등과 같은 신과학운동가들은 현대 과학과 동양 사상을 곧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앞의 책, p.18

  우선 만공선에 나타나 있는 역설들을 몇가지만 살펴보자. 만공은 진흙소(泥牛)․돌계집(石女)․木馬․石虎․귀신 방귀털․똥등과 같은 역설을 통해 有無의 분별을 초월하고자 한다.

  “밤사이 木馬가 못 가운데를 지나니 놀라 일어난 진흙소가 바다의 조수를 뒤집는다.” ꡔ만공법어ꡕ, p.39


  만공의 「돌사람 이마가 깨진다(石人斫額)」는 상당법어의 末後句다. 나무로 만든 말은 인형일뿐 상식적인 추론으로는 연못을 건너갈 수 없다. 진흙소(泥牛) 또한 흙은 물만 닿으면 녹아버리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그 형체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항차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의 조수를 뒤집는다니 기존의 상식과 논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다. 또 돌은 단단하기 때문에 돌사람(石人)의 이마는 깨지지 않아야 하는 게 세속의 상식 논리다.
  그러나 만공은 이 억지 소리 같은 역설을 통해 심오한 선지를 밝히고자 한다. 만공은 여기서 목마․泥牛․석인등과 같은 禪語들을 통해 허망함(空)조차도 없는 有無 분별의 초월을 지향하고 있다.
  만공은 또 「거문고 법문(彈琴法曲)」 앞의 책, p.169
과 「臘月八日」 앞의 책, p.175
이라는 게송에서도 石女․木人․漆(캄캄함)등과 같은 역설을 거침 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퉁기고 있는 거문고 곡조를 “石女心中劫外曲”으로 승화시켜 불법 세계 속에서 노니는 法悅을 드러내 보였다. 석녀는 노래를 할 수 없고 아기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아이를 못 낳는 여자를 석녀라 한다. 그런데 석녀가 인간세계에서 말하는 ‘永遠’을 초월해 있는 불법 진리를 노래하고 있다니 참으로 엄청난 역설이다.
  ‘石女’는 만공의 師家인 경허성우선사의 제2 悟道頌이라 할 수 있는 「題天藏菴(천장암에서)」 世與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人若問鏡虛事 石女心中劫外歌
    (ꡔ경허집ꡕ, 인물연구소, 1981, pp.353~354)
에도 나온다. 깊고 깊은 佛法의 노래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노래를 하지 못하는 돌계집(돌인형)만이 부를 수 있다는 禪家의 心行處滅이며 상식의 논리를 넘어선 초논리다. 진흙소도 또한 경허선사의 상당법어에 「泥牛吼(진흙소의 사자후)」 ꡔ경허집ꡕ, 한국불교선학연구원, 대명문화인쇄, 2000, p.218
라는 제목의 법문이 나온다. 경허와 만공은 진흙소․돌계집등을 통해 “불교는 세상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며, 俗이 곧 眞이요 진이 곧 속이라 진․속이 둘이 아님” ꡔ만공법어ꡕ, p.77
을 설파하고 있다.
  泥牛는 조동종 개산조인 洞山良价선사(807~869)가 師伯 僧密과 함께 행각중 隱山에 산거하는 마조의 제자 龍山선사를 만나 “몇살 때 이 산으로 들어오셨느냐”고 물어 용산이 “나는 세월을 떠나 살기 때문에 내 나이를 모른다”고 대답하니 동산은 다시 “무슨 도리를 터득했기에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묻자 용산이 “진흙소 두 마리가 바다로 들어가는 걸 보았는데 아직껏 소식이 없다” 我曾見兩只泥牛頭入海 直至于今無消息 (胡紹仁, ꡔ洞山禪林ꡕ, 江西人民출판사, 1993, p.29)
는 사자후를 토한 데서 비롯해 선림에 회자해 온 禪語다. ‘石女’도 역시 조동종의 宋代 부용도해선사(1043~1118)가 상당법어에서 “청산은 늘 걸음을 옮겨가고 있고 석녀가 밤에 아이를 낳는다(靑山常運步 石女夜生兒)”고 설파한 데서 유명해진 선가의 역설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는  禪者의 경지에서는 나이니, 세월이니 하는게 결국 물속에서 진흙소의 형체가 없어지듯이 無종跡이며 석녀도 아이를 낳는 역설적인 ‘불가능의 가능’이 실현된다.
  만공은 이밖에도 게송 「침운당 만송」 ꡔ만공법어ꡕ, p.186
․「간월도에서 서산군수에게 게송을 짓고 휘호해 주다」 앞의 책, p.189
․「중되는 법」 앞의 책, p.230
등에서 똥․木馬․石虎․귀신 방귀털과 같은 역설의 선어들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枕雲堂 晩頌」에서 “청정하기는 똥 같은 침운당이여!”라 하고 「중되는 법」에서는 “귀신 방귀털을 먹고 사는 소”라는 역설로서 선사상의 저류를 이루는 ‘汚物의 철학’이 설파해 온 道無所不在論의 ‘佛道 遍在論’과 불법 묘도의 長養法을 설파한다. “똥같이 청정하다”는 논법은 세속 상식의 논리에서는 전혀 모순이며 성립될 수 없는 역설이다. 똥은 오물의 상징이기 때문에 침운당의 계행 청정을 ‘똥’에 비유한 표현은 선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淨穢一如, 聖俗一如의 萬物一體論을 설파하는 만공의 선지는 도의 편재론으로 “온갖 잡풀이 다 부처의 어머니(百草是佛母)” 앞의 책, p.292
라는 法訓을 남기기도 했다. 불이법의 선리는 이처럼 전통적으로 양극단의 상대적 대립을 떨어버리고 中道에 서기 위한 방편으로 暗속에 明을 진입시켜 暗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는 反츤法 반츤법:靜을 강조하기위해 동을 도입시켜 ‘새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산이 더욱 그윽하다는 鳥鳴山更幽와 같이 상반을 대립시켜 한쪽을 강조하는 표현법.
을 구사해 왔다.
  만공은 또 “밝기가 검은 옷칠과 같다”는 역설을 통해 암흑의 진리를 설파하기도 했다.

맺을 때는 石女의 꿈이요,
풀 때는 木人의 노래니라,
꿈과 노래를 모두 버리니,
보름달이 밝기가 漆과 같도다. ꡔ만공법어ꡕ, p.175


  선방 대중에게 결제를 끝낼 때 내린 「解制示衆」이다. 휘영청 밝기만 한 보름달의 광명을 옷칠과 같은 ‘칠흙’이라 했으니 명암분별의 세계를 넘어선 도인의 경계가 아니고서는 知音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귀신의 방귀털’은 선림에 회자해 오는 ‘토끼의 뿔 거북의 털(兎角龜毛)’과 같은 역설의 극치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 게 세상 진리고 상식이다. 귀신 방귀털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묘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유체계에 대한 집착을 떨어버리고 이같은 혁명적인 토끼에게도 뿔이 있는 역설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유를 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오늘의 정보화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변화와 개혁’도 바로 이러한 발상의 전환과 사유체계의 혁명이다.
  오물의 철학을 통해 道의 편재론을 설파한 예는 ꡔ莊子ꡕ <知北遊>편의 장자와 東郭子 문답 張黙生 原著 張翰勛 校補, ꡔ莊子新釋ꡕ, 齊魯書社, 1993, p.480
에 보이고 ꡔ趙州語錄ꡕ에도 똑같은 구도의 조주스님과 제자 文遠의 내기 문답이 있다. 金空緣 편역, ꡔ趙州錄ꡕ, 경서원, 1989, p.477
이밖에 德山․臨濟․雲門선사등 조사선림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똥․오줌과 같은 배설물을 萬法의 근원처요 부처라고 설파하는 역설을 곧잘 구사했다. ‘암흑의 진리’는 동산양개선사가「「君臣五位(일명 曹洞五位)」 頌에서 正(본체․暗․공)과 偏(현상․明․색)이 중심에 도달한 선의 최고 경지인 ‘兼中到’를 “저사람 집에 돌아와 까만 숯 속에 앉아 즐겁다네” 吳經熊, ꡔ禪學의 黃金時代ꡕ, 삼일당, 1983, p.279
라고 노래한 데서 그 역설의 상징성을 잘 드러냈다.
  선은 원래가 역설의 논리로 일관한다. 만공선 역시 역설이 흘러 넘친다. 선은 일상적 추론의 범주를 벗어난 非논리와 배치된 상식을 휘둘러 기존의 사유체계를 파괴하고 진리 접근의 새로운 心眼을 열고자 한다. 특히 조사선 시대에 들어서는 그 ‘역설의 美學’이 절정을 이룬다.
  선은 우리가 사물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를 사물의 논리적 해석에만 매달리는 부당한 집착 때문이라고 본다. 선의 역설은 이분법적인 상대적 분별심에 의존해 사물을 파악하려는 이러한 부당한 집착을 가차없이 일격에 깨부수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은 사람을 역설과 모순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고 그 아성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선적 사유체계를 갖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선어록을 보면 거북의 털․토끼의 뿔․돌계집(石女)․나무새(木鳥)․쇠소(鐵牛)․진흙소(泥牛)․금까마귀(金烏)․세발 당나귀(三脚驢)와 같은 역설적인 용어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禪語들은 허망함(空) 조차도 없는 有無 분별을 초월한 不落空, 不住涅槃을 표현하는 역설이다. 선사들은 ‘石女가 아이를 낳고, 木鳥가 노래를 한다’고 말한다. 세속 논리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石女고 나무새는 결코 노래를 하지 못하는 인형일 뿐이다.
  선은 한마디로 역설의 寶庫다. 그런데 최근 서구에서 新과학이론이라고 쏟아 내는 ‘카오스 이론’, ‘복잡화 이론’, ‘사이버 이론’, ‘홀로그래피 이론’등이 모두 역설의 논리에 바탕하고 있으며 이론 개발의 발상부터가 역설의 논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선은 여기서 또 하나의 새 천년 文明史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 질․량 면에서 서양의 역설이 계곡물이라면 선의 역설은 광활한 大海라고 말할 수 있다. 시쳇말로 서양의 역설은 선의 역설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러셀 역설이나 크레타 역설은 舊來不動如如佛을 묘사한 만공의 역설이나 조사선의 隔下語 隔下語:규격에 들어 맞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역량을 드러내 보이는 格外의 언구.
들에 비하면 빈약하다 못해 차라리 졸렬하다고 할 정도다. 잠시 선림의 역설을 좀 더 살펴 보자.
  위진남북조 시대 梁末의 거사 傅大士(일명 무州善慧)는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空手把鋤頭 步行騎水牛 人從橋上過 橋流水不流(졸저, ꡔ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ꡕ, 자작나무, 1998, p.157
했고 한산과 습득의 이야기들로 널리 알려진 天台拾得거사는 “우물 밑에서 티끌이 일고, 높은 산 위에 파도가 인다” 井底紅塵生 高山起波浪 石女生石兒 龜毛數寸長 欲覓菩提道 但看此榜樣 (金達鎭역주, ꡔ寒山詩ꡕ, 세계사, 1992, p.400)
는 역설의 偈頌을 읊조렸다. 부대사의 게송 제4구와 습득의 게송 「井底紅塵生」은 인류가 5천년 동안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은 ‘물이 흐르고 다리는 고정돼 있다’는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橋流水不流’라는 역설이다. ‘우물 밑 티끌’, ‘산꼭대기 파도’, ‘한치나 자란 거북털’, ‘돌아이를 낳는 石女’등은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任運등등한 절대 자유인이 노니는 광활한 ‘우주’를 내보여 준다. 여기는 세속의 萬法 중 하나인 절대자 까지도 짝하지 않는 초형이상학적인 경계다.
  마조도일대사는 참문 온 수좌를 맞아 마당에 동그란 원(一圓相)을 그려 놓고 “들어가도 맞고 안 들어가도 맞는다.” 이리야 요시다까저 박용길 역, ꡔ마조어록ꡕ, 고려원, 1988, p.226
는 모순의 도가니로 몰아 넣어 학인의 2분법적인 入, 不入의 분별심을 일거에 박살냈다. 또 몽둥이질(棒)로 유명한 덕산선감선사(782~865)는 小參 때 거량하러 나온 新羅僧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신라에서 왔다”고 답하자 “네가 채 당나라로 오는 배에 오르기 전에 30棒을 때렸어야 했다”했고, “대중들에게 옳게 말해도, 틀리게 말해도 30방을 때리겠다” 禮山 江峰편저, ꡔ禪宗燈錄釋解ꡕ, 산동인민출판사, 1994, p.347
는등의 ‘격하어’를 통해 自心成佛의 선지와 시비 분별의 초월을 촉구했다.
  모두가 기찬 역설이요 상식을 어리둥절케 하는 모순의 도가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처럼 역설의 논리가 정보화 시대라는 문명사의 흐름을 이끄는 세계관과 과학 이론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나온 것이라니까 선진 이론이라고 허겁 지겁 받아 들이지 말고 원래 우리의 것이었던 것을 들여오는 逆輸入의 부끄러움을 반성해야 한다. 러셀 역설은 부분과 전체가 혼동되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근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부분과 전체를 혼동한 논법의 역설을 즐겨 사용한다. 러셀 역설과 ‘한국적인 것=세계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곧 ‘一卽多 多卽一’이라는 禪理와 石頭希遷선사(700~791)의 「參同契」가 설파한 선학이론의 하나인 ‘부분과 전체는 하나이면서 둘’이 되기도 하는 ‘回互의 논리’ 앞의 책, pp.264~265
와 전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선학과 참선정진은 이제 고요한 산사의 선방에 안주해 있을 때가 아니다. 선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류 문명사를 이끄는 이데오르기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상적 보고다. 그리고 선은 한․중․일 동아시아가 그 본산이며 우리의 것이다.
  최근 한국 경영학회에서도 러셀의 역설과 한국적 경영을 연결시켜 한국 기업의 경영상의 문제점을 진단한 바 있다. 김상일․이장우, ꡔ한국기업의 변화와 혁신」, 다산출판사, 1997, p.115
지금까지 우리가 금과옥조로 준용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로 사고하는 한 우리는 결코 높은 의식에로 向上一路의 상승을 할 수가 없다. 찰스 핸디는 “다가 올 미래의 예측과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逆說의 사고가 필요하다” 김상일, ꡔ러셀과 과학혁명구조ꡕ, 솔, 1997, p.28서 재인용
고 강조했고 김상일교수(한신대)는 “21세기는 역설을 아는 자가 역사를 향도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는 확신을 피력하고 있다.
  선은 이제 ‘행동하는 말씀(Logos of Praxis)'으로 社會化 돼야 하며 문명의 수레바퀴를 이끄는 法輪을 굴려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선리가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인류 문명과 軌를 같이 하고 있는 예는 역설의 논리 외에도 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문명사의 흐름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서양이 그 원리를 원용해다가 전개하는 이론을 수입하는 데 급급한가.
  우리가 그처럼 멸시하고 배척운동 까지 벌이던 巫俗을 서구 민속학도들이 필드 워크해다가 ‘굉장한 것’이라고 하자 뒤늦게 얼싸 안은 愚를 다시 범해서는 안된다. 필자를 포함한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불자들의 각성이 시급한 오늘이다.

Ⅴ. 창의력과 정보화 시대

  선수행의 구체적 내용은 창의력과 직관력의 고양이다. 돈오 견성을 위한 참선 정진이 지향하는 바도 부처님의 앉은 자세를 닮은 가부좌에 있는 게 아니고 창의력과 직관력을 키우는 思惟修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좌선의 실천 목표인 內面自證을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나는데 필요한 ‘자기성찰’의 핵심 요소는 창의력과 직관력이다. 따라서 頓悟란 고양된 창의력과 직관력의 폭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로 특징 지워지는 우리가 진입한 21세기의 핵심 요소도 창의력과 직관력이다. 정보 산업의 세계적 선두 주자인 미국 MS그룹 회장 빌 게이츠와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는 일본 孫正義 소프트뱅크 사장은 많은 초청 강연과 언론 인터뷰에서 ‘아이디어와 감수성’이 정보화 시대의 핵심 요소임을 거듭 강조해 오고 있다. 아이디어와 감수성은 말을 바꾸면 창의력과 직관력이다. 이처럼 선수행의 핵심 내용과 정보화 시대의 핵심 요소가 일치한다. 인류 사상사에서 많은 철학과 사상이 창의력과 직관력을 강조해 왔지만 선 만큼 깊히 천착하고 실천한 예가 없다.

∙∙
  만공은 면면히 이어져 온 조사들의 혜명을 傳燈하는 한편 뛰어난 자신의 창의력과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거량․방함록등에서 보여주고 있는 ․등과 같은 원상은 필자의 좁은 식견으론 아직껏 선종서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理事無碍의 도리를 설파하기 위해 남양혜충국사(?~775)가 개발해 활용한 이래 97종(일설에는 1백 27종)의 원상이 혜충의 제자 탐원응진과 위앙종 개산조 앙산혜적선사-신라 오관산 요오順之선사에게 전승돼 한․중 선림에서 널리 활용돼 왔으나 구체적인 원상의 활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현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牛․日․◓․◒․●등이 전해 오는 정도다.
  만공은 또 ‘祖師西來意’를 묻는 대은수좌의 거량에서 “이 자리는 한암과 상로의 자리가 아니니 대은이 의심하는 바를 물음이 옳다” ꡔ만공법어ꡕ, p.116
고 힐난하면서 독자적인 창의성을 촉구했다. 그의 창의력 강조는 보월수좌와의 거량에서 절정을 이룬다
  만공은 부산 운수수좌의 ‘三世心不可得’에 대한 거량 편지를 받고 “위음왕불 이전에 이미 설해 마쳤느니라”는 답서를 써놓고 제자 보월수좌에게 보여주자 보월은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 정경을 바라 보고는 통쾌히 웃으며 “보월! 오늘에야 자네한테 밥값을 받았네”라며 기뻐했다. 앞의 책, pp.143~144
‘飯価收穫’이라는 이 거량은 참으로 父慈子孝하고 뚜껑이 상자에 딱 들어 맞는 선법일 뿐만 아니라 선의 핵심 내용인 창의력을 소중히 여긴 일화다. 선림에 우두종의 경산법흠선사가 마조로부터 백지에 둥근 원 하나만 그린 편지를 받아 그 안에 점을 하나 찍었다가 혜충국사로부터 “법흠이 마조 한테 속았다”는 평을 들은 ‘書中一圓相’ 졸저, ꡔ중국선불교 답사기ꡕ 권2, 자작나무, 1997, pp.132~135
이라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뛰어난 원상 활용을 그 가풍으로 했던 위앙종의 위산선사가 제자 앙산에게 왕경초거사로부터 받은 ○을 그린 편지를 보여주자 앙산이 종이를 꺼내 원상을 그리고 그안에 날일자(日)을 쓴 후 일어나 발로 쓱쓱 문질러 버리자 위산이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는 이야기 앞의 책, pp.132~135
도 있긴 하다.
  만공과 보월의 거량이 외형적으로 비록 전해 오는 선림의 일화등과 같다 하더라도 만공은 여기서 四句百非 四句百非:선리를 설파하는 변증법의 하나
를 떠난 창의적인 보월의 행동 언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점에서 혜충과는 전혀 다르다. 어쨌든 만공은 제자들에게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창의력 배양을 거듭 촉구했고 경책했다. 직관력은 만공선의 저류를 관통하는 혈관이다. 선지식들의 모든 선문답과 법문에 동원되는 언어 표현 속에는 시종 직관력이 放光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천 5백년 동안 동아시아 선림에서 山寺의 허공을 진동시킨 고함(喝)과 계곡을 울린 몽둥이질(棒)도 어찌 보면 운수납자들의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시키려는 자비로운 가르침이었다. 이처럼 선이 갈구해 마지 않은 창의력과 직관력이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핵심 요소로 거듭 거듭 강조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이 원래 그러해야 하는 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건, 필연이든 간에 선학적 입장에서는 주목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정보화 시대’로 특징 지워지면서 급격한 변화와 개혁의 폭풍우를 몰아치고 있는 21세기 인류문명은 20세기 현대문명의 後期산업사회와는 전혀 질과 양을 달리하는 패러다임이다. 그 변화가 가히 충격적일 만큼 급진적이며 광범하다.
  후기산업사회의 少品種大量生産체제는 주체적 개성을 강조하는 문명사조를 따라 하루 아침에 휩쓸려 내려가고 多品種少量生産의 다양화 시대로 바뀌었다. 대량생산체제의 와해는 위성방송의 등장으로 매스콤, 특히 TV에서도 다채널 시대가 열려 실감케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기존의 주식시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는 해가 되고 벤처 열풍을 탄 코스닥시장이 새로 뜨는 태양이 됐으며 사이버 증권거래 시대가 열렸다.
  이미 계절파괴․유형파괴의 파도가 휩쓸어 기존의 계절감각과 유행감각은 골동품이 돼버렸다. 겨울철의 열무김치․오이소박이와 여름철의 포기배추 김장김치가 보편화 됐고 여름철에도 목이 긴 부츠를 신는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이 유행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러한 모든 변화와 파괴들이 전세계 리얼 타임으로 동시 진행되면서 그 속도가 초고속이다. 정보혁명으로 이제 인류는 ‘匿名의 多數’에서 정보의 바다에 내던져 진 體露金風의 ‘벌거벗은 다수’가 됐다.
  과연 선은 이러한 정보혁명․정보산업 시대에서 전통적인 個人濟度의 벽을 넘어 사회구원 차원의 역사와 인류를 위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 종교적 차원에서 선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상적 代案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도 던져봄직 하다.
  인류 자멸의 공포를 실감시킨 환경오염은 서양사상(기독교사상)에 기초한 현대문명의 종언을 가져왔다. 따라서 새천년의 문명은 자연 親和的이고 인간의 個體性이 보다 강조되는 패러다임의 정신문명과 문화의 세기, 종교의 세기, 철학의 세기들이 전개되리라는 게 미래학자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선은 1천 5백년의 세월에 걸쳐 자연친화와 인간의 개체성 강조를 어떤 사상체계 보다 깊히 천착하고 역설해 온 동양사상의 우뚝한 봉우리다. 한․중․일 동아시아인들의 인생과 종교․철학이 어우러져 빚어낸 선사상은 주관적 唯心論의 최고봉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류 문명사의 흐름과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이든, 인간의 本來面目이 그러해야 하는 필연이든 간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은 최근 구미 선진국에서 21세기 인류문명을 이끌만한 하나의 代案思想(Alternative thought)으로 폭넓게 조명되면서 깊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선에 관한 책들이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신문인 「르 몽드」지의 1면 전단 광고에 몇해 전부터 자주 나온다. 또 최근 독일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서울의 한 신문사 특파원에 따르면 베를린 시내 대형 서점의 종교책 코너에 꽂힌 책의 5분의 3이 선에 관한 책들인데 크게 놀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 禪理가 정신분석학․경영학․스포츠․여성패션에 이르기 까지 응용돼 실용화 되고 있다. 1999년도 겨울 여성 패션의 갈색천, 넓은 깃, 단순한 디자인, 숏커트 머리등은 선의 單純性에 기초한 節制美를 살린 것이었다. 「조선일보」, 2000년 2월 8일자.

  선림의 師家는 창의력이 없는 제자를 결코 印可하지 않는다. 그래서 禪家에서는 제자가 스승 보다 나을 때 인가할 만 하고 제자의 법력이 스승과 동등하면 스승의 德을 半減했다고 한다. 스승의 선지와 선법을 앵무새 처럼 줄줄 외우고 목도장 처럼 빼어 닮은 것만으론 결코 학위를 받을 수도 없고, 수여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독자적인 창의성이 보여야만 학위를 印可한다. 선림의 혹독한 전통이며 오늘의 정보화 시대에 딱 들어 맞는 교육이다.

  “덕산의 법을 이어 받았지만 그러나 덕산을 긍정하지는 않는다.(嗣德山 又不肯德山)” 禮山 江峰편저, ꡔ禪宗燈錄釋解ꡕ, 山東人民출판사, 1996, p.351

  덕산선감선사의 사법 제자인 암두전할스님(828~887)이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하고자 한 사자후다. 그는 또 수좌 시절 동산양개선사를 參謁하고 “동산은 훌륭한 부처이긴 하나 방광이 없다 (洞山好佛 只是無光)” 졸저, ꡔ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ꡕ, 자작나무, 1998, p.288
면서 동산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암두가 말하고 있는 ‘無光’은 곧 독창성이 없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선은 창의력을 생명으로 한다. 그래서 선은 어떤 만트라(mantra)도 가지지 않으며 制式的인 儀式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하다. 禪定型儀禮는 그 바탕에 다양한 개성의 독창성을 수용하는 유연성과 때로는 破格을 흔쾌히 수용하는 공간을 두고 있다.
  위산영우선사를 보좌해 위앙종 개산을 도왔던 영우의 師弟 장경대안선사(793~883)도 독자적인 창의성을 중요시 하는 사자후를 토한 바 있다. 그는 “위산에서 30년 동안 밥을 얻어 먹고 똥을 누웠지만 위산의 선만은 배우지 않았다.”고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자신의 家風을 과시했다.
  成佛에 이르는 길은 오직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외길’이 있을 뿐이다. 만약 그 길이 고속도로 처럼 뚫려 있고 公式 같은 게 있다면 하루에도 수만명의 부처가 생겨날 것이다. 선은 이런 점에서 각자의 독창성을 거듭 강조하고 창의력 고양에 수행의 촛점을 모은다.
  정보화 시대가 그처럼 중시하는 창의력을 선림은 1천5백년동안 金科玉條로 여기면서 탁마해 왔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에 필요로 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선림 ‘역설의 미학’과 창의력 중시 전통은 값진 자산이며 많은 영감을 얻을수 있는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선이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이끌 代表思想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망하는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Ⅵ. 無情說法과 자연친화 사상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을 자랑하지만 自他를 위하여 順用되지 않고, 逆用되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를 주는 것 보다 해독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니, 오직 세계가 자타의 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인 참된 과학 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문명이 사람 마다 마음 속에 건설되어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되나니라. ꡔ만공법어ꡕ, p.272


  만공이 法訓에서 밝히고 있는 문명관이다. 그는 物神合一, 靈肉雙全의 정신문명 우위론을 펼치고 있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은 자연관을 제시한다.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 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多生에 익혀 온 習性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정말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한 것이니,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體達한 후에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自家用으로 삼게 될 것이니라. 앞의 책, p.272


  만공은 이어 “물질과 정신이 합치된 과학자라야 영원의 만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갈파한다.  만공이 자신의 문명관과 자연관을 이같이 명시하고 있는 점은 특이한 예다. 다른 선지식들은 통상 ‘無情說法’등으로 자연경외사상을 강조한다. 만공의 자연관은 인간의 물질적 행복을 무한 보장하리라는 기대에서 정복주의적으로 자연을 무제한 정복하려 하지 말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며 合一하는 길을 찾으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 인류 문명이 직면한 최대 위기는 ‘환경오염․자연 파괴․생태계 훼손’이다. 현대 문명이 20세기말로 종언을 고하고 3000년대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건설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사정도 개발지상주의가 빚어낸 인과응보의 환경파괴가 그 중요 원인의 하나다. 지금까지의 개발지상주의가 인간의 물질적 행복 指數를 어느 정도 높여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빚어진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지도 모를 위협적인 환경 오염을 야기했고 이제는 대기 오염․기상 이변․생활 쓰레기등에서 생생하게 體感되고 있다.
  2000년 1월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의 話頭는 ‘날씨’였다. 3천2백여명의 세계 정치․경제 지도자들이 참가한 세계경제포럼은 향후 10년 동안의 최대 이슈를 ‘기후 변화’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여러가지 대책들을 논의했다. 「중앙일보」․「조선일보」, 2000년 1월 28일자.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려는 개발전략으로 얻은 물질적 풍요의 반대 급부로 나타나고 있는 엄청난 환경 파괴의 재앙을 잠시 살펴 보자.

  1999년 6월의 일이다. 라니냐 현상으로 지구촌 곳곳에 기상이변이 일면서 가뭄과 폭우, 살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중국에서는 20일 동안의 장대비로 2백40명이 목숨을 잃고 농경지 20억평이 침수 됐다. 미국의 동부와 중서부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살인적 폭염으로 17명이 사망했다. 러시아에도 1백년만에 33도를 넘는 무더위가 닥쳐와 1백 50여명이 더위를 피하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 뿐만 아니라 라니냐는 북미의 혹한, 남미의 가뭄, 동남아의 폭우를 불러오고 있다. 라니냐는 남미 적도 부근의 해수면 온도를 3~7도나 높였던 엘리뇨 현상이 빚은 기상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자연의 반작용이다.
  라니냐는 7천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발생시킨 중미(中美)의 허리케인(98년 11월), 미국 중서부 일대의 혹한과 폭설(97년 1월), 유럽의 2미터 폭설(99년 2월), 각 10만명과 25만명의 이재민을 낸 독일과 페루의 폭우(99년 5월)등의 재앙을 불러왔다. 98년의 엘리뇨는 수십만명의 호흡기 질환을 유발한 동남아 산불, 4만5천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미국 플로리다 산불, 1천5백명여명의 사망자를 낸 인도 혹서 등의 기상재해를 불러왔다. 모두가 다 끔직한 재앙이다. 인류의 환경파괴가 빚은 인과응보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와 생태계 변화로 이른바 ‘18세기 질병’으로 치부해 온 콜레라, 말라리아같은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런 전염병은 최근 선진국에서 까지도 발병한다. 기후 온난화와 환경오염으로 바다 속도 산호초 감소 등의 생태계 파괴가 급속화 하고 있다. 미국의 환경학자 크리스 블라이트 박사는 「월드 워치」(1999년 5․6월호)에서 “이같은 생태계 변화는 인류가 저지른 환경오염때문이다”라고 불교의 ‘인과응보(Nemesis Effect)’ 논리를 빌어 설명했다. 그는 기후 온난화와 질소가 질병에 합쳐지면 유행병이 증가하고 콜레라 병균 등이 바다와 배 등을 통해 지구촌에 겉잡을 수 없이 퍼진다고 설명했다.
  91년 수백만명이 감염되고 1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페루의 콜레라를 돌이켜 볼 때 모골이 오싹해 지는 이야기다.
  영국 국영방송(BBC)은 최근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의 빙하 해빙이 빨라져 1만5천여개의 빙하가 40년내에 완전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 원인은 지구 온난화와 한해 1만여명에 달하는 캠핑자들의 자연 훼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단기적으로는 호우, 장기적으로는 수원고갈이라는 대재앙을 몰아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빙하가 수원인 인도대륙의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수량이 급격히 감소할 경우 인도․파키스탄의 5억 인구가 식수원과 농업용수 부족으로 엄청난 생태계 재앙에 직면 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면서 남태평양․인도양의 수면이 상승해 투발루공화국등이 水葬 위기에 처하게 됐고 1백년 내에 대륙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2000년 2월 18일자.


  그래서 21세기 화두는 ‘환경’과 ‘복지’다. 환경 문제는 오늘을 사는 모든 인류의 가슴에 와 닿는 화두다. 요사이는 아파트도 自然親和 아파트임을 강조해 광고한다. 인류가 다같이 공감하는 이 중차대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老莊을 비롯한 동양사상은 대체로 자연을 인간의 상위 개념, 또는 同格으로 보면서 모든 진리의 근원을 자연의 섭리에서 찾고자 했다. 南朝의 玄學과 노장사상이 접목된 선사상 또한 佛道와 자연의 섭리를 동격시 하면서 山居의 樂道를 세속 열반으로 승화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無情說法’이다.
  만공은 「題更進橋」 ꡔ만공법어ꡕ, p.168
․「蘭草讚」 앞의 책, p.170
․「四月八日 枕席吟」 앞의 책, p.173
․「示 飽山禪子」 앞의 책, p.200
등의 게송에서 무정설법을 거듭 설하고 있다.

  “흐르는 물 소리는 조사의 西來曲이요, 너울 거리는 나무잎은 가섭의 춤이로세.”
  “마침내 우짖는 부처의 소리를 토하는구나. 百草가 푸르니 붉음도 알겠노라.”
  “이와 같은 산빛, 달  광명속에 萬像이 나날이 새롭네.”

  만공의 게송들이 읊조리고 있는 ‘무정설법’이다. 그는 법훈을 통해서도 “生死없는 그자리는 有情物이나 無情物이나 다 지녔기 때문에…” 앞의 책, p.247
, “변소에 앉아 있는 동안 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一念에 든다면 견성할 수 있나니라” 앞의 책, p.260
고 설파하고 있다. 만공이 말하고 있는 변소는 無情의 배설물을 떠올리게 하는 오물의 철학이며 ‘君子三上論’과 일치하는 맥락이다. 예부터 馬上(타고 가는 말 위), 枕上(잠자리에 들 때의 베개 위), 廁上(뒤볼 때의 변기 위)등이 군자의 사색 3대 명소로 꼽혀왔다.
  만공의 무정설법이 설파하는 선지는 한마디로 두두물물이 부처 아님이 없다는 一切現成, 곧 現成公案의 세계다. 그는 “소리 소리가 다 법문이요, 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의 眞身이건만…” 앞의 책, p.277
이라고 설하면서 현성공안의 원리를 “불교의 唯心이란 유물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 앞의 책, p.279
이라고 친절히 풀이해 주고 있다. 그는 급기야 “부처를 풀밭 속에서 구하라” 앞의 책, p.292
고 일할한다. 보잘 것 없는 잡풀이 바로 부처요, 부처의 어머니라는 만공의 무정설법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발전시킨 절대 평등의 세계이며 자연경외사상이다.
  ‘무정설법’은 남양혜충국사가 皆有佛性을 발전시켜 처음 설파한 이래 동산양개선사․소동파거사의 開悟 화두로 더욱 유명해졌고 선림에서 널리 참구돼 왔다. 당․송 8대가의 한사람으로 대문장가였고 임제종 황룡파의 거사였던 東坡는 여산의 동림상총선사를 참문, ‘무정설법’ 화두를 받아가지고 돌아 나오는 길에 여산 폭포 소리를 듣는 순간 頓悟해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계곡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이니, 산빛인들 어찌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아니랴.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을,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하게라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을까.” 李淼 楊尙東편저, ꡔ佛禪大智慧ꡕ, 吉林人民出版社, 1994, p.242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동파의 오도송 「溪聲山色」은 계곡물 소리와 산빛에서 불법 진리를 체득한 ‘외마디 소리(見性)’의 구체적 사례다, 석가모니의 8만4천 법문이 곧 계곡물 소리나 산빛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體得하는 순간 터져 나온 동파의 외마디 소리는 자연이 인간의 스승이며 불법의 母胎임을 밝힌 禪詩들 중의 하나다. 역시 宋代 대룡지홍선사도 “울긋불긋 피어 있는 산꽃과 쪽빛 같이 푸른 산속 계곡물(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이 바로 부처의 堅固法身” ꡔ禪宗編ꡕ, 권10 <碧岩集>, p.708
이라고 설파했다.
  任運自然은 선사상을 떠바치는 기둥이며 世俗卽極樂의 삶을 사는 선의 실천구조다. 조사선은 자연과의 合一을 이루는 구체적 사례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平常心是道를 제시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상생활이 곧 불법 진리임을 설파했다.
  만공이 지향하고 있는 了事人․無事是貴人도 자연과 합일을 이룬 사람이다. 단순성을 특징으로 하는 선은 그 속성상 언어 압축의 연금술인 詩와 가까워지면서 偈頌이라는 선시를 발전시켰다. 선의 자연친화사상은 宋代 시문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산수와 자연을 즐겨 노래하는 자연주의 문학에 뛰어난 江西詩派 杜松柏, ꡔ禪門開悟詩二百首ꡕ, 중국사회과학출판, 1993, p.557
를 형성시켰고 그 강서시파가 광대한 선시 장르의 원류가 됐다.
  ‘무정설법’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禪의 자연친화사상은 21세기의 화두인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떠한 이데오르기 보다도 호소력을 가질만 하다 하겠다. 만공선 또한 전통적인 선림의 자연친화사상과 생명경외사상을 담고 있다. 그는 “중은 곤충에게도 대자대비의 用心을 가져야 한다.” ꡔ만공법어ꡕ, p.288
고 가르치고 있다. 만공의 平等心은 미물의 곤충은 물론 草木까지도 그 생명의 존엄성과 부처의 현현인 現成公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百草가 부처의 어머니임을 인정하는 것 보다 수승한 자연경외사상은 없다.
  만공은 또 “土木瓦石이 곧 道” 앞의 책, p.292
임을 설파하면서 “미물을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후일 나도 미물이 된다”는 警句를 발하고 있다. 그는 이어 모든 佛道의 실천을 강조하는 ‘불법 肉化’의 人格論을 제시한다. 만공 가풍의 특징이기도 한 인격론의 실천구조는 無心道人에 귀결된다.
  그는 “허공(自性․自我)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행동을 낳나니라” 앞의 책, p.279
고 갈파해 자성-마음-인격-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구조를 제시했다. 만공은 “神은 아무리 신통 자재한 최고의 신으로 인류 화복을 주재한다 해도 육체를 갖추지 못한 邪” 앞의 책, p.271
라고 선언함으로서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의 신을, 대내적으로는 부처의 神格化를 경계했다.
  그러면 그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불교 인격의 덕목들은 무엇인가. 만공은 “인격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平安을 얻을 길이 없다”는 法訓에 이어 利他行․無事是貴人․無心道人 앞의 책, pp.290~292
을 강조한다. 그는 “함이 없는 곳에서 참으로 일이 이루어 지고, 착함이 있다”는 노장과 맥락을 같이한 전형적인 禪語法과 “무심이 비로자나불의 스승”이라는 직설로서 외형적으론 범부와 같은 삶을 살지만 道法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도인의 通路를 제시했다.
  한마디로 ‘행동하는 인격’은 만공선이 전개하는 인격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선림의 인격론은 황벽희운선사와 재상 배휴의 ‘高僧畵’ 졸저, ꡔ중국선불교답사기ꡕ, 제3권, 자작나무, 1998, pp.33~42
라는 선문답에 보이고 있다. 원래 ‘인격’이란 말은 로마 시대의 법률 용어였다고 한다. 오늘날 보편화된 ‘인격’이란 말속에는 도덕적, 심미적 의미와 모든 역사적 의미까지가 포함돼 있다. 인격은 전혀 객관적 대상화가 되지 않는 자신의 내면적 문제로 귀결된다.
  인격은 여기 또는 저기라는 구체적 장소에 존재하는 게 아니고 행위 속에서, 긴장 속에서, 혹은 충동적 몸짓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인격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결단의 순간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결단에서 가장 공평무사하고, 정의롭고, 진리에 부합해야  고매한 인격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인격의 전제는 바로 나를 비우고 버리는 데서 부터 출발한다. 이점에서 선이 거듭 촉구하는 ‘자아 소멸’은 바로 하나의 훌륭한 인격론이다.
  따라서 만공선의 인격론은 인류의 보편사상과 보편윤리로 수용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물론 만공의 선지를 보다 다듬고 쌀찌워야 하는 전제 조건을 붙여야 한다. 또 그의 인격론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열쇠로 내세울 수 있는 자연경외사상과 구체적인 연결 고리를 명시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웅지를 한번 펴봐야 한다. 문제는 한국불교가 만공의 선사상을 얼마 만큼 천착하고 다듬어 내놓느냐다.
  우리는 급류를 타고 있는 문명사의 전환점에서 문명의 주춧돌이 되는 ‘사상’을 제시할 수 있는 정신적 大國의 웅지를 품어야 한다.

Ⅶ. 결 어

  선사상은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 차원에 머무는 데 만족할 사상체계가 아니다. 그 속에는 동아시아인들의 인생과 철학이 어우러져 있다. 때문에 선사상은 단순한 종교 이상의 내용과 경험칙을 담고 있다. 지금 정보화 시대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사이버 공간도 선이 설파해 온‘眞妄和合구조’의 현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은 지금까지의 개념으론 분명히 ‘가짜 공간’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면서 종래와 똑 같은 효과를 갖는 시장을 볼 수 있다. 장바구니를 들고 걷거나 차를 타며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오던 공간 개념의 장보기가 집안에서 컴퓨터 화면만 보고 주문하면 宅配로 원하는 물건이 집에 배달돼 장보기가 이루어진다. 과거의 장보기가 眼耳鼻舌身意에 의존하는 6識의 감관작용이었다면 오늘의 홈쇼핑은 無眼耳鼻舌身意라는 육신의 주인공인 무의식 속에 內在하는 自性을 통해 장보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짜라고 여겨왔던 무의식 속 감관의 통로가 오히려 6식의 감관작용 보다 더 진짜임을 실감한다. 6식의 감관작용으로는 사물의 극히 외피적인 측면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상대방의 진짜 속마음을 알려면 무의식의 감관을 동원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과 무의식, 진짜와 가짜가 하나로 통일되는 眞妄和合구조의 선적 세계가 나타나고 바로 오늘의 정보화 시대의 총아인 사이버 공간에서의 장보기가 실재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사이버 공간의 등장으로 21세기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됐다. 電子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직접민주주의가 시민의 인격과 議會의 인격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위태롭게 된 代議민주주의를 본래의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로 되살리는 구원 투수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인터넷이 상징하는 메시지의 雙方向性은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기 때문에 고대 아테네의 民會 장소였던 아고라가 바로 사이버 공간 안에서 부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滿空禪이 역설과 圓相을 통해 설파하고 있는 體用一如論이나 부분과 전체가 互換하는 쌍방향성을 강조하는 ‘回互의 원리’ 回互의 원리:석두희천선사의 ꡔ參同契ꡕ 중 ‘門門一切境 回互不回互 回而更相涉 不爾依位住’에서 비롯한 것으로 부분과 전체가 아무런 걸림이 없이 相卽相入하는 호환성을 밝힌 선학이론.
는 21세기 정보화시대의 패러다임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논리다. 또 오늘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논리들이 거슬러 올라가면 선장들이 개발한 선학 이론과 같은 맥락인 경우가 허다하다.
  선은 교육방법 부터가 문답식이며 스승과 제자의 뜻을 쌍방향적으로 개진하려 했다. 그리고 기존의 사유체계를 파괴해 버리고 새로운 사유체계를 수립하려는 격렬한 革命性을 보여주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변화와 개혁도 이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선은 이미 1천5백년 전 코페르니쿠스가 地動說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내보여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橋流水不流)’고 설파했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신봉하는 ‘水流橋不流’의 진리는 지구상의 인류가 정해놓은 언어․문자적 표현 약속에 불과할 뿐이지 寂然無爲한 우주 大道의 본체에서 보면 정반대로 橋流水不流가 절대 진리일 수도 있다는 게 선가의 주장이다.
  만공이 설파하고 있는 ‘無心是道’의 무심은 이제 스포츠에서 까지 그 원리를 실용화 하고 있다. 미국 프로농구(NBA) 시카고 불스팀의 전 감독 필 잭슨은 3연패(1992~1994년)의 위업을 이룩하자 ‘선수 훈련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한마디로 “禪的으로 훈련시켰다” 「뉴스위크」, 1994년 6월 23일자.
고 했다. 필 잭슨감독의 말은 참선을 통해 선수들에게 승부에 대한 일체의 집착과 분별심을 떨어낸 무심의 경지에서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체득시키는 훈련을 했다는 얘기다. 모든 감독과 코치들이 코트에 들어가거든 승부에 부담을 갖지 말고 힘껏 기량을 발휘하라고 말한다. 운동선수의 기량은 승부를 떠나 무심한 상태로 뛸 때 가장 잘 발휘된다는 사실 쯤이야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體得이 되지 않고는 인간인 지라 아무리 머리로, 입으로 다짐을 했어도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승부욕에 구속 당하고 만다. 필 잭슨은 이같은 문제를 선적인 훈련을 통해 해결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카고 불스팀은 선수들의 참선 훈련을 전통화 해 지금도 시합에 들어가기 전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단 1분이라도 좌선을 한 후 코트에 들어선다고 한다.
  이미 서구 선진국에서 먼저 나름으로 연구한 선의 원리들이 정신분석학․경영학․스포츠등에서 실용화 되고 있다. 경영학에서는 선이 강조하는 직관력을 도입한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이 새삼 부상하고 있으며 정신분석학에서는 광범위한 선의 실용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선의 원리들을 보다 광범하게 조명해 새롭게 부상하는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과 연결시켜 代案思想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대한 연구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같은 선의 사회화는 바로 ‘불법의 肉化’이기도 하다. 선은 그 본체가 이미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하는 테두리를 넘어선 사상체계고 철학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결코 外道라고 비판하거나 백안시 해서는 안된다. 선의 心性論․解脫論․本體論․修行論․倫理觀․文學性등은 더욱 깊은 천착을 통해 세속 사회를 이끄는 수레 바퀴를 굴려야 한다. 선의 생활화, 대중화, 사회화, 세계화라는 것도 이같은 내용이 담기지 않고는 한낱 口頭禪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