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2집 제5주제 논평:「만공의 선세계와 미래문명의 비전」에 대한 논평

淸潭 2008. 2. 22. 17:42
 

2집 제5주제 논평:「만공의 선세계와 미래문명의 비전」에 대한 논평

 

권기종(동국대학교 교수)

  <滿空의 禪世界와 미래문명의 비전>이란 이은윤 원장의 논문을 논평하기 전에 두 가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본인은 남의 논문에 대해 논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써 연구한 논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것은 논문을 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논평 자체가 남의 약점을 돌출하고자 하는 저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솔직히 말해서 ‘만공의 선세계’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의 논문에 대해서 논평을 하려면 한 단계 높은 연구가 있어야 정확한 논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논문은 먼저 만공선사의 가풍을 정리하고, 그 가풍의 특징을 통해서 미래세계에 대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도반윤리, 사우(師友)윤리, 실천윤리를 통해서 미래사회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였다.
  둘째는 역설의 논리를 신과학이론과 연관지으면서 역설의 초논리가 미래세계를 어떻게 향도할 것인가를 예측하였다.
  셋째는 창의력이 정보화 시대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 있다.
  넷째는 자연친화 사상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둘로 보지 않는 미래세계의 환경문제의 방향을 정리했다.
  그리고 결론에서 말하기를 ‘선의 원리를 보다 광범하게 조명해 새롭게 부상하는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과 연결시켜 대안(代案)사상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대한 연구작업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같은 선의 사회화는 바로 불법의 육화(肉化)이기도 하다. 선은 그 본체가 이미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하는 테두리를 넘어선 사상체계이고 철학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결코 외도(外道)라고 비판하거나 백안시해서는 안된다. 선의 심성론(心性論)․해탈론(解脫論)․본체론(本體論)․수행론(修行論)․윤리관(倫理觀)․문학성(文學性) 등은 더욱 깊은 천착을 통해 세속사회를 이끄는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 선의 생활화, 대중화, 사회화, 세계화라는 것도 이같은 내용이 담기지 않고는 한낱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논문은 미래사회의 제반 현상에 선사상이 어떻게 적용되고, 또 선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같은 시각은 선이 선방에서만 필요한 것이어서는 안되며, 선이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제시해 주고 있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자의 생각으로는 선이란 인간 개개인의 인성변화(人性變化)를 통해서 보다 질 높은 삶과 문명을 창조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심성변화의 방법으로 화두가 제시되고, 그 화두는 석녀(石女)․목인(木人)․니우(泥牛) 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화두는 왜 역설의 논리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까. 인간심성의 변화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방법보다 논리와 합리를 넘어선 초논리적 방법, 다시 말해서 충격요법이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성장과정에서도 충격을 통해서 발전하거나 변화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면 건강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거나, 멀쩡하던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결과를 받는 경우이다. 이것은 모두가 비논리적 사건이다. 건강한 아버지가 갑자기 죽는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멀쩡하던 자신이 죽을 병이 들었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인생관이 바뀌고 삶의 변화가 있다.
  마찬가지로 선수행에 있어서 화두는 확실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충격요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화두는 유무(有無)가 둘이 아니라거나 일(一)이 곧 다(多)라는 성질의 교리적 설명과는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선을 통한 인성의 변화는 소위 배워서 익혀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데 있다. 선을 통한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가르침을 통해서 습득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지식은 될 수 있어도 삶으로 나타나는데는 한계를 갖는다. 예를 들어 ‘집착을 떠나야 자유로워진다’라는 것을 안다고 집착을 떠난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은 자신의 내면에서 변화를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며, 그러한 내면적 자각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도 창의적인 것이며 또 창의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선수행의 방법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 원용되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들이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나 긴장을 풀기 위해서, 또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의 본질이 경기력 향상에나 효과적인 경영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과거나 현재처럼 미래의 문명이라는 것도 그 시대를 사는 인간에 의해서 영위되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래의 문명을 이끌어갈 인간이 문제가 된다. 과연 바람직한 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점이 미래문명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명사는 아집과 독선, 그리고 이기적 욕망에 의해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수많은 종교 지도자와 사상가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했지만 바뀐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개선해야 할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인간 각자가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인간의 깊숙한 내면 세계를 바꿀 것인가. 여기에 선수행의 위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논자가 지적했듯이 선은 이제 특정 종교의 신행수단이 아니라 탈종교적 인간교육의 보편적 방안이다. 따라서 선의 실천에는 동양인, 서양인의 구별도 없고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차별도 있을 수 없다. 그가 과학자이거나 실업가이거나, 또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거나 간에 그 어떤 사람도 각자의 내면적 자각과 혁신이 없다면 바람직한 미래사회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논자도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만공의 선세계에는 즉심즉불(卽心卽佛) 무심시도(無心是道)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 무심시도(無心是道)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은 도(道)가 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별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일상사(日常事)의 모든 것이 도(道)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공스님의 삶은 생활 그 자체가 도였다. 이것은 선을 통한 깨달음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선의 세계는 도가 현실화된 세계이며, 삶과 진리가 하나된 세계이다. 이 같은 인간의 삶이 미래문명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