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 제3주제 논평:「한국선과 21세기 문화」를 읽고
강건기(전북대학교 교수)
정보통신 혁명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는 이미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이 시대의 한 특성은 논자가 지적하듯이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빠른 속도의 변화이다.
이런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한국불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논자는 오늘의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를 풀어 가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논자는 한국불교의 부정적 요소로 1)도피적 출세간주의 2)현세 긍정주의 3)세속적 권력에 종속된 호국적 전통 4)기복성 5)종단의 조직과 운영상의 허점 6)간화선 우위의 수행전통을 들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중화의 요청이 절실하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대중화의 방법으로 정보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늘에 필요한 정보화는 교설의 전산화나 유통과 함께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의 재해석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 과정에서 타종교, 타학문과의 연계를 위한 배려도 아끼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 한국선과 관련하여 논자는 두 가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교와의 겸수요 다른 하나는 이른 바 선의 과학적 연구이다. 즉, 화두 드는 선이 염불, 주력, 간경과 함께 삼매에 드는 길로 실천되어야 하며, 선 수행의 원리, 좌선의 신체 생리적 효과, 자세와 호흡 등이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자는 논자의 한국불교에 대한 애정과 문제를 풀어가려는 자세에 먼저 경의를 드린다. 그러면서 21세기의 문명과 한국불교, 한국선을 생각하며 이런 점들도 생각될 수 있겠다 싶은 몇 가지 점을 드는 것으로 평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첫째, 새로운 세기에 한국의 선, 불교가 ‘한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역할을 다하기 위해 문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을까? 논자는 문명 자체의 흐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한국 불교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 혹은 적응적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 문명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의 규명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불교 혹은 선은 그 시대적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적응’도 중요하지만 문제의 제기 또한 게을리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평자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생각하게 된다. 토끼 한 마리가 도토리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게 되었다. 잠이 막 들었는데 도토리 하나가 머리에 ‘탁’하고 떨어졌다. 놀란 토끼는 무슨 변이 난 줄 알고 뛰기 시작했다. 그를 본 다른 토끼들도, 또 노루, 돼지 등 다른 짐승들도 함께 뛰었다. 모두 큰 일이 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짐승들의 앞서가기 위한 질주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낭떠러지라도 만나면 줄줄이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사자는 위엄을 갖추고 치닫는 짐승들의 길을 막고 물었다. “너희들 어디를 향해 이렇게 뛰고 있느냐?”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사자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리고 있느냐?” 역시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의 불교, 선은 저 사자의 물음을 오늘의 세계를 향해 물어야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늘의 문명 자체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그 방향 또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문명은 그 고도한 물질적 발달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밖으로는 환경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안으로는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혹자는(예컨대, Alvin Toffler) 정보통신혁명으로 대변되는 21세기에서 그런 문제들은 더 이상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낙관적 견해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이미 심각한 현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원인의 규명과 함께 문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생명을 둘로 보는 이원적 사유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그런 이원적 사유의 전형적인 모습이 서구의 종교요 휴머니즘이다. 인간과 자연, 다른 생명을 다르다고 보고 인간을 위해 그들을 정복, 착취한 결과가 환경, 생태계의 파괴이다. 또 감각‧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개아적 인본주의를 기초로 한 문명이 안이비설신의를 충족시키는 문명이요 그 결과는 본래적인 나, 참나의 상실이다.
평자는 새로운 문명의 모델로 불교의 정토(淨土)를 생각해 본다. 정토는 환경이 청정한 땅이요, 문명도 발달된 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이다.
둘째, 오늘의 한국불교, 선은 ‘하나’인 세계관을 제시해야 한다. 문명의 한계가 이원적 사유에서 초래된 결과라면 새로운 문명의 전환은 ‘하나’인 세계관의 정립으로 가능하다. 즉, 인간과 자연, 인간과 모든 생명들이 본래 하나인 생명이라면 진정한 평화와 공존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선은 바로 그 하나(不二)인 진리, 하나인 생명관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가 실현된 평화의 땅이 정토일진댄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위해 하나인 생명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공(滿空)의 세계일화(世界一花)는 새로운 문명의 기초로 살려져야 한다.
셋째, 한국불교 특히 선은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는 실천으로 오늘의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고 회복하는 일이 한국선의 본령이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기 상실, 인간상실의 병이 오늘의 세계, 오늘의 문명에 깊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국선이 줄기차게 추구해온 깨침을 향한 쉼 없는 정진의 전통은 잘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흘러 넘치는 정보의 물결 속에서 정보 이전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전통이 바로 선이지 않겠는가. 참나의 회복, 말이 끊어진 세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정보를 문명의 이기로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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