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2-3 제3주제:韓國禪과 21세기 문화
심재룡(서울대학교 교수)
1. 변화의 世紀
언필칭 새 천년이라고들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인데도 새 천년이라는 표현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언어의 관습적 쓰임에 무신경하게 반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세기에 밀어닥칠 심상찮은 변화를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천년에 붙이는 다양한 수식어 -정보혁명, 세계화, 대중화, 문화의 세기 등등- 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요컨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변하고 만물이 유전하는 것은 하등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문제되는 것은 변화의 항목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정도와 방식 때문이다. 한마디로 너무나 광범위한 규모로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근 수 십여 년의 변화의 정도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이전 수 천년에 걸친 변화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인류는 이미 자신이 불을 당긴 문명의 산물들이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 점증되는 가속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세기를 저렇게 호들갑스럽게 맞는 연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앞으로 닥쳐올 변화에 대하여 기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변화의 속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과 삶의 양식이 과연 정보화시대의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는 이제 인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과의 법칙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어떤 의지적 힘으로도 쉽사리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 흐름은 단호하며 총체적이다.
그러한 빠른 변화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사실과 자신의 필요 여부를 가릴 겨를 없이 엄청난 경제적 시간적 대가를 지불하면서 물질문명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현대인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년전의 사람들보다 깜짝 놀랄 만치 많은 정보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입문 하나를 열기 위해서 적어도 수십 개의 문손잡이의 구조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업주의 문명의 보이지 않는 거센 물결에 떠밀려 개인용 컴퓨터를 구입하는 일도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일 퍼센트의 기능을 쓰기 위해서 우리는 고가의 컴퓨터를 사야한다. 아무도 변화의 속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앞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웬만한 상상력을 가지고는 향후 2~30년 후의 인류의 보편적 삶의 양식을 예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변화란 대개의 경우 변화하지 않는 무엇을 전제로 한다. 인류 문명의 변화도 그러하다. 蘇東坡는 「赤壁賦」에서 이렇게 읊었다: “변한다는 관점에서는 천지만물이 일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볼 때 세계와 나는 영원한 존재”라고. 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 天地不能以一瞬 將自其不變者而觀之則 物與我皆無盡也
즉 인간 존재가 객관세계와 교섭하는 대자적 관계와 그러한 관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솟아나는 실존적 물음 -나는 누구인가-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포기하지 못하는 질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변화란 같은 과정의 반복이기가 쉽다. 물론 그 주기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법칙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소위 ‘새로운’ 것이란 끊임없이 ‘헌’ 것이 되어 가는 것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요컨대 새로운 세기의 변화와 관련해서 불교가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인간존재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탐구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이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왔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불교가 제공하는 ‘정보’에 일정한 무게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반성적 물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인간조건과 그로부터 배태되는 물음이 있다면, 다른 한 편으로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조건이 또한 존재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변화의 측면을 도외시한다면 인간의 구체적 삶을 떠난 공소한 논의가 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토대는 변화를 기본 속성으로 한다. 따라서 변화를 읽지 못하고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유기체는 생명체이든 문명이든 소멸될 수밖에 없다. 소위 진화란 변화를 탈(乘) 수 있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21세기의 문명이 문명 자체의 논리와 법칙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삶의 양식이 쉽게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해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변화를 읽어내고 또 적응해야 한다. 문화현상의 하나인 불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해 급박하게 돌아가는 벅찬 변화의 어간에서 변화를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2. 정보와 대중화 여기서 말하는 ‘대중화’는 집단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정보의 수집과 확산에 있어서 절대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보에 관한 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대중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정보화사회는 가상공간이 실제공간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개인화를 심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21세기를 급격한 변화의 세기로 규정할 때 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우선 모든 변화는 정보의 양과 속도에 비례해서 촉진된다. 그런데 21세기라고 해서 인류의 정보생산능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보의 디지털화 덕분이다. 정보들이 디지털화됨으로써 정보의 재생 및 처리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또 정보가 광속으로 이동함으로써 정보의 교환 및 공유를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진 전세계 정보통신망의 밀집도에 따라 이 모든 과정은 머지 않아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 정보에 경우, 양적 팽창과 속도의 증가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정보체이다. 즉 정보란 유기체의 질서와 생명현상을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이며 변수이다. 어떤 유기체 내에서 각 기능간의 정보의 흐름이 얼마나 원활한가에 따라서 그 유기체의 물질적, 의식적 기능의 효율성이 결정된다. 인류가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또 다른 종족의 사상과 문화를 쉽게 자주 접함으로써 상호 이해 증진은 물론 인류가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질서를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모든 정보를 보편적 어법과 논리에 입각해서 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러한 정보는 아무도 찾지도 않고 이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난파선과 같이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하게 될 것이다. 불교는 물론, 모든 분과 학문이 자신만의 아성을 깨고 나와 개방적인 자세로 대화에 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대중성의 요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보혁명으로 인해 야기된 급격한 변화의 물결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참다운 의미의 대중화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정보의 가치는 개방으로부터 생겨난다. 과거에 정보가 어떤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 되고 그로부터 특권과 특혜가 생겨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정보가 대중에게 개방되고 대중에 의해 공유됨으로써 정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정보가 대중에 의한 검증을 거쳐 수용되거나 폐기된다는 점에서 대중은 엄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고, 대중은 또한 거의 무제한적으로 대부분의 정보에 접근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보의 부재로 인한 판단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말하자면 정보는 인체를 순환하는 기혈과 같은 것이어서 정보가 제대로 순환함으로써 그 사회 및 사회 구성원인 대중이 건강할 수 있게 된다.
불교의 경우에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불교의 정보화현황은 타종교에 비해 썩 만족스러울 만큼 진척된 것은 아니지만 1999년 말 현재, 야후 코리아에 등록된 1,862 종교관련 사이트 중에서 불교계가 150개인데 비해 기독교계는 1,636개이다.
고려대장경 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려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이 큰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장경의 전산화작업이 끼칠 파급효과 및 현황에 대해서는 최근에 ꡔ한국불교의 정보화의 과제ꡕ의 제하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일련의 논문 및 보고서 참조바람.
그러나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그러한 기본 정보 외에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대중에게 접근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 시대 불자들에겐 정보의 개방화시대의 대중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변화에 맞게 불교를 전승, 유포시키는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된 세 가지 중심 개념은 불교/정보/대중이다.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기존의 연구성과에 근거해서 파악한 후에 그것을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살펴보자. 한국불교와 선불교는 적어도 해방 이후를 다루는 경우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현대한국불교가 선불교 중심으로 자리잡게된 계기를 이승만정권 하의 비구/대처 분규 이후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현대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비젼이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불교의 현재상이다. 따라서 논의 대상을 현대 한국불교 일반으로 통일하되 특별히 선불교 전통에만 관련될 경우에 한해서 따로 명기할 것이다.
3. 현대 한국불교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
모든 문화현상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면, 혹은 부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없다. 부정적 요소는 동시에 긍정적 요소를 품고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듯이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부정적 요소를 일소하고 긍정적 측면을 키워나가자는 식으로 일매지어 말할 수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생겨난 현상이기 때문에 무엇부터 손대야 할 지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법을 제시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정보화/대중화의 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아래에서 부정적/긍정적 요소를 구분한 것은 불교계 안팍에서 통용되는 분류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괄호( ) 안의 내용은 상반된 평가가 가능한 예를 들어본 것이다.
<부정적요소>
*도피적 출세간주의 (청정한 수행가풍과 도량이 유지,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일본불교같은 지나친 제도적 세속화가 둔화시킨 공로가 있다.) → 대중화
*인도적 초월주의를 취하지 않고 중국적 현세긍정주의를 취했다. (불교의 토착화를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 정보의 불균형 및 대중 교육
*세속적 권력에 종속된 호국적 전통 (드물게는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 보살행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대중의 동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일부 권승들의 행태
*현세나 내세 기복적 (기복은 종교적 심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불교의 민중적 토대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기복이 반드시 이기심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 대중 교육
*종단의 조직과 운영상의 허점 (종단의 분규를 양비론적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에서도 대립구도는 있게 마련이다. 분규를 거듭나기 위한 진통으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병은 들었을망정 살아있다는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 대중의 참여가 없는 독단
*간화선 우위의 수행전통 (전통의 계승, 혹은 선가의 말을 빌면 ‘정법’의 선양이라는 덕목이 있다.) → 대중으로부터의 遊離
<긍정적 요소>
*선과 교를 겸수하는 전통 (적어도 현대의 한국선가에서는 청허의 捨敎入禪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 선불교의 정보 부족
*엄격한 승가생활 및 수행전통의 잔존 (불교의 화석화, 형식화, 경직화로 시대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다.) → 대중화
*민중불교 운동의 성과 (사회과학적 방법에 따른 불교교리의 재해석에 따른 무리와 정치성이 실제 해방의 대상인 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호응을 못한 시대적 한계를 노정했다.) → 대중화
*회통적, 원융적 통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이라기보다 불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점복, 기도, 참선 등이 혼재된 신행생활에서는 원칙없는 혼합주의적 측면을 보이고 있기도 한다.) → 대중교육
각 항목에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그러한 장단점들이 일부 혹은 전체적으로 정보화 및 대중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컨대 최근의 조계종사태는 ‘일부’ 권승들의 일탈된 행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대의 모든 사부대중이 그 책임의 일단을 져야하는 것이고, 넓게는 동시대인 모두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적어도 그러한 행태가 가능하도록 방치, 내지는 간접적으로 허용한 대중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의 각성이 촉구되는 것이다.
중국 대륙이 적화되고 나서 불교의 명맥이 사실상 끊어지고, 일본은 또한 지나치게 세속화한 반면, 한국 불교가 순수 비구(니)승가로서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 승가에 대한 평가는 자못 부정적이다. 해방 후 최근 수 십 년간 불교학계는 한국불교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 몰두한 감이 있다. 물론 반성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것인 한 아무리 잦아도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소 답답하게 보이더라도 문제의 소재를 면밀하게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들이 축적되고 대중의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현실화할 수 있는 기연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승가 내외에서 일고 있는 반성의 목소리들은 그래서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제기될 만한 문제는 거의 다 나왔고, 그 많은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와 승려들이 근본적인 점에서는 문제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 대개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짧게는 수 십 년, 길게는 수 백 년 이상 걸려서 맺힌 문제이니 만치 단시일에 해결 가능한 특별한 방안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대개의 경우,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현실성이 없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현실적인 힘을 행사하는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 및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현실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의 경전과 제도와 재산을 민중화해야 한다 한용운, 1921년 2월 16일 동아일보 사설
는 주장은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백번 옳은 말이요, 처방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이다.
4. 불교와 정보 정보와 불교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졸고 「정보문명시대의 불교」(동국대학교 개교90주년기념세계불교학술회의 논문집 ꡔ21세기 문명과 불교ꡕ 동국대학교, 1996)에서 필자의 입장을 개괄한 바 있다. 그것이 일반론이라면 본 고는 각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지연기의 머리에 오는 것이 無明이다. 이는 지혜의 결여이며, 달리 말하면 정보의 결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특정한 정보에 대한 심화된 인식, 혹은 인식의 전변을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가 전하는 정보가 심오한 것이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평범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다만 그 정보를 얼마나 體認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인식의 층위를 나누는 것은 인도사상의 보편적 특성에 속한다. 무위법으로서의 열반이 특정 정보의 획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존적 결단을 내리고 실천궁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불교의 경우 특정 정보의 기본형은 사성제로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방대하다고 하나 결국 사성제의 다양한 변주에 불과하다.
정보체계로서의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교설이라는 특정한 정보의 전승과 보존과 보급이다. 이를 위해 경전을 전산화해서 광범위하게 유통시키는 것이 일차적인 과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텍스트의 전산화도 중요하지만 보편어법과 보편논리를 사용한 컨텐츠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原 정보는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능력이나 성품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인드라의 그물과 같은 정보통신망을 통해 정보가 공급되고 상호교류를 통해 확산됨으로써 불국토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인체나 사회가 병이 드는 것은 많은 경우 신호체계의 이상으로 인한 것이다. 즉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이 왜곡되거나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탐욕과 분노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의 유기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역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이 다가오는 세기에 불교의 가르침에 맡겨진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불교’가 해내야 한다는 것은 바로 불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변화를 겪은 ‘사람’이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으로 보건대 아마 하나의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개개인의 중요성이 커짐으로써 가르침의 전승과 전파라는 교육의 중요성이 또한 강조된다. 인류가 문자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교육은 언제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단순한 지식의 축적으로서의 교육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보장해준 것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윤리적, 도덕적 삶을 지향하는 교육조차 인간의 삶을 더 도덕적으로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기원전 6세기보다 현대인들이 더 행복하고 더 도덕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류의 삶이란 유사한 과정의 반복인 듯싶다. 아마도 욕망이 문명을 낳았기 때문에 그만큼 긍정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욕망이 결국 고통을 낳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인간을 불행한 존재로 규정했지만, 그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했다는 점에서 염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존재의 불행은 인지와 인지의 소산인 문명의 발전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바른 견해(양질의 정보)를 얻는 일이다. 결국 지혜의 문제이다. 그러면 ‘지혜’가 어떻게 계발될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불교적 정보를 대중에게 제공한다고 해서 모두가 깊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정보에 대해서도 깨침의 深淺은 달라진다. 선지식이 할 수 있는 것은 구법자의 근기에 맞는 방식으로 정보를 재구성 내지 재해석해주는 것 이상은 아닐 것인가?
붓다가 “와서 보라!”고 권해도 오지 않고 듣지 않을 사람들에게, 혹은 와서 들어도 궁극적으로 오욕의 쾌락을 탐닉하여 불법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각적 쾌락의 대안으로서’의 열반의 즐거움을 권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모든 종교가, 그리고 석존이래 신심 없는 일반인에 대해 불교가 무력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정보의 역할은 信解行證 가운데 信解를 일으키고 行으로 이끄는데 그치는 것이므로 禪的인 것이라기보다는 교학에 가까운 것이다. 만약 선사가 제자를 제접하는 경우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를 빼앗는 법거량의 정당성은 정보에 의존하게 된다. 어째서 정보를 빼앗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일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언설로서의 정보가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연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간화선문을 포함한 禪家의 교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다른 분야 학문과의 교류와 연계를 위한 배려이다. 이것은 상대편에게 연구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인 동시에 불교학 자체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인문학 내에서 인접 학문의 경우에 있어서도 불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거나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불교인들의 인식과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본다. 제반 과학은 차치하고라도 불교 내의 여러 종파적 입장을 조정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현황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염불, 주력, 간경, 참선 수행의 심리적/ 육체적 매카니즘은 어떤 것이며, 목적하는 바와 경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이들 각 수행의 같고 다른 점은 또 무엇인가?
5. 불교와 대중
과거 절대군주제 하에서 군주가 가진 권능이 이제는 서서히 대중에게 이양되고 있는 중이다. 한국불교의 경우, 이 과정은 매우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서 흡사 지금도 절집만큼은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지만 시대의 변화는 거역할 수가 없을 것이다. 종단이나 승가는 점점 대중의 참다운 귀의처로서 대중의 뜻을 살피는 겸허한 자세를 보이게 될 것이며 대중은 승가를 받치는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승가와 대중은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불교가 새시대의 종교에 걸맞는 위상을 갖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승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대중의 역량과 지혜야말로 불교의 앞날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대중교육은 주로 대학에서의 교양교육이나 승려들의 법회가 직접적인 교육현장이며, 두 극단 외에는 대중들이 직접 불교를 접할 기회가 없고 주로 출판물이나 매체를 통해 배우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일반 신도에 대한 포교당과 사원의 교육 및 설법은 승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수적으로 20,000이 못되는 승려들이 (수)천만에 이르는 신도들의 교육과 의례를 전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부터 대중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법사제도를 시행해오고 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다른 부분도 그렇지만 대중에 대한 승려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법을 전하는 스승에 대한 존경은 필요하지만 매사 너무 승려 중심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승려가 할 수 있는 얘기와 학자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서로가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교수가 설법하면 -교수도 설법할 수 있다!- 신심이 떨어진다고 해서 꺼리는 경향도 있다고 들었다.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라고 하면 신심이 떨어지고 무조건 믿고 따르고 ‘감동’하라고 하면 신심이 붙는다는 것인가. 새로운 세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불교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또한 어느 한 쪽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대중과 승가 및 학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대중교육과 관련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한 두 세대쯤 뒤를 생각하는 배포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문명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인지 모두들 조급하게 일을 도모하고 금새 그 결과를 얻고자 안달한다. 그러나 먼 장래를 보고 투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존의 포교당용 교재는 효용성이 심히 의심스럽다. 꼭 쉬워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교설부터 ‘설득력있게’ 그들의 의문에 답하고 다시 더 깊은 의문으로 이끌 수 있는 책이 써져야 한다.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실질적 수요자인 지식인층을 위해 새롭고 다양한 형식의 불교 글쓰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잠시만 시장조사를 해보아야 이런 류의 수요가 가히 폭발적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의 필요에 맞는 상품을 공급해주지 못하는 불교계에 있다.
불교 내의 다양성 확보도 관건이다. 선불교가 현대 한국불교의 주류가 되다시피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해방 후의 종단분규의 여파이다. 구한말까지도 백분율로 따져서 선사가 16 퍼센트이고 교학승이 68 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여기에 속하지 않은 대부분의 승려는 교종과 선종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걸로 분류되어 있다. 이능화, <조선불교사> 하편, 1918.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종헌에서 선맥을 잇고 있다고 표방하고 있는 현금의 조계종 내의 敎/禪 비율 및 非敎非禪 비율이 예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20,000을 헤아리는 승려 가운데 선방에서 결제 때 房付들이는 수좌들이 매 안거 때마다 500명 남짓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가승려들이 이러할진대 일반 신도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선불교의 교설(?)에 의해 안심입명하는 선남선녀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실제로 염불 주력(다라니) 간경 등으로 신행생활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이러하고 이치 또한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근기를 운위한다고 해서 반드시 근기의 우열을 생각하고 수행의 우열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선종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파, 수행간에 우열을 나눔이 없이 병행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1)우선 염불, 주력, 간경 등이 삼매의 한 수단으로서 (화두)선과 나란히 갈 수 있다는 점을 소상히 논구해야 할 것이다.
2)선불교건 무엇이건 이젠 보편논리에 의지해서 합리성과 보편성에 입각하여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섣불리 신행(믿음)을 강조하거나 미신적 요소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종교가 이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넘어서는 벼랑까지 이성과 합리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선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선수행은 왜 하는 것인지 - 선수행의 원리 - / 좌선시 신체생리적 효과와 역효과 / 자세와 호흡과 마음가짐의 문제 등등이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도교적 수련법이 스며든 천태선의 영향과 기공이나 단전호흡류의 수행법을 참선과 병행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 공과에 대해서도 엄밀하게 논구하고 수행의 체계를 확립해서 수행인들에게 잦은 심신의 병을 예방해야 한다.
현대 한국선은 남종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종선 가운데 임제의 법맥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별로 확인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어느 계통에 속하든 무수한 갈래 중 하나라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종파적 입장을 절대화하는 독단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불교사가 인문과학으로서 엄격히 객관화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선 중심의 교육은 교학을 무시하고 교리 중심의 교육은 실천수행을 등한시하는 폐단이 있다. 새로운 시대의 불교 교육은 명실상부하게 敎와 觀의 겸수여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5. 맺음말
개인용 컴퓨터로 연결된 정보망의 구축과 그 길을 광속으로 이동하는 정보의 흐름이 21세기의 모든 특성을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에 들어 인류가 갑자기 정보를 쏟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정보의 자연적 증가 외에 이동속도가 빨라짐으로 인해서 실제로 양적 팽창의 효과가 생기며, 전세계에 걸쳐 거미줄같이 짜여진 통신망을 통한 활발한 상호교류로 인해 이질적 문화 상호간의 이해가 증진되고 그 만큼 백화쟁명의 다문화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불교의 경우에는 1) 타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 역시 증대하고 요청될 것이며, 2) 문화현상의 일반적 특성에 의해 타학문과의 상호 교류 필요성도 증가할 것이다.
어떤 특정 그룹이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폐쇄적 개념과 배타적 교리는 상대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구태의연한 어법과 전문술어들을 그대로 쓰면서 정보의 양만 늘린다고 해서 포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공유할 수 없는 정보는 도태될 것이다. 이것은 정보홍수 속에서 고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의 공유를 위해서는 우선 그 개념과 전제 및 기본 논리가 보편적 정서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온전한 의미에서 정보의 대중화를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세계화를 얘기하고 문화전쟁을 얘기하지만 왜 세계화가 요청되는지 분명한 동기와 목적을 갖고 있는가? 어쩌면 상업주의적인 발상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불교가 세계화되고 또 인류에게 기여하는 유일한 길은 한국 내에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논하는 것은 마치 상품의 질과 물량을 확보해놓지 않고 광고 카피에 골몰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불교를 외면하면서 남들에게 불교를 광고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조급할수록 지금은 내실화를 기해야할 때이다. 우선 한국인들에게 불교를 제대로 알릴 수 있어야 하며, 또 우수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대중의 호응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세대 내지 두 세대를 내다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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