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제4주제 논평:최동호 교수의 "경허의 선적계보와 시적해석" 논평

淸潭 2008. 2. 20. 21:08
 

제4주제 논평:최동호 교수의 "경허의 선적계보와 시적해석" 논평


 

김재홍(경희대학교 교수)



  전통문학사에서 불교문학은 천여년 이상 연면히 계승되어오면서 이땅의 사람들에게 정신과 사상, 그리고 생활의 뿌리가 되어왔다. 현대문학에서도 불교문학, 특히 불교시는 한국문학의 황금부분을 차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신문학 초기 육당의 「백팔번뇌」, 만해의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30~40년대 미당과 조지훈, 김달진과 신석초는 불교시를 통해 현대문학사를 풍요롭고 깊이있게 확대하고 심화해주었다. 분단 후에도 이원섭, 조병화, 박희진, 이형기, 장호, 박재삼을 비롯하여 정진규, 허영자, 박제천, 홍신선, 김초혜, 오세영, 문정희, 홍희표 등 주요 시인들이 불교적인 세계관과 감수성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해왔다. 특히 고은의 「만인보」와 김지하의 「애린」 등은 불교사상을 깊이있게 천착하면서 우리문학의 중심부로 이끌어들이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또한 승려시인들의 활약도 관심을 둘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동규, 정현종, 조정권, 송수권, 나태주, 이성선, 최승호, 황지우, 최동호 등 현대시단을 이끌어가는 주요 시인들이 불교적 인식과 정서를 깊이있게 형상화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러한 모습은 가히 불교적인 문학전통이 우리문학사의 원천이고 뿌리이자 근본토양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전통문학사에 있어서 우리문학의 중심토대이자 황금부분인 불교문학에 대한 발굴과 함께 그것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폭넓은 노력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외래문학사조와 방법에 짓눌려 우리적인 전통과 주체성이 심히 훼손돼가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기에 그러하다.
  이점에서 근자에 이르러 한국불교선학연구원의 설립과 다양한 사업계획 추진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특히 오늘의 심포지움과 경허의 선시에 대한 연구발표는 주목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불교에 연원을 둔 민족적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 이루어지고 민족 주체성이 확립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불교문학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관으로서의 불교의식과 생활로서의 불교적 정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낸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경전들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세계관이나 교리를 바탕으로하여 불교적인 생활방식이나 관습․환경․태도 등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불․법․승 삼보의 세계를 핵심으로 불교경전 및 불교인의 불교적 삶, 그리고 포교행위까지를 포괄한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광범위한 불교문학의 내용과 형식이 모두다 바람직한 불교문학으로서의 높은 질과 가치를 지닌다는 말은 아니다. 불교 문학이란 말 그대로 ‘불교’와 ‘문학’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기에 그것이 불교적인 내용을 담아야 하지만 동시에 문학적인 예술성을 담보해내지 못하면 자칫 수단으로서의 문학이라고 하는 저급한 차원으로 떨어지기 쉽다. 문학이란 모든 인간의 삶, 그 사상과 정서를 다루지만 특히 가치있는 삶, 미적으로 고양된 정서와 사상의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한다. 깊이있는 불교사상이 높은 예술적인 형상성을 확보하게 될 때 비로소 참다운 문학으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문학은 불교 그 자체의 종교성․사상성도 구현돼야 하지만 동시에 문학으로서의 예술성․감동성을 획득해 내야만 비로소 참된 불교문학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삶은 자본주의의 과도한 팽대로 인해 인간소외와 불평등이 가중되고 과학문명이 급속히 발달함으로써 환경파괴와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되어 하나의 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불교문학은 인간구원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인류사적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으로 판단된다. 오늘날과 같이 온갖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감옥에 갇혀, 공해에 찌들고 인간소외에 절망하는 시대에 정신적인 활로를 열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경허선사는 한국불교사에 있어 가장 빛나는 별의 하나이면서 정신사, 문학사에 있어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 분명하다. 말 그대로 “원효가 한국 불교의 첫새벽이라면, 지눌은 한국 간화선의 첫새벽이고, 서산은 한국 중세선의 첫새벽이며, 경허는 한국 근대선의 첫새벽”(한중광, ꡔ경허 길위의 큰 스님ꡕ, 한길사, p.20)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경허는 선수행이 삶이요, 시 그 자체를 이룬 詩禪一体의 선승으로서 자연의 이법과 인생의 원리를 선적 직관과 통찰력으로 파악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만해도 “그 저술이 시문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선문법어의 깊은 뜻과 묘한 구절들인데 혹은 술집과 시정에서 읊조렸으되 저속하지 않으며 비바람 눈보라치는 텅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없이 문장마다 선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그 법칙이 어떠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실로 일대의 기이한 글이요 싯구이다”(한용운, 머리말, ꡔ경허집ꡕ, p.10)라고 상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선시는 「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유월 연암사 아랫길에/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누나」라는 오도송을 비롯하여 禪定詩, 山情詩, 禪迹詩, 회고시, 雲水詩, 禪機詩, 公案詩, 頌古詩, 傳法詩, 즉물시, 단도직입시, 無常詩, 黙照詩, 순례시, 經禪詩, 禪畫詩, 이별시, 화답시, 次韻詩, 비분강개시, 임종게 등 내용과 형식면에서 상자연의 선시를 비롯하여 생활시 등 거의 모든 삶의 국면들을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말그대로 삶이 그대로 禪이요 詩인 경지라고 하겠다. 아울러 방법론적인 면에서도 「일없음이 오히려 일을 이룸이라/사립문 닫고 한낮에 조나니/산새들이 나의 고독 아는지/그림자 편편히/창앞을 스쳐가네」와 같이 역설(paradox)과 모순어법(oxymoron)을 활용함으로써 反常合道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만물과의 만남에서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느낌과 그 느낌을 통해서 부딪쳐오는 깨달음 및 감동을 물아일체의 경지로서 노래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의 시는 일상생활은 물론 망국의 한까지도 섭수해들임으로써 생활이 선이고 선이 바로 시로 녹아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음달 외로이 둥글어/빛이 온갖 물상을 삼키니/빛과 그림자 모두 사라지면/다시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임종게와 같이 거울마음(鏡心)과 마음달(心月)로서 만상조응을 이루어냄으로써 경허의 선시는 모든 것을 불성에 바탕을 두고 만법귀일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경허의 선시는 사상과 예술성을 높고 깊게 성취해냄으로써 불교사적인면에서뿐 아니라 문학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중요한 의미와 위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최동호 교수의 「경허의 선적 계보와 화두의 시적 해석」이라는 연구발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논문은 전체적인 면에서 경허의 불교사적 의미와 전승연원을 밝히고 경허의 화두와 깨달음을 긍정적으로 분석하면서 경허가 한국불교의 21세기에 있어 하나의 열린 비젼을 제시하리라는 전망을 피력하고 있다.
  먼저 논자는 경허가 한국불교가 배출해낸 최상승선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그 정통성을 입증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 경허에 대한 우상화와 폄하의 압력을 극복하고 경허의 진면목을 학구적으로 구명해보려 시도한 초유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놓여진다.
  두 번째 이 논문은 경허를 원효로부터 지눌, 그리고 청허에 이어지는 간화선의 계보로 파악하는 기존 견해에 동조하면서 청허와 경허의 법맥을 구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경허가 선과 교의 법맥을 함께 계승하면서, 서산의 ‘진흙소’가 편양언기를 매개로하여 ‘진흙소의 울음’으로 상징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것임은 핵심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로 경허가 붙잡고 고투하던 화두가 ‘콧구멍 없는 소’로서 진아(眞我)를 발견하고 무애행을 통해 각기 다른 불성이라 하여도 불성이라는 근본진리는 하나이며 모든 것이 「빛과 경계를 함께 잊는 것으로서」 한 이치로 귀일한다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일원상(一圓相)에 도달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경허의 이 일원상이 바로 청허의 ꡔ선가귀감ꡕ에 연원을 두고, 이를 통해 경허가 정통적인 선법을 따르면서도 견성의 경지에 도달하고 무애행의 실천을 완성한 대선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최동호 교수의 이 연구발표는 경허의 선적 계보를 밝히는데 하나의 소중한 디딤돌이 됨에 분명하다.
  다만 최 교수의 연구결과는 첫째, 그것이 시 전체의 실증적인 분석과 체계화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연역적으로 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지적될 수 있다. ‘그렇다’라기보다 ‘왜 그런가’, ‘어떻게 그런가’를 체계적으로 논증하는 절차를 거쳐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청허와 경허의 선적 맥락과 계보가 시세계의 종합적인 비교분석을 통해 도출되고 검증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청허의 시에 대한 깊이있고 철저한 분석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것이 경허에 대한 분석론으로 연결되어 비교논술되면서 종합됐으면 훨씬 설득력있는 논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셋째로, 논지의 전개 방식이 시자체의 분석과 논의에서 유추된 쟁점보다는 경허의 언술 등에 의지해 해설적으로 진행된 것도 하나의 아쉬움이다. 제한된 지면과 시간 때문에 그러했지만, 이러한 보다 체계적이고 정밀한 논의가 귀납적, 실증적으로 전개되어 경허의 선적 계보를 깊이있게 검증해내 간다면 더 바람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지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아울러 이러한 경허 선시가 불교사는 물론 한국 시문학사 전체에 있어서 어떤 상관관계와 영향을 미쳤는가까지 검증했다면 더 큰 업적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최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