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1-5 제5주제:鏡虛의 韓國佛敎史的 位置

淸潭 2008. 2. 20. 21:10
 

제5주제:鏡虛의 韓國佛敎史的 位置


 

김영태(동국대 명예교수)

Ⅰ. 현대 한국 참선의 중흥조

  禪(Jhana․Dhyana)은 본디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心一境專注하여) 아주 고요(寂靜)하게하고 생각(思慮)을 올바르게 관찰(正審)하는 수행(마음닦는 공부법)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靜慮 또는 思惟修라고 번역하였다. 靜慮는 靜心思慮의 줄인 말이며 思惟修(思惟修習이라고도 함)는 正審思慮와 같은 뜻으로 마음 닦는 공부임을 강조하여 앞쪽의 靜(寂靜) 또는 靜心을 생략한 용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와같이 禪은 三昧(Samadhi) 곧 定 또는 息慮凝心에 이르는 수행방법이므로 定이라고도 번역하며 禪定이라고 연결지어 일컫기도 한다. 그렇다고 三昧를 목적으로만 삼는 수행방법은 아니며, 三昧를 통해 최상의 지혜인 摩訶般若를 頓發시켜서 깨침을 얻는데(證悟)에 究竟을 두고 있다. 그러나 禪이란 말 그 자체는 빨리어의 자아(즈하)나(Jhana)를 단순히 소리옮긴(音譯한) 禪那(범어 드야나 Dhyana는 소리옮겨서 駄衍那․持阿那라고 함)의 앞 글자만을 따서 쓴 것이므로, 말하자면 靜慮나 思惟修라는 뜻을 지닌 인도말(빨리어)의 원어를 소리로 옮겨 반으로 줄인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禪의 글자는 중국에 있어서 특히 실천적 불교수행을 강조했던 菩提達摩 이후로, 敎外別傳의 格外道理로서 不立文字하고 直指人心하여 見性成佛한다는 이른바 祖師禪旨가 확립되고 부터는 禪字의 개념이 본래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즉 Jhana를 소리옮긴 禪那의 앞 반쪽 글자(音譯略語字)인 禪을 그 본디의 뜻인 靜慮나 思惟修 보다도 오히려 몇 갑절 더 深遠한 뜻으로 함축시켜서 祖師禪旨를 표방하는 最究竟語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禪은 佛心이며 언어와 思慮를 초월한 경지(言語思量超絶處)라고까지 일컬어지기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루어진 중국의 禪세계를 그들은 最上乘 頓悟의 祖師禪이라고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그 禪法은 우리나라에서도 전해져 수용되었고 또 이어져 왔다. 朝鮮王朝의 오랜 斥僧廢佛에도 慧命은 계승되었으나 國運이 기울어질 무렵에는 祖師禪의 法風이 매우 미미해졌었다. 그러한 때(朝鮮末~大韓帝國時代)에 꺼져가는 禪燈을 다시금 밝게 빛나도록 되살린 선지식이 출현하였으니 그가 바로 鏡虛 惺牛禪師(1849~1912)이다.
  이 글에서는 주어진 과제에 따라 먼저 現代 한국 참선의 중흥조로서의 鏡虛禪師를 당시 생존했던 우리 불교계의 대표적 知性이라할 세 분(李能和․漢岩 重遠․權相老)의 글을 통해 보기로 하였으며, 다음에 종래 禪家相承의 法統과 그 宗에 대하여 略說하고, 끝으로 그가 이룩한 불교세계의 역사적 位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ꡔ朝鮮佛敎通史ꡕ에 보인 鏡虛禪師
  鏡虛禪師의 불교사적 위치를 고찰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그의 생애와 업적에 관하여서 어느 정도는 알아야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일찍이 그의 行狀 맨끄트머리에 “佛紀2958年 辛未 3月15日 門人 漢岩重遠 謹撰”이라 적힌 「先師 鏡虛和尙行狀」은 순한문의 筆寫本으로 현재 ꡔ韓國佛敎全書ꡕ 11冊(pp.653~656)에 影印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佛紀  2958년 辛未는 서기 1931년이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가 되는 1932년 5月號의 ꡔ佛敎ꡕ(第95號, pp.21~26)에 「鏡虛和尙行狀」(漢岩)이 국한문으로 번역(譯者 밝혀있지 않음)되어 있다.
이 찬술된 바가 있고 또 略譜와 몇 군데 글 韓龍雲, 「略譜」(ꡔ韓國佛敎全書ꡕ 11책, pp.587~588). 이 「略譜」는 ‘世尊降誕後 2969年 壬午 9月 2日 韓龍雲識’로 되어있는 ꡔ鏡虛集ꡕ 序에 이어 있으므로, 佛紀 2969년 壬午 곧 서기 1942년에 「鏡虛集序」와 함께 쓴 것으로 보인다.
  權相老, 「朝鮮禪宗略史」 16 鏡虛와 現代禪(白性郁博士華甲記念 ꡔ佛敎學論文集ꡕ, pp.292~293).
  性陀, 「鏡虛의 禪思想」 Ⅱ生涯 (朴吉眞博士華甲紀念 ꡔ韓國佛敎思想史ꡕ, pp.1104~1115) 등.
에서 그의 행적이 언급되어졌을 뿐 아니라, 주어진 논제의 성격상 그 傳記의 전반에 관한 문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기로 하였다.
  이 論考의 차례에 따라 다만 근래의 우리 불교계에 그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져 왔는가, 즉 鏡虛禪師는 어떠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禪師의 재세시에 청장년의 知性으로 활동하였던 세 분의 저술(李能和 ꡔ朝鮮佛敎通史ꡕ․漢岩 「鏡虛和尙行狀」․權相老 「韓國禪宗略史」)을 통하여 그의 禪과 인물을 밝혀볼 생각이다. 그래서 연대의 순서대로 먼저 尙玄 李能和居士(1869~1945)의 ꡔ朝鮮佛敎通史ꡕ에서부터 보기로 하였다.
  鏡虛禪師의 입적한 해에 44세가 되는 尙玄居士는 그의 역저인『佛敎通史』의 하편 李能和,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p.962~963(大正 7年․1918년, 新文館 발행).
에서 禪師에 관해 대략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순한문이므로 우리글로 풀어서 옮겨 본다.

  근세의 禪界에 鏡虛和尙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처음 洪州의 天藏庵에서 자취를 일으켰으며, 松廣寺․仙巖寺․靑巖寺․海印寺․通度寺․梵魚寺 및 金剛山의 여러 절을 편력하면서 자못 禪風을 드날렸다. 세상에 전하는 이른바 鏡虛의 悟道歌는 그 글이 길어서 모두 옮겨 싣지 못하므로, 맨 끝의 네 글귀만 옮긴다.

문득 코구멍이 없다는 사람들의 말소리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단번에 깨쳤네.
유월의 연암산 아랫 길에
들사람이 하릴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六月鷰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鏡虛화상은 말 재주가 있어서 그 설하는 바의 法이 옛 祖師 보다도 못하지가 않다(有辯才 有所說法 雖古祖師 無以過之)라고 한다. 그러나 浩蕩하여 얽매임이 없어서 邪淫과 殺生을 범함에 이르러도 개의치 않았는데, 세상의 禪流들이 다투어 본받게 되었다. 심지어는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깨달음(菩提)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것이 참 지혜(般若)에 방해받지 않는다.(飮酒食肉 不碍菩提 行盜行婬 無妨般若)”라고 외쳤으며, 이를 일러 大乘禪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고자 하는 일이면 감추고 꾸며야할 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모두 滔滔하게 행하였다. 대개 이러한 弊風은 실로 鏡虛로부터 시작되어졌다. 叢林에서는 이를 가리켜 魔說이라고 하였다.

  내가(李能和 자신) 감히 鏡虛禪師의 깨달은 바와 본 바를 알지는 못하지만, 佛經과 禪書에서 본바대로 논한다면 이는 옳지가 않은 것 같다.

라고 한 다음에, ꡔ指月錄ꡕ 明의 那羅延窟學人 瞿汝稷集인 ꡔ指月錄ꡕ은 全 32卷으로, 萬曆壬寅(1602) 무렵에 이루어진 禪錄이다.
에서 인용하고 있는 ‘大慧宗杲禪師 示眞如和尙云’의 “學般若人 隨順塵勢 定爲魔所攝持 又於隨順境中 强談道理 … 更敎人撥無因果 便言飮酒食肉 不碍菩提 行盜行婬 無妨般若 如此之流 邪魔惡毒 入其心腑 都不覺知 欲出塵勞 如撥油救火 可不悲哉” (반야를 공부하는 사람이 띠끌의 힘에 따르면 어김없이 마구니에게 잡히게 되며, 또 경계 가운데에 따르게 되면 억지로 도리를 담론하여… 다시 남에게 因果가 없음을 가르치며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菩提에 장애되지 않고 도둑질과 음행이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말을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구니와 나쁜 독이 그 심장과 폐부에 들어가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塵勞에서 벗어날려고 한다. 이는 마치 기름으로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라는 말을 이끌어와서, 鏡虛의 이른바 大乘禪이 叢林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또 ꡔ楞嚴經ꡕ 唐 天竺沙門般刺蜜帝譯, ꡔ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ꡕ 卷9(大正藏 19, p.149 上).
에 보인

“又 ꡔ朝鮮佛敎通史ꡕ(下, p.963)에는 ‘又’ 자리에 ‘在’가 들어가 있다.
彼定中 諸善男子 …… 撥無因果一向入空 空心現前 乃至心生長斷滅解 悟則無咎 非爲聖證 若作 위의 책에는 ‘作’이 아닌 ‘非’로 되어 있다.
聖解 則有空魔 入其心腑 乃謗持戒 名爲小乘 菩薩悟空 有何持犯 其人常於信心檀越 飮酒 噉肉 廣行婬 위의 책에는 媱이다.
穢 因魔力故 攝其前人 不生疑謗” (禪定중의 수행자가 因果를 떨쳐버리고 곧장 空으로 들어가 텅빈 마음이 드러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知解를 없애어서 깨침에는 허물이 없으나 聖解를 증득하지 아니하고 聖解를 짓게되면 곧 空魔가 마음 깊숙히 들어가 持戒하는 이를 비방하여 소승이라하며, 空을 깨친 보살은 持犯이 상관없다하여 신심있는 신도들 앞에서 언제나 술 마시고 고기 먹고 지저분한 음행을 행하였으나, 마구니의 힘에 연유한 까닭으로 그 사람을 용납하여 의심하고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
을 인용하고는, 그러한 說語들에서 또한 鏡虛의 大乘禪을 깨뜨려 밝힐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尙玄居士의 이 ꡔ佛敎通史ꡕ는 鏡虛禪師의 입적 6년 뒤인 1918년에 간행되었으므로, 鏡虛와 그 禪에 관해 적은 글로서는 단연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漢岩禪師에 의해 쓰여진 「鏡虛和尙行狀」과 그 행장이 수록된 ꡔ鏡虛集ꡕ 현행의 ꡔ鏡虛集ꡕ은 世尊降誕後 2969年(1942) 壬午 9月2日 韓龍雲識의 序와 略譜가 앞에 붙은 1943년 中央禪院 刊行(鉛活字本)이 전해져 있으나(ꡔ韓國佛敎全書ꡕ 11책에 수록), 실은 그에 앞서서 佛紀 2958年(1931) 辛未 3月15日 門人 漢岩重遠 謹撰의 「先師 鏡虛和尙行狀」 이 앞에 놓인 ꡔ鏡虛集ꡕ 筆寫本 역시 ꡔ韓國佛敎全書ꡕ 11책에 活字本 ꡔ鏡虛集ꡕ에 이어 수록되어 있다.
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1931년보다도 13년이나 앞선 것이 된다. 그와 같이 鏡虛 입적 오륙년 사이에 쓴 글이므로 그 당시 불교계의 鏡虛禪師에 대한 風聞과 평가를 비교적 정확하게 代辯한 글이 아닌가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尙玄의 이 짤막한 글을 통하여 鏡虛禪 곧 大乘禪의 家風이 국내에 널리 선양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의 禪風이 ‘蕩無拘檢하여 至犯婬殺에 不以介意하고(얽매임이 없이 호탕하여 邪婬과 살생을 범함에도 개의치 않고)’, ‘飮酒와 食肉이 不碍菩提요 行盜와 行婬이 無妨般若라(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菩提에 장애되지 않으며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것이 般若에 방해받지 않는다)’하여 그때의 불교계에 적지않은 弊風이 되었음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당시 禪家(叢林)에서는 그(大乘禪의) 주장을 魔說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2. 不二門을 증득한 眞善知識
  스승 鏡虛禪師의 입적년에 37세가 되는 漢岩 重遠禪師(1876~1951)는 그의 56세 되는 해(1931년)에 그 스승의 行狀(앞의 註1에서 이미 보았음)을 지었다.「鏡虛和尙行狀」에서 그는 先法師의 생애와 행적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출생 여기에서는 哲宗 8年 丁巳(1857)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卍海가 작성한 略譜에는 憲宗 15年 己酉(1849)生으로 되어 있어서 鏡虛의 誕生은 두 가지 說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憲宗 15년(1849)說을 취하고 있다.
에서 입적까지를 차례로 서술하고나서 受法弟子 4人(枕雲․慧月․滿空․漢岩자신)을 간략하게 열거하고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全文이 순한문으로 쓰여져 있다.)

  行狀이란 것은 그 사실을 기록하여 거짓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화상의 깨치심과 교화선양의 인연은 진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夫行狀者 記其實不以虛也 和尙之悟道 揚化因緣誠如上言)

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그(漢岩)는

만일 그(스승의) 행리를 말할 것 같으면, 키가 크고 용모가 소박하며 志氣가 굳세고 음성이 큰 종소리와 같았다. 無碍의 言辯을 갖추었고 八風을 대하여도 움직이지 않음이 태산과 같았으며, 행해야할 것은 행하고 그쳐야 할 것은 그쳐서 남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데 자유로웠고 聲色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거리낌없이 노닐었으므로 남들의 의심과 비방을 받게 되었다. 이는 넓고 큰 마음으로 둘이 아닌 법문(不二門)을 증득하여 스스로를 그와 같이(如如하게) 초월하고 놓아버린 것이다. (若論其行履則 身長貌古 志氣果强 聲若洪鍾 具無碍辯 對八風不動如山 行則行止則止 不爲人之打之遶 故飮啖自由 聲色不拘 曠然遊戱 招人疑謗 此乃以廣大心 言不二門 超放自如 …)
라고 하여, 몇가지의 초연한 사례와 일화를 들어보였다. 그리하여 다시,

어느날 아침에 한 절귀를 읊었는데,
세간과 청산 어느 곳이 거긴가
봄나라엔 꽃이 피지 않은 곳이 없구나
이웃에서 惺牛(鏡虛 자신)의 일 묻는다면
돌계집 소리 속에서 劫外의 노래 부르리라.
世與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人若問惺牛事     石女聲中劫外歌.

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주장자를 꺾어서 문밖에 내던지고 훌쩍 산을 나왔다.

  곳에 따라 宣化하였는데 窠臼를 벗어버리고 軌則을 두지 않았으니, 혹은 城市에 노닐며 塵俗과 뒤섞였고 때로는 松亭에 한가로이 누워서 자유롭게 風月을 즐겼다. 그 초연하고 일탈한 趣意를 사람들이 능히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떤 때에 법문을 설하면 지극히 부드럽고 온화하며 매우 精細하여 불가사의한 妙旨를 부연하니, 가히 善에도 철저하고 惡에도 철저하였다고 할 수가 있어서 修斷(수행하여 번뇌를 끊음)으로서는 닦아서 단멸(修斷)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문장과 筆法에도 모두 사람들에 뛰어났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偉人이라 할 수 있다. (隨方宣化 脫略窠臼 不存軌則 或懶遊城市混同塵俗 或閑臥松亭嘯傲風月 其超逸之趣 人莫能測 有時垂示則 極柔和甚精細 演不可思議之妙旨 可謂善到底惡到底 不可以修斷而修斷也 文章筆法 皆過於人 眞希世偉人也)

라고 적었으며, 또

  뒷날의 공부하는 이(學者)가 스님의 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스님의 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니(後之學者 學和尙之法化則可 學和尙之行履則不可),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 곧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人信而不解也)”는 글귀는 ꡔ佛敎ꡕ 誌의 번역 「鏡虛和尙行狀」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이 번역본에는 “和尙의 行履를 學함은 不可하다”는 아래에 이어서, “부처님이 이르시지 아니하였는가 法을 依하고 人을 依치 않는다고 만일 佛言을 順히 아니하야 法을 依하고 人을 依하든지 法을 依치 아니하고 人을 依하든지 法도 依치 아니하고 人도 依치 아니하면 다 不可하니 法도 依치 아니하고 人도 依치 않는 것은 信하지 않는 것이오 法을 依치 아니하고 人을 依하는 것은 相에 着하야 外邊으로 드러나는 것이오 法을 依하고 人을 依하는 것은 信하고 解치 못하는 것이며”(앞에 나온 ꡔ佛敎ꡕ 제95호, pp.25下~26上)가 더 들어있는데, 이 부분은 현재 筆寫本 行狀에는 없는 구절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또 法을 의지한다는 것은(又依法者)”부터 원문 筆寫本에는 “人信而不解也”에 바로 연결되어 있다.(ꡔ韓國佛敎全書ꡕ 11책, p.656上右).
또 法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참되고 바른 미묘한 법(眞正妙法)을 의지하는 것이며,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律儀와 不律儀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의지한다는 것은 스승하여 본받는 것이며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得失과 是非를 보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여, 스승 鏡虛화상의 法化는 배우고 의지하되 그 行履는 배우지도 의지하지도 말라고 한 까닭을 설명하여, ꡔ圓覺經ꡕ과 「金剛經ꡕ의 佛說 및 佛日普照國師의 法語를 이끌어와서 스승의 입장을 부연하였다. 그리고는,

  그러므로 ‘스님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스님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가 않다’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다만 법을 결택하는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행리의 無碍를 본받는 자를 책망한 것이며, 또 그 有爲의 相과 견해에 국집하여 心源에 洞徹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를 경계한 것이다. 만일 법을 결택하는 正眼을 갖추고 心源을 洞徹한다면 곧 행리가 자연히 참됨(眞)에 칭합하여 四威儀 안에 항상 청정함이 나타나게 될 것인데, 어찌 外相의 현혹하는 바가 되어서 愛情과 人我의 견해(見)를 일으킬 것인가. (故曰 學和尙之法化則可 學和尙之行履則不可 此但責其未具擇法眼 而先效其行履無碍者也 又策其局執於有爲相見 不解 洞徹心源者也 若具擇法正眼而洞徹心源則 行履自然稱眞 四威儀內常現淸淨 安可爲外相之所幻惑 起愛憎人我之見也哉)

라고 하여, 그 스승의 法化와 行履의 취(可學)하고 취하지 않아야(不可學)할 바에 관한 설명의 일단을 맺고 있다. 끝으로 그는 이 行狀을 쓰게된 意義를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밝혀놓았다.

  하나는 末法 중에 참 善知識이 세상에 출현하여 弘法한 難思의 功德을 찬양하고, 하나는 우리들이 밖으로 치닫는 일에 망녕되이 집착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어서 佛化를 손상하는 허물을 경계한다. (一以讚末法中眞善知識出世弘法之難思功德. 一以警吾輩妄執外走而虛度時日以傷 損佛化之過失焉) 이 대목 끝에 先師의 詩詠과 記文을 모아 인쇄에 붙여 간행한다는 맨 끝말은 옮기지 않고 생략하였다. ꡔ佛敎ꡕ 誌(95호, p.26下)에서는 이 대목의 두 번째 一(一以警…)을 “一은 써 吾輩의 無碍行을 妄作하야 佛化를 傷損하는 過失을 경계하노라”라고 번역하였다. 이제 본문에서 원문까지 옮겨 보았지만  필사본 行狀에는 “無碍行을 妄作하여…”라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뜻으로 본다면 필사본에 있는 “警吾輩妄執外走而虛度時日 以傷損佛化之過失焉” 보다는 “吾輩의 無碍行을 妄作하야…”쪽이 더 쉽게 이해되어진다고 할 수가 있다. 앞의 註11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필사본과 번역본에 간혹 같지 않는 부분과, 더 들어있고 빠져있는 부분이 더러 있다. 아마도 이 필사본은 漢岩스님의 親筆이 아니고 어떤이의 傳寫인 듯하다. 그래서 誤字와 脫字도 간혹 보이고 빠져 있거나 뜻이 잘 안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본에서도 “…그 文義에 있어서 多少의 疑問處가 있으나 그는 或 傳寫의 誤인지…”라고 譯者가 後記하고 있다.

  이 대목은 한마디로 말해서 근래의 드문 善知識이었던 漢岩 重遠大禪師가 그 스승 鏡虛禪師의 行狀을 쓰고는, 그 先師의 行履를 자칫 잘못 흉내내어 본받는 폐단이 후인들에게 있지 않기를 바라는 노파심절에서 쓴 간절하고도 정성스러운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스승의 이 行狀을 끝내면서 행장을 쓰게된 意義를 요약하여 강조한 두 가지를 우리는 앞의 본문에서 보았었다.
  그 첫번째는 현세의 末法 중에 참 선지식(眞善知識)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법을 펼친(弘法한) 難思議의 공덕을 찬양(또는 찬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스승 鏡虛를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 곧 眞善知識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하여 末法세상에 출현하여 弘法한 스승의 자취를 難思議 곧 불가사의한 공덕이라고 찬양하였다.
  두 번째(첫번째와 마찬가지로 一이란 숫자를 앞세우고 있음)는 앞에서 본것처럼 現傳의 필사본 行狀과 번역본 행장이 뜻으로는 억지로 맞추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의 글 그대로라면 같은 내용으로 보기가 어려울만큼 다르다. 즉 필사본에는 ‘우리들이 밖으로 치닫는 일에 妄執하여 時日을 헛되이 보내어서 부처님의 가르침(佛化)을 손상(傷損)시키는 허물(過失)이 없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며, 번역문에서는 ‘吾輦의 無碍行을 妄作하야 佛化를 傷損하는 過失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밖으로 치닫는 일에 망령되이 집착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다(妄執外走而虛度時日)’와 ‘無碍行을 妄作하여’의 부분이 각각 다른데, 표면상으로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한문 그대로라면 ‘妄作無碍行’이 되므로 다섯 글자인데, 전자는 ‘妄執 이 ‘妄執’ 두 글자도 판독에 확연한 편은 아니지만 그 위에 또 두 글자가 보이는데, 이들 글자는 아마 誤記하여 일부러 글자를 불분명하게 흐린 듯해서 여기에서는 지운 글자로 처리하였다.
外走而虛度時日’의 아홉 글자로 되어 있어서 우선 글자의 수로도 넉자가 더 많다.
  같은 「鏡虛和尙行狀」이면서 한쪽은 原文이고 한쪽은 번역문인데 어째서 원문과 번역문이 그렇게 글자의 수나 글의 내용에 있어서 다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ꡔ佛敎ꡕ 誌 게재의 번역문 원본이 현재 ꡔ佛敎全書ꡕ 影印收錄의 필사 원문과는 동일본 「行狀」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필사본 외에 따로 원본이 있거나 아니면 약간 수정된 간행본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어쨌든 현재 이 두가지 「行狀」을 통해 본다면 漢岩禪師가 스승의 행장을 쓴 두 번째의 뜻은, 당시의 승려들이 내면적 수행의 眞正한 성취에 힘쓰지 아니하고 외형적 妄執에 사로잡혀 善知識의 無碍行을 흉내내어 虛度時日하므로써 佛化를 손상시키는 과실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앞 장에서 본 ꡔ佛敎通史ꡕ에서 鏡虛를 평하여 “蕩無狗檢 至犯婬殺 不以介意 世之禪流 爭相效之”라고 한 부분에 상대되는 漢岩의 解明이 “吾輩가 無碍行을 妄作하여 佛化를 傷損하는 過失을 경계한다”라고 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漢岩은 스승 鏡虛의 ‘蕩無拘檢’이 결코 당시의 禪流들이 다투어 흉내내었다는 이른바 ‘無碍行의 妄作’과는 格이 다른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ꡔ通史ꡕ에서는 “심지어 飮酒 肉食이 不碍菩提이며 行盜 行婬이 無妨般若라고 외쳤는데, 이를 일러 大乘禪이라 한다.… 叢林에서는 이를 가리켜 魔說이라 하였다.”라고 한 당시 鏡虛에 대한 풍문을, 漢岩은 스승의 行狀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데 자유로웠고 聲色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거리낌 없이 노닐었으므로 남들의 의심과 비방을 받게되었다.(故飮啖自由 聲色不拘 曠然遊戱 招人疑謗)”라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에 이어서 漢岩은 “이는 넓고 큰 마음으로 둘이 아닌 법문을 증득하여 스스로를 그와 같이(如如하게) 초월하고 놓아버린 것이다.(此乃以廣大心 證不二門 超放自如)”라고 웅변하였다. 漢岩의 이 짤막한 한마디(廣大心으로 不二門을 證悟하여 스스로 如如하게 超放하였다)야 말로 참으로 스승 鏡虛를 지극히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現代禪의 中興祖
  尙玄居士나 漢岩禪師 보다는 약간 年下인 退耕 權相老박사(1879~1965)는 鏡虛禪師가 입적한 그 해(1912) 34세의 청년 승려였으나, 그는 전년(1911)에 이미 朝鮮佛敎月報社의 발행인(社長)이 되었다가 鏡虛入寂年(1912)인 그 해 2월에 관계당국의 인가를 얻어 한국불교 최초의 불교교양 포교 종합월간지인 ꡔ朝鮮佛敎月報ꡕ의 창간호를 간행했던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신진 知性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훨씬 나중에 東國大學校 초대총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지만 ꡔ朝鮮佛敎月報ꡕ 발행인만이 아니고 佛敎中央學林․佛敎中央專門學校 교수와 ꡔ佛敎ꡕ 誌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ꡔ朝鮮佛敎略史ꡕ․ꡔ韓國寺刹全書ꡕ․ꡔ韓國地名沿革考ꡕ 등 많은 저술을 남긴 碩學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근대 우리 불교계의 산 역사요 開化 격동기(鏡虛의 활동 및 입적 전후) 불교역사의 생생한 증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그가 본 鏡虛禪師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退耕의 「韓國禪宗略史」 이 논문은 白性郁博士頌壽記念 ꡔ佛敎學論文集ꡕ(東國大學校, 1959刊), pp.265~298에 수록되어 있음.
는 논문형식으로 쓴 제목 그대로의 우리나라 禪修 諸宗門派의 약사이다. 그는 이 글에서 編이나 章節의 구별없이 전체를 일련번호로 붙여서 18개 항목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중에 16번째가 ‘鏡虛와 現代禪’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韓國禪宗略史」 16 ‘鏡虛와 現代禪’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만을 가지고 그의 鏡虛觀을 대충 엿볼 생각이다.
그는 이 항목 첫머리에,

  朝鮮末葉에 禪宗의 一巨匠이 出世하였으니 鏡虛禪師라, 諱는 惺牛요 姓은 宋氏니 哲宗八年(檀紀 4190) 丁巳 현재 鏡虛禪師의 출생은 1942년에 간행된 ꡔ鏡虛集ꡕ의 略譜(韓龍雲撰)에 의해 憲宗 15년 己酉(1849)를 定說로 하고 있으나, 앞의 본문에서 이미 본바와 같이 禪師의 上足 漢岩禪師의 「鏡虛和尙行狀」에서는 哲宗 八年 丁巳(1857)로 하고 있는데 특히 그 入滅을 언급한 대목에서는 “和尙生於丁巳 寂於壬子 九歲出家 壽五十有六 臘四十有八”라고 明記하였다. 그래서 退耕의 이 丁巳生說도 漢岩의 「鏡虛和尙行狀」의 說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에 生하였다.

라고 시작하여, 出家 이후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었다. 그러면서도 禪師가 講席을 버리고 禪室에 獨坐參究하게 된 동기와, 勇猛精進 끝에 활연悟得하게 된 사연에 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한 셈이다. 논문의 주제 자체가 略史라서 그런지 ‘鏡虛와 現代禪’도 매우 간략하게 짧은 항목으로 다루었는데, 그 悟道의 계기에 관한 일화는 격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대화형식으로 옮기고 있다.
  그가 용맹정진한지 3개월이 된 어느날 우연히 학인이었던 元奎라는 沙彌(나중의 東隱講伯)의 恩師와 아버지인 李處士가 問答하였다는 이야기(一段話) 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로 인해 그는 크게 깨달았다는 것인데 그 대목을 여기에 옮겨 본다.

(李處士) 중노릇을 잘못하면 死後에 소(牛)되는 理致를 아는가?
(大師) 그것이야 工夫는 하지 않고 施物만 받아 먹었으니 소밖에 될 것이 있습니까.
(處士) 대답 잘못하였소. 중노릇 幾十年에 그 대답을 그렇게 한단 말이오?
(大師) 나는 禪理를 모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處士) 소는 되어도 코구멍(鼻孔) 뚫을데가 없습니다 해야지요.
  이 一段話를 듣고는 爆地에 心胸이 豁然하여 一百二十斤擔子를 卸下한 듯 하였다. 이로부터 保任工夫를 쌓아서 最上乘禪旨를 提唱하여 活活潑潑하고 蕩蕩無碍하여 觸事接物에 文字 그대로 任運騰騰하고 騰騰任運하여 ‘飮酒食肉 無妨般若 行盜行婬 不碍菩提’의 消息을 實地로 弄現하였다. 앞 註14의 ꡔ佛敎學論文集ꡕ, p.293.


라고 하였다. 앞쪽의 ꡔ佛敎通史ꡕ에서 본바가 있지만 그의 ‘悟道歌’ 끝의 頌曰에 있는 “忽聞人語無鼻孔”은 바로 이 “소는 되어도 코구멍 뚫을데가 없다”는 그 이야기를 읊은 것이다.
  그렇게해서 宗風을 擧揚하자 掃地되었던 禪風이 蔚然히 再煽하였으며 그 문하에 무수한 禪匠이 배출하게 되었다고하여 그 제자의 이름들을 열거하였다. 그리고는,

現下 全國禪院에서 拄杖子를 짚고 面壁하는 이들은 모두 그 門風을 承襲할 뿐 아니라 僧尼로 하여금 禪의 面目을 알게하고 一般으로 하여금 禪法이 있는 줄을 알게된 것은 전혀 禪師의 힘이다.

라고하여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禪師에 대한 毁譽가 兩極端에 이르러서 ‘善時엔 善過於佛하고 惡時엔 惡過於虎라’ 이 말은 禪師의 嗣法高足인 滿空月面禪師의 ‘聞鏡虛法師遷化吟’(ꡔ韓國佛敎全書ꡕ 11, p.651下와 ꡔ滿空語錄ꡕ, p.85)의 앞 귀절 “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는 말을 適評이라 하지마는 現代의 우리나라 禪學을 말하는데는 禪師를 中興祖로 尊仰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앞의 註16과 같음.


  한마디로 말해서 退耕은 鏡虛를 우리나라 현대 禪의 중흥조라고 논평하였다. 이 글(禪宗略史)이 논문이기 때문에 그는 禪學(現代의 우리나라 禪學)이라고 쓴 듯하지만 현행의 ꡔ鏡虛集ꡕ을 통해 보면 ‘禪學’ 보다는 ‘參禪’(現代의 우리나라 참선)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고 하겠다.
  이상의 당시 대표적인 知性이라 할 세분의 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 또한 ‘鏡虛禪師는 현대 한국 참선의 중흥조이다’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Ⅱ. 종래의 相承 法系와 鏡虛의 家統

  여기에서 말하려는 禪家相承의 法統은 말할 것도 없이 朝鮮王朝 廢佛에 의한 法難期 곧 無宗山僧時代 拙稿, 「近代佛敎의 宗統宗脈」(朴吉眞博士古稀紀念 ꡔ韓國近代宗敎思想史ꡕ, 1984).
의 禪門法系家統을 가리킨다. 앞장에서 우리는 鏡虛禪師가 한국 현대참선의 중흥조임을 밝혀 보았는데, 종래 相承의 法統正脈에 있어서 그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잠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하여 편의상 종래의 禪門相承法系와 鏡虛의 직접적인 家統의 두 갈래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보기로 한다.
  1. 종래의 禪家相承法系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禪家法統은 실제 현존史料에 의하여 碧松 智嚴(1464~1594)으로부터 그 始源을 찾게 된다. 休靜撰, 「碧松堂大師行蹟」(ꡔ韓國佛敎全書ꡕ 7, pp.752下~753上)에 “正德戊辰秋 入金剛山妙吉祥 看大慧語錄 疑着狗子無佛性話不多時日 打破漆桶 又看高峰語錄 至颺在他方之語 頓落前解 是故師之平生 所發揮者 乃高峰大慧之風也 大慧和尙 六祖十七代嫡孫也 高峰和尙 臨濟十八代嫡孫也 吁 師以海外之人 密嗣五百年前宗派……”라고 밝힌 글과, 또 浮休善修가 ‘松雲大師小祥疏’에서 四溟堂 松雲 惟政(1544~1610)을 가리켜 “又投西山 已染禪旨 師承有自 淵源不無 近繼碧松 遠承臨濟”(ꡔ浮休堂大師集ꡕ5․ꡔ韓佛全書ꡕ8, p.20下)라고 한 것 등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碧松의 法이 芙蓉 靈觀(1485~1571)을 거쳐 淸虛 休靜(1520~1604) 곧 西山大師代에 와서 山中僧團의 禪門法統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拙稿, 「休靜의 禪思想과 그 法脈」(ꡔ韓國禪思想硏究ꡕ, 1984)
   ____, 「朝鮮禪家의 法統考」(佛敎學報 22, 1985)
   ____, 「霽月堂集에 보인 休靜의 法統」(韓基斗敎授華甲紀念 ꡔ韓國宗敎思想의 再照明ꡕ, 1993) 등.
芙蓉堂의 受法弟子이므로 西山과는 同門이라 할 수 있는 浮休 善修(1543~1615)도 실은 西山門下의 한 제자였으므로, 그 이후의 禪法은 西山大師의 門下와 그 法孫들에 의해 相承되어졌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그 相承의 法系를 모두 다룰 수가 없으므로 鏡虛 출생 이후 그의 활동 당시까지 사이에 생존했던 대표적인 고승 몇분의 法系를 대강 정리해 봄으로써 종래의 法系相承史實을 확인하고자 한다.
  ① 禪과 敎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茶와 詩에도 이름 높았던 艸衣 意恂(1786~1866)은 81세 되는 高宗 3년 즉 1866년에 입적하였다. 申櫶 撰 「艸衣大宗師塔碑文」에는 丙寅(1866)년 81세에 入寂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覺岸 撰 ꡔ東師列傳ꡕ 4 草衣禪伯傳에는 乙丑年(1865) 80세에 入寂한 것으로 되어 있다.
艸衣禪師는 玩虎에게서 拈香하고 金潭으로부터 禪을 받았다고 한다. 위와 같은 「艸衣塔碑」, ꡔ東師列傳ꡕ.
玩虎 倫佑는 白蓮 禱演의 法嗣이며, 禱演은 蓮潭 有一의 弟子이다. 金潭 또한 蓮潭의 제자이므로 그의 法系는, 西山 休靜―鞭羊 彦機―楓潭 義諶―月潭 雪霽―喚惺 志安―虎嵓 体淨―蓮潭으로 이어진다.
  ② 高宗 13년(1876)에 입적한 枕溟 翰醒(1801~1876)은 白坡 亘璇(1767~1852)의 제자이다. ꡔ東師列傳ꡕ 4 枕溟講伯傳 및 「仙巖寺枕溟大師行狀」.
그 法系는 喚惺―虎嵓―雪坡―退庵―雪峰―白坡로 이어져 翰醒에 이르고 있으며, 草衣와는 虎嵓으로부터 蓮潭과 雪坡로 갈라졌을 뿐 다같이 西山 이후 喚惺의 門孫이 된다.
  ③ 櫟山이라고도 號하는 映虛 善影(1792~1880)은 그의 塔碑에 「曹溪宗師 華嚴講伯 映虛堂大禪師」라고 있어서, 당시 宗名은 없었으나 曹溪宗系統이었으므로 大禪師라고 하였지마는 華嚴學에 뛰어난 講伯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高宗 17년(1880)에 입적하였는데, 그 역시 西山 下 喚惺의 門孫이었다. 「朝鮮曹溪宗師華嚴講伯映虛堂大禪師塔碑銘」 및 ꡔ東師列傳ꡕ4 映虛講伯傳.
즉 喚惺―涵月 海源―翫月 軌泓―雷黙 等麟―仁峰 德俊―映虛 善影으로 이어졌다.
  ④ 善影 입적의 이듬해 곧 高宗 18년에 입적한 優曇 洪基(1822~1881)는 喚惺의 門孫인 枕溟 翰醒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浮休 善修의 門孫인 碧潭 幸仁의 玄法孫으로 그 法을 이었다. 「優曇大禪師行狀」, 「曹溪山松廣寺優曇和尙行狀」 및 ꡔ東師列傳ꡕ 5 優曇講伯傳.
그 法系는 浮休―碧巖 覺性―翠微 守初―栢庵 性聰―無用 秀演―影海 若坦―楓潭 世察―碧潭 幸仁―會溪 輝宗―蓮月 以俊―洪基로 이어져 있다.
  ⑤ 高宗 26년(1889)에 입적한 雪竇 有炯(1824~1889)은 枕溟 翰醒의 授戒弟子이다. 그 法系는 枕溟의 師인 白坡로부터, 龜峰 仁裕―道峰 國燦―正觀 快逸―白岩 道圓―有炯으로 이어져 있다. ꡔ東師列傳ꡕ 5 雪竇講伯傳, 「靈龜山雪竇大師行狀」등.

  ⑥ 有炯과 동년에 입적한 混元 世煥(1853~1889)도 喚惺 門孫으로서 그 法系는, 喚惺―涵月―影波―淸潭―湖月―慧峰―霞隱―克庵 師誠―世煥이다. ꡔ混元集ꡕ 및 ꡔ朝鮮禪敎史ꡕ pp.531~532.

  ⑦ 有炯과 같이 翰醒의 授戒弟子인 涵溟 太先(1824~1902)은 高宗의 光武 6년(1902)에 입적하였다. 「華嚴宗主函溟堂大禪師碑銘」 및 ꡔ東師列傳ꡕ 5 등.
그의 法系는, 西山 下 鞭羊―楓潭―月渚―雪巖―霜月―龍潭 慥冠―圭岩 朗成―瑞月 巨鑑―會雲 振桓―圓潭 乃圓―豊谷 德仁―太先으로 이어져 있다.
  ⑧ 高宗 25년(1888)에 입적한 龍雲 處益(1813년생)의 法系는, 浮休―碧巖―翠微―栢庵―無用―影海―楓潭―黙庵 最訥―寶峰 孟陟―處益으로 되어 있다. ꡔ東師列傳ꡕ 4 龍雲禪伯傳.

  이상에서 대충 대표적인 몇몇 禪師의 法系를 들어 보았다. 이들만이 아니라 당시 승려들은 모두가 西山 休靜(浮休 善修 포함)의 門孫이었으므로 鏡虛를 포함한 당시의 불교계(禪家)는 모두가 西山확립의 法統을 相承한 계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2. 鏡虛에 이어진 家統
  이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른바 無宗山僧時代의 山門(禪家)法統은 法祖 碧松智嚴이 평생 發揮한 家風을 法師 靈觀을 거쳐 이은 西山大師가 확립하였으며, 그 계통의 法孫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禪脈 중심의 僧團을 형성해 왔었다. 그러므로 근세에 이르러 참선을 크게 일으켜 오늘날 우리 禪界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鏡虛禪師도 당연히 그러한 禪脈 法統을 계승한 山門의 禪師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에 그 家統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우선 鏡虛의 法을 이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漢岩의 「鏡虛和尙行狀」에 보인 관련부분부터 풀어서 옮겨 본다.

  일찍이 대중을 향해 말하기를, 무릇 祖宗의 門下에 心法을 傳授함에는 근본이 있고 근거가 있으니 착란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 (嘗示衆曰 夫祖宗門下心法傳授 有本有據不可錯亂)……
  내 비록 道가 완전치 못하고 성품을 잡도리하지 못하였으나 한 평생 행하려 한 바는 이 한 물건(一着子)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있었다. 이제 늙었으니 뒷날에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龍岩長老에게 법을 이어서 그 道統의 연원을 정연하게 하고, 萬化講師로써 受業師로 삼아야 옳으니라 하시다. (一後我弟子 當以我嗣法於龍岩長老 以整其道統淵源 而以萬化講師 爲我之受業師可也) ꡔ鏡虛集ꡕ의 略譜(龍雲撰)에는 “三十二歲時 住洪州天藏庵 一日對衆演法次 特明傳燈淵源 仍自嗣法于 龍巖和尙…”이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行狀」에서 “嘗示衆曰…”로 시작된 이 演法이 鏡虛 32세 때 天藏庵에서의 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行狀」에는 “而今老矣 日後我弟子 當以我嗣法於 龍岩長老以整其 統淵源”(이제 늙었으니 뒷날에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龍岩長老에게 法을 이어서…)라고하여 늙었을 때(老境)의 설법으로 되어 있으므로, 32세 때는 옳지가 않다고 하겠다.


라고 당부한 스승의 말을 옮기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그 법계를 밝혀놓았다.

  이제 남기신 가르침을 따라 法(법통)의 源流(淵源)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님(鏡虛)은 龍岩 慧彦을 이었고 慧彦은 錦虛 法沾을 이었으며 法沾은 栗峰 靑果를 이었고 靑果는 靑峰 巨岸을 이었으며 巨岸은 虎岩 軆淨을 이었으므로, 淸虛(西山)는 鞭羊에게 전법하고 鞭羊은 楓潭에게 전법하고 楓潭은 月潭에게 전법하고 月潭은 喚惺(虎岩의 스승)에게 전하였다. 화상(鏡虛)은 淸虛로부터 11세손이 되며 喚惺으로는 7세손이 된다. 今遵遺敎而泝法源流 則和尙嗣龍岩慧彦 彦嗣錦虛法沾 沾嗣栗峰靑果 果嗣靑峰巨岸 岸嗣虎岩軆淨 而淸虛傳之鞭羊 鞭羊傳之楓潭 楓潭傳之月潭 月潭傳之喚惺 和尙於淸虛爲十一世孫 而於喚惺爲七世孫也(ꡔ韓國佛敎全書ꡕ 11, p.654下).


라고 하였다.
  여기(行狀)에 밝힌 바 그대로의 법통(行狀에는 道統이라 하였음) 연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淸虛休靜(西山大師)―鞭羊彦機(1581~1644)―楓潭義諶(1592~1665)―月潭雪霽(1632~1704)―喚惺志安(1664~1729)―虎岩體淨(1687~1748)―靑峰巨岸―栗峰靑果―錦虛法沾―龍岩慧彦―鏡虛惺牛.
  이 「行狀」에서는 無宗名 山中僧團의 禪家 法祖인 西山大師로부터 鏡虛는 11世孫이며, 그 派祖라 할 수 있는 喚惺으로부터는 7世孫이라 하였는데, 이는 西山과 喚惺을 각각 포함해서 11世 또는 7世라는 말이지 西山 후 또는 喚惺 후 몇代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西山 11世와 喚惺 7世說에는 異說이 있으니 鏡虛를 西山 13세손이며 喚惺 9세손이라하여 그 사이에 2대를 더 넣고 있는 것이다. 즉 龍岩長老 아래에 永月 奉律과 萬化 普善의 두 代를 거쳐서 鏡虛에 이르고 있는 설(龍岩―永月―萬化―鏡虛)이다. 性陀, 「鏡虛의 禪思想」 (朴吉眞博士華甲紀念 ꡔ韓國佛敎思想史ꡕ, 1975).
   李逢春, 「朝鮮後期 禪門의 法統考」-鏡虛의 法脈系譜를 중심으로-(ꡔ韓國佛敎學ꡕ 22집, 韓國佛敎學會, 1977).
이는 현재 德崇門中에서 현행되는 계보이며, 근자에 나온 ꡔ佛祖源流ꡕ 耕耘 炯埈, ꡔ海東佛祖源流ꡕ 我編 鏡虛惺牛 조(불기2520년 刊).
에도 그렇게 밝혀져 있다.
  특히「鏡虛의 禪思想」에서 性陀스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鏡虛集보다도 4․5년 앞서 간행된 栗峰集을 비롯하여 門徒集인 滿空語錄․雲峰禪師法語․金烏集 등에서 동일하게 鏡虛의 法燈相續을 龍岩慧彦―永月奉律―萬化普善―鏡虛惺牛로 대고 있다. 또 生存한 門下의 老家들도 위와같이 法燈相續을 증언하고 있으며, 多年間 曹溪宗法統을 수집 연구하여 原稿가 완성된 俗離山의 耕耘스님도 마찬가지로 考證하였다. 아마 鏡虛集 略譜에 밝힌 傳燈淵源은 誤植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鏡虛는 淸虛下 13세손이고 喚惺下 9세손이다. 앞 註33에 나온 ꡔ韓國佛敎思想史ꡕ, p.1109의 註6.


라고 註記하였다. 그는 ꡔ鏡虛集ꡕ 略譜(韓龍雲撰)에 있는 “一日對衆演法次 特明傳燈淵源 仍自嗣法于龍巖和尙 師於淸虛爲十一世孫 而於喚惺爲七世孫也”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으며, 그래서 이를 誤植으로 보려고까지 한 듯 하다. 그러나 그 ꡔ鏡虛集ꡕ보다도 11년 전에 썼던 漢岩의 「鏡虛和尙行狀」에는 鏡虛 스스로가 “龍岩長老의 법을 이은 것(嗣法)으로써 그 道統의 淵源을 整然하게 하고, 萬化講師로써 나의 受業師로 함이 可하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 師說을 받들어 「行狀」 撰者(漢岩)가 傳(嗣)法의 차례를 밝히고는 淸虛 11世요 喚惺 7世라 하였던 것이므로 이를 그처럼 쉽게 誤植일 것으로 보아넘길 문제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현재 德崇門中 계보 등에서는 鏡虛를 淸虛 13世 喚惺 9世라 하고, 「行狀」과 「略譜」에서는 淸虛 11世 喚惺 7世로 하고 있어서 2說이 서로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行狀」에서의 11世 7世說은 鏡虛自說에 근거하여 그 道統 곧 法統의 淵源을 整理한 代數이므로 이를 옳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鏡虛는 후대에 이러한 논란이 있을 것을 미리 알기나 한 것처럼 “日後 我弟子는 當以 我嗣法을 於龍岩長老하여 以整 其道統淵源할지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而以 萬化講師로 爲我之 受業師 可也니라”라고하여 嗣法師(法統을 이은 스승)와 受業師(講學敎業을 배움받은 스승)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러므로 「行狀」에서의 11世 7世說은 嗣法師의 禪脈 중심(거기에는 受業師인 萬化講師는 넣지 않았으므로) 法統이며, 德崇門中의 13世 9世說은 受業師의 講脈(永月․萬化)까지 포함한 法系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Ⅲ. 鏡虛의 불교세계와 그 史的位相

  無宗山僧時代 승려들의 수행은 주로 三門修業 韓國佛敎史書에서 三門修業이 소항목명으로 처음 다루어진 것은 拙著, ꡔ韓國佛敎史槪說ꡕ(經書院, 1986), pp.216~218에서이다.
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三門이란 看(講)經門․參禪門․念佛門인데 이들 공부수행(修業)은 오늘날의 학술용어로 말한다면 敎學(敎理專攻분야)․禪學(禪理參究 및 禪實修분야)․淨土學(念佛往生信仰분야)의 세 부문이라 할 수 있다. 日帝强占期 초까지도 우리 산중의 큰절들에는 講堂(房)․禪房(참선당)․염불방(堂)이 따로 있어서 각각 專業修行 또는 兼修에 열중하였으나, 그 중에서 특히 講經공부는 山寺 學人들의 必修課程이었다고 할 수가 잇었다.
  그러한 修學의 전통은 西山大師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 遠法孫이었던 鏡虛 또한 전통적인 學人修業의 과정이라 할 講學을 공부하였고 또 약관의 20대 초에 講師가 되어 가르쳤다. 30대 초에는 修禪精進하여 悟得하고는 여러 곳을 편력하며 弘法활동을 하였으므로 그는 敎禪達通의 眞善知識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한 그가 이룩한 불교세계의 특성과 역사적 位相을 여기에서 간략하게 밝혀보기로 한다.

  1. 그가 이룩한 대중적 생활참선으로서의 특성
  鏡虛禪師의 禪觀 및 佛敎思想 전반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그리 많은 편은 못된다. 다만 현재 수 편의 논문 性陀, 「鏡虛의 禪思想」(앞 註33에 나왔음).
   ____, 「鏡虛禪師의 禪世界」(ꡔ韓國佛敎學ꡕ 22, 韓國佛敎學會, 1997).
   韓基斗, 「近代 韓國의 禪思想」(朴吉眞博士古稀紀念 ꡔ韓國近代宗敎思想史ꡕ, 1984).
   高翊晉, 「鏡虛堂 惺牛의 兜率易生論과 그 時代的 意義」(ꡔ韓國彌勒思想硏究ꡕ, 佛敎文化硏究院 編, 1987).
   拙稿, 「朝鮮朝 佛敎와 牧牛子思想」(ꡔ普照思想ꡕ3, 普照思想硏究院, 1989) 등.
들에서 鏡虛의 불교세계를 나름대로 깊이있게 다루고는 있으나 거의 모두가 부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ꡔ鏡虛集ꡕ을 통하여 그의 불교세계를 엿볼 수가 있다. 우선 한 권으로 되어있는 그 내용의 차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法語(11편)․序文(9편)․記文(5편)․書簡(4편)․行狀(2편)․影贊(7편)․五言絶(3편)․五言律(6편)․七言絶(26편)․七言律(97편)․四六文(1편)․歌(6편)으로 되어 있으며,「補遺」로 序(1편)․法語(3편)․五言絶(1편)․五言律(2편)․七言絶(9편)․七言律(19편)․歌(3편)․附錄(1편). 


  이 목차만으로서는 종래 朝鮮代 여느 禪師들의 文集과 다를 바가 없다. 語․序․記․簡․狀․贊 등의 文類와, 五言․七言 絶律 및 四六․歌頌 등 詩歌類로 이루어진 雜文集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雜文集의 형태이기는 하나 이 한 권의 ꡔ鏡虛集ꡕ(補遺 포함)에는 그의 참면목을 알게하는 독특한 향취가 서린 글들로 가득차 있다. 禪師로서의 풍모를 드러내는 글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 글모음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禪세계는 敎니 禪이니 하는 차별상을 떠난 하나의 불교세계를 찾아낼 수 있게 한다고 할 수가 있다.
  첫번째의 法語편에는 ‘泥牛吼’에서 ‘與法子滿空’에 이르기까지의 10편이 모두 한문으로 된 전통적 禪法語라 할 수가 있으나, 본래 辯說에 능했기 때문인지 마냥 전통 답습에만 매달려 있는 禪법문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보다도 그 끝에 들어있는 ‘중노릇하는 법’은 특히 한문자 하나 섞이지 않은 순한글의 법문이다. “대저 중노릇 하는 것이 적은 일이리요”로 시작된 이 법문은 근 1세기 전의 문장인데도 한문자 하나 없는 순한글이니, 그 때 그는 벌써 놀랍게도 불교를 일반대중에게 널리 쉽게 펼치고자 하였음을 알 수가 잇다.
  두 번째의 序文편에는 아홉 편의 서문이 묶여 있으나 실은 序라고 붙여진 제목의 글은 네 편 뿐이며, 첫머리의 ‘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와 ‘海印寺修禪社芳啣引’․‘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등 序라는 題名이 없는 글이 다섯 편이나 된다. 이들 아홉 편의 글은 ‘南原泉隱寺佛粮序’와 ‘德裕山松溪庵回祿後成造勸善文’ 및 ‘喪布稧序’의 세 편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개가 修禪과 관련있는 글이다. 그 중에서도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등과, 다음 記文 편의 5편 가운데 첫번째인 ‘陜川郡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 등은 修禪結社를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당시의 불교계 및 鏡虛의 禪修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가 있다.
  書簡편의 편지글과, 瑞龍 取隱 兩和尙의 行狀과, 7편의 影贊(錦雨和尙․茵峰和尙․大淵和尙․歸庵和尙․古庵和尙․金峰和尙․東谷和尙) 등은 禪師의 風格과 禪味 및 禪敎의 높은 경지를 엿보게 하는 훌륭한 글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130여편에 이르는 詩와 여섯 편의 歌曲들도 모두 그의 禪味와 道風을 드러내고 있는 金科玉條와도 같은 글이라고 할 수가 있다. 補遺편에 들어있는 수 편의 法語와 수 십편의 詩歌들도 모두 예외일 수가 없다.
  그와 같이 보여주고 있는 그의 불교세계 중에서 가장 특징지울 수 있는 그의 업적은 禪의 대중화, 참선의 생활화를 외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순한글로 쓴 ‘중노릇 하는 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중노릇하는 것이 적은 일이리요.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야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되여 살고 죽는 것을 면하자고 하는 것이니, 부처되려면 내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않으나 다 꿈으로 알고,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 가고 중생도 되고 귀신도 되어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을 생각하야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되, 보고 듣고 일체 일을 생각하는 놈이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고 모양이 있는 것인가 모양이 없는 것인가 큰가 작은가 누른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을 내여 궁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하며 닭이 알안듯하며 늙은 쥐가 쌀든 궤짝 쫓듯하야 항상 마음을 한군데 두어 궁구하야 잊어버리지 말고 의심하야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말고 그저 있을 때라도 의심하야 지성으로 하여가면 필경에 내마음을 깨다를 때가 있을 것이니 부디 신심을 내여 공부할지니라. ꡔ鏡虛集ꡕ(ꡔ韓國佛敎全書ꡕ 11, p.597 上中).
……

  여기에 참선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이대로가 참선하는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마음을 한 군데에 두어 궁구하여 잊어버리지 말고 의심하여 지성으로 하여가면 필경에 내 마음을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니 부디 신심을 내어 공부할지니라.’라고 강조하여 당부하고 있다.
  그보다도 그는 본격적인 「參禪曲」 위와 같음, pp.630下~633上.
을 지어 참선을 쉽게 노래로 풀어 읊었다. 이는 앞의 ‘중노릇하는 법’과는 달리 한문자를 섞어 쓰고 있으나 노래말은 당시로서는 매우 쉬운 어문체라 할 수 있다. 「參禪曲」의 짜임새를 대강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가 있으리라고 본다.
  “忽然히 생각하니 都是夢中이로다.”로 시작되는 이 「參禪曲」은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燈불이라.”까지가 맨 첫단으로서 無常을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三界大師 부처님이 정녕이 이르사대”에서 “八萬藏經 遺傳하니”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는 發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어서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大悟하기 가깝도다.”의 대목은 좀 긴 편인데 여기에서 닦는(修禪)방법을 노래하고 있다.
  “홀연히 깨달으면 本來 생긴 나의 부처~生死輪廻 본래 없다.”에서는 깨달음과 그 涅槃의 경지를 읊고 있다. 이어서 “善知識을 찾아가서 了然히 印可맞아 다시 의심없은 후에”로 깨친 바의 인가를 언급하고 곧 “世上萬事 忘却하고… 有緣衆生 濟度하면 報佛恩德 이아닌가…… 八風五欲 일체경계 不動한 이 마음을 泰山같이 써나가세”라고 悟得 후의 保任自適생활을 노래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허튼소리 우시개로 이날 저날 헛보내고…”로 시작하여 “百千萬劫 蹉跎하야 다시 人身 망연하다.”에까지 放逸한 생활과 그로 인한 무서운 果報를 읊어서 경계하였으며, 이어 “참선 잘한 저 道人은~任意快樂 自在하니”에서 善修善果를 잠깐 밝히고는, “아무쪼록 이 세상에… 부지런히 하여보세… 자욱자욱 死地로세”라하여 憤發을 촉구한 다음, “이전 사람 참선할제 마디그늘 아꼈거늘… 나는 어이 放逸한고~오호라 한심하다.”하여, 스스로를 警策하고 마음을 되돌이켜(自策回心하여) 返照해 보이고 있다.
  끝부분에서 그는 “이 글을 자세 보아 하루도 열두시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다시 할말 있아오니 돌장성이 아이낳으면 그 때에 말하리라.”라고 맺었는데, 이는 勤修勸發의 간절한 당부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參禪曲」 이야말로 鏡虛의 禪思想을 참으로 쉽게 잘 나타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허례 허식도 없고 上根大智나 下根劣機의 차별도 없고, 僧과 俗의 구별도 없다. 오직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곧 사람이면 누구나(나도) 참선하여(닦아서)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맨먼저 人生의 無常을 들고, 다음에 그 無常의 生死輪廻를 永斷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일깨웠다. 이어서 發心하고 올바르게 닦는 참선공부를 밝혔으며, 悟得과 涅槃의 경지를 보이고는 善知識의 印可를 거쳐 悟得 후의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放逸과 그 果報를 警戒하고, 善修의 善果를 들고는 분발하여 自策하고 回心返照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부지런히 공부하고 경책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禪을 最上乘禪旨 앞의 註14 「韓國禪宗略史」 및 앞의 註33 「鏡虛의 禪思想」 등.
라고 한다면 그는 最上乘禪旨를 그와 같이 쉬운 노래로 읊었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노래로 읊은 참선법문을 통하여 그의 참선이 일반 대중의 생활속에 쉽고도 친근하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의 禪은 대중적 생활선이었다고 한마디로 특징지울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2. 現近代 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이제까지 우리는 현근대 韓國禪의 중흥조로서의 鏡虛禪師를 보았으며, 또 鏡虛는 無宗山僧時代 禪家法統을 확립한 西山大師 休靜의 먼 法裔로서 그 家統이 뚜렷하였음을 보았었다. 특히 그는 傳統的 最上乘禪을 重興시켰으므로 종래 山寺중심의 祖師禪 일변도이기가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을 위한 생활참선을 쉽게 펴고자 하였다.
  敎外別傳 格外道理의 不立文字禪이기 때문에 전통禪家에서는 敎格內的 佛法을 止揚하였고, 文字的 知解를 放棄하는 것이 통례였었다. 그러므로 上根機人이 아니면 이해도 추측도 불가능하다는 이른바 禪話 法語를 썼고, 또 言語道斷 語路不通의 公案(話頭, 예를 들면 마른 똥막대기․뜰앞의 잣나무․麻三斤․趙州 無字 등)을 들었으니 이를 看話 또는 擧話(話頭提擧)라고 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鏡虛는 ‘중노릇하는 법’이라는 법문을 순한글로 썼고 또 「參禪曲」을 쉬운 말로 노래하였으며, 그 밖에도 우리말 불교노래(歌曲)인 「可歌可吟」 앞의 註38과 같은 책, pp.633上~634下.
   이 책의 p.690上에 들어있는 筆寫本 ꡔ鏡虛集ꡕ에서는 「可歌可咏」 곧 吟이 咏으로 되어있다. 이 「可歌可吟」은 ꡔ釋門儀範ꡕ 下편, pp.281~283에 이미 수록되어 있음.
과 순한글의 「법문곡」 앞의 ꡔ韓國佛敎全書ꡕ 11, pp.634下~636下.
을 읊었다. 전문적인 佛敎歌曲은 아니나 「金剛山遊山歌」가 있다(같은 韓佛全書, pp.641中~651中).

  그의 「법문곡」에서 참선하는 법에 관한 대목의 요긴한 부분만을 뽑아 옮겨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깊이 의심하야 궁구하되 이것이 무엇인고 어떻게 생겼는가 큰가 작은가 긴가 짜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누른가 푸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도시 어떻게 생겼는고 시시때때로 의심하야 의심을 놓지말고 념념불망 하여가면 마음은 점점 맑고 의심은 점점 깊어 상속부단할 지경에 홀연히 깨달으니 천진면목 좋은 부처 완연히 내게 있다. 위와 같은 책, p.635下.


  ‘중노릇하는 법’에서의 공부하는 방법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법문으로 되어있는데 이미 앞쪽에 이끌어 본 바가 있다.「參禪曲」에서는,
  닥난 길을 말하랴면 허다히 만컷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로 시작하여 닦는 법 곧 참선 닦는 방법에 관해 읊고 있다. 이「參禪曲」은 이 글의 끄트머리에 과목을 쳐서 전문을 옮길 생각이므로 여기에는 따로 인용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쉬운 노래말로 참선을 읊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最上乘禪旨를 제창하여 침체에 빠진 禪法을 중흥한 禪師로서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우리 불교계로서는 참으로 놀랍고도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무렵의 것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국한문 혼용의 「參禪曲」이 ꡔ釋門儀範ꡕ 安震湖, ꡔ釋門儀範ꡕ 下편, pp.231~235.
에 또 하나 수록되어 있지만 한글로 표기하였을 뿐이지 그 내용이 어렵고 매끄럽지 않다. 그에 비한다면 ꡔ鏡虛集ꡕ의 「參禪曲」은 훨씬 부드럽고 쉬우며 읽기가 편한 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鏡虛禪師는 우리 한국 참선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참선을 쉽게 노래로 지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이 땅의 禪風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그는 단순한 근대 한국선의 중흥조만이 아니고, 쉽고도 새롭고 신선한 참선의 기풍을 불러 일으킨 참 선지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실로 그는 現近代의 우리 불교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기원(一新紀元)을 이룩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끝으로 여기에 그의 「참선곡」 전편을 옮겨서 과목을 붙여(科分하여) 鏡虛의 참선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한다.

              參禪曲(科分)

忽然히 생각하니 都是夢中이로다        ─┐
千萬古 英雄豪傑 北邙山 무덤이요        │
富貴文章 쓸대업다 黃泉客을 免할소냐        │ 無常觀
嗚呼라 내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
바람 속의 燈불이라        ─┘

三界大師 부처님이 叮嚀이 이르사대        ─┐
마음 �어  成佛 하야 生死輪廻 永斷하고        │
        │부처님의 가르침
不生不滅 저 國土에 常樂我淨 無爲道를        │
사람마다 다 할 줄로 八萬藏經 遺傳하니        ─┘

사람 되야 못 닥그면 다시 工夫 어려우니        ─┐
        │ 發心
나도 어서 닥가 보세        ─┘

닥난 길을 말 하랴면 허다히 만컷마는        ─┐
대강 추려 적어 보세 안꼬 서고 보고 듯고        │
着衣喫飯 對人接語 一切處 一切時에        │
昭昭靈靈 知覺하난 이것이 어떤겐고        │
몸뚱이난 송장이요 妄想煩惱 本空 하고        │
天眞面目 내의 부처 보고 듯고 안꼬 눕고        │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 번 깜짝할 새        │ 닦는 방법
千里萬里 단여 오고 許多한 神通妙用        │    禪修
分明한 내의 마음 어떠케 생겼난고        │
疑心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잡듯이        │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        │
六七十 늙은 寡婦 子息을 일흔 후에        │
子息 생각 간절하틋 생각생각 잊지 말고        │
깊이 궁구 하여 가되 一念萬年 되게 하야        │
廢寢忘飧 할 지경에 大悟하기 각갑도다        ─┘

忽然히 깨다르면 本來 생긴 내의 부처        ─┐
天眞面目 絶妙하다 阿彌陀佛 이 아니며        │
釋迦如來 이 아닌가 점도 안코 늑도 안코        │  頓悟
크도 안코 적도 안코 本來 생긴 自己靈光        │ 涅槃境地
盖天盖地 이러 하고 涅槃眞樂 가이 없다        │
地獄天堂 本空하고 生死輪廻 本來 없다        ─┘

善知識을 차저 가서 了然이 印可 마저        ─┐
다시 疑心 없은 後에 世上萬事 忘却 하고        │
隨緣放曠 지내 가되 빈 배같이 떠 놀면서        │
有緣衆生 濟度 하면 報佛恩德 이 아닌가        │
一切戒行 지켜 가면 天堂人間 壽福하고        │
大願力을 發하여서 恒隨佛學 생각하고        │悟得後의 생활
同體大悲 마음 먹어 貧病乞人 괄세 말고        │保任 自適
五蘊色身 생각 하되 거품 같이 觀을 하고        │
밧같으로 逆順境界 夢中으로 생각하야        │
喜怒心을 내지 말고 虛靈한 내의 마음        │
虛空과 같은 줄로 眞實이 生覺하야        │
八風五欲 一切境界 不動한 이 마음을        │
泰山 같이 써 나가세        ─┘

헛흔 소리 우시개로 이날저날 헛보내고        ─┐
늑난 줄을 忘却하니 무삼 工夫 하여 볼가        │
죽을제 苦痛 中에 後悔한들 무엇하리        │
四肢百節 오려 내고 머리골을 쪽이난 듯        │放逸
五臟六腑 찢난 중에 압길이 캄캄하니        │果報 警戒
寒心慘酷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
저 地獄과 저 畜生에 나의 身世 慘酷하다        │
百千萬劫 蹉跎하여 다시 人身 망연하다        ─┘
參禪 잘 한 저 道人은 안저 죽고 서서 죽고        ─┐
알토 안코 蟬脫 하며 오래 살고 곳 죽기를        │
        │ 善修善果
제 맘대로 自在하며 恒河沙數 神通妙用        │
任意快樂 自在하니        ─┘

아무쪼록 이 世上에 눈코를 쥐여뜻고        ─┐
부지런이 하여 보세 오날 내일 가는 것이        │
        │ 憤發
죽을 날이 당도하니 푸주 간에 가는 소가        │
자옥자옥 死地로세        ─┘

이전 사람 參禪할제 마듸그늘 액겻거늘        ─┐
나는 어이 放逸하며 이전 사람 參禪할제        │
잠오난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럿거든        │
나는 어이 放逸하며 이전 사람 參禪할제        │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뻣고 울엇거늘        │
나는 어이 放逸한고 無明業識 毒한 술에        │
昏昏不覺 지내 가니 嗚呼라 슬프도다        │   自策
타일너도 아니 듯고 꾸지저도 조심 안코        │ 回心 返照
심상이 지내 가니 희미한 이 마음을        │
어이 하야 인도할꼬 쓸때 없난 貪心嗔心        │
공연히 이르키고 쓸때 없난 許多分別        │
날마다 紛擾하니 우습도다 내의 지혜        │
누구를 한탄할꼬 知覺 없난 저 나비가        │
불빗을 貪하여서 저 죽을 줄 모르도다        │
내 마음을 못 닥으면 如干戒行 少分福德        │
도모지 虛事로세 嗚呼라 寒心하다        ─┘

이 글을 자세 보와 하로도 열두 시며        ─┐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러니 工夫하소        │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 위에 페여 놓고        │ 勤修 勸發
시시때때 警策하소 할 말을 다 하랴면        │ 거듭 당부
海墨寫而不盡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할 말 있사오니        │
돌장승이 아희 나면 그 때에 말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