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제5주제 논평:鏡虛의 韓國佛敎史的 位置

淸潭 2008. 2. 20. 21:12
 

제5주제 논평:鏡虛의 韓國佛敎史的 位置


 

이은윤(한국불교선학연구원 원장)

  1. 한국불교는 신라말 고려초 九山禪門이 개산된 이래 禪宗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조선조의 억불하에서도 이같은 선불교 법맥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경허성우선사가 유구한 한국선불교의 傳燈을 새삼 환히 밝힌 근․현대 한국 불교 중흥조라는 데는 승속간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같은 경허의 평가는 특히 그의 ‘무애행(戒行)’과 관련한 견해에서는 승가와 학계의 비판적 시각이 없지 않다. 또한 선사가 중흥조라는 불교사적 위치를 확고히 점할 수 있는 연구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처럼 선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고 척박한 연구풍토에서 오늘 김영태 교수의 발표 논문은 우선 앞으로의 경허연구에 거보를 내딛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능화의 「韓國佛敎通史」등 경허 관련 각종 문헌사적 자료들을 폭넓게 조명, 선사의 무애행에 대한 평가를 진일보시킨 김교수의 통찰은 괄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禪林조차도 경허의 무애행을 자신있게 100% 수용,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김교수가 천착한 경허평가는 오히려 팔이 안으로 굽게 마련인 승단의 연구나 자리매김 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예나 지금이나 鏡虛禪을 말할 때 문제가 되는 뜨거운 감자는 그의 무애행이다. 따라서 상현 이능화거사의 「조선불교통사」에 나와 있는 기록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상현거사는 당시 총림이 경허의 무애행을 ‘魔說’이라고 비판한데 동조하는 입장이다. 상현은 “내가 감히 경허선사의 깨달은 바와 본 바를 알지는 못하지만 불경과 禪書에서 본 대로 논한다면 이는 옳지가 않은 것 같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 다음 「指月錄」의 대혜종고선사장(章)을 인용, 경허의 大乘禪이 총림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경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들은 대체로 이같은 상현의 논거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허가 전개한 대승선, 흔히 말하는 祖師禪의 禪旨와 回互의 논리가 펼쳤던 대기대용의 活潑潑한 주체적 眞人의 절대자유(무애행)를 깊이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상현이 인용한 대혜종고선사(1089-1163)나 「능엄경」은 중국 禪宗史에서 볼 때 조사선의 황금기가 끝난 선불교 쇠퇴기의 인물이고 典據라는 점이다. 인도불교를 중국화시킨 동아시아 선불교가 당말오대까지 전개한 조사선의 황금기(7C 중반~10C 중반)는 선종의 태동 배경이며 사상적 본래면목인 民衆性을 그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는 돈오를 통해 自得한 개인의 주체성 위에서 엄격한 도덕적, 윤리적 자기 비판을 거쳐 행하는 일상생활 모두가 진리라는 이른바 平常心是道가 바로 佛道였다.
  간화선의 개창자로 알려진 대혜종고가 살았던 남송대에 이르면 이같은 조사선은 五山十刹制라는 불교의 官邊化와 귀족 지향적인 모습으로 변하면서 超佛越祖의 기상을 드날리던 대승선(조사선)의 선풍이 형해화 된다. 따라서 대혜의 禪風은 경허가 전개한 대승선의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이 보리에 장애가 되지 않고, 도둑질과 음행이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라는 초불의 조사선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스승의 저술인 저 유명한 「碧巖錄」을 불태우고 戒行을 강조한 것도 실은 깨치지도 못한 주제에 조사선의 활발발한 선풍만을 모방해 막행막식하고, 禪理를 체득하려는 노력없이 관념화한 禪旨를 뇌까리는 口頭禪의 폐풍을 경발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선림이 그의 「書狀」을 선원 교재로 채택하는 등 大慧禪에 크게 의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허가 眞善知識으로서 전개한 선은 이미 그 활기를 잃은 남송대 대혜종고의 禪이 아니라 마조의 법사로 활달한 조사선풍을 드날렸던 盤山寶積선사와 그의 제자 鎭州普化화상으로 이어진 風狂의 철학을 그 저류로 하는 조사선이 아니었던가 싶다. 오늘의 한국불교 선종을 대표하는 조계종의 禪法인 臨濟禪風도 그 개산조인 임제의현선사가 보화화상으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비록 가설적이고 깊은 연구와 천착도 없지만 일단 경허의 무애행과 관련한 비판의 고리를 풀고자 하는 생각으로 일단 문제를 제기해 본 것이다. 극히 지엽적인 가설이지만 경허가 圓寂에 앞서 남긴 臨終偈를 보면 반산보적선사의 상당법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心月孤圓 光呑萬象
(光非照境 境亦非存)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달 홀로 둥글어 만상을 삼키었도다.〈빛이 경계를 비치지 않으니 경계 역시 존재하질 않는구나〉빛과 경계 다 잊었거늘 또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위 3구절로 된 반산의 법어 중 가운데 구절을 생략하고 앞뒤 2구절만 인용한 게 경허의 임종게다. 경허가 반산의 법문을 임종게로 썼다고 해서 공연한 표절 시비를 일으킬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禪家에서는 悟得의 경지가 같거나 또는 자신의 禪旨와 일치하면 선배 선승들의 법어나 화두를 그대로 옮겨 쓰는게 하나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임종게는 禪匠들이 遷化에 앞서 자신의 宗旨를 밝히는 역작이며 이 세상에 남기는 불생불멸의 舍利다. 그렇다면 왜 하필 경허가 반산의 법문을 임종의 사리로 남기고 갔을까? 여기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가 반산과 조사선의 3대 사상적 저류인 風狂의 철학․痴鈍의 철학․汚物의 철학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서 禪風으로 정착시킨 그의 사법 제자 보화화상의 선지를 자신의 종지로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경허의 무애행을 대혜선사의 선지를 빌어 평가하는 것은 전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능엄경」을 인용한 경허 비판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능엄경」 자체가 중국에서 만든 僞經이라는 설이 오래전 부터 있어 왔고 특히 이 경전은 선종 5家 중 맨마지막 개산인 法眼宗만이 중시한 경전이다. 법안종의 法源인 현사사비․나한계침선사 등 雪峰법계의 福建禪에서 「능엄경」의 心法과 선의 魔境 50종에 대한 禪病 치유책을 깊이 천착했었다.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법안종만이 다른 선종 4家 등과는 달리 염불 정토사상과 禪敎一致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원래 한국 선종의 9산선문 법맥은 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7개의 禪刹 모두가 마조-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지는 馬祖禪의 법맥이다. 그러나 후일 고려 광종이 법안종의 영명연수선사를 크게 존경한 나머지 국비 유학승 28명을 그가 주석하고 있는 抗州 淨慈寺로 유학 보내 법안종풍을 대폭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선림은 선교일치니 通佛敎니 하는 正體性의 변질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고려말 쇠퇴한 선풍과 혼란스런 法統문제를 재정립하고자 태고보우국사(1301~1382)가 元나라에 건너가 이어온 법맥은 임제종 호구파 석옥청공선사의 선풍이었다.
  이 문제는 한국 선종의 법맥 正統性과도 관련될 수 있는 중대한 과제이기 때문에 깊은 연구와 천착이 필요하다 하겠다. 다만 상현거사가 경허를 평하면서 인용한 전거의 하나인 「능엄경」의 禪理와 한국 선림이 오늘 현재까지도 그처럼 지향해 마지않는 조사선의 선지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한 것뿐이다. 따라서 경허가 진정으로 조사선의 선지를 지향한 참선지식이며 한국 근세불교의 중흥조라면 대혜선사나 「능엄경」에 準據를 둔 경허의 무애행 평가는 다시없는 金科玉條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감히 제기하고자 한다. 한가지 덧붙여 두고자 하는 점은 오늘의 한국불교 선종(조계종)이 宗祖문제에서 태고보우와 보조지눌로 엇갈리고 있고 임제선풍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염불선과 같은 법안종풍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실상’을 가름하는 연구가 폭넓게 진행돼야 겠다는 생각이다.

  2. 경허선의 구극은 ‘飮酒食肉 不碍菩提 行盜行淫 無妨般若’다. 이는 경허 비판의 잣대가 아니라 오히려 깨친 사람이 道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삶을 사는 조사선의 선지다. 우선 不二門의 無爲法을 중시하는 조사선의 선지식들은 고기를 먹어야 할 계제가 되면 고기를 먹고 처녀의 넓적다리를 만져야 할 상황이 되면 만지는 入眞入俗의 상황논리에 철저하다. 부처님도 춘다가 베푼 망고동산 공양에서 ‘수카르타나(맛이 좋은 어린 돼지고기)’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坦然선사가 행각 도중 물이 불어난 산골 계곡에서 처녀의 허벅다리를 움켜쥐고 업어 건네 준 일화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나 탄연이 不殺生戒와 不淫戒를 범했다고는 않는다.
  경허는 김교수가 인용한 게송에서와 같이 俗界와 聖界(世與靑山)를 구분치 않는 不二法門에서 삶을 살고 간 선지식이었다. 원래가 世間과 出世間이라는 분별은 조사선의 선지에서 보면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려는 가짜 가랑잎돈(黃葉錢)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한암선사가 「경허화상의 행장」에서 “스님의 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그 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대목도 경허의 무애행이라는 연장선상에서 늘 비판의 단골 메뉴로 인용된다.
  그러나 경허의 무애행은 실존적인 체험을 넓히는 參究행각인 선림의 전통적 萬行이라는 관점에서 깊이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위대한 선지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소승적인 계율관에 매달린 미시적 안목이어서는 안된다. 보다 거시적인 안목의 佛法 이해와 선리를 천착할 때 비로소 眞善知識의 心要를 읽어 낼 수 있다. 따라서 경허의 선풍을 이해하는 데는 국가경제를 운영함에 있어서 微視經濟와 함께 巨視經濟의 안목이 필요한 것과 같이 禪思想이라는 도도한 넓은 바다에서 그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한암스님이 말한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부분은 그 앞에 ‘불법을 참으로 悟得하지도 못한 채’라는 단서가 붙어야 할 것 같다. 또 선승의 진정한 불도 현현은 法化가 중심이지 지엽적인 행리나 戒行일 수 없다. 한암스님 스스로도 “법을 결택하는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한 채 그 행리의 무애를 본받는 것을 경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암은 이어 “경허화상의 무애행은 넓고 큰 마음으로 不二門의 불도를 증득하여 스스로를 그와 같이 초월하고 놓아버린 버린 것이다.”라고 웅변하고 있다.
  김영태 교수는 한암의 웅변을 “참으로 스승 경허화상을 지극히 적절하게 나타낸 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려 경허의 무애행에 대한 시비를 가름했다. 김교수의 이같은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가지 사족을 붙여둔다면 경허의 무애행에서 음주식육과 함께 자주 破戒로 거론되는 還俗이다. 거시적인 선리의 안목이라면 이 문제도 저 쪽에서 깨달았더라도 이 쪽으로 밖에 올 수 없는 깨침의 세속 회향, 즉 깨침의 사회환원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경허화상의 有髮俗服 환속은 마누라를 얻거나 빌딩을 사놓고 잘 살아보겠다는 俗人化가 아니었다. 그는 환속후에도 지옥에 비유될 수 있는 삼수․갑산에 들어가서 글방 훈장으로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를 한마디로 불법의 肉化였고, ‘행동하는 말씀(Logos of Praxis)’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런지….
  원래 조사선의 선지는 깨달음에도 안주하지 않고(不住涅槃) 백척간두진일보 하는 세속 회향이다. 이것이 바로 活句고, 活禪이고, 活人劍이며 조사선이 추구하는 佛法의 肉化다. 흔히 우리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보살행이라는 것도 ‘불법의 육화’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경허의 환속을 단순한 파계로만 치부하는 건 禪法과는 천리만리 어긋난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하겠다.
  경허화상의 행장에서 문제가 되고있는 무애행과 환속이라는 파계를 이처럼 극과 극으로 대립시켜 불법의 육화․행동하는 佛道로 일거에 끌어올린 것에는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경허화상을 근세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추앙하는 데 이의가 없다면 그의 禪風을 보다 깊고 폭넓게 조명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겉만 보고 속을 보지 못하는 당시 총림 凡僧들의 안목과 불교 교리를 逐字的으로 해석하는 경허 평가는 다시 검증돼야 한다. 이점에서 김영태교수의 경허 평가는 시사하는 바 크다.
  아울러 경허의 萬行에 대한 승속간의 적극적인 평가와 연구를 촉구하고 싶다. 만행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선수행의 중요한 章을 이루는 대목이다. 특히 경허화상의 무애행이 만행과 같은 맥락이라면 겉으론 破戒처럼 보이는 그의 무애행에 담긴 선리와 가르침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경허의 만행은 質量면에서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선림의 역대선승들을 무색케 하는 압권이다. 중국 선림의 단하천연선사와 방온거사가 거침없는 無事僧, 風顚漢으로 유명하지만 경허의 만행에 비해서는 그 격렬성과 奇行性이 한참 뒤진다. 우리는 경허의 만행들이 던져주는 頓悟의 깊은 소식을 知音하지 못한 채 외피적인 행위에만 매달려 있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만행을 통해 전해주려 한 깨우침의 소식과 보살행은 飮酒․懶女同寢이라는 실천적 행동을 통해 메아리쳤다. 선사는 술시중에 진절머리를 내는 시자 만공에게 “나는 술이 먹고 싶으면 밀씨를 구해 뿌리고 밭의 잡초를 뽑아주면서 밀을 가꾸어 수확해서 누룩을 빚고 술을 담그어 먹겠다”고 말해 “누가 가져다 놔 주면 먹겠다”는 만공의 피동적인 삶에 선이 지향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해인사 조실 시절 온 대중이 美人으로 착각했던 나환자 여인과의 동침도 天刑으로 치부돼 남편․부모자식으로 부터 까지도 소외된 처절한 한 인간을 돌보고자 하는 깊은 人間愛가 그 뒤에 자리하고 있음을 읽어낸다면 단순한 弄世의 奇行으로 치부해선 안된다. 물론 옛날 위진남북조시대 중국불교에 나환자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먹었다는 스님의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진정한 자비행이란 통렬한 인간애다. 그렇다면 나병의 여인과 동침한 경허의 만행은 如法한 중생제도의 실천이며 대자대비가 아닐 수 없다.
  경허의 만행에는 하나 같이 直指人心의 돈오를 일깨우는 큰 소식이 담겨있다. 또 때로는 제자들의 공부를 警發하는 가르침과 선리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되는 기존의 찌든 사유체계를 일격에 깨부수어 주려는 頓棒의 성격을 띄고 있다. 어쨌든 경허를 근세 한국선종의 중흥조로 받드는 데 동의한다면 경허선의 우뚝한 산봉우리이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만행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폭넓은 연구가 이제부터라도 적극 진행돼야겠다.

  3. 경허선사의 법맥에 대한 김교수의 論証은 크게 주목할 만한 점이다. 각종 문헌과 논문 등을 비교, 경허의 법통과 관련한 청허휴정선사(서산대사)의 11세손, 13세손 등 여러 說을 소개했다. 傳燈의 문제는 선림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돼 합일된 경허법맥의 정립이 절실하다.
  경허선의 선사상과 그 특징에서는 순한글로 된 선법문 ‘중노릇하는 법’과 한글․한문 혼용의 「참선곡」을 예시, 일반 대중에게 선법을 널리 펴고자 한 생활불교였음을 강조한 데 적극 동의한다. 또 그의 쉬운 구어체와 달변의 변설, 전통이라는 窠口에만 매달려 있지 않으려 한 창의성 등을 높이 평가한 김교수의 卓見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경허집」에 수록된 선사의 게송 1백 60여편을 언급, 경허의 선사상에 대한 한 연구분야를 제시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김교수가 경허선의 특징으로 제시한 선의 생활화, 참선의 대중화에 몇 가지 덧붙여 두고 싶은 점이 있다. 우선 경허 家風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들 중의 하나는 農禪倂行이다. 「백장청규」의 普請法에 따른 선림의 농선병행은 선가의 오랜 전통이며 노동을 수행 차원으로 승화시킨 세계 종교사상 유일무이한 선종만의 뚜렷한 특징이다. 노동과 좌선수행을 동일시한 농선병행의 수행법은 그 출발의 배경이 심산유곡 선찰의 자급자족을 위한 사원경제적 이유였지만 후일 노동도 하나의 수행으로 율장화시킨 점은 선종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한국 선림이 근대까지도 運力이라는 승가의 단체노동을 통해 논밭을 경작한 선농일치 정신은 당시의 사회경제문화 환경과 연계되는 요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수행 차원의 비중이 컸다. 경허화상의 근로 행적은 자세하게 전하는 게 없다. 그러나 그가 圓寂하던 날도 학동들과 함께 봄날 서당의 담밑 풀을 뽑았다고 한다. 또 경허 가풍을 잇고 있는 대표적 禪刹인 덕숭산 수덕사의 경우 벽초․원담 방장 등이 농사일 밖에 모른다고 해서 ‘머슴’, ‘농사꾼’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같은 점들로 미루어 경허의 가풍은 선농일치에 아주 철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경허선은 한국 선종의 법맥인 6조 혜능-남악회양-마조-백장-황벽-임제로 이어진 조사선 남악법계의 농선병행과 생활불교․실천불교․민중불교 선풍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달변과 게송에 나타나 있는 文才는 조주종심선사(778~897)의 口脣皮禪과 청원-석두-운암-동산으로 이어지는 청원법계의 조동종․운문종․법안종등의 문학성도 겸비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허의 가풍은 조사선의 양대 선맥인 남악법계․청원법계가 각각 뚜렷한 특징으로 하는 평삼심 시도의 선농일치와 문학성을 두루 갖춘 禪風이었다. 경허의 선농일치 가풍과 관련, 하나 부연해두고 싶은 것은 선사가 자신의 悟后 보임 도량인 천장암과 근접한 9산선문의 하나인 충남 보령 성주산 聖住寺 개산조 無染국사를 흠모하지 않았었을까 하는 추론이다. 무주무염선사의 탑비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장년으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낮추는 것을 생활의 기틀로 삼았고, 밥 먹을 때는 양식을 달리 하지 않았으며, 옷도 반드시 똑같이 입었다. 절을 짓거나 고칠 때는 대중에 앞장서 일하면서 항상 ‘불조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밟으셨는데 어찌 내가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으랴’고 말하였으며 물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도 때로는 몸소 친히 하였다. 또한 ‘산이 나를 위해 흙이 되어 주리니 내가 어찌 편안하게 지내리오’라고 하였다.”

(始壯及衰 自貶爲基 食不異糧 衣必均服 凡所管葺 役先衆人 每言祖師嘗踏泥 吾豈蹔安栖 至摙水負薪 或弓親且曰山爲我爲塵 安我得安身)

  “물 긷고 땔나무 나른다”는 대목은 중국 선림 龐蘊거사(?-808)의 게송에 나오는 自得한 경지의 平常心是道를 밝힌 귀절로 선림에 널리 회자되는 구절이다. 경허선사가 무염국사의 평상시도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조차를 구명할 단서도 없다. 다만 여러가지 정황을 참고해 일단 가설을 던져 보고자 할 뿐이다.
  경허의 수행 가풍은 ‘중노릇하는 법’에서 설파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몸뚱이를 송장으로 알라”는 不顧芭草之身의 頭陀行을 지향하고 있다. 당나라때 詩佛로 추앙 받던 시인 王維거사가 北宗의 정각선사 비문을 쓰면서 ‘雪山童子 不顧芭草之身’의 정각선사 두타행을 찬양한 바 있다. 이는 석가모니가 설산에서 6년 동안 파초와 같이 덧없는 육신을 돌보지 않고 고행 정진했던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몸뚱이를 송장으로 알라”는 경허의 가르침은 왕유가 말하고 있는 가을되면 여름철 무성했던 파초가 흉한 모습으로 지듯이 육신이란 죽으면 흉하게 썩어 없어지고 마는 人身虛妄을 일깨워 불멸의 法身을 수행 증득하라는 독려였으리라.
  여기서 경허의 대승선에 깔려 있는 고행정진을 새삼 발견, 마설로 몰아붙이는 경허의 대승선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단편적인지를 확연히 볼 수 있다. 또 그가 강조하고 있는 回心反照의 자기성찰도 조사선이 일관되게 역설해 온 見性成佛의 요체다. 지금까지의 경허에 대한 불교사적, 선사상사적 조명이 어설픈 논거들로 일관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결론은 내려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경허화상은 그의 法化와 萬行에서 근대 동아시아 禪宗史에 기록될 만 한 걸출한 禪匠이다. 더더욱 한국 근세불교의 중흥조가 되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機鋒을 갖추었던 한국 선종의 祖師다.
  김영태교수의 경허연구에 다시 한번 동감을 표하면서 앞으로 더욱 경허화상에 대한 연구가 폭넓고 깊이 있게 진행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