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1-1 제1주제 鏡虛禪師 再考

淸潭 2008. 2. 20. 20:55
 

제1주제 鏡虛禪師 再考


金知見(국제일본문화센터 객원 교수)

  그러니까 壬子年(1912) 4月 25日, 함경도 갑산땅 熊耳坊의 道下洞에서 鏡虛스님께서 示寂하시고 거의 百年歲月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철학․종교를 포함한 불교는 너무나도 경허스님과는 방향을 달리한 길로 거슬러 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 경허스님을 찾는 붐이 일어나고 있으나 자칫하면 경허스님을 탈렌트로 전락시킬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엮어두었던 토막생각들을 다시 엮어서 「鏡虛禪師再考」로 拙稿를 整理해보기로 합니다.
  1918년, 그 무렵에 新文館이라는 계몽적인 출판사가 있어 아마 우리나라 최초였다고 할 佛敎史書인 李能和의 ꡔ朝鮮佛敎通史ꡕ를 펴냈을 때, 鏡虛堂은 著者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습니다. 下卷 962쪽 이하에 나옵니다.

  「근세에 鏡虛和尙이라는 자 있으니 처음에 洪州(현 충남 홍성)의 天藏菴에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여 松廣, 仙岩, 海印, 通度, 梵魚 및 楓岳의 諸寺를 편력하면서 제법 禪風을 드날렸습니다. 世傳에 이른 바 「鏡虛悟道歌」는 장편이라서 전부를 옮기지 못하거니와 그 最末句에 이르되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라고 하였습니다.
  世人은 말하기를, 鏡虛和尙은 辯才가 있고, 그가 설한 바 法은 비록 古祖師라 할지라도 이를 넘어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淫行과 偸盜를 범하는 일조차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의 禪流,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飮酒食肉이 菩提와 무관하고 行淫行盜가 般若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倡言하고 이를 大乘禪이라 하여 수행이 없는 잘못을 엄폐가장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에 들어갔으니 이러한 弊風, 실로 鏡虛에서 그 원형이 만들어진 것, 叢林은 이를 지목하여 魔說이라 한다.
  내 아직 鏡虛禪師의 悟處와 見處를 감히 안다고 하지 못하겠으나 만약 佛經과 禪書로써 이를 논한다면 곧 그 옳지 아니함이 드러난다. 일찌기 ꡔ指月錄ꡕ을 보았더니

  般若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塵勢에 隨順함은 결정코 魔에 攝持된 것이다. 또한 順境중을 좇음에 있어 도리를 强辯하여 煩惱 곧 菩提요, 無明 곧 大智라고 하여 步步에 有를 행하며, 口口에 空을 담론함은 스스로가 업력에 속박되었음을 자책하지 아니하는 것일 뿐만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인과를 撥無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걸핏하면 飮酒食肉이 菩提와 무관하고 行盜行淫이 반야에 방해롭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流는 邪魔와 惡毒이 그 心腑에 들었으되 도무지 깨닫지 못함이니 塵勞를 벗어나고자 하면서 마치 기름을 뿌려 불을 끄고자 함이라 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鏡虛의 이른 바 大乘禪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총림에서 배척되어야 옳다 하겠다. 또한 ꡔ楞嚴經ꡕ에 이르되

  또 저 定중의 諸善男子가 色陰이 쓰러지고 受陰이 명백함을 보고 밝게 깨달은 중에서 虛明한 성품을 얻으면 그 가운데서 홀연히 永滅한데로 들어가서 인과를 撥無하여 一向히 空에 들어가서 空한 마음이 앞에 나타나며 내지 길이 斷滅한다는 견해를 내게 되리라. 깨달으면 허물이 없으려니와 聖證이 아니니 만일 聖心이라는 견해를 지으면 空魔가 그 心腑에 들어가서 戒行가지는 이를 小乘이라 훼방하고 보살은 空을 깨달았거니 무슨 持戒와 犯戒가 있으리요 하면서 항상 신심있는 檀越에 대하여 술먹고 고기먹고 淫穢를 행하더라도 魔의 힘을 因하여 그 사람들을 섭취하여 의심하거나 비방하지 않게 한다.(耘虛譯, 동국역경원, 1970, pp.349~350)


라고 한 말씀도 또한 가히 鏡虛의 대승선을 照破할 수 있는 것이다. 汾陽善昭, 顚濟和尙, 및 晛子和尙도 혹 食肉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別論할 일이요, 이를 끌어다가 禪法을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참으로 준엄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처럼 승복할 수 없는 심판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그처럼 준엄한 심판을 通史에 올림에 있어 李能和는 그 무렵 세간에 퍼져있던 평판을 그저 「世傳所謂」니 「世人謂」니 해서 아무런 객관적 검증의 절차없이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道宣이 唐高僧傳에서 동시대의 인물을 立傳함에 있어 취했던 엄정한 자세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ꡔ朝鮮佛敎通史ꡕ가 간행된 것은, 1918년, 嗣資의 漢岩重遠이 같은 滿空月面의 위촉을 받아 「先師鏡虛和尙行狀」을 草함과 동시에 先師의 法語와 遺墨을 수집하여 ꡔ鏡虛集ꡕ 양권을 탈고한 것은 그때로부터 13년 뒤의 일입니다. 그러나 ꡔ鏡虛集ꡕ은 곧 上梓되지 못하고 死藏된 채 다시 11년이 지난 1942년에 稿本 본래의 體裁를 바꾸고 자료를 가감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비로소 排印出刊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가슴 아픈 일은 漢岩의 先師行狀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거하고 간단히 鏡虛堂의 閱歷만을 摘記한 略譜로 대체하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1918년 현재로 李能和가 ꡔ鏡虛集ꡕ을, 더구나 漢岩의 先師行狀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李能和가 ꡔ鏡虛集ꡕ을 읽고, 鏡虛堂의 嗣資들인 枕雲玄住, 慧月慧明(1861~1937), 滿空月面(1871~1946) 및 漢岩重遠(1876~1951), 이렇게 네 분 宗師들이 지닌 인품과 종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아보고자 노력을 기울였다면 通史의 鏡虛章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술되지 않았을까요. 鏡虛堂을 위해서는 물론 本邦初有의 大著인 佛敎史書를 집필한 李能和 자신을 위해서도 이처럼 불행한 일이 다시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ꡔ鏡虛集ꡕ을 통해 본 鏡虛의 像에서 우리는 오직 투철한 本分宗師의 안목과 苦口丁寧한 法語의 숨결에 접할지언정 그 어느 곳에서도 偸盜淫行, 飮酒食肉을 골자로 한 이른 바 대승선을 표방하고 고취하였다고 彈劾할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 ꡔ鏡虛集ꡕ을 읽어보십시오. 本分宗師의 法語, 詩偈에 감히 각주를 달아 소개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鏡虛堂이 悟後에 莫行莫食한 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 漢岩師는 그의 先師行狀에서 실로 異論을 세울 여지없는 해명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先師에 대하여 半肯하고 半不肯함으로써 「記其實事 以示後人」한 漢岩의 객관적 입장이 있습니다.
  그만큼 漢岩의 先師行狀은 이러한 류의 전기물로서는 드물게 보는 정직한 기록인 것입니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에 혹시 당시의 德崇門中이 異見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1942년 活版의 鏡虛集에서 漢岩의 先師行狀이 제거된 원인은 아니었던가 확실치는 않지만 어떻든 그것은 크나큰 실수였다고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鏡虛의 圓寂 후, 그분이 조선 근세의 거인이었던만큼 이에 비례하여 미숙한 상상, 미심쩍은 전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그럴수록 鏡虛의 진면목이 왜곡되고 오해된 것은 어쩌면 당연히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李能和의 위 통사에서의 기록이 그 예증이 됩니다.
  비교가 썩 적당치 못합니다만, 13세기의 저 아씨씨의 聖者로 불리는 프란치스코(1182~1226)의 경우, 死後 얼마되지 않아 그의 人稟과 理想에 대한 위협적인 혼란이 야기되었고,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몸소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大傳記」를 찬함으로써 온갖 중구난방의 전설과 평판을 잠재웠던 보나벤뚜라(1221~1274)가 없었던들 아마도 오늘날 聖 프란치스꼬는 異端의 괴물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漢岩師는 鏡虛堂의 보나벤뚜라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깨닫기 이전의 苦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차피 목적적 행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뒤의 고행, 그것을 고행이라고 부르지 않고 흔히 入纏垂手니 異類中行이니 하는 용어로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의 고행인 것입니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鏡虛堂의 표현을 빌리면 龍이 換骨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凡夫가 改心함에 그 얼굴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의 苦海는 거기에서 탈출하고 싶은 세계이겠지만 다름아닌 그 苦의 바다로 돌아가 함께 헤엄치다가 溺死함을 본분으로 삼는 것, 이것이 고행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古人은 무엇보다도 佛祖의 位만큼 위태로운 것이 다시 없다고 했습니다.
  남의 길이 아닌 나의 길, 그것을 가는 것이 고행입니다. 설사 부처가 간 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버리고 六師外道가 떨어진 곳을 향하여 함께 떨어짐으로써 비로소 正命食이 가능한 곳, 그래서 被毛戴角의 異類中에 스스로 떨어짐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한 가닥의 出身之路 - 거기에 모든 偶像이 침묵하는 말없는 기쁨의 세계가 있습니다.
  체제불교가 알고 있는 上昇구조와는 판이한 시지프 Sisyphe의 길, 저 끝없는 下降의 길, 스스로 소외되고 배척받아 類的 自我가 산산히 부숴지는 狸奴白牯의 行, 그래서 이제 고해를 육신으로 삼아 온몸으로 끌어안는 삶 - 이것이 禪史에서 禪宗이 그처럼 감추고 좀체 드러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 그 苛烈함에 몸서리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일부러 발설하지 않았던 眞相이었던 것입니다.
  일찌기 長沙의 景岑으로 하여금 만일 이것을 바른대로 擧揚한다면 법당앞에 草深一丈일 것이라고 고백하게 하였던 저 「종교」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鏡虛堂이 걸어간 길, 그 莫行莫食은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가열한 자기실험의 고행이요, 그래서 狸奴白牯의 異類中行이었던 것입니다. 「驢事未去 馬事到來」의 話頭를 들고 있다가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 꿸 구멍없는 소가 되라」는 말에 眼目定動, 大悟를 경험한 한 마리의 깨친 소, 惺牛가 바로 鏡虛입니다.
  코뚜레 꿸 구멍없는 소란 무엇입니까. 소가 아님을 깨닫고 그래서 자기분열을 경험한 소입니까. 아닙니다. 唯念水草 曾無異念의 그저 한마리의 소입니다. 銜鐵負鞍 그대로가 惺牛입니다. 소가 소아님을 의식할 때 거기에 다름아닌 코뚜레 꿴 소, 윤회의 주체인 소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鏡虛堂은 노래합니다.

無相之佛도 難容이어든
毘盧之頂이 何貴리요
遊芳草岸이라가 宿蘆花洲로다

禪의 本分宗師라면 悟證의 境涯를 聖證이라는 냄새나는 술어로 표현하지도 않거니와 당초에 聖證이라는 것을 肯認하지도 않습니다. 梅月堂 雪岑(1435-1493)이 갈파한 대로 오히려 禪的인 自己一着의 세계는

菩提涅槃路非遙  參介工夫在半朝
一句透時千句透  聖心消處妄心消

인 것으로서 聖心이니 聖證이니 聖解니 하는 聖字 항렬의 세계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境涯, 그렇기 때문에 禪宗이 禪宗인 所以가 됩니다만, 이것을 大藏 중에서 ꡔ楞嚴經ꡕ의 一句나 ꡔ指月錄ꡕ의 一節을 가지고 마치 무슨 法令이나 되는 것처럼 휘두르면서 비판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미숙하기 짝이 없는 발상의 所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설사 세속의 법관이 죄인을 治罪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경우 법령 전체를 배경으로 하여 위법성을 판단할 뿐 斷章取句식의 몇 개 條文만으로 만사를 논정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는 것으로 압니다. 설사 所引의 ꡔ楞嚴ꡕ 一句와 ꡔ指月ꡕ 一節이 大藏 중 최우선의 것이라 치더라도 李能和는 무엇보다도 객관적 자료에 의하여 먼저 사실을 확정함이 없이 거꾸로 맞춤한 經文과 禪錄의 文句를 찾아낸 다음 여기에다가 근거없는 사실을 꿰어맞추는 隨矢立的 방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생사람 잡는 誤判의 전형인 것입니다.
  다시 되풀이하거니와, ꡔ鏡虛集ꡕ에는 本分宗師의 森嚴한 警責의 言句가 사람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祖師禪의 진면목이 活潑潑地 솟아오릅니다. 어디에 所論과 같은 대승선의 主唱이 있습니까. 嗣資인 枕雲玄住, 慧月慧明, 滿空月面, 및 漢岩重遠 중 어느 한 분이라도  所論의 대승선을 주창하거나 破戒行을 찬양한 사람이 있습니까. 李能和의 표현대로 세상의 禪流 倡言하였다는 飮酒食肉 行盜行淫의 대승선을 요샛말로 하자면 「경허주의」 또는 「경허이즘」 정도의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일부 師承과 무관한 沒法子들이 유행시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鏡虛堂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비단 鏡虛堂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르크스(1818~1883)가 그렇고 하이데거(1889~1976)가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그들 당대에 이미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가 세상을 風靡한 바 있습니다만 그 명칭이 돌려진 장본인인 마르크스나 하이데거는 정작 그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실존주의자도 아니었고, 이에 關知한 바 없다고 증언하고 이를 탄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굳이 苦言을 한마디 한다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鏡虛입적 후 활판의 ꡔ鏡虛集ꡕ 一卷이 출현하기까지 30년간 침묵한 채 변호와 단속을 포기했던 五臺山 月精寺 문중과 德崇山 修德寺 문중에도 그 책임의 一端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鏡虛行狀과 ꡔ鏡虛集ꡕ을 통해 드러난 鏡虛의 履歷은 의외로 간략합니다. 그리고 그나마도 불확실합니다. 예컨대 가장 확실해야 할 그의 生年만 해도 그렇습니다. 漢岩撰의 行狀에는 丁巳年(1857) 4월 24일 生, 壬子年(1912) 4월 25일 寂, 壽 56, 臘 48로 되어 있고, 卍海撰 略譜에는, 아마도 당시 德崇문중의 전승이겠습니다만, 己酉年(1849) 8월 24일 生, 임자년(1912) 4월 25일 寂, 壽 64, 臘 56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西餘 閔泳珪선생이 가르쳐 주셔서 비로소 깨닫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만, 실인즉 鏡虛堂의 생년은 정사년도 기유년도 아닌 丙午年(1846)이었던 것입니다. 鏡虛堂이 光武4년(1900)에 찬술한 「瑞龍和尙行狀」一篇이 ꡔ鏡虛集ꡕ에 실려있는 바, 거기에서 다른 사람 아닌 鏡虛 본인이 그 해 당신의 年光 55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고 그러니만큼 그의 생년이 병오년일 수 밖에 없음은 간단한 산술의 문제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鏡虛堂은 壬寅年(1902)에 찬한 「梵魚寺金剛菴七星閣創建記」에서

余二十年前  遊四佛山諸刹  聞金井山之爲勝區  而金剛菴爲要妙焉  將欲一遊  而錯落未賞  今已老矣

라고 술회하고 있으니만큼, 만약 鏡虛의 생년이 정사년(1857)라고 한다면 그 때 鏡虛堂의 年光 고작 46, 결코 今已老矣라고 自嘆할 계제가 못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鏡虛堂의 閱歷은 漢岩撰 行狀의 경우 11년을, 卍海撰 略譜의 경우 3년을 각각 소급하여 比定하지 않으면 안될 것인 바, 이렇게 보면 鏡虛堂의 祝髮은 甲寅(1854), 東鶴寺 講主가 된 것은 戊辰(1868)이요, 그가 大悟한 高宗 16년 己卯(1879) 당시의 年光은 34세인 것입니다.



  각설하고, 鏡虛堂의 일생은 風雲의 舊韓末을 배경에 두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기야 조선의 불교, 특히 禪宗은 고려대에 이미 義天(1055~1101)이 주도한 체제불교인 天台敎觀에 통합됨으로써 羅代 이래 九山禪門의 醇全한 전통을 잃었고 무신집권의 시대에 知訥(1158~1210)과 一然(1220~1289)에 의하여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되었지만, 그것도 잠시간, 이윽고 조선대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처참하게 유린된 상태였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西山(1520~1604)과 普雨가 있어 집권세력과 타협함으로써 말살의 禍만은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지만, 9산의 隆化, 16국사의 계통은 이미 단절되었고, 師資相承의 宗乘은 사실상 그 실체를 상실한지 오래였던 것입니다. 鏡虛堂이 그의 悟道歌에서 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을  시초와 종말에 거듭 외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선종의 正體性, 즉 宗乘의 위기를 토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미 입적한 龍岩慧彦(1783~1841)의 嗣法을 자처한 것도 실은 뒤늦게나마 宗乘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禪燈을 밝히고자 한 悲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다시 열강의 각축이 날로 심해져 간 구한말, 鏡虛라는 하나의 禪燈 또한 거센 바람을 견디고 타오르기에는 너무나 외롭고 가녀린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鏡虛가 悟道한 지 5년 후인 1884년에 이른바 甲申政變이 있었고, 다시 10년후인 1894년에는 東學亂 등과 같은 극도의 정치사회적 혼란의 격동기를 鏡虛가 어떻게 살았던가 하는 점에 관한 한 우리의 지식은 白紙로 남아 있습니다. 漢岩撰의 行狀이 전하는 鏡虛의 活動期는 1899년(己亥)부터 1904년(甲辰)까지 고작해야 5년간에 그칩니다. 그리고 ꡔ鏡虛集ꡕ에 수록된 작품 또한 이 시기의 것이 주종을 이룹니다.
  위의 활동기에 들어가기 전 고종 32년(1895), 조선의 승려는 비록 他力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변화된 세상을 맞이합니다. 일본 日蓮宗의 僧 佐野前勵(1895~1912)의 주선으로 500년 간 유지되어 왔던 승려의 都城 出入禁止가 金弘集 내각에 의하여 해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조선의 승려는 다투어 佐野에게 謝意를 전하는 등 일본의 은혜에 感泣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鏡虛는 그와 같은 破天荒의 조치에 일말의 기쁨도 느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吾有誓願  足不踏京城之地

라고 하여 스스로의 도성출입을 금지하는 서원을 세웠고 이것을 海印寺를 비롯한 南遊의 계기로 삼았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도성출입을 금지하든 해제하든, 생각해보면 그것이 本分衲子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무엇이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王이 불러다가 國師니 王師니 하고 모신다해도 기를 쓰고 山野로 도망치는 것, 이것이 바로 孤雲의 四山碑가 전하는 九山의 자세요 전통이 아니었습니까.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었다고 환호하는 時流, 더구나 그 해제에 일본승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에서 鏡虛는 실망과 우려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녘으로 향한 雲水의 발길은 5년간 오로지 그 殺活의 機權과 希世의 文章을 통하여 마지막 조선불교에 바쳐진 서사시가 됩니다. 그것은 또한 聲色不拘 曠然遊戱, 찬양과 疑謗, 毁譽褒貶을 일체 돌아보지 않는 異類中行의 大長征이기도 하였습니다. 削髮存髮의 丈夫가 폭풍 속에서 流血狼藉한 全身으로 막아선 모습, 나의 鏡虛에 대한 이미지는 언제고 그렇게 떠오릅니다.
  光武 3년 己亥 靑岩寺 修道菴에서 修禪을 지도하고 거기서 漢岩重遠을 만난 것은 그나마 鏡虛의 가장 행복한 시기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는 鏡虛의 詩偈 중 가장 아름답게 느끼고 있는

畝犬或蹲隨菜女  潤鳩時語傍耕人
樵歌一曲斜陽外  醞藉群山淡入雲

의 一節이 이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논두렁의 개는 나물캐는 처녀의 뒤를 따라 껑충거리고 냇가의 비둘기는 밭가는 농부에게 무어라고 말을 거는 듯 구구거리는 저 전원의 풍경, 그것은 鏡虛의 本地風光이 아니었을까요. 이와 같은 境涯를 나는 白隱慧鶴의 槐安國語에 나오는 「狗吠乞兒後 牛耕農夫前」에서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伽倻山의 海印寺 시절을 거쳐 通度寺, 梵魚寺, 호남의 華嚴寺, 松廣寺로 옮겨가는 鏡虛의 발길은 풍전등화의 국운과 縣絲와 같은 宗乘의 장래 때문에 무겁고 또 무겁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야산에서 읊은 칠언율의 하나인

已過榮枯等是辛  伽倻山裡討幽眞
鳥歌花笑心無限  月白風淸道未貧
況有維城莊室界  應將皇極度迷淪
從今一衲重重補  不下雲岑老此身

은 시니컬하기까지 합니다. ‘王子 수두룩하니 정치 잘해 민생을 해결하겠지. 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한벌 누더기 거듭 거듭 기워 입으며 구름에 잠긴 이 산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늙으리라.’ 얼마나 눈물겨운 역설입니까.
  그의 나이 어언 60의 1905년. 마침내 國恥의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국권의 실질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이 때 淵齋 宋秉璿(1836~1905)은

國亡 道亡 人類且亡 吾之所處 只一死字而已

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飮毒하였습니다. 정치이념으로서의 유학에 있어서 國亡은 곧 道亡이었고 그것은 자살의 명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佛僧의 경우 그것이 자살의 명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라고 해서 道亡의 운명에 예외가 주어질 수는 없었으니, 다음 해인 丙午歲, 통감부가 朝鮮寺院管理規則이라는 것을 제정하자 전국의 사찰은 앞을 다투어 일본 각 종파 사찰의 別院이 되고자 통감부에 「加末狀」을 제출하는 말기 증세를 보였던 것입니다.
  甲辰年에 오대산과 금강산 유력을 마치고 釋王寺의 佛事에 증명이 되었던 것을 끝으로 鏡虛堂이 잠적, 長髮服儒의 朴蘭珠가 되어 甲山 쪽으로 간 것은 바로 을사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갑산은 조선시대 流刑地로 유명한 곳입니다. 일생 남은 것이라고는 疑謗 뿐, 조선의 불교는 이제 形骸조차 남지 못하게 된 지경에 이르러 鏡虛의 손에 쥔 마지막 카드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스스로 유형지를 선택함으로써 異類中行의 마지막 章을 넘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鏡虛, 아니 박란주는 甲山과 江界간을 왕래하며 여생을 지내게 됩니다. 三家村裡 서당의 훈장으로 학동들과 생활하는 외에 그가 交遊한 인사로는 金淡如, 金允鍾, 李汝盛 등의 이름이 ꡔ鏡虛集ꡕ에 올라 있습니다. 그 중 김담여(金鐸)는 1919년 上海에서 臨政 樹立을 위한 국민대회가 열렸을 때 25명의 각 道대표 중의 한 사람이었고 김윤종이나 이여성은 교육자였습니다.
  아마도 鏡虛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는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風塵幸得此身支  放曠逍遙晩老時
千村日暖燕飛亂  太古山寒鶯語遲
江草自來遊客夢  村鏐何妨故人期
多少榮枯今始悟  白雲深處訪君之
                              (和李敎師汝盛)

의 一首, 그리고 또 하나를 든다면

天載無聲敢訴言  五雲何處打龍軒
自憐元日他鄕客  也幸夷山好禮村
首祚布陽宣養素  屠蘇治疫罄無痕
牧童不識邦家恨  簫鼓杵謠響裡門
                              (元旦)

의 一首는 어느 것이고 그 시절의 客愁와 아울러 국운에 대한 암울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鏡虛가 65세가 된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고, 같은 해 한달이 채 못되어 해인사의 승 李晦光은 뒤늦을 세라 조선불교를 일본 曹洞宗에 예속시키고자 石川素童과 회담합니다. 참으로 邦家의 恨은 어디에 두고 이 무슨 철모르는 방아타령입니까. 그리고 다음 해 朝鮮寺刹令이 공포됨으로써 조선의 전통불교는 그 종언을 맞이합니다.
  鏡虛는 그때까지 살아서 이와 같은 國亡과 道亡의 소식을 모두 듣고 보았습니다. 임자년(1912) 6월이던가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朝鮮禪敎兩宗 31개 本山의 주지들이 모여 住持會議院을 구성합니다. 鏡虛堂은 이 일이 있기 한달 전쯤인 같은 해 4월 25일, 마치 조선불교의 長逝와 그 운명을 함께 하듯이 스스로 택하였던 유형의 땅 갑산 熊耳坊의 道下洞에서 입적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질풍노도의 異類中行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뒷날 鏡虛堂을 두고 그의 嗣資인 滿空은 善은 부처를 지나고 惡은 호랑이를 넘는다고 했고, 漢岩 또한 善到底하고 惡到底한 분이었다고 추억합니다.

옛날 달마는
신발 한짝 熊耳山에 남겼더니
뒷날
熊耳坊의 鏡虛는
그것마저 아예 거두어 갔네

위에서 鏡虛禪師와 漢岩老師의 師資 간의 소식을 얼추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漢岩노사의 滿目靑山의 소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만목청산(滿目靑山)

  日帝 때 있었던 일입니다. 月精寺 종무소에서 전갈이 오길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사토타이준이 면회를 요청하니 곧 내려오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上院寺에서는 대중스님들이 漢岩조실의 진두지휘하에 가을 김장준비로 밭갈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普請作務 중이었던 것입니다. 전갈 온 사람이 헛수고하고 내려간 얼마 후에 내려오시라던 일행이 상원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고 통역맡은 사람(뒷날 제헌 국회의원)은 작업을 중지하고 귀빈을 맞으라는 성화였습니다. 작업이 완료된 다음에야 漢岩은 손발을 씻은 후에 조실방에 정좌합니다. 통역이 다시 조르자 그때 漢岩은 「가서 물어보게, 나를 찾아뵈러 왔는지 절 받으러 왔는지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시자방으로 들어온 사토교수는 공손히 예배했습니다. 그 때 대화 중에 사토교수는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했습니다. 「本然淸淨한데 어찌 山河大地입니까?」 漢岩은 방문을 활짝 열고 「滿目靑山」을 일러주었습니다. 귀국 후 日本 禪宗인 曹洞宗 관장(종정)을 지낸 사토교수는 漢岩의 높은 법력을 기회있을 때마다 소개했다고 합니다.
  당시 상원사 선방에서는 放禪의 여가에 李通玄장자의 ꡔ新華嚴經論ꡕ이 제창되고, 선과 화엄이 相依相資되는 소식이 물이 흐르듯 고려 修禪寺의 宗風이 擧揚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강하던 스님들 중에 뒷날 조계종단에 없어서는 안 될 고암, 탄옹, 보문, 탄허, 석호 등을 배출한 것입니다.
  일본의 사토타이준께 일러 준 漢岩의 滿目靑山의 消息을 落眉談으로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本來淸淨이란 어떤 가치판단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깨끗하고 더러움이란 인간들이 부여한 가치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청소를 해서 淸淨한 것이라면 그것은 漸敎입니다. 그런 식으로 부질없이 부여한 淸淨이란 淸淨이 아니라 오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추하게 보거나 부처를 깨끗한 것으로 갈구하는 것은 頓敎가 될 수 없습니다. 唯識의 미세습까지 없어져야 見性한다는 말은 돈황본 ꡔ壇經ꡕ의 念念相續이라는 宗旨와는 正反對되는 말입니다. 淸淨이, 무엇인가 있는 것을 씻어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淸淨이 아닙니다. 沒價値的인 것이 淸淨입니다. 沒價値가 不思善, 不思惡입니다. 加減되지 않는 자리, 있는 그대로의 자리가 다름아닌 원래 구원되어 있는 자리입니다.
  부처와 인간을 실존에서 출발하는 대립된 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라는 것은 그때그때 인간의 내적 필연성을 外化한 것입니다. 고정화된 부처는 우리로 따지면 2500년 전의 부처입니다. 2500년 전에 만들어진 부처에 도달한다는 것이 다름아닌 漸敎입니다. 항상 그 시대 인간의 善이니 惡이니하는 고정화된 관념과 제도에 수식되지 않는 자기실존을 자각할 때 거기에 부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慧能이 말한 頓敎입니다. 頓敎라 말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부처와 인간의 대립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 消息이 南泉의 異類中行이요, 雪岑의 服勞爲人이고 回互의 사상입니다. 漸敎를 택할 것이냐 頓敎를 택할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漸敎는 틀린 것입니다. 漸敎와 頓敎가 목적은 같으나 길만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표가 다릅니다. 漸敎 쪽은 고정화된 관념을 향해서 가는 것이고 頓敎 쪽은 관념이 아닌 현실이라는 아주 큰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사용하는 異類라는 말은 畜生을 말합니다. 南泉은 「나는 죽으면 아랫마을 信者집 소(水牯牛)가 된다고 유언했었습니다. 潙山도 西山도 비슷한 말을 했었습니다. 전생에 빚진 것이 있으면 소나 말로 환생해서 갚는다는 관념이 전제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없지 않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 그 자체, 服勞爲人하는 그 자체면 되지 거기에다 인간이니 수고우니 하는 말이 있으면 異類墮에 떨어집니다. 異類中行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漢岩은 그의 스승 鏡虛를 보는 눈이 있었고 鏡虛는 異類虛無가 아닌 異類中行을 했다는 消息을 알게 됩니다. 鏡虛의 畜生道를 보고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異類墮한 것입니다. 評價란 주인공에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善惡, 부처, 중생이라는 관념은 漸敎 쪽에 있는 것이지 頓敎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評價의 문제는 행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絶對主體道란 행위에 있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評價는 상대를 의식한 것이기에 評價를 의식하게 되면 隨處作主나 立處皆眞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자리는 曾無異念일 때 비로소 보장될 수 있습니다.
  漢岩이 말한 그대로 鏡虛는 소위 世俗的 善과 惡에 다 같이 철저했던 탓으로 차마 닦아서 끊어 버릴 수 없는 데서 닦아 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洞山良介가 「형제들이여, 동쪽 서쪽으로 각자 가게 된 이상 모름지기 저멀리 조그마한 풀 한포기 없는 곳을 향해 가라!」는 법문을 거량함에, 鏡虛는 「형제들이여, 동쪽 서쪽으로 가게 된 이상 노상의 잡초를 하나하나 다 밟고 가라!」했으니, 滿目靑山 滿目寒光의 消息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념에 매이지 않고 행위하는 실존의 강조라 일러 무방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