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빈 바랑

종교가 아편이 될 때

淸潭 2007. 11. 1. 09:1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3> 종교가 아편이 될 때 [중앙일보]
인간을 ‘중독자’로 만든 건 신이 아닌 욕망이죠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1772~1801)는 “종교는 아편으로 만든 마취약”이라고 했습니다. 또 칼 마르크스(1818~1883)는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라면서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죠. “종교는 아편이다.” 그들은 ‘종교=아편’ 혹은 ‘신(神)=아편’으로 이해하죠. 그리고 ‘예수’가, 혹은 ‘부처’가 인간을 끊임없이 ‘중독자’로 만든다고 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끊임없이 종교가 존재했던 본질적 이유가 ‘중독’이나 ‘도피’, 혹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한 걸까요.

 우선 ‘종교=아편’이란 등식을 다시 들여다 보죠. 저는 묻고 싶네요. 이 등식의 어디에 ‘신’이 있나요? 여기에는 ‘신’이 없습니다. ‘예수’도 없고, ‘부처’도 없죠.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인간’만 있을 뿐이죠. 강고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욕망’만 있을 뿐이죠. 그 욕망이 ‘종교’라는 권력과 형식을 붙잡고 있는 거죠.

 신문이나 TV를 보며 “종교는 정말 아편이야”라고 혀를 찼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럼 짚어 보세요. 열이면 열, 그 풍경 안에는 ‘신’이 없습니다. ‘신’이 있다 해도 ‘내가 만든 신’ ‘내가 그린 예수’ ‘내가 빚은 부처’만 있을 뿐이죠. 그게 바로 ‘아편’의 실체입니다. 그럼 ‘종교=아편’이란 등식을 다시 써야죠. ‘인간의 욕망=아편’이라고 말이죠.

 불교계가 시끄럽네요. 요즘 조계종 총무원의 전화통은 수시로 울립니다. 재가 불자들의 ‘하소연’ 때문이죠. “왜 불교가 이렇게 욕을 먹느냐” “이젠 창피해서 ‘불자’라는 말도 못하겠다”는 얘기들이 쏟아지죠. 주위에선 ‘신정아 씨 사건’을 계기로 터져나온 종단 내부의 권력투쟁을 보며 “종교는 역시 아편”이라고 푸념하는 이들도 꽤 있더군요.

 대한불교 조계종의 승려 수는 1만3000여 명입니다.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종회의원은 80명 정도죠. 이중 계파를 만들어 ‘패거리 정치’를 주도하는 스님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반대파를 향해 이들이 구사하는 ‘전술과 전략’을 읽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터집니다. 권모술수는 세속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정치 10단’이란 칭호가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질 따름이죠. 불교계 관계자들은 “이런 소수의 ‘정치인 스님’들이 불교계 전체를 욕먹이고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중도(中道)의 정치’를 요구한다면, 그게 ‘코미디’가 되겠죠. 왜냐고요? 그들에게 ‘종교’는 이미 ‘아편’으로 작용할 테니까요. 권력과 명예, 재력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 자신을 ‘중독자’로 만들었기 때문이겠죠.

 기나긴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 보세요. 종교가 아편이 되는 순간은 늘 있었죠.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그 순간에는 ‘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도 없고, ‘부처’도 없었죠. 대신 ‘인간’만 있었죠.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죠. 저는 그 어디에서도 ‘부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도 찾을 수가 없네요. 대신 ‘인간’만 보입니다. 중독된 욕망, 그 욕망에 중독된 인간, 그 인간에 중독된 종교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종교’를 ‘아편’이라 부르지 마세요. ‘인간의 욕망’을 ‘아편’이라고 불러야죠.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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