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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분신자결한 고 정해준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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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2월4일 아침 6시 4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분신 서거한 故 정해준 열사는(당시 나이 60세) 사망원인이 당초 알려진 ‘분신’이 아니라 ‘할복’이 직접적 원인인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밝혀졌다.
본지가 긴급 입수한 ‘부검 소견서’에 따르면, 故 정해준 열사는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이기 전, 미리 준비한 예리한 칼로 양쪽 흉부에 60센치 길이의 자해를 했으며, 복부 중앙에도 상당한 깊이로 활복을 했음을 부검소견을 밝혔다.
또한 故 정해준 열사는 왼쪽 팔의 동맥을 절단 했으며, 오른쪽 발목 뒷부분의 인대를 끊은 것으로 나타났고, 이어 몸에 불을 붙여 전신 3도 화상과 함께 산화 한 것으로 나타나, 열사가 죽음을 결심한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숙연함과 함께 충격을 주고 있다.
황우석박사의 ‘진실규명’과 ‘연구재개’ 절규했던 정해준열사
故 정해준열사는 분신 장소에서 발견된 유서에서 "▲ 황우석 박사의 세계적인 줄기세포 연구 중단 진실 규명을 위하여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연구를 계속하기 위하여 ▲황우석 박사의 세계적 줄기세포 연구가 없는 진실조작 및 도적질, 음모세력 차단을 위하여 ▲나의 이와 같은 황우석 파동을 두 눈을 뜨고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보고 있을 수 없다."고 죽음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던 열사의 절규를 남겼다.
당시 사고경위를 조사한 종로경찰서의 기록을 보면, 정해준열사는 부산 자택에서 2월2일 서울로 상경 한 것으로 알려졌다. 故 정해준열사는 서울에 올라온 이후의 행적은, 황우석박사 사태가 일어난 후 자주 접속하던 사이트에 글을 남긴 것과 자신의 영정 사진을 서울의 모 사진관에서 직접 촬영을 했고, 당일 곧 바로 찾아 간 것으로 서거직전의 행보를 찾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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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가 입수한 고 해준열사의 사체 검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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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해준 열사는 마지막으로 서프라이즈 사이트에 ‘가자! 광화문에 동학혁명 정신으로!’ 라는 글을 남겼다. 국민들과 황우석 박사 지지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는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중단사태 진실규명을 위하여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연구 재개를 위하여 ▲황우석 박사의 세계적 줄기세포 연구업적 진실조작 및 음해 도적질 음모세력 처단을 위하여 나는 위와 같은 사태를 두 눈을 뜨고서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저 한줌의 무리들을 처단하지 않고 서는 우리들은 물론이고 자녀들의 미래는 없다 ▲진실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한 mbc의 매국질을 처단하자 ▲친일 매국질 수구어용 나팔수 반민족 반통일 반민주 반개혁 친 외세 조중동을 처단하자. 고 외쳤다.
이와 같은 故人의 글과 스스로 영정사진을 준비 했던 상황을 볼 때, 故 정해준열사는 즉흥적이고 흥분된 감정으로 이승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시 거대한 음모세력에 의해 황우석박사가 억울하게 침몰한 것을 보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치밀히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진중권 ‘대중의 패닉’‘착란의 상태’
故 정해준열사가 분신 자결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sbs 라디오 뉴스전망대 프로에서 "대중의 패닉은 우려했던 일"이라면서 "이미 두 번이나 일어난 사건, 이 착란의 상태를 그대로 놔두는 한 같은 사건이 또다시 반복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며 그 책임을 서프라이즈와 황우석박사 지지 카페가 져야 한다고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진중권 씨는 “문제는 인터넷 사이트들입니다. 황우석 지지자들이 모여 '사실'에 애써 눈을 감은 채 서로 간에 '믿음'을 강화해주는 해괴한 신앙의 공동체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라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비논리적으로 토해내는 망막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이어 “사태가 비관적으로 흐를수록 황우석 지지자들의 대응도 극단적으로 되는 것 같다, 이제라도 사회가 관심을 갖고 (황우석 신드롬) 치유에 나서야한다"고 말해, 건강한 대한민국을 부르짖던 그 추운 날의 자발적 황우석박사 지지열기를 광란과 해괴한 신앙적 공동체로 몰아 붙였다.
결국 故 정해준 열사의 죽음은 진중권의 표현처럼 ‘황우석 신드롬’에 이끌려, 극단적인 패닉상태에서 흥분된 감정의 표현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검소견서에 나타난 대로 단순히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분신 한 것이 아니라, 60센치의 길이로 자해를 했고, 동맥과 인대를 끊어 낼 정도의 비장함을 선택 했으며, 영정 사진을 스스로 준비 할 정도로 차분함을 유지 한 것을 볼 때, 무지한 한 언론인의 조잡한 언행이 故人과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을 두 번 안겨 주었는지 진중권씨 스스로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함을 네티즌 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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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가한 어린이. 이 아이에게 참다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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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이중적 잣대 "시위농민 사망, 정권도 바꿀만한 사안"
진중권의 이중적 비겁한 표현을 잘 옅볼 수 있는 또 다른 죽음에 대한 시각이 있다. 2005년 12월 28일자 한국일보에 의하면, 진중권 중앙대 교수는 "늙은 농부들과 젊은 전경들이 시위현장에서 작대기와 방패를 들고 육박전을 벌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치가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도 "사학재단을 위해 몸싸움도 마다 않고 이 엄동설한에 극한투쟁을 하는 정성의 10분의 1만 농민들 위해 썼어도, 애초에 농민들이 대나무 들고 상경할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그는 "시위를 하던 한 학생의 죽음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87년 시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번 사태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도 교체될 수 있는 사안이다"라고 주장했다.
황우석박사 사건과 FTA 농민시위는 차별화?
황우석박사 사건을 만나 진실을 파헤치고 그 양심을 속일 수 없어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엄동설한에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에겐 어떠한 이익이나 개익적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던 순수한 국민 정신운동이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국익수호의 대열이었다.
그러나 진중권씨는 농민들이 당장 이익과 직결된 시위에서 전경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건과 스스로 동학혁명 정신으로 식민사관을 바로잡자고 부르짖으며,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 준비된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해 비겁한 필치의 이분법적 선을 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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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3일 광화문에서 거행되는 고 정해준열사 1주기 추모집회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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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더와 진실을 왜곡 은폐하는 언론은 자성이 있어야
아직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故 정해준 열사의 분신 자결서거를 잘 모른다. 그것은 물놀이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의 보도와 서울 중심부에서 민족의 혼과 정신을 깨우치며 목숨을 내 놓으므로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의로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은 이 시대 양심의 등불이라고 자처하는 언론이며, 언론인의 자세인지 그들 양심에 묻고 싶다.
그렇게 故 정해준열사는 가셨고, 남은 자들은 고인을 보낸 지 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형장에 선 사형수 앞에서도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숙연함 일진데, 스스로 저버린 인성마비의 한 언론인과 우리사회 언론들의 자화상을 보며, 남은 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반문을 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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