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스크랩] [한국의 선지식] 관세움의 화신 수월

淸潭 2006. 9. 18. 15:31
 

[한국의 선지식]   관세음의 화신 수월


 

'모름'의 바다 헤매다 자비의 감로 머금어

“불법의 근본 뜻은 무엇입니까.”(무제ㆍ武帝)

“텅 비어 아무런 성스런 것이 없습니다.”(달마ㆍ達磨)

이해 못한 무제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526년 중국으로 건너간 선의 시조 달마가 불심천자로 불린 양 나라 무제와 첫 대면에서 나눈 대화다. 여기서 불식(不識ㆍ모른다)의 선어가 탄생했다. 불식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선문에서는 사고가 미치지 못하고 말 길이 끊어진(언려불급 언어도단ㆍ言慮不及 言語道斷) 세계를 일컫는다. 달마는 집착과 분별에 사로잡혀 성속과 유무의 대립적 사고에 익숙한 무제를 깨우치기 위해 불식을 사용한 것이다. 불식은 알고 모름의 분별의식을 초월한 말이다.

경허회상(鏡虛會上)에서 생사번뇌의 바다를 건넌 수월음관(水月音觀ㆍ1855~1928)은 잠적한 스승과 해후했을 때 달마와 무제의 문답을 연상시키는 짧은 대화만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둘의 해후는 1910년 함남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 서당에서 이뤄진 것 같다. 전해오는 말로는 문밖에서 부르는 수월의 목소리를 들은 경허는 “누구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수월입니다”라는 대답에 경허는 “모르오”, 이 한 마디를 던지고 입을 닫았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누구냐’는 물음은 ‘나는 누구일까’라는 불교의 근본문제와 연결된다. ‘수월입니다’는 수월이 아님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모르오’는 바로 달마의 불식에 다름 아니다.

수월의 일대기 ‘달을 듣는 강물’을 쓴 김진태 검사는 “수월이 서당에 나타난 것은 스승의 살림살이를 한눈에 셈해 보고자 함이었고 경허가 갑산에 몸을 숨긴 것은 그를 알아볼 밝은 눈을 기다렸음이 아닐까”라며 “수월은 ‘모르오’,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그 멀고 험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 한 마디는 경허의 결론이었고 수월의 바다였다. 이제 수월이 할 일은 모름의 바다가 되어 끝없이 출렁이고 끝없이 노래하는 일뿐이다”고 적고 있다.


 

경허통해 전통적 수행아닌 천수경으로 깨달음


 

수월은 혜월혜명(慧月慧明) 만공월면(滿空月面)과 함께 경허의 세 달로 불린다. 법호나 법명에 월자가 들어있기도 하지만 내로라하는 경허 제자 중에서 셋이 그만큼 뛰어난 그릇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월의 깨달음은 화두참구를 통한 선가의 전통적 수행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경허는 수월에게 자비의 바다에 들어가 주인이 되게 하는 천수경, 그 중에서 관세음의 주문인 대비주(大悲呪ㆍ일명 대비심다라니ㆍ 大悲心多羅尼)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게 했다. 조사의 지혜를 타고난 제자의 근기를 꿰뚫어 본 것이다.

천수경은 스님이 되려면 누구나 외워야 하는 필수기초과목이자 자비의 경전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게 온몸을 던져 깨달음의 문을 열겠다는 노래다. 관세음은 천수천안을 갖고 있다. 손과 눈이 천 개씩이나 된다. 중생의 고통을 살펴 어루만져주기 위함이다. 관세음의 구세의 그물은 자비다. 중생을 사랑해 기쁨을 주는 것이 자(慈)이고 가엾이 여겨 괴로움을 없애주는것을 비(悲)라고 한다. 수월이 대비심 삼매를 얻은 해는 1887년으로 짐작된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 끝에 스물아홉 뒤늦은 나이로 산문에 들어선지 4년만의 일이다.

불변의 문을 넘어선 수월은 한번 보거나 들으면 잊지 않았고, 앓는 이들을 고쳐 줄 수 있는 신통력을 얻게 됐다. 수월은 저잣거리의 이름 모를 중생에게 감로의 비를 뿌렸다. 한번도 그럴듯한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수월의 행장에 빈 곳이 많은 까닭은 그의 이런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글을 모른다는 점도 보태진다. 그러니 오도가나 임종게를 남겼을 리 없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최상의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더할 나위 없는 향기 되네.

아름다운 그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고.

청정한 그 성품은 영원한 법신일세.

面上無瞋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口裏無瞋吐妙香(구리무진토묘향)

心裏無瞋是珍寶(심리무진시진보)

無染無垢是眞常(무염무구시진상)


 

수월의 삶은 이 선시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자비의 감로를 한껏 머금은 수월은 금강산 유점사를 찾았다. 그는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무 한 짐을 해다 놓은 수월은 그 위에 앉아 자비삼매에 빠져들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나오던 주지가 수월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산문 밖으로 나가 보시지요. 인연이 깊은 시주가 오고 있습니다.”수월이 눈을 뜨고 말했다. 주지는 반신반의하며 산문을 나섰다. 과연 기품이 넘치는 초로의 부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김성근 판서의 부인이었다. 까닭 모를 병을 앓아오던 부인은 수월의 이적(異蹟)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행방을 알아보다가 유점사로 들어갔다는 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선 것이었다. 부인은 도중에 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끌려 가마에서 내렸다. 바위에 앉아 합장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월이 삼매에 든 그 시간이었다. 기도를 끝낸 부인은 갑자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병이 나았음을 느꼈다. 부인의 설명을 들은 주지는 나무꾼이 바로 수월임을 알았다. 수월을 찾았지만 이미 절을 떠난 뒤였다.

수월은 스승의 열반 소식을 예산 정혜사의 혜월과 만공에게 서신으로 알린 뒤 만주로 떠났다.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반야의 씨앗을 뿌리던 수월은 1921년 나재구(羅在溝) 송림산으로 들어가 조선인들이 지은 화엄사에 주석했다. 초라한 절이었지만 수월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도량이었다. 깨달음의 길을 찾아 머나먼 조국 땅에서 온 후학들을 만나는 기쁨도 컸다. 훗날 한국불교의 대선사로 빛을 발하는 금오(金烏) 효봉(曉峰) 청담(靑潭)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수월은 일흔 넷이 되던 1928년 여름 열반에 들었다. “개울에 가서 몸 좀 씻겠네.” 하안거를 끝낸 이튿날 수월이 남긴 이 말이 임종게였던 셈이었다. 목욕을 마친 수월은 바위에 알몸으로 앉아 물에 뜬 강처럼 살아온 걸림 없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좌탈(坐脫)의 자세로 법신으로 다시 태어난 수월 앞에 모여선 대중의 귓가에는 그가 늘 독송하던 천수경이 맴도는 듯 했다.


 

가없는 중생의 아픔

끝없는 중생의 소원

얼마나 애달팠으면

천의 손이 되셨을까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천의 눈을 하셨을까


 

연보

▦1855 충남 홍성 출생. 수월은 법호, 음관은 법명 속성은 전(田)씨이며속명은 전해지지 않음(전ㆍ全씨라는 설도 있음)

▦1883 서산 천장암에서 출가

▦1887 대오

▦1888~96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의 사찰에서 수행 및 만행

▦1907~12 경허의 행적 찾아 함경도 일대 유랑, 이후 만주로 건너감

▦1921 만주 왕청현 나재구 송림산 화엄사에 주석

▦1928.7.16 화엄사에서 입적

<조계종 홈 에서>

출처 : 禪 이야기
글쓴이 : ban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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