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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1만개 메우고, 순서 맞추고… 고국서 되살린 19세기 잔칫날

淸潭 2025. 3. 11. 11:14

구멍 1만개 메우고, 순서 맞추고… 고국서 되살린 19세기 잔칫날

허윤희 기자2025. 3. 11. 00:52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
오늘부터 31년 만에 국내 공개
美 피보디에식스 박물관 소장 유물
리움서 1년 넘게 복원·새 이름 붙여
미국 피보디에식스 박물관이 소장한 19세기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 8폭 병풍이 98년 만에 옛 모습과 이름을 되찾았다. 폭 5.07m, 높이 1.71m. 낱장으로 뜯어지고 벌레 먹어 1만 개의 구멍이 뚫려 있던 그림이 1년 4개월간의 보존 처리 후 10일 공개됐다. /연합뉴스

1826년 어느 날, 평양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말을 탄 두 젊은이를 둘러싸고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거리엔 구경 나온 인파가 가득했다. 부벽루에선 화려한 연회가 열렸고, 밤이 되자 횃불을 켜고 대동강 뱃놀이가 펼쳐졌다. 평안도 도과(道科·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해 실시한 과거시험)에서 문·무과 장원 급제한 두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였다.

이날의 잔치를 생생하게 담은 19세기 조선 시대 병풍 그림이 옛 모습을 회복하고 이름까지 되찾았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은 “미국 피보디에식스(Peabody Essex) 박물관이 소장한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 8폭 병풍의 보존 처리를 마쳤다”며 10일 작품을 공개했다. 병풍은 낱장으로 뜯어지고, 화폭은 벌레 먹어 1만개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으나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에서 1년 4개월간 보존 처리한 끝에 원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장원 급제자 두 명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제1폭 그림의 세부 모습.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전체 폭 5.07m, 높이 1.71m.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에 들어온 급제자 행렬의 모습부터 평양 일대에서 성대하게 열린 잔치 모습을 한 폭에 한 장면씩 시간순으로 그렸다. 성곽을 따라 밀집한 구경꾼, 우산을 들고 대기 중인 군졸들, 춤추는 기녀들과 악대... 8폭에 그려진 등장인물만 2500~3000명에 달한다. 김정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이사장은 “19세기 당시 평양 모습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한 폭의 기록화이자 풍속화”라고 했다.

이 그림은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과 조선일보 공동주최로 열린 특별전 ‘유길준과 개화의 꿈’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당시엔 따로 떼어진 낱장을 패널 상태로 선보였고 그림 순서도 지금과 달랐다. 남유미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장은 “8폭의 순서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도’ 등을 참고해 행렬의 경로, 주요 전각의 위치를 파악했고, 위성 지도까지 동원해 그림의 순서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리움미술관이 병풍 보존 처리를 하면서 색을 맞추는 모습.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무엇보다 그림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 최대 성과다. 1994년 도록에는 ‘평안감사 환영도’라고 소개됐으나, 도과 급제자를 축하하는 잔치라는 뜻으로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로 명칭을 변경했다. 미술관은 “이 같은 도상은 국내외를 통틀어 유일본”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안감사향연도’에는 평안감사만 등장하지만, 이 그림은 급제자 2명까지 주인공이 3명이라 차이가 있다”고 했다.

병풍 비단을 부착하는 모습.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숙련된 전문가 3명이 1만 개의 구멍을 메우는 데만 3개월이 꼬박 걸렸다. 남 실장은 “보존 처리 업무만 25년을 했지만 이렇게 벌레 구멍이 많은 것은 처음”이라며 “희고 고운 발색을 내기 위해 그림에 덧댄 배접지에 쌀가루를 넣었기 때문에 벌레가 더 많이 먹은 것 같다”고 했다.

1799년 개관한 피보디에식스 박물관은 1800점 이상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 유물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미국 내 첫 박물관으로, 우리와 특히 인연이 깊다. 1883년 조선 최초의 방미 외교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던 유길준은 에드워드 모스 당시 박물관장과 교류하며 한국을 알렸고,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둘러 고국으로 떠나기 전에 자신이 쓰던 갓을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10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 병풍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피보디에식스 박물관은 1927년 미국 금융가 조지 피보디와 W.C. 엔디콧 기금으로 이 병풍을 구입했고, 1994년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기금을 바탕으로 2003년 한국실이 마련됐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활옷도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의 보존 처리를 거쳐 되살아났다”고 덧붙였다.

옛 모습을 되찾은 조선 시대 '활옷'(왼쪽)과 '평안감사 도과 급제자 환영도'가 리움미술관 M1 2층에 전시된 모습. /연합뉴스

옛 모습을 되찾은 조선 병풍과 활옷은 11일부터 4월 6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관람은 무료. 두 유물은 5월에 재개관하는 피보디에식스박물관 한국실 ‘유길준 갤러리’에서 주요 작품으로 소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