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 맹 페이(I.M. Pei 1917~2019).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중국계 미국인을 알 것이다. 건축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파리를 제대로 여행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루브르박물관을 가보고도 이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루브르를 보고도 사실은 아무것도 본 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늘 신문에 I. M. 페이의 부음 기사가 실렸다. 그가 5월1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중국 태생의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
그는 1917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인 1935년 태평양을 건넜다. 열여덟살! 그의 오비추어리를 읽으면서 백남준을 생각했다.
'천재강연'을 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천재는 태어나나? 만들어지나? 나의 답은 천재는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객석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비범함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꽃피우려면 먼저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 재능을 자극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다음은 본인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재능이 점점 자라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만일 괌이나 사이판에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재능을 꽃피울 수 없다.
백남준이 열여덟살에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남준은 1950년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 1954년 도쿄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간다. 독일에서 우연히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를 만나고, 독일 예술가 요셉 보이스를 만나게 된다. 각각 20년, 12년 연상인 두사람과 교유를 하며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한다. 백남준이 독일 다음에 선택한 곳은 뉴욕이었다.
크로스오버의 도시 뉴욕!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 한국을 아는 뉴요커들은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 가봉보다도 못사는 세계 최빈국을 누가 거들떠보기나 했겠는가. 그러나 뉴욕은 차별하지 않고 그를 품었다. 그의 창의성만을 본 것이다. 뉴욕이라는 개방적인 공간에서 그는 오노 요코, 존 레논을 비롯한 선구적인 예술가들과 교유를 하며 예술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비디오 아트를 잉태한 곳은 독일이지만 비디오 아트를 예술로 만개시킨 곳은 뉴욕이었다.
I.M. 페이'는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원에서 그는 우연히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로피우스가 누구인가?
1919년 4월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Bauhaus)를 열고 디자인의 모더니즘을 개척한 사람이다. 올해는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는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문인편) 보부아르 이야기를 하면서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를 언급했다. 사르트르가 나폴레옹 광장이 보이는 석재벤치에 앉아 보부아르에게 '청혼'을 했다. 두 사람의 세기적인 '커플관계'가 시작된다.
당시 루브르박물관 출입구는 3개였다.
페이는 그 나폴레옹 광장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출입구를 하나로 통일했다. 둔중한 석재의 숲 한복판에 유리 공간을 창조해 루브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사람, 엄숙한 루브르박물관에 유머의 빛을 불어넣은 사람 I. M. 페이.
공산주의 도시와 이슬람 도시에서는 천재가 꽃피지 않는다. 천재는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자라는 나무다. 평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비범한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한다.
I. M. 페이의 부음 기사를 접하면서 그가 1935년 중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 2019-05-27, 12: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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