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돋는 로버츠 감독의 예언, 그리고 류현진의 반응
조미예 입력 2018.09.01. 16:47 수정 2018.09.01. 17:38
사뭇 진지했습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류현진은 더 던질 수 있다. 8회에도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 상황이었고, 로버츠 감독은 우리가 뒤지고 있는데, 아웃 카운트가 7개밖에 남지 않아 득점을 위한 대타 투입이 절실하다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강한 애리조나를 만나 7이닝 2실점 호투를 펼친 선발 투수를 일방적으로 교체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선발 투수 류현진을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1회 골드슈미트에게 투런포를 허용한 뒤로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한 류현진은 8회까지 책임지고 싶은 욕심과 바람이 있었습니다. 투수 입장에선 너무나도 이해되는 당연함입니다. 이때까지 투구 수는 고작 86개였고, 2회에서 7회까지 피안타도 2개 밖에 안 됐습니다.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라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2-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역전을 위한 타격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로버츠 감독은 류현진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류현진 역시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땀을 닦으며 화장실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허니컷 투수 코치는 불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류현진이 교체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류현진은 헬멧을 쓰고, 방망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팔 온도 유지를 위해 수건을 감싸기도 했습니다. 8회에도 올라가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헬멧도 쓰고, 방망이도 잡았는데, 다리 보호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기자는 무언의 시위를 하는 줄 착각했습니다. 이미 키케 에르난데스는 타자 대기석에 올라섰기도 했고요.
류현진은 경기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무언의 시위는 아니었다”라며 웃었습니다. 감독과 의견이 어긋났던 건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류현진이 강하게 어필하자 로버츠 감독도 딱 잘라 교체를 하지 못했고, 류현진에게 일단 타석에 오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던 상황입니다.
류현진은 “처음 감독님이 이야기했을 땐 계속 던지겠다고 어필했다. 더 던질 힘도 있었고, 계속 피칭 페이스가 좋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긍이 되는 부분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키케가 타석에 오르기 전, 앞선 두 타자(도져, 푸이그)는 모두 아웃이 된 상황. 주자가 나가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감독은 키케를 대타로 기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류현진에게 일단 준비하고 있으라고 지시는 했지만, 이는 진짜 류현진을 타석에 올릴 생각이 아니었던 거죠. 키케 에르난데스가 타석 대기석에 준비하고 있고, 2아웃이 되자, 로버츠 감독은 류현진에게 다가와 열심히 설명합니다.
류현진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유였다고 말했습니다. 8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의지가 확고했던 류현진의 마음을 바꾼 건 어떤 말일까.
“현진~ 네가 한 이닝 정도 더 던질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이제 아웃 카운트가 7개밖에 남지 않았고, 우리는 어떻게든 득점을 해야 해. 걱정 하지마. 여기서 키케가 홈런 칠테니까.”
감독의 마음과 계획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선수 본인은 조금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류현진은 착잡했습니다. 아쉬움인 거죠. 스스로가 좋은 투구감이 좋다고 느꼈고, 7이닝을 넘어 8이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것도 애리조나를 상대로.
그래서 그런지 표정이 조금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웠던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타석에 올랐던 키케 에르난데스가 타격하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습니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홈런을 확신했던 것.
류현진의 입꼬리는 금세 올라갔습니다.
패전을 면하는 순간이기도 했고, 로버츠 감독의 예언이 소름 돋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뻐하는 게 류현진뿐이겠습니까. 다저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팬들도 일제히 일어나 환호했습니다.
키케 에르난데스가 대타로 출전해 홈런을 날린 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도 류현진 선발 등판 경기였습니다. 이쯤 되면 둘의 궁합이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류현진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라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기자석에선 "이제부터 류현진 선발 등판 때, 키케는 무조건 대기 시켜야겠다"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이날 승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기에 질문과 답이 이어졌습니다.
키케의 동점 홈런은 단순한 홈런이 아니라 분위기를 완전히 역전 시키는 한 방이었습니다. 굳건했던 잭 그레인키를 흔들리게 하는 홈런이었던 거죠.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 열광의 도가니. 다저스타디움이 정말 그랬습니다. 키케 에르난데스의 동점포는 다저스 팬들과 다저스 더그아웃을 들썩이게 했습니다.
키케와의 하이파이브를 마친 류현진이 어디론가 향합니다.
밝게 웃으며 한마디를 했습니다. 위치나 상황이 로버츠 감독에게 하는 말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류현진은 로버츠 감독에게 다가가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굳잡~ 로버츠”라고. 감독의 말이 맞았고, 교체 시기도 적절했음을 알리는 류현진의 반응이었습니다. 로버츠 감독이 류현진 대신 키케 에르난스를 타석에 올리면서 했던 말은 “현진~ 걱정 마. 키케가 홈런을 칠 거야”였기 때문.
류현진은 “로버츠 감독이 키케가 홈런 칠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는데, 정말 키케가 홈런을 날려서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류현진은 감독에게 찾아가 “감독님~ 굳잡~”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키케의 홈런은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는 홈런이었습니다. 잭 그레인키가 흔들릴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었죠. 터너는 흔들리는 그레인키를 상대로 역전 홈런을 시원하게 날리고 승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이날 류현진은 7이닝 2실점(4피안타 1피홈런 5탈삼진 2실점) 호투를 펼쳤습니다. 투구 수가 86개인 상황에서 교체된 건 아쉬움이 남지만, 류현진이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류현진은 팀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1회에 천적인 골드슈미트에게 투런포를 허용한 뒤, 흔들리지 않고 더 단단한 피칭과 영리한 볼 배합으로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칭찬할만합니다.
이날 딱 하나 아쉬웠던 건, ‘천적’ 골드슈미트를 만나 첫 타석에서 투런포를 허용했다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볼배합을 바꾸면서 두 번째 타석은 유격수 땅볼, 세 번째 타석은 중견수 플라이로 돌려세웠습니다. 천적도 스스로 돌파해나가는 류현진입니다.
그리고 “지금 몸 상태는 전혀 이상 없고 굉장히 좋은 상태다”라며 남은 시즌 등판을 더 기대하게 했습니다. 빅게임 피처임을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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