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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淸潭 2018. 8. 18. 11:39

 '엄청난 류현진' 허샤이저의 폭풍 칭찬

백종인 입력 2018.08.18. 08:56 수정 2018.08.18. 08:57

                                    사진제공 = 게티이미지

세상의 눈과 귀가 한 곳으로 몰렸다. 1988년 서울이었다. 이데올로기에 반토막 난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대회가 한창이던 9월 28일. 잠실 체조경기장은 요란했다. 미국과 소련간의 남자 농구 준결승이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76-82. 비참하게 3,4위전으로 밀려났다. 그 때부터 NBA가 드림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패배가 전해진 그날. 정작 미국에서는 또다른 사건이 있었다. 샌디에이고였다. 파드레스가 다저스와 접전을 펼쳤다. 9회까지 0-0이었다. 연장전이 필요했다. "이제 그만 던질래요." 원정 팀 선발은 글러브를 벗었다. 감독이 눈을 부라렸다. "무슨 소리야. 더 던져."

훗날 그 투수의 회고다. "그 때는 사실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못했어요. 며칠 뒤면 플레이오프였는데, 그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감독(토미 라소다)이 펄쩍 뛰더라구요. '1이닝만 더 던지면 되는데' 그러면서요."

이 투수는 9회까지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다. 58이닝 연속 무실점이었다. 연장 10회.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힘들어 보였다. 이닝을 끝낼 때는 마운드에서 허리를 숙인 채였다. 세번째 아웃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나인들이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말했다시피 보통 사람들의 신경은 온통 올림픽에 쏠린 때였다. 그들의 홈 타운인 LA에는 TV 중계도 되지 않은 경기였다. 라디오만이 위대한 순간을 전했다. 중계팀의 해설자는 돈 드라이스데일이었다. 바로 직전 기록(58과 2/3이닝) 보유자였다. 대기록이 탄생하자 그는 중계 부스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영웅을 힘껏 안아줬다.

신기록 순간 빙긋이 웃는 허샤이저(왼쪽), 라디오 중계 끊고 나와 축하해주는 돈 드라이스데일.  유튜브 캡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속 기록 10개를 선정한 사람이 있다. ESPN의 제프 메론 기자다. ▶ 조 디마지오의 56게임 안타 ▶ 에드윈 모제스의 허들 107연승 ▶ (복싱) 로키 마르시아노의 49연승 ▶ (테니스) 비욘 보리의 윔블던 5연패 등이 포함됐다. 물론 59이닝 무실점 기록도 그 중 하나다.

오렐 허샤이저는 그 해 정규시즌을 그렇게 마감했다. 그리고 뉴욕 메츠와 NLCS 1차전에도 8회까지 점수를 주지 않았다. 합치면 사실상 67이닝 연속 무실점인 셈이다. 그는 월드시리즈에서도 폭발했다. 2차전에 완봉승, (최종) 5차전은 완투승으로 끝냈다.

그 해 정규시즌에서 267이닝, 포스트시즌에 42.2이닝을 던졌다. 합하면 무려 309.2이닝이다. 사이영상과 월드시리즈 MVP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 밖에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최상급 수식어 '월드 클래스'

매케함은 여전했다. 엊그제(16일) 다저 스타디움이 그랬다. 전날의 전운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두런두런, 수군수군. 사람들은 그 얘기 뿐이다. '오늘 또 뭐가 터지는 거 아냐?' '잔뜩 벼르고 있대' '추가 징계가 나올 지 모른다며?' 쿠바산 악동의 퍼포먼스는 모든 이슈를 압도했다.

덕분에 정작 관심이 필요한 곳은 소홀해졌다. 석 달 만에 돌아온 투수였다. 미국 날짜로는 8월 15일이었다. 굳이 갖다붙이면 광복절이다. 부디 빛을 되찾아야 할텐데….

센스 있는 '그 분'이 이슈를 연결시켜준다. <sportsnet la="">해설자 오렐 허샤이저다. 경기전 오프닝 멘트다. "로테이션에 돌아온 투수는 RYU군요. 야시엘(푸이그)과는 절친이라죠? 어젯밤에 친구가 파티 준비를 잘 해놨으니, 마음껏 즐기기 바랍니다." </sportsnet>

이윽고 플레이볼. 초반부터 아들 걱정하듯 우호적이다. 1회 2루타를 맞고 몰린 장면이다.

"재활 등판을 잘했다고 해도 그건 별개예요. 빅리그 게임은 전혀 다른 거죠. 상대가 자이언츠 잖아요. 어제 그런 일도 있었고. 게다가 팀이 현재 5연패 중이라는 게 부담스럽죠. 등 뒤에 주자 한 명이 있는 것만으로도 꽤나 스트레스일 거예요."

그렇게 한자락을 깔았다. 그리고는 칭찬을 쏟아낸다. "그런데 말이죠. 저 친구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보세요. 마운드를 어슬렁거리거나 그러질 않아요. (시간을 끌거나, 잡동작이 없다는 뜻) 차분해요. 아주 침착하구요."

그 때였다. 에반 롱고리아에게 두번째 스트라이크가 들어갔다.

해설자의 입에서 찬사가 터져나왔다. "엄청난(exceptional) 커터예요. 월드 클래스 투구네요. 타자의 카운트(2-1)에서 저 구석으로 찔러 넣을 수 있다는 게 말이죠. 4월에 만났을 때 홈런도 하나 뺐겼던 타자인데." 특히 'exceptional'이라는 단어에 진한 강세를 넣었다.

허샤이저가 감탄했던 바깥쪽 커터.                                   mlb.tv 화면

말 그대로 레전드다. 사상 최고의 찬란함을 남긴 스타다. 그런 대투수도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칭찬을 넘어 감탄의 수준이었다.

그건 상황 탓이다. 힘든 요소들이 가득했다. 정상적인 멘탈 유지는 어렵다. ▶ 105일만의 등판 ▶ 연패 ▶ 라이벌전 ▶ 전날의 소란스러움 ▶까다로운 타자 ▶불리한 카운트 등등. 버티기 힘든 압박들이었다. 그런데도 최상의 스트라이크를 던졌다. 꼼짝 못 할 공이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마이크를 잡은 지 벌써 17년. 해설자로도 베테랑이 된 전설이다. 그가 찾아낸 최상급 수식어는 '월드 클래스'였다.

"피칭이 누워서 떡먹기 같아요"

3회 초를 KKK로 끝냈다. 99번 투수에게 매료된 해설자는 몸살을 앓는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던지죠? 저 친구한테는 피칭이 누워 떡먹기 같아요(He could pitch falling out of bed). 리듬이나 움직임이 너무 편해보여요." 이어서 필살의 비유가 시작된다.

"골프로 치면 말이예요, 그냥 (아무 준비없이) 첫번째 티로 뚜벅뚜벅 가는 거예요. 장갑 하나 꺼내서 끼고, 골프화도 툭 던져서 대충 신고. 그래요. 약간 건들건들 커피도 한 잔 들고 말이죠. 그리고는 볼을 때려요. 280야드(약 256미터ㆍ프로 수준의 상당한 거리)는 날아간 공이 페어웨이 한 가운데로 떨어지죠. 나 같으면 스윙 연습에, 퍼팅에 한 45분은 다듬어야 간신히 시작하는 데 말이예요."

다시 야구로 돌아왔다. "그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던지지 않아요(힘을 100% 쓰지 않는다는 뜻). 불펜에서 던지는 걸 봐도 그래요. 금새 스피드를 올릴 수 있어요. 아마 마음만 먹으면 94, 95, 96마일도 나올 걸요? 느낌이 그래요. 그는 뭔가 더 대단한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

경기 시작전 오프닝 멘트를 하고 있는 허샤이저와 캐스터 조 데이비스.    mlb.tv 화면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이젠 막 지친다(?). 5회 1사 1, 2루의 위기였다. 앨런 핸슨을 KO(삼진)시켰다. 역시 87마일짜리 백도어 커터였다. 그 장면에서는 어땠겠나.

"이건 포심이 아니라 커터예요. 빠른 볼은 아닌데, 먼 쪽을 파고드는 대단한 속도감을 가진 공이었어요. 빅 피치군요. 5월 이후 처음 나온 투수라고 누가 믿겠어요."

이걸로 성이 찰 리가 없다. 추가 옵션이다. 백도어 커터에 대한 찬송이다. "일단 그가 목표점을 발견하면, 딜리버리의 신뢰도가 높아요. 정확하게 포인트를 공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죠. 릭(허니컷 코치)이 칭찬하는 것도 그거에요. '그 친구는 일단 자기 차선에 들어가면 굉장해.' 마치 크루즈 모드(자동주행장치)를 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이예요."

55번을 사랑하는 사람들

2013년 NLCS 5차전이었다. 시구자는 허샤이저였다. 선수시절 55번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공을 받는 포수도 같은 번호다. 시구자가 사연을 들려줬다.

"꽤 오래 전이네요. 끝나고 가는 데 주차장에서 아이 하나가 울고 있는 거예요. 물어보니 4살이래요. 선수들이 아무도 사인을 해주지 않아서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야구 선수니 내가 해줄게'라며 달랬죠. 그리고 글러브에 이렇게 써줬어요. '미래의 메이저리거에게.'"

아이는 진짜로 메이저리거가 됐다. 바로 스킵 슈마커였다. 그는 세인트루이스를 시작으로 LA 다저스, 신시내티 레즈를 거쳤다. 팀은 달랐지만 등번호는 늘 55번이었다. 주차장의 착한 아저씨를 기억하기 위함이리라.

슈마커의 손에는 어렸을 때 사인받고 찍은 사진이 들려있다. 다저스 존 수 후 블로그

충청도 쪽에도 한 명 있다. 유난히 55번을 좋아했던 투수 말이다. 대전고를 막 졸업한 신출내기가 그 번호를 원했다.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투수의 백넘버라서다. 비슷한 외모다. 늘씬한 훈남 스타일이다. 대전의 55번도 나중에 리그 최다승 우완투수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직업까지 따라한다. 방송 해설자다.

그에게는 애제자가 하나 있다. 통통한 왼손잡이다. 큰 데서 놀아보겠다며 일찌감치 바다를 건넜다. 공교롭게도 우상의 곁이었다. 곁에는 짝도 생겼다. 또 한번 '공교롭게도' 소개자는 스승이었다. 두 명의 55번, 그리고 99번. 묘하게 돌고 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