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각종 기념일 제정 기록

淸潭 2018. 5. 5. 10:42

4.19 혁명

 

 

 

 

 

 

1. 4.19 발발의 원인

(1) 타락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  -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정권은 19 60년 4월 26일 하야하는 그 날까지 엄청난 독재와 부정을 자행하였다. 북진정책의 허구,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 발췌개헌안 날치기, 부산정치파동, 3선을 위한 4 사5입 개헌 등 계속되는 반민주 독재 정치와 경제정책의 실패 그리고 통일의지의 약화등 실 정을 하고 있었다.

(2) '60. 3. 15 부정선거(혁명의 도화선) -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전국 도처에서 학생들의 민주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마침내 3월 15일, 3.5.7인조 등 다수에 의한 공개 투표, 사전 투표율 40% 완료, 투 표함 바꿔치기, 야당참관인 불법 연행,정치깡패에 의한 공포 분위기 조성등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 시키려는 극도에 달한 3.15 부정선거로 혁명의 불길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2. 4. 19의 진행 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 날 민주당에서는 선 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 물리치자' 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 상고생 김주열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 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민권승리의 그 날(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 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무너진 독재 정권(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3.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1.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유지되었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을 선봉으로 한 반독재 대중에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2. 집단행동에 의해 기존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민주시민혁명이다.

  3. 4.19 혁명에 의해 과도 정부인 허정 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독재를 청산하고자 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막을 기대했으나 '61년 5 .16구테타로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4. 우리의 자세 

  민중의 함성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진 4.19혁명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의해 장기간 이끌어 오 던 제 1공화국을 물러나게 한 찬란한 민권 승리의 본보기로 역사의 자리 매김을 확고히 할 것이다. 우리도 선배들의 의로운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복지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학의

 

 

 

 

 

 

 

1. 유래 및 의의

o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날 (과학데이)

    1934년에 우리나라의 훌륭한 선각자들이 4월 19일을 제1회 '과학데이'로 삼고 큰 행사를 벌였음.

    민족 지도자들은 과학기술이 발전해야만 민족의 힘을 기를 수 있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따라 과학의 중요함을 국민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과학의 날을 정하고 그 행사를 벌였던 것임


o 과학데이를 4월 19일로 한 까닭은?

    그 당시 진화론으로 너무나 유명했던 영국의 과학자 찰스다윈은 1809년 2월 12일에 태어나 1882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음.

    그가 발표한 진화론은 동양에서도 큰 영향을 끼쳐 다윈이란 이름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잘 알 정도로 유명할 때였음.

    그런 까닭으로 다윈을 세계최고의 과학자라고 여기어 다윈이 죽은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1934년에 4월 19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는데 모두 찬성하였던 것임.


o 일본의 탄압

    그러나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과학데이를 핑계로 민족운동을 한다고 하여 이 행사의 지도자인 김용관을 감옥에 가두고 더 이상 이 행사를 계속하지 못하게 하였음.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과학 발전과 과학적인 생활태도를 형성시키기 위해 1968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였다.

o "과학의 날 " 4월 21일

    우리나라 정부기관으로서 처음으로 과학기술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과학기술처가 1967년 4월 21일에 발족되었고, 그런 까닭으로 이 날을 과학의 날로 정하여 1968년(제1회)부터 "과학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있음.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부터 과학 기술의 지향점과 개발 전략을 설정한 과학 시술 장기 종합 계획을 수립하여 영국, 독일, 일본의 과학 기술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기술정보센터(KORSTIC), 한국과학원(KASS)을 비롯한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등 수많은기관이 과학기술처의 업무를 분담 보조하는 등 과학의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마련되고 있다.

  우리는 평소에 과학적인 생활 태도로 불편하고, 불편한 점을 고쳐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는데 이날의 의의가 있다.

2. 요구되는 적성

 ▷ 과학적인 관찰력, 탐구력, 형태지각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과 논리력, 사고력, 창의력, 수리력이 요구된다.

 ▷ 논리적이고 정확한 판단력, 자료수집 및 분석 결과 검증 보고서 작성을 위한 지적·사무적 능력이 구   된다.

3. 관련 직업

 ▷ 과학자, 발명가, 각종 기술자, 특허 사무 조종자, 변리사, 국공립 연구기관의 연구자, 원자력 연구소의 연구자,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연구소의 연구원, 생명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 각종 분야의 연구원에 근무하는 연구·기술 개발원, 우전공학 연구원, 농업진흥청 산하의 각종 연구 개발원, 정보통신 연구·기술 개발원, 우주 항공 과학 기술자, 정보처리기술, 전자계산, 기술 관련 분야 종사자 등

4. 직업 전망

 ▷ 과학 기술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각종 분야의 기술 개발에 열의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 유전 공학, 정보 통신, 컴퓨터, 우주 항공 분야 등 미래 과학 분야에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어 과학자, 연구원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 기초 과학, 응용과학, 반도체, 컴퓨터 등의 첨단 과학 기술 분야가 미래 사회의 유망한 직종으로 각광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5. 우리의 자세

  오늘 날 과학의 발전이 눈부시고, 그것이 인류의 생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에 대하여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과학 기술은 한마디로 국가 발전의 열쇄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앞선 민족일수록 남보다 일찌기 발전을 이룩했고, 그런 민족이 남보다 앞서 세계를 이끌어 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세계 현실이다.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과학적인 정신과 생활태도를 갖고 공부하고 살아 간다면 경쟁이 치열한 오늘의 현실에서 개인의 성공과 발전은 물론 국가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지구의 날

 

 

 

 

 

 

 

'지구의 날'이란

  지구의 날은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범시민적 각성과 참여를 통해 지구환경 위기 극복을 위한 뜻을 모으고 표현하는 행사로서 전세계 시민들의 희망의 축제입니다.  지구의 날의 시작은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바다위에 기름이 유출된 사고가 계기가 되어 1970년 4월 22일, 미 상원의원 '게이로 닐슨'이 주창하고, 당시 하버드대 학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가 나서서 준비하면서 추진된 행사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 184개국 약 5,000개의 단체가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4월 22일 지구의 날에 각 국의 환경, 사회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지구를 위한 행사를 진행합니다. 세계 각 국에서 약 5억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환경행사가 바로 지구의 날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지구의 날을 기념하는 첫 행사를 수만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남산에서 개최한 후 매년 민간단체들이 기념행사를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흐름과 같이 '차없는 거리'행사를 중심으로 전국 50여개 지역에서 많은 환경시민단체들이 지역의 특색에 맞는 행사를 기획하여 참여하는 축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욱 특별한 이유

  2002년에는 21세기 지구환경 문제해결을 위한 지구적 차원의 행동을 논의하는 등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담(WSSD, 리우+10회의)이 열렸고, 세계인들의 평화의 축제인 월드컵이 한.일 양국에서 열렸던 해로서 환경과 지구평화를 위한 시민행동의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세계가 공동의 과제로 제시했던 지속가능한 발전은 비단 자연환경의 복구와 보존뿐 아니라 환경을 고려하는 사려깊은 소비생활, 빈곤문제 해결,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 보건과 건강과 같은 삶의 질향상을 위한 매우 다양한 영역의 통합적 의제형성 및 실천을 통해 인류발전 방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 184개국 5,000여개의 단체가 지구의 날 2002를 준비하고 'Protect Our Home'을 테마로 진행되었던 2002년 지구의 날 행사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에 각국의 정상이 참가하도록 요구하는 범세계 공동캠페인이 제안되었으며 ▲ 지역사회 환경, 보건 감사활동을 실시하기, ▲ 차없는 날 행사 준비하기 ▲ 나무를 심고 잘 가꾸기 ▲ 생태적인 발자국 측정해보기 ▲ 평화를 위한 시간을 갖기 등을 국제적인 주요캠페인으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환경의 날

 

 

 

 

 

 

 

 의 의
 - 국민의 환경보전 의식 함양과 실천의 생활화

 유래 및 연혁
· 지구환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초의 세계회의인 「UN인간환경회의」('72. 6. 5∼6.16, 스웨덴의 스톡홀름, 113개국 대표참가)에서 UN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하고 세계환경의 날 제정키로 결정
· 1972년 제27차 UN총회에서 UN인간환경회의 개최일인 6월 5일을「세계환경의 날」로 지정하고, 해마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여 범세계적으로 환경보전행사를 실시하도록 권고
 - '96. 5. 30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규정

 환경보전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국제연합이 지정한 기념일. 1972년 6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113개국의 대표가 참석하여 개최된 UN환경회의를 기념하여 그 해 제23차 UN총회에서 제정하였다. 인간은 자연 환경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오늘날, 자연 환경은 무절제한 자원 개발과 낭비로 인하여 자원고갈, 수질과 대기 오염, 생물종의 멸절이나 삼림 지역의 감소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간은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서 당초에 원하지 않았던 환경 오염이라는 위기 속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의 위기는 생태계의 파괴와 더불어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 오염이 심각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이나, 대체로 인간 본위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으며, 과학 기술의 남용을 초래한 인간의 무지와 무절제한 욕망이 주원인이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생존 자체에 심각한 위기를 봉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적 의식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자연의 정복자,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품속에 겸허한 자세로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자연의 일부이면서 적어도 동반자적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자연 자원의 낭비를 줄여 나가는 슬기와 과학적 사고 방식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결코 한 개인,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온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1972년 6월 5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국제 연합 인간 환경 회의'가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인간 환경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그 선언은 자연 보전과 그 향상을 위한 인류 공동의 사상과 원칙을 천명하였다. 즉,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인간 환경을 보호하고 개선한다는 것은 이제 인류의 지상 목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자연보호 헌장에서는 "국민 모두가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여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모든 공해 요인을 배제함으로써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후손들도 자연을 이용할 권리가 있으므로, 우리는 자연을 잘 보전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환경의 날을 맞이하여, 자연 환경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우리들이 해야 할 바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싶다. '자연은 인류의 어머니이다.'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자연 환경 보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 날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지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方定煥)을 포함한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5월 5일로 정하여 행사를 하여왔으며, 1961년에 제정, 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하였고,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이날은 어린이가 따뜻한 사랑 속에서 바르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하며, 불우한 어린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위로하고, 모범어린이 및 아동복지사업의 숨은 유공자를 발굴·표창하는 한편,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행사를 실시하여 체력향상 및 정서함양을 도모한다.

  여러가지 행사는 각 시·도, 시·군 및 단체별로 어린이가 참석하는 기념식을 거행하는데, 기념식전에서는 〈대한민국어린이헌장〉을 낭독하고 착한 어린이·청소년을 시상한다. 또한, 어린이체육대회·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가장행렬· 묘기시범· 밤불꽃놀이· 어린이 큰잔치 등을 거행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지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方定煥)을 포함한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5월 5일로 정하여 행사를 하여왔으며, 1961년에 제정, 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하였고,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하였다가 1975년부터는 공휴일로 제정하였다.

  이날은 어린이가 따뜻한 사랑 속에서 바르고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하며, 불우한 어린이들이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위로하고, 모범어린이 및 아동복지사업의 숨은 유공자를 발굴·표창하는 한편,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행사를 실시하여 체력향상 및 정서함양을 도모한다.

  여러가지 행사는 각 시·도, 시·군 및 단체별로 어린이가 참석하는 기념식을 거행하는데, 기념식전에서는 〈대한민국어린이헌장〉을 낭독하고 착한 어린이·청소년을 시상한다. 또한, 어린이체육대회·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가장행렬· 묘기시범· 밤불꽃놀이· 어린이 큰잔치 등을 거행하기도 한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1899- 1931)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  선린중학,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대학에서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 문화운동가로서,  또  사회 운동가로서 어린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1978년 금관 문화 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사후에  발간된 책은 '소파전집', '칠칠단의 비밀', '글벗집', '소파 아동 문학 전집' 등이 있다.  방정환은 동화 구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뚱뚱하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생긴  그가 동화를 이야기하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귀가 솔깃해져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던  방정환은  순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갔을때는  죄수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주었고,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정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보낸  방정환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다.

[ 어린이 운동가 ' 어린이날 ' 제정 ]

  우리에게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이름을  선물한 사람이  방정환이다.  방정환은  서기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가난한 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방정환의 호는 소파이고  소년  운동가였으며  아동 문학가였다. 방정환은  일본 동양대학  문학과에 다니면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동화가 마음의 양식 같은 것이다. 일본만 해도 동화집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한 권도 없다니 ! '
  방정환은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낸 뒤, 아이들을 가리키는  고운 말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어른, 젊은이, 늙은이 하는 것은 모두 우리말인데, 왜 아이들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는 것일까 !    기껏 있다는 것이  애놈이니  애자식 뿐이란 말인가 ? '
  이렇게  생각하던  방정환은  자기가  아이들에게 맞는  고운말을  만들어 내기로 하였다.  그 결과  생각해낸 말이  바로  '어린이'였다.  그리고  1923년 3월에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손진태,  윤극영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색동회란 이름은  두 번째 모임에서  윤극영이 붙였으며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어린이날은  1946년 윤석중에 의해  5월 5일로  변경되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로서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어버이 날

 

 

 

 

 

 

 

  범국민적 효사상 앙양과 전통 가족제도의 계승 발전은 물론, 효행자와 전통 모범가정, 장한 어버이를 발굴해 포상·격려할 목적으로 제정한 기념일.

국가 : 한국
시작연도 : 1973년
행사시기 : 매년 5월 8일
주요행사 : 시· 도 및 군·구별 기념식, 부모님 위안잔치, 체육대회, 효도관광,

  1956년 국무회의에서 해마다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해 17회까지 행한 뒤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6615호)에서 어버이날로 개칭해 현재까지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제정 목적은 범국민적 효사상 앙양과 전통 가족제도의 계승 발전은 물론, 사회와 이웃에 모범이 되는 효행자, 전통 모범가정, 장한 어버이를 발굴해 포상·격려하는 데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행사를 주관하며, 포상 대상자를 각계 각층에서 고루 선발해 효사상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지방 및 기관 특성에 맞게 행사의 다양화와 내실화를 추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각 시·도 및 시·군·구 등 기관별로 기념식을 실시한다. 그러나 정부 주관행사의 내실화 지침에 따라 중앙기념식은 하지 않는다.

  기념식 외에 가족 노래자랑, 합동 회갑연, 연예인 초대잔치 등 부모님 위안잔치를 비롯해 체육대회, 효도관광, 효행 사례집 발간, 가훈 갖기 운동 전개, 카네이션 달아드리기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또 효행자 및 모범가정 등에 대한 포상으로 훈격에 따라 국민훈장, 국민포장, 대통령·국무총리·보건복지부장관 표창 등이 주어지며 부상으로 일정액의 상금이 지급된다.

  이 날을 전후해 1주일 동안을 경로주간으로 정해 양로원과 경로당 등을 방문·위로하는 등 어른 공경에 관한 사상을 고취하기도 하였으나 1997년부터 경로주간을 폐지하고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10월을 경로의 달로 정해 별도로 시행하고 있다.

  어버이날은 본래 한국에서 생긴 것은 아니고, 사순절의 첫날부터 넷째 주 일요일에 어버이의 영혼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영국·그리스의 풍습과,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1914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5월의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면서부터 정식 기념일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어머니가 생존한 사람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죽은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각종 집회를 열며,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선물을 한다.

우리의 자세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어버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한송이의 꽃이 라도 달아 드립시다. 그리고 산업화·도시화·핵가족화로 퇴색되는 어른 봉양과 경로 사상을 확산을 확산하고 옛 선인들의 효행 사례를 본받아 효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
 


 

 

 

 

 

 

 

스승의 날

 

 

 

 

 

 

 

♠ 스승의 은덕에 감사하고 존경하며 추모하는 뜻으로 제정한 날.

국가 : 한국
시작연도 : 1964년
행사시기 : 매년 5월 15일
주요행사 : 교육 유공자 포상과 음악회·체육대회

1. 스승의 날의 유래

  1958년 5월 8일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스승의 날을 제정하는 의견이 제기된 뒤 1963년 10월 서울과, 1964년 4월 전주에서 청소년 적십자단의 각도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고, 불우한 퇴직교사 또는 질병에 걸린 교사를 위로하자는 차원에서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였다.

  전국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스승의 날 기념식 행사를 개최하다가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73년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인 12월 5일(1968. 12. 5)에 통합 폐지되었고, 1982년부터 다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날은 스승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각급 기관 및 단체별로 실시하는데, 교육 유공자 포상과 음악회·체육대회 등을 연다.

  정부에서는 교육인적자원부 직원뿐 아니라 중앙·지방행정기관의 공직자, 국영기업체·정부투자기관·사회단체·일반기업체 임직원 등이 스승 찾아뵙기, 안부편지 보내기, 모교 및 자녀학교 방문하기 등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한편, 교육에 헌신 전념하는 우수 교원을 발굴하고, 교원의 사기 진작과 스승에 대한 존경 풍토를 조성할 목적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교원들에게 훈장·포장 및 대통령·교육인적자원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한다.

  전국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경건한 뜻을 표하며, 불우한 퇴직 은사나 와병 중인 교사를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2. 무명교사 예찬론 


  나는 무명교사를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노라. 전투를 이기는 장군은 위대한 장군이로되, 전쟁에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무명의 병사로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은 이름 높은 교육자이고 젊은이를 올바르게 이끄는 것은 무명교사로다. 그가 사는 곳은 어두운 그늘, 한난을 당하되 달게 받도다. 그 를 위하여 부는 나팔 없고, 그를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 없으며, 금빛 찬란한 훈 장이 그 가슴을 장식하지 않도다. 묵묵히 어둠의 전선을 지키는 그, 무지와 우매의 참 호를 향하여 돌진하는 그 어머니, 날마다 날마다 쉴 줄도 모르고 청년의 원수인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자 싸우며, 잠자고 있는 정기를 일깨우도다.
  게으른 자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하고자 하는 자를 고무하며, 방황하는 자에게 안 정을 주도다. 학문의 즐거움을 가르침에서 옮겨 주며, 지극히도 값있는 정신적 보물을 젊은이들과 더불어 나누도다. 그가 켜는 수많은 촛불, 그 빛은 후일에 그에게 되돌아 와 그를 기쁘게 하노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받는 보상이도다. 지식은 서책에서 배울 수 있으되, 지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따뜻한 인간적 접촉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로다.
  공화국을 두루 살피되 무명의 교사보다 예찬을 받아 마땅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민주사회의 귀족적 반열에 오를 자, 그 밖에 누구일 것인고. '자신의 임금이요, 인류의 공복인저!!!'

 


 

 

 

 

 

 

 

성년의 날

 

 

 

 

 

 

 

1. 성년의 날 제정 취지 

  성년의 날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년에 달한 젊은이들에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격려하고, 성인으로서의 자각과 사회에 대한 책무를 일깨워주며 자긍 심과 긍지를 가지고 민주시민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하였다.

2. 성년의 날 연혁
  1. 1973년,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의거 4월20일을 성년의 날로 제정
  2. 1975년, 5월을 '청소년의 날'로 정하고, 5월 6일을 '성년의 날'로 변경
  3. 1985년, 5월 세째 월요일로 지정하여 '성년의 날' 행사 시행
3. 우리나라 전통 성년식

(1) 유 래: 삼한시대 마한에서는 소년들의 등에다 상처를 내어 줄을 꿰고 통나무를 끌면 서 그들이 훈련 받을 집을 지었다는 성년식에 대한 기록이 있다.
(2) 내 용
  가.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남자(15-20세)에게 관(모자)를 씌워 성년 복장을 입히는 의식으로서 4례(관, 혼,상,제) 중의 하나이다. 남자가 관례를 올린후에는 관명(官名)과 자(字)를 쓰며 혼례 및 관직에 오를 자격과 향교나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나. 계례(荇禮)
  성인이되는 여자(15세)에게 머리를 올려 쪽을 찌고 비녀(용잠: 龍簪)를 꽂아 주고 성년의 복장(흔히 녹색 저고리에 청색 치마)을 입히는 의식이다. 보통 결혼 날자에 임박해서 치루 어 졌는데 이는 관례의식을 마쳐야만 혼례를 치룰 수 있다는 관습에 의한 것이다.

4. 성년의 권리와 의무

(1) 권 리
  민법 제 4조에 의해 만 20세로 성인이 되며, 성인으로서 매매권 행사, 소유권 행사, 계약 체결등 완전한 법률 행위를 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약혼의 자유', 각종 선거권, 정당원의 가입 자격등 가진다.
(2) 의 무
  성인이 되면 법적으로는 '병역의 의무'를 지며, 도덕적으로는 도덕 현상에 관해 正, 善을 행할 의무를 진다.
 


 

 

 

 

 

 

 

석가 탄신일

 

 

 

 

 

 

  음력 4월 8일(사월초파일)은 석가모니께서 탄생한 날로서 불교에서는 이 날을 '관불절' 또는 '관등절'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겨 왔는데 절에서는 물론 관아에서까지 수 많은 등(관등 놀이)을 달아 장안이 마치 밤시장 같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한다.

  오늘날 불교의 쇠퇴로 말미암아 이 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옛 처럼 성대하지는 않지만 불교 교리는 유교사상과 함께 우리의 정신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관계로 인하여 그 사상이 신도 가 아닌 일반대중의 마음속에도 어느 정도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인생의 과정을 ' 고통 '으로 간주하여 고통을 제거하는 길은 욕심을 버림으로써 가능하다는 가르침과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3독(三毒)])이라 하여 멀리할 것을 권하는 가르침은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길에 나선 성인의 큰 뜻(자비심)을 되새기고 어렵고 고달픈 이웃이 없는가를 살펴보며 서로 돕고 아껴주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광주 민주화 운동

 

 

 

 

 

 

  10ㆍ26 이후 '12ㆍ12사태'를 계기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촉구하는 운동이 각계 각층에서 일어났다. 서울시내 대학 교수 361명의 '학원민주화 성명'이 나오고, 군부가 곧 행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대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약 10만여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5.16)같은 날 군사 정권의 재등장에 반대하는 '지식인 134명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날 대학생 간부들은 군부에게 정권 탈취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바로 다음날 '계엄령 전국 확대'를 단행하여(5.17)본격적인 정원 탈취에 나섰다. 이와 함께 전국에 검거 선풍이 몰아쳤고 주요 지점마다 계엄군이 증강 배치되었다.

  일요일이던 5월 18일 아침 10시에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든 학생 100여 명은 교문을 봉쇄한 공수대원들로부터 무차별 곤봉 세례를 받는 것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시작된다(5.18). 사태는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소식을 듣고, 혹은 '휴교 시에는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이라는 행동 지침에 따라 학생들 200여명이 모여 공수 부대의 학교 점령을 비난하며 구호를 외쳤다.

  "비상 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유래 없이 잔혹하고 폭력적인 진압이었다. 광주교대, 조선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의 학생 시위 규모는 늘 있었던 시위의 규모를 넘어서지 못해 시민들의 반응 또한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일부는 우려 섞인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무렵, 신군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11공수여단 4개 대대가 광주에 증파된다. 이는 신군부의 집권계획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분쇄한다는 그들이 내린 단순 명료한 결론이었다. 이로부터 학생들에 대한 게엄군의 과잉저지에 흥분하여 시위 학생의 수가 불어났고, 계엄군의 저지는 더욱 격렬해졌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민중 항쟁은 하루 사이에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어갔다.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변한 광주 항쟁은 2백여대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계기로(5.20) 노동자ㆍ도시 빈민ㆍ회사원ㆍ점원 등이 폭넓게 참여하여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한 폭력 저항으로 변해 갔다. 또한 가두방송 차량을 타고 도청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20일 밤 시민들의 공세에 밀린 공수 부대들은 발포로 응수해 사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항쟁은 새로운 국면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긴장의 5월 21일이 밝았다.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의 분노에 찬 시위는 잠잠해지기는커녕 더욱더 크게 울려 퍼졌다. 이에 계엄군은 이날 오후를 기해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시작하였다. 수 많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주로 노동자ㆍ공사장 인부ㆍ넝마주이ㆍ접객업소 종사원ㆍ날품팔이ㆍ학생 등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계엄군의 임시 본부인 전남도청을 기관총과 소총으로 공격하여 계엄군을 '전략상 후퇴'하게 했다.

  항쟁 발발 4일 만에(5.21) 계엄군이 후퇴함으로써 교도소를 제외한 전체 광주시가 시민군의 점령안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시위는 목포, 해남, 화순 등으로 들불처럼 확대되었다. 계엄군은 병력을 보충하고 시 외곽을 차단하여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5월 22일에서 27일까지는 공동체적 상호협력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은 매점 매석을 방지함으로써 제한된 생필품을 최대한 활용했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되 이상의 쌀을 팔지 않았고, 담배 가게주인은 한 사람에게 한 갑씩만 팔았다. 슈퍼마켓이나 식료품점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이 누구에 의해서 강요된 적 없이 모두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지켜졌다. 평소에 흔히 있던 강도나 절도 등도 자취를 감췄다.
 높은 도덕성과 민주시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시민군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시내치안과 경비를 맡았다. 교통 역시 시민군이 확보한 차량을 동원하여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해결하였다. 공수 부대의 광주 퇴각 이후 신군부 일파는 광주를 다방면에서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이 완전히 장악한 언론을 동원해 온통 '폭도', '약탈', '무정부상태', '혼란' 등 의 용어로 가득 채워졌다. 또한 광주를 인근 지역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한 빈틈없는 봉쇄망이 구축되었다. 광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광주 고립 작전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공수 부대 3여단 특공조가 27일 새벽 3시 30분 극비리에 작전을 개시했다. 도청 인근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 당시 투입되어 공격을 가한 군부대는 무려 2만여명, 일방적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약 4시간만에 상황은 끝났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최후의 항전을 선택한 도청안의 시민군 300 여명,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흩어져 있던 자체 방어 병력 수백여 명이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 진압에 맞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그 중 상당수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엄사령부가 항쟁 중 사망자가 148명이며 그 중 71%인 118명이 총상으로 죽었고, 사망 군인 수는 15명이라 발표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조선왕조 시대의 갑오농민전쟁, 호남의병 전쟁과 일제 식민지 시대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 4공화국 말기의 중화학 공업 과잉 투자 등으로 인한 경제적 침체 및 소외, 특히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영ㆍ호남 사이의 지역감정 조장,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호남지방의 상대적 낙후, '유신'체제 이래 'YㆍH 사건', '부ㆍ마 항쟁', '서울의 봄'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고조,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한 계엄확대 및 학내 시위 과잉 진압 등등의 원인이 겹쳐 터진 민중항쟁이었다. 광주항쟁의 진압은 단계적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의 한 단계였다. 즉 그것은 12ㆍ12 사태로 시작되어 다음해 8월 전두환의 대통령 선출에서 완성된 일련의 사태의 하나였던 것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좌절되었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미는 너무컸다. 외세나 일부 정치적 성향을 지닌 군부세력에게 치명적인 도덕적타격을 주어 5공화국을 비정통적 정치 권력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족, 민주 운동에 큰 교훈을 주었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미화되기만 했던 '외세'에 대한 문제, 민족 문제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현충일

 

 

 

 

 

 

 

>> 의의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불의에 항거하여 궐기한 광복 후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다.

  현충일은 국토 방위와 민족 자존을 위하여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전몰 장병들의 영령에 대하여 그 위혼을 추모하여 명복을 기원하는 날이다. 
 
>> 유래 및 지정 연혁

..;유 래
  현충일을 6월6일로 정한 데는 우리 민족의 풍습이 반영된 것임. 우리 선조들은 24절기중 손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왔음.
그래서 1956년 제정 당시 망종일인 6월6일을 현충일로 정한 것임.
..;연 혁
1956. 4.19 - 6월 6일을 현충일로 제정(대통령령 1145호)
1970. 1. 9 - 년1회 현충 추념식 거행(국립묘지령 4510호)
1982. 5.15 - 공휴일인 법정 기념일로 정함.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는 호국 영령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어야 함은 물론 이 날만큼이라도 다음과 같은 자세로 생활하여야 할 것이다.  

1. 반드시 조기를 게양하도록 한다.

2. 오전 10시에 싸이렌이 울리면서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의 묵념을 한다.

3. 가무, 음주 등을 삼가하며 야외놀이 등 유흥적인 놀이도 자제하여야 한다.

4. 영령들의 유가족에게 따뜻한 위로를 한다.

 


 

 

 

 

 

 

 

7.4 남북공동성명

 

 

 

 

 

 

 

  70년대 초에 이루어진 미국과 중국의 화해무드를 배경으로 71년 8월 6일 북한은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를 제안하였다. 한편 전태일 분신 사건,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 함평 고구마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대내적 위기의 타개책 겸, 미국의 동북아 긴장완화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재개하였다. 이리하여 71년 9월 20일에는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고, 마침내 72년 7월 4일에는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전 민족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3대원칙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조국통일의 도정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며, 온 국민을 열광케 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남북조절위원회 본 회담에서 남과 북은 뚜렷한 의견차이를 드러내고 만다. 북한측은 미군철수를 요구하며 남한정권의 약화를 기도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은 남북대화와 통일을 위한 체제정비라는 이유를 내세워 "10월유신"을 단행, 독재체제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남한정부가 74년 6월 23일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이른바 6.23 특별선언을 발표하자, 북한은 그것이 두개의 한국을 지향하는 영구분단의 음모라고 비난하였다. 이어서 북한은 남한의 유신체제와 6.23선언이 조국통일의 장애물임을 지적하고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실로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운동이 성명의 운동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며, 따라서 국민들에게 굳게 뿌리내리지 못한 남북 당국간의 합의는 한낱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한가위(추석)

 

 

 

 

 

 

 

 

  한가위는 원단(元旦: 설)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名節)답게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가위'라는 명칭이 신라 시대 가배(嘉俳 : 혹은 嘉排) 풍속에서 변천된 것이고, '추석(秋夕)'이라는 명칭은 <예기(禮記)>의 "춘조월추석월(春朝月 秋夕月)"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특히 가을의 중심 8월은 만물이 성숙(成熟)하는 좋은 철이기에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하여 온갖 음식과 과실(果實)을 풍성하게 장만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속담(俗談)에서도 알 수 있듯이 풍요로움 속에서 조상의 은덕(恩德)을 기리고 밝은 한가위 달과 함께 다양한 행사와 풍속으로 지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가배(嘉俳)의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때에 육부(六部)를 나누어 두 편을 만들고 왕녀(王女) 2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나눈 부락(部落)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부터 매일 큰 부락의 광장에 모여 길쌈 짜는 내기를 하는데, 을야(乙夜 :밤 9시 - 11시)가 되어서야 하루를 마쳤습니다. 그러다가 8월 보름이 되면 각 편의 길쌈 결과물의 많고 적음을 따져 내기에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합니다. 이때 노래와 춤을 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때 내기에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면서 "회소(會蘇) 회소(會蘇)"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애절(哀絶)하면서도 단아(端雅)해서 후대 사람들이 그것으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합니다."

   이상의 사료(史料)를 통해서 그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新羅)가 부족국가(部族國家)에서 고대국가(古代國歌) 체제(體制)로 전환되는 시점에 부족의 결속력(結束力)과 응집력(凝集力)을 모으는 방편으로 길쌈내기를 시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회소(會蘇)'라는 의미 역시 "모여서[會] 다시 하자[蘇]"라는 아쉬움의 표현인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가배(嘉俳)는 국가적 단결(團結) 행사에서 출발하여 풍요와 결실의 계절에 넉넉함을 나눌 수 있는 풍속(風俗) 행사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농사일도 거의 끝나 햇곡식을 먹을 수 있는 시기이기에 새로 수확(收穫)한 곡식(穀食)이나 과실(果實)로 사당(祠堂)에 차례(茶禮)를 올리는데, 절차는 설날과 같은 절차를 따릅니다. 이와 함께 한식(寒食) 때 손질한 이후 여름철 내내 풀로 무성한 조상(祖上)의 묘소(墓所)를 찾아 벌초(伐草)를 함으로써 겨울을 잘 지낼 수 있도록 합니다. 

   고향(故鄕)을 찾아 떠나는 민족(民族)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이 시기는 조상(祖上)의 음덕(陰德)을 잊지 않는 우리 민족(民族)의 아름다운 풍속(風俗)의 한 모습입니다.

 


 

 

 

 

 

 

 

제헌절

 

 

 

 

 

 


   7월 17일은 나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법률인 헌법을 만들어 널리 공포한 날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3년 뒤인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의원을 뽑고, 여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모여 헌법을 만들어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제헌절인 것이다.

   사람의 사회는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률로써 규율이 지켜나가고 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집안과 이웃을 만들며, 아름다운 도덕은 우리 사회를 정이 넘치는 평화로운 터전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은 습관과 아름다운 도덕을 다같이 지켜나가지 못하고, 사회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법률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법률은 여러사람이 서로 지켜나갈 일들을 정해 놓은 규칙이라고 하겠다.

   법은 어떤 몇몇 사람의 의견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다같이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준법벙신은 법률을 지켜나가는 정신이다. 그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겠다. 문화가 발달된 나라일수록 법률을 잘 지킨다. 미개한 나라의 국민들은 법률을 예사로이 생각하고 잘 지켜나가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문화민족으로 자랑해 왔다. 그러나 법률을 지키는 데에는 소홀한 점이 있어 남들의 비웃음을 산 일들도 더러 있었다. 요즈음도 탈세를 하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법률을 잘 지키는 것은 남을 위해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이익을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은 도덕과 법률을 잘 지켜나가는 습관을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야 하겠다. 이러한 준법정신이 바로 나라의 발전을 꾀하는 지름길이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뜻깊은 제헌절을 맞이하여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학교규칙부터 잘 지키는 학생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공부하는 학교의 훌륭한 전통은 우리가 세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규율을 잘 지켜 앞날의 나라와 겨레를 이끌어나갈 주인이 되도록 하자.

[大韓民國(대한민국) 憲法(헌법) 前文(전문)] 

悠久(유구)한 歷史(역사)와 傳統(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大韓國民(대한국민)은 己未三一運動(기미삼일운동)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을 建立(건립)하여 世界(세계)에 宣布(선포)한 偉大(위대)한 獨立精神(독립정신)을 繼承(계승)하여 이제 民主獨立國家(민주독립국가)를 再建(재건)함에 있어서 正義人道(정의인도)와 同胞愛(동포애)로써 民族(민족)의 團結(단결)을 鞏固(공고)히 하며 모든 社會的(사회적) 弊習(폐습)을 打破(타파)하고 民主主義(민주주의) 諸(제) 制度(제도)를 樹立(수립)하여 .......................... (중략)..........................維持(유지)에 努力(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子孫(자손)의 安全(안전)과 自由(자유)와 幸福(행복)을 永遠(영원)히 確保(확보)할 것을 決議(결의)하고 우리들의 正當(정당) 또 自由(자유)로히 選擧(선거)된 代表(대표)로써 構成(구성)된 國會(국회)에서 檀紀(단기) 四千二百八十一年 七月 十二日(사천이백팔십일년 칠월 십이일) 이 憲法(헌법)을 制定(제정)한다.

檀紀 四千二百八十一年 七月 十二日 
大韓民國 國會議長 李承晩(이승만)



 

 

 

 

 

 

 

광복절

 

 

 

 

 

 

 

*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3.1, 제헌절, 개천절과 함께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온 국민이 이 날을 경축한다.

   광복절의 뜻은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가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36년간 일본의 압박 밑에서 사람대접도 못받고 고생하며 살다가 1945815일에 해방된 날이요, 둘째로 그로부터 3년간 미군정을 거쳐 1948815일에 우리민족의 힘으로 민주국가를 처음으로 세운 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어찌하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한때 나라를 빼앗겨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나라가 없었다는 이유로 온갖 고생을 하던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아 자유를 되찾고 즐거워했으니,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해방이후 6.25동란, 4.19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사회변화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선 농사만을 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탈바꿈했고, 세계 10대 수출대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경제적 부흥을 발판삼아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93 대전엑스포 등 굵직한 세계대회를 연달아 개최하였고,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여 세계속의 한국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산다고 하는 것은 경제가 발전하여 돈을 많이 벌고 물질만 풍부하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문명에 병행하여 정신문명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 정신적으로 잘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맞게 사는 인간다운 삶을 말한다. 인간답고 바르게 살지 못하면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언제 보아도 휴지 한조각 없이 깨끗한 거리와 운동장, 푸른 산과 들, 맑은 시냇물과 파아란 하늘, 질서있고 친절한 태도와 예절바른 행동...이런 것들은 광복 60여년을 앞에 둔 우리 한국의 특색으로 굳어지게 곱게곱게 다듬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은 자연은 물론 국민의 마음씨가 따뜻하여 다시 오고 싶다" 라는 소리가 세계속에 울려 퍼질때 애국선열들 앞에 떳떳한 광복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천절

 

 

 

 

 

 

 

  개천절은 우리나라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BC2333년에 처음으로 도읍을 왕검성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건국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중 일연이 저술 한 삼국유사에 유래하고 있다.

  건국 신화에 의하면 천제(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에 내려가 신시(神市)를 베풀었는데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아 이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병, 형벌, 선악 등 여러 가지 세상 일을 다스리고 곰에서 환생한 여인과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고려시대 이후 단군은 우리민족의 시조로 숭상해 왔으며, 민족의 자주 독립정신과 통일의식을 더욱 고취하는 것으로써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겠다.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넋을 위로하며,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면서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근래에는 단군 왕검을 믿는 종교(대종교)가 일어 나 10월 3일을 제사 지내는 날로 정하여 단군 왕검을 숭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해방 후 에는 이날을 개국 기념일로 정하게 되었다.

  개천절은 우리나라의 건국을 경축하고 단군 성조에 대한 숭상과 조국정신을 되새기는 뜻있는 날이다. 우리 민족 신화의 건국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반만년간 민족과 나라를 지켜온 선조들의 역사와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더욱 참다운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누구나 잘 살수 있는 복지 국가를 이룩하려는 국민적 결의를 굳게하여야 할 것이다.

 


 

 

 

 

 

 

 

한글날

 

 

 

 

 

 

 

1. 유 래

  한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고, 한글을 만든 분들의 위업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이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 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하였고, 1928년 명칭을 '한글날'로바꾸었다.
  1932년과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역서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하였으며, 1 934년부터 1945년까지는 그레고리오역서에 의하여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28일에 행사를 거행 하였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원본의 말문(末文)에 적힌 '정통(正統) 11년 9월 상 한(上澣)(세종 28년 9월)'을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되어 이 날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부터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여 이날에 기념식을 행하였다.

2. 주시경 선생의 한글 사랑  

  한글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마도 주시경 선생일 것이다. 그것은 주시경 선생이 우리 나라 글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여 한글의 문법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사실상 최초의 국어 학자이기 때문이다.
  '큰 글'이라는 의미로 한글이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도 주시경 선생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글과 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일로 여긴 주시경 선생은 국어·국문의 연구와 보급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국어 문법에는 우리 글을 쓰는 것이 옳으며 한문을 쓰면 그 뜻으로만 해석하려는 폐단 이 있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쓰는 술어들은 국어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우리 글 나름의 문법 체계를 정리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또한 국어의 보급에 힘을 쏟아 낮에는 여러 학교, 밤 에는 야학, 방학 중에는 국어 강습소를 순회하면서 우리 글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였다. 그는 가난하여 항상 무명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툭하면 끼니를 거르면서도 추호도 이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국어학자이기 이전에 애국 지사였던 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외세의 침 략을 받는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채 나이 39세 되던 1914년 7월 27일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3. 우리의 자세 

  우리에게는 자랑스럽고 소중하며 우수한 우리의 글 '한글'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곳곳 에서는 외국어가 범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지식과 신분을 과 시하는 방법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뜻도 알 수 없는 국적불명의 외국어로 표시된 원색적인 옷, 읽을 줄도 모르면서 들고 다니는 외국 잡지, 그밖에도 청소년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접근하는 일본의 연가(엔까) 등을 삼가하여 야 할 것이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일본말과 국적 불명의 외래어 사용을 반성하고, 우 리 글과 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학생의 날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1953년 문교부가 이 날을 학생의 날로 정한 것이다.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정해지게 된 계기는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9년 10월 광주로 통학하는 열차 속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같이 열차를 타고 있던 한국인 남학생이 이를 말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우리 민족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분노 가 가득한 때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자 열차에서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일본학생은 가만 두고 한국인 학생만 일방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광주에 있는 학생이 들고 일어났으며, 이것은 단순히 광주의 학생 운동 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의 항 일 투쟁을 기념하여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학생들의 항일 운동은 단순히 일본인 학생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일어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가 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학생들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른들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비 판하고 잘못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가까운 보기로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것도, 4·19혁명을 주도한 것 도 학생들이었다. 그러한 학생들의 민족애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학생의 날을 정해 이 날을 기념하는 것도 단순히 11월 3일의 광주학생운동만을 기념하자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면서 민족을 올바로 이끌어 왔던 젊은 학생들 모두를 기억하고 그러한 젊은 학생들의 자기희생정신을 길 이 계승하기 위한 의미로서 학생의 날이 정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배 학생들의 의로운 정신과 민족 사랑 정신을 이어 받아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성 탄 절

 

 

 

 

 

 

 

  •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기념일. 기독탄신일, 예수 성탄대축일, 크리스마스 등으로 불린다.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절 중의 하나이다.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12월 25일을 예수의 출생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 이 날짜를 출생일로 정한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로마에서 동지에 행해졌던 축제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녔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농경신인 사투른(Saturn)과 태양신인 미트라(Mitra)를 숭배하는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뒤 로마의 교회는 전통적인 축제일을 예수의 생일과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 당시 미트라숭배와 사투르날리아(Saturnalia)가 매우 광범위하게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풍습을 억압하는 대신 동화시키는 방법을 사용, 태양의 재탄생에 비유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의 탄생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점차 널리 퍼져갔으며,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한 대항논리를 정교화시키는 가운데 강화되었다.
  • 신학적인 정당화가 이루어졌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날짜를 3월 25일로 정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예수의 삶이므로 응당 완전히 꽉 찬 기간 동안 생애가 이루어졌으리라 보기 때문에 수태도 3월 25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 계산에 의하면 예수의 출생은 12월 25일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날은 세계적인 축제일이 되었고, 이때 사용되는 용품생산에 많은 기업이 관여하면서 커다란 상품시장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날과 연관되어 있는 사항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은 원시시대의 수목숭배와 연결시킬 수 있으나 가까이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거기에서 에덴의 동산을 상징화하면서 ‘낙원의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연극이 탄압을 받게 된 뒤에는 집안으로 들여와 사탕, 과일, 촛불로 장식하게 되었다. 19세기초 독일에서 북유럽국가들로 전파되었고, 1841년에는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인 알버트공에 의하여 영국에 소개되었다.
  • 미국에서는 19세기초 펜실베이니아지방에 이주한 독일계 정착민들에 의하여 전달되었으며, 곧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 트리를 공공장소에 놓게 된 것은 바로 미국에서부터였다. 우리나라에도 19세기말 20세기초에 걸쳐 미국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풍습이 전래되어 나갔다.
  • 그러나 이탈리아, 스페인 및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색깔은 녹색과 붉은색이다. 겨울을 이겨낸 생명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삶은 녹색으로,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붉은색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날과 관련된 장식의 색은 이 두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 붉은 포인세티아의 사용이나 크리스마스 화환은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 때는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캐럴’이라는 말은 원래 플루트 연주에 맞추어 추는 춤곡이라는 의미로 밝고 경쾌하며 후렴과 반복이 행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단순하고 율동적인 노래인 캐럴은 원래 15세기에 영국에서 황금기를 맞게 되나, 종교개혁과 뒤이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캐럴의 발전이 둔화되어 미약하게 유지되어오던 중 19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 〈베들레헴의 작은 성 O Little Town of Bethlehem〉,〈오 성스러운 밤 O Holy Nihgt〉 등이 이때 작곡되어 현재까지 계속 불리고 있으며, 세속화된 노래로서는 〈징글벨 Jingle Bells〉,〈화이트 크리스마스〉 등이 있다. 영국 소설가 디킨스 (Dickens,C.)가 쓴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1843)이라는 작품은 크리스마스 및 이때 불리는 캐럴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 크리스마스 카드가 지금의 모습대로 등장한 것은 1843년 영국의 삽화가인 호슬리(Horsley,J.C.)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넣고 "당신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to You)"이라는 문구를 적어 런던에서 1,000장을 팔았다. 1860년에는 온 영국에 퍼졌으며, 곧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화되었다.
  • 1907년 미국에서는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이 고안되어 카드에 붙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카드보내는 것이 보급되었으며, 실도 1933년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인 홀(Hall,S.)에 의하여 처음 발행되었다. 또한, 이날을 중심으로 성대한 연회가 벌어져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이 행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전통적으로 영국에서는 거위나 수탉 등을 재료로 하였으나, 16세기말부터는 멕시코 등지에서 들여오는 칠면조를 사용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주요 요리로 인정받고 있다. 뚱뚱하고 온화하며 흰 수염의 산타클로스는 4세기 소아시아의 성자인 성니콜라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많은 선행을 하고 선물 주는 것으로 유명한 이 성자의 이미지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었고, 다시 초기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하여 미국에 도입되었다.그러나 지금과 같은 산타 할아버지 모양이 만들어진 것은 1863년 나스트(Nast, T.)라는 만화가에 의한 것이라 한다.
  • 그리고 이 날을 위하여 마굿간이 만들어져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양과 짐승들, 아기예수 앞에서 경배드리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이는 13세기에 성프란시스(St.Francis of Assisi)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다는 풍습이며, 우리나라에서도 명동성당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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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인권 선언일

     

     

     

     

     

     

     

      이 날은 1948년 12월 10일 제3차 국제연합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세계인권선언의 취지를 구현하기 위하여 세계인권선언일에는 매년 법무부 주관으로 각종 기념행사를 행한다.

      인간의 기본권이란 인간이 사회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절대불가결한 권리이다. 출생과 동시에 지니게 되는 인간 고유의 권리, 즉 천부인권으로서 기본권·인권 등으로도 표현되며, 국가의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기본 권리와 자유를 가리키는데, 일반 법률에 규정된 것에 우선한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으로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 국가의 임무라고 보는 사상(자유주의)이 보급되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물려줄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자연권(自然權) 또는 인권이다. 국가는 그와 같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권은 국가에 선행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프랑스의 인권 선언은 모두가 이와 같은 인권을 선언하고 보장하였다.

      인권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자유권을 뜻하였다.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서신의 비밀, 주거의 불가침, 재산권의 불가침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참정권(參政權)은 이에 비하여 인간으로서 가지는 권리가 아니라, 국민으로서 지니는 권리라고 하여 인권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제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국민 주권이 확립되고, 국가의 임무는 모든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사상(사회국가 사상)이 보급됨과 동시에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참정권)나 국민이 그 생활을 보장받는 권리(사회권)도 다같이 인권 속에 포함하고 있다.

    [주요 내용 정리]

  • 1948년 12월 10일 제3차 국제연합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 12월 10일.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의 취지를 구현하기 위하여 세계인권 선언일에는 매년 법무부 주관으로 각종 기념행사를 행하며, 공휴일은 아니다. 73년 3월 30일 제정·공포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제6615호)에 따라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하였다.

  • 세계 인권 선언이란 1948년 12월 제3차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선언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인권 무시, 인권의 존중과 평화 확보 사이의 깊은 관계를 고려하여 기본적 인권 존중을 그 중요한 원칙으로 하는 국제연합헌장의 취지에 따라 보호해야할 인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채택되었다.

  • 전문(前文)과 본문 30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제21조까지는 시민적·정치적 성질의 자유, 즉 자유권적 기본권에 관한 규정이다. 그리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성질의 자유, 즉 생존권적 기본권에 관해서도 상당한 배려가 되어 있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22조), 노동권과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 및 노동자의 단결권(23조) 등에 관해서도 상세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 * 대한 민국 헌법은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그 근본 원리로 하고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서 기본적 인권을 '불가침의 권리'로서 보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