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교수의 마지막 강의 "좋은 건축이 뭐냐 묻기 전에.."
이은주 입력 2018.03.04. 03:31 수정 2018.03.04. 07:48
10권짜리 『건축강의』『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그의 건축 특강 핵심 메시지
2일 퇴임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10권짜리 『건축강의』(안그라픽스)와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뜨인돌)을 함께 펴낸 것. 40여년간 건축과 함께 씨름하며 배우고 질문하고 '생각해온 것들을 이 12권의 책에 정리했다. 『건축강의』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10년 전에 기획한 책이다. "건축학에 기본이 되는 서적, 교재랄 게 별로 없는 게 늘 아쉬웠다"는 그는 "건축학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것들을 다루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건축학 전체를 꿰뚫고, 건축학의 대계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으로 썼다"고 말했다. 반면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은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국민건축교과서'로 쓴 두 권의 책 중 첫 권이다. 퇴임을 앞둔 그를 만난 기자가 그가 마지막 강연과 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했다. 『건축강의』와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도 참고했다.
━ 좋은 건축이 뭐냐고 묻지 마라. 좋은 학교가 무엇인지 질문하라 "좋은 건축이 뭐냐고요? 우리는 이제 이 질문을 바꿨으면 해요. 좋은 건축을 묻지 말고, 질문을 좁혀서 좋은 학교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으면 해요. 그러면 좋은 건축이 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든요. 아이들이 태어나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곳이 학교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합치면 12년이에요. 평균 나이 84세로 계산하면 인생의 1/7을 학교에서 보내는 거죠. 여기에다가 어린이와 십대 청소년의 '감성'을 고려하면 그 시간의 중요성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공간을 지금처럼 내버려 두고 좋은 건축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학교 건축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 학교 건축은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공간을 통해 삶을 보고 이해하는 훈련이 안 돼 있어서 그래요. 공간이라는 게 '내 것'이라는 인식이 부족해요. 공간은 나와 관계없는 것, 남의 것인 줄 알아요. 공간이 왜 좋은지, 무엇이 좋은지 그런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내 집 창문에 이쁜 블라인드나 커튼만 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그 창으로 밖에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아야 하거든요. 지금이라도 학교 교육에서 공간에 대해 배웠으면 합니다. 공간을 통해서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법을요."
━ 한국의 많은 공공건축물은 왜 재미없게 지어졌을까? "치안센터, 주민센터, 경로당, 도서관, 어린이집, 소방서, 경찰서, 학교…. 많은 공공건물이 딱딱하고 재미없게 지어진 게 사실입니다. 공공부문에 투자되는 건축 공사비 연간 20조 원이나 드는데 그 중요성은 간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좋은 공공건축물을 지으려 하기보다는 가장 싼 예산으로 만들려고만 해왔죠. 어떤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부족했고, 공무원들이 국민을 대신한 건축주로서 책임을 방기하거나 외면한 겁니다."
"공공건축물을 짓는 데 몹시 나쁜 제도가 있어요. 전자입찰이라는 겁니다. 가장 설계비를 싸게 제출한 사람에게 작은 공공건축물의 설계는 맡기는 방식이에요. 공공건축물의 80%가 설계안도 받아 보지 않고 가격 경쟁만으로 설계자를 선정하죠. 주민들을 늘 가까이 대하는 작은 공공건축물은 그저 '저비용'에만 초점을 맞춰 지어져 왔죠." "2011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받은 작은 건물이 하나 있어요. 부산 문현동의 '푸른솔 경로당'이에요. 소방도로 개설공사를 하고 남은 구유지의 자투리땅 65㎡에 지은 정말로 작은 경로당입니다. 심사를 위해 제가 직접 현장 방문을 해보니 꽤 높은 산동네였고, 재료도 고만고만한 건물이었어요. 그런데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작은 땅을 어떻게든 살려내려 동분서주했던 공무원의 의지가 없었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을 집이었습니다. 이 조그만 집을 정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건축가의 마음이 보였죠.
"반드시 값비싼 재료를 써서 비례를 잘 맞추고 정교한 시공을 해야만 좋은 건축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지역민들의 생활할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파악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문제를 풍경 속에서 풀어낼 때 그 건물은 아름다워집니다."
━ 건축은 모두의 기쁨이다 " 가장 소중한 건축의 본질이 기쁨인 것 같아요. 기쁨이야말로 건축물을 사용하거나 보는 사람들과 건축가를 이어주는 접점입니다. 저는 건축이 주는 깊이와 매력은 바로 이 기쁨에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에서 기쁨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어요. 지속해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동의 기쁨을 담는 그릇이 건축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의 기쁨은 많은 사람이 나누게 돼 있죠. 어떤 건물에 사는 사람이나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 건물이 조용한 기쁨을 준다면 그 건물은 모두의 건물이 되는 거예요. 만약 '건축은 예술'이라고 말한다면, 그 예술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사회적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 우리는 아파트를 '상품'으로만 보았다 "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는 이제까지 아파트 단지의 계획과 설계에서 한 번도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를 제대로 물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수많은 아파트를 지었으면서도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가질 것인가를 진지하게, 실효성 있게 물어본 예를 찾기 힘듭니다. 전국의 아파트가 똑같은 이유가 있어요. 아파트를 매매용 상품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집=부동산'이라는 인식만 있었던 거에요. "
━ 건축학도여, 관찰하고 해석하라 "카메라를 들고 먼 곳을 찾아가거나 책을 줄 치며 공부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그 전에 주변을 관찰하고 자신의 눈으로 해석해야 해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눈으로 봐야 합니다. 마히가 고등학교를 바꿔놓은 건축가가 그렇게 했듯이 눈으로 봐야 해결책이 보이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대학 1학년 때는 아무리 보려고 해도 잘 안 보일 거에요. 그래도 꾸준히, 20년~30년 해야 합니다."
━ 건축은 감상하는 게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죠 "사진만 보고 '이쁘다, 멋지다'하는 것은 건축 공부가 아닙니다. 건축을 알려면 먼저 몸을 그 안에 둘 줄 알아야 합니다.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거죠. 그래서 내가 몸을 움직이는 범위 안에서 일상생활을 관찰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건축은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종이, 나무, 벽돌, 빛, 콘크리트 등 이런 요소들도 이전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건축은 우리 삶의 전체적인 모습이에요. 궁극적으로 건축을 배우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건축을 통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 '환상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를 있게 한 것은? "많은 사람이 가우디를 '환상의 건축가'로 알고 있습니다.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만들기 이전에 사회가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 건축물은 개인의 환상을 실현해주려고 만든 게 아니라 사회가 그가 그 건축을 만들 수 있게 해줬다는 거죠. 우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지은 건축가는 잘 알면서도 한정된 예산이라는 문제를 뛰어넘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우디의 계획안을 보며 미래를 생각하고, 바로셀로나라는 도시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건축은 짓는 게 아닙니다. 건축은 사회 모두가 자라게 하는 것이에요. "
━ 내가 존경하는 건축가, 루이스 칸 "제가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가 루이스 칸(1901~1974)입니다. 건축의 진실성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죠. 칸은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일, 그게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시설(Institution)'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했죠. 한마디로 현대건축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주택이나 학교, 창고 등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모든 시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본 거죠. 칸은 "정부 시설이건 가정 시설이건 배움의 시설이건 인간의 시설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감각 이상으로 건축가가 전문가로서 할 수 있는 더 큰 일은 없다"고 했어요."
━ 건축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건축이 가르치는 바는 참 많아요. 건축에는 문화, 공학, 예술, 산업, 기술, 환경, 경제, 생활, 여가, 전통, 공동체, 법과 제도, 공공성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요. 어떤 공학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국민의 삶에 관여하고 있지 못하죠. 이 정도라면 건축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할 만합니다. 건축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편리한 집을 짓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건축을 통해 세상을 보기 위해서죠."
앞으로의 계획을 그에게 물었더니 "지금까지 건축학자로서 쌓아온 지식을 30대의 건축가들과 나누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자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진짜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30대 젊은 건축가들이 적잖아요. 고민도 많고 욕심도 많은 30대들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 건축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이제 숨을 고르고 '나무처럼 자라는 건축'을 위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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