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今畵家, 各擅一能, 未能兼工. 金君士能生於東方近時, 自幼治繪事, 無所不能. 至於人物山水仙佛花果禽蟲魚蟹, 皆入妙品, 比之於古人, 殆無可與爲抗者. 尤長於神仙花鳥, 已足鳴一世而傳後代. 尤善於摸寫我東人物風俗. 至若儒士之攻業, 商賈之?市, 行旅閨?, 農夫蠶女, 重房複戶, 荒山野水, 曲盡物態, 形容不爽, 此則古未嘗有也. 凡?者皆從絹素流傳者, 而學習積力, 乃可?. 而創意獨得, 以至巧奪天造. 豈非天賦之異, ?超流俗耶. 古人謂?鷄大難, ?鬼神易. 以其目所易見者, 不可杜撰瞞人也. 世俗莫不驚士能之絶技, 歎今人之莫及. 於是求者日衆, 至於?素堆積, 督索盈門, 至不暇於寢啖焉. 英廟朝圖繪御眞也, 士能被召相役. 又於當?朝, 承命寫御容大稱旨, 特授督郵之任. 歸而治一室, ?掃庭宇, 雜植嘉卉. 軒楹瀟灑, 一塵不起. 牀?之間, 惟古硯精毫佳墨霜絹而已. 乃自號檀園, 要余作記. 余惟檀園, 乃明朝李長?之號也. 君之襲以爲己有者, 其意何在. 不過慕其文士之高朗, 繪事之奇雅而已. 今者士能之爲人, 眉目?秀, 襟懷脫灑, 見者皆可知爲高雅超俗, 非閭巷庸?之倫. 性且喜琴笛雅音, 每當花月之夕, 時弄一兩操以自娛. 卽無論其技藝之直追古人, 風神軒軒霞擧, 可以求於晉宋間高士, 若方之於李長?也, 則已遠過而無不及矣. 顧余老朽, 曾與君爲圃署之同寀. 每有事, 君輒悶其衰而代其勞, 此尤余所不能忘. 近日得君之?者, 輒就余求一二評跋, 以至於大內之屛?卷軸, 亦或有拙字之題後. 君與余雖謂之忘年忘位之交可矣. 余於記檀園不能辭, 亦不暇就園之號而着語, ??君平生以應之. 昔人以醉白堂記, 謂韓白優劣論嘲之. 今此記, 人或不以李金優劣論소我耶. 余與士能交, 前後凡三變焉. 始也士能垂?而遊吾門, 或奬美其能, 或指授畵訣焉. 中焉同居一官, 朝夕相處焉. 末乃共遊藝林, 有知己之感焉. 士能之求吾文. 不於他必於余者, 亦有以也.
고금(古今)의 화가들은 각기 한 가지 능력이 있지만 여러 가지를 함께 잘 그리지는 못한다. 김군(金君) 사능(士能=그의 字)은 우리나라 근세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하여 능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인물(人物) 산수(山水) 선불(仙佛) 화과(花果) 금충(禽蟲) 어해(魚蟹)에 이르기까지 다 묘품(妙品)에 들었다. 옛 사람에 비유하더라도 대적할 자가 없다. 더욱이 신선(神仙)과 화조(花鳥)가 뛰어나니 이미 일세(一世)를 울리고 후대(後代)에 전해짐이 족하리라.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물(人物)과 풍속(風俗)을 모사(模寫)함이 뛰어났다. 유사(儒士)의 공업(功業), 장사하며 저자 거리에 서성이고, 문 앞을 지나가는 행인, 농부와 잠녀(潛女), 나열된 방과 대문의 모습, 황야(荒野)의 산수(山水), 곡진(曲盡)한 물태(物態)와 시원스럽지 못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뛰어난 것들은 옛날에 일찍이 없었다.
무릇 그림은 다 흰 비단에다가 그려서 전하는 것이니 학습이 쌓여진 힘이 있어야 떨칠 수 있다. 창의(創意)는 홀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공교함에 이르려면 하늘의 조화를 얻어야 하니 어찌 하늘이 내린 특수함이 아니리오. 속된 시류를 멀리 초월함이여.
옛 사람이 말하기를 닭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귀신을 그리는 것은 쉽다고 했다.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려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김홍도의 절기(絶技)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고, 오늘날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여 감탄한다. 그래서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이 매일 몰려오니 천과 비단이 쌓이게 되었고 독촉하며 요구하는 사람이 문 앞을 메워 침식(寢食)의 겨를도 없을 지경이다.
영조 때 조정에서 어진을 그리게 되었는데 김홍도가 상역(相役=역할을 주도함)으로 소환되었다. 또 당저조(當?朝)에서 명을 받아 대칭지(大稱旨=이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마 等身大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로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데 특별히 독우(督郵)의 임무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한 방을 잡고 뜰과 집안을 청소하고 아름다운 화훼를 심었다. 난간과 기둥이 소쇄(瀟灑)하니 먼지 한 톨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과 안석 사이에 오직 옛 벼루와 정교한 붓과 좋은 먹과 서릿발처럼 하얀 비단만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스스로를 단원(檀園)이라 부르면서 나에게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단원(檀園)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니 명나라 이장형(李長?)의 아호(雅號)였다. 김군(金君)에게 배여서 이미 정착된 것이니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그 문사의 높고 낭랑함을 사모하고 그림 그리는 일의 기이하고 고아함을 사모함에 불과한 것인가.
지금 김홍도의 위인(爲人)됨은 눈썹과 눈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금회(襟懷)가 탈쇄(脫灑)하여 본 사람들은 고아(高雅)하고 속된 모습을 벗었으니 여항(閭巷)의 용렬(庸劣)한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성품은 또 거문고 피리의 고아한 음을 좋아하여 언제나 꽃피는 달의 밤이 되면 즉시 하나를 양손에 잡고 놀며 스스로 즐겼다. 즉 그 기예(技藝)도 고인(古人)을 곧 바로 따랐음을 논할 필요가 없다. 풍체(風體)가 훤칠하여 노을이 물든 듯, 가히 진나라 송나라 사이의 고사(高士)를 얻은 듯하고 지금 이장형(李長?)이 있는 듯하니 곧 이미 멀리 앞질렀고 미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돌아보니 나는 이미 늙었지만 일찍이 김군(金君)과 함께 사포서(司圃署: 궁중의 채소밭을 관장하던 종6품 직책)의 동료였다.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김군이 문득 내가 쇠약함을 고민해주고 나의 노고를 대신해 주었으니 이에 더욱 내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김군의 그림에 문득 내가 한두 줄 제발(題跋)로 평(評)해 달라고 한 것이 있는데 대내(大內)의 병장(屛帳)과 권축(卷軸)에 이르기까지이나 또한 혹시라도 졸한 글의 제후(題後)도 있을 것이다. 군과 나는 비록 나이를 잊은 사이라고 말하지만 직위를 잊은 사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나도 단원에게 글을 써 달라고 하면 사양하지 않는데 또한 취할 겨를이 없어도 단원의 호(號)를 덧붙여 글을 써 주니 군은 평생을 그렇게 응해주었다.
옛 사람이 취백당의 기(記)에서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의 우열을 논하며 조소(嘲笑)했는데 지금 이 기(記)를 보고는 사람들이 혹여 이장형(李長?)과 김홍도(金弘道)의 우열을 논한다고 나를 꾸짖을 수 있겠다.
나와 김홍도와의 교분에 전후 무릇 세 번 변했다.
처음은 김홍도가 어릴 때 내 문하에 들어왔을 때다. 혹은 그 능력의 빼어남을 장려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법을 지도하였다.
가운데는 같은 관직(사포서)에 함께 생활했을 때다. 조석으로 서로 함께 했다.
마지막은 마침내 예림(藝林)에 함께 생활함이다. 지기(知己)의 느낌이 있다.
김홍도는 내 글을 구하였고 남에게는 구하지 않아 반드시 나에게만 구했으니 또한 감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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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박연폭포
김홍도의 포의풍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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