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리랑
입력 2017.12.08. 11:08 수정 2017.12.08. 11:28
[한겨레21] 1944년 8월 버마에서 촬영된 ‘위안부’의 실제 모습…
전쟁 끝나고 공포 가시자 그들이 화답한 ‘아리랑’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까? 카메라에 포착된 현실은 전체 현실 중 일부만 보여준다. 사진에는 사각(死角)이 존재하며, 어떤 현실은 감춰진 채 해석되지 않는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과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번갈아 집필하는 ‘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 사진을 주제로, 이 사진들이 찍힌 맥락과 사진이 담지 못한 사각을 통해 우리가 살아낸 현대 세계사의 주요 장면들을 소개한다. 이 시기의 전쟁은 여전히 한국의 ‘현재’를 규정하는 만큼, 연재에서 다루는 전쟁 사진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_편집자
빛바랜 흑백사진 속 불안한 눈빛을 한 여성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일부 여성들은 자기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군복 입은 남성들이 천막 밑에 앉은 여성들을 둘러싸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것이 위안부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는 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오래전에 알려진 이 사진은 미군 통신대가 촬영했는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Ⅱ에 소장돼 있다. 이 사진은 조선인 위안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희귀한 사진 가운데 하나다.
고개 숙인 여성, 그 옆의 군인들
사진을 살펴보면, 어떤 이는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어떤 이는 카메라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다른 곳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맨 오른쪽 여성은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인다. 여성들을 둘러싼 왼쪽 남성들은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군인임이 확실하다. 남성들은 사진 찍는 것을 준비한 듯 일제히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동양인으로 보인다. 중국군인가? 우리는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진을 단지 본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찍힌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1941년 12월7일(현지시각)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1942년 5월 버마(지금의 미얀마) 북부 도시 미치나를 점령했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후퇴했던 영국군은 인도를 통해 버마 주둔 일본군에 반격했다. 그러자 1944년 초 버마 방위를 담당하던 제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는 인도의 임팔 지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다. 보급과 병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우격다짐의 ‘임팔 작전’으로 일본군 5만여 명은 제대로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 채 밀림에서 질병과 기아로 죽었다. 일본군의 임팔 작전이 대실패로 끝난 직후, 반격에 나선 미·영·중 연합군의 미치나 탈환 작전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미치나는 인도의 레도, 중국 쿤밍을 연결하는 도로의 가운데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비행장이 있었다. 비행장을 뺏으면 미군 수송기는 무거운 화물을 나를 수 있어 중국의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미군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에 충분한 군사 물자를 보급해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 했다. 미치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버마 북부 작전의 성패를 결정짓는 열쇠였다. 미치나를 손에 넣은 연합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레도 도로와 버마 도로를 연결하려 했다.
3개국 연합군은 1944년 5월부터 버마 미치나를 공격해 석 달 만에 완전히 점령했다. 미치나 공방전에는 미군·영국군·중국군·일본군뿐 아니라 인도군, 버마 카친족 등 다양한 민족이 관여했다. 적의 규모나 희생자 수로 보면, 미치나 작전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인 미 해병대의 타라와 탈환 작전과도 맞먹었다.
‘위안부’ 만났던 유일한 생존자
미치나 점령 뒤 미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포로를 심문해 지휘관, 부대 배치, 인원, 무기, 군인 사기 정도 같은 각종 군사정보를 캐내는 일이었다. 일본인 포로 심문은 ‘니세이’(2세라는 뜻)라고 하는 일본계 미군이 맡았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미군에 들어간 니세이들은 언어와 포로 심문 교육을 받은 뒤,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전선에 배치됐다. 이들은 주로 연합군번역통역부(ATIS)나 전쟁정보부(OWI)에 소속됐다.
1941년 말, 일본군은 새로 점령한 지역들에 위안소를 설치했다.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는 한 달 만에 위안소를 세웠고, 버마 주둔군을 위해서는 조선에서 위안부 800여 명을 데려왔다. 1942년 8월께 버마에 도착한 여성들은 각지로 배치됐다. 미치나에는 교에이·긴수이·바쿠신로·모모야라는 이름의 위안소 4곳이 설치됐다(나중에 긴수이와 바쿠신로는 합쳐졌다). 미치나의 위안부는 거의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여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인 여성은 대개 후방 지역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포로로 잡힌 사람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 20명과 2명의 위안부 관리자(‘마마상’이라 하는데, 이 용어는 아직도 기지촌이나 동남아에서 ‘중간 포주’라는 뜻으로 쓰인다), 조선인 간호원 1명이었다.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나이는 23살이었다. 이들이 조선을 떠날 때를 기준으로 하면 모집 당시 나이는 21살이었다. 31살인 평안남도 출신의 여인을 빼면 조선을 떠날 때 여성들의 평균나이는 20살이었다.
맨 처음 잡힌 간호원은 처음엔 위안부로 여겨졌으나, 이후 조사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야모토 기쿠에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던 김 간호원은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간호부 양성소를 1년 다닌 독신 여성이었다. 그를 심문해 보고서를 쓴 사람은 아쿠네 겐지로라는 이름의 니세이였다. 아쿠네는 니세이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막내뻘이었다. 93살임에도 아직 정정한 모습인 그를 지난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미치나에서 여성들을 만났던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위안부들이 젊어 보였고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으며, 군사정보는 거의 알지 못했다.”
위안부 여성들은 미치나에서 잡힌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1944년 7월31일 밤에 작은 배를 타고 이라와디강을 건너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행이 흩어졌고, 주변을 방황하다 8월10일 영국인 장교가 이끄는 카친족 병사에게 체포됐다. 이들은 미치나로 인도됐고 이곳에서 처음 심문을 받았다.
거짓을 기록한 ‘위안부 보고서’
미치나를 탈환한 뒤, 미군은 최전선의 전쟁터에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니세이 출신의 그랜트 히라바야시 병장은 상관인 원로이 챈에게 이런 내용의 첫 상황보고를 남겼다. “대위님, 당신은 이 상황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약 20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조선인입니다. 포로들이 센터에 있고,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미군이 이때 처음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일본군 포로를 심문해, 미군은 이미 1942년 말부터 남태평양의 격전지인 라바울 등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위안소와 위안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 정보는 연합군 내에서 공유됐다. 하지만 여성들을 만나기 전까지 위안부 문제는 연합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위안부를 본격 심문해 보고서를 작성한 이는 니세이 알렉스 요리치였다. 그는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 보고서 작성에만 20일을 매달렸다”고 한다. 보고서에는 ‘심리전 작전반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 제49호’라는 제목이 붙었고 이후 ‘극비’로 취급됐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군이 특정 부대를 위해 특정한 날을 할당해 위안소를 이용하도록 했다고 쓰여 있다. 일주일 가운데 수요일은 신체검사가 있어 쉴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장교들은 언제든 위안소를 갈 수 있기에 사실상 쉬는 날이 없었다.
일본군은 영화 관람이나 독서 등의 여흥을 즐길 만한 수단을 군인에게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전투식량과 운송수단조차 현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군의 방침이었다. 유일한 유흥은 위안소였다. 그 때문에 ‘위안소는 만원’이었다. 보고서엔 “병사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들은 쉬이 부끄러워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한 위안부에 따르면 “보통의 일본인 병사들은 ‘위안소’에 있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자, 기지 사령부 장교까지 “좀 읽게 해달라”고 난리였다. 만약 인쇄해 발행하면 베스트셀러가 되고, 요리치는 부자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보고서는 주목을 끌었다.
일본 우익은 위안부가 매춘부였다는 증거로 이 보고서를 자주 이용한다. 보고서에는 “위안부는 병사의 편의를 위해 일본 군대에 소속된 매춘부 혹은 ‘직업적인 종군자들’(professional camp followers)이다” “이들은 잘살았으며,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었다” “이들은 무지하고, 유치하며,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다. 일본인의 기준이나 백인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예쁘지 않다. 이들은 자기중심적 경향이 있으며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은 ‘매춘부’(prostitute)라는 단어를 일본군이 관리하는 ‘위안부’(comfort woman)라고 일찌감치부터 판단하고 있었다. 미치나의 위안부 여성들은 일본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리치가 작성한 보고서는 위안부의 직접 육성이 아닌 ‘마마상’의 입을 통해 쓰였다. 그래서 보고서에는 여성들의 처지와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보다 마마상이 제공한 일방적인 정보가 수록되기 쉬웠다.
위안부를 ‘위안’한 중국계 미군
이 글 모두에서 언급한 위안부 사진의 맨 왼쪽에 있는 군인은 원로이 챈이라는 중국계 미군이다. 챈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에 입대해 장교로 버마 전선에 투입됐다. 그는 전역 뒤 버마 전투를 다룬 <버마-비화>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다섯 쪽에 걸쳐 버마 미치나에서 위안부를 만난 일을 상세히 서술했다. 회고록은 1986년에 나왔는데, 이때는 위안부 문제가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챈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선 위안부 소녀들에 대한 그 어떤 공식 기록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제국 일본군이 이 불행한 젊은 여성들을 얼마나 많이 위안부로 강요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20만 명 넘게 추산된다. 대부분 조선 농민들(자작농과 소작농)의 딸들- 일부는 도시 빈민가에서 왔거나 일부는 이전부터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해왔을지라도- 이 1935년과 1945년 사이에 헌병대에 모집됐고 중국, 버마, 괌, 말레이,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사실은 일본군이 배치됐던 광대한 태평양 전구 어디로든 보내졌다.”
니세이를 비롯한 여러 미군은 미치나에서 발견된 위안부를 여러 차례 심문했고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원로이 챈처럼 위안부의 처지를 깊이 이해한 미군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위안부들도 더 편안해졌고, 처음에 느꼈던 공포도 줄어들었다. 위안부가 인도로 이송되기 전, 챈은 마지막 이별 파티를 했다. 그는 이 자리를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떠난 조선인 위안부를 ‘위안’하는 우리들의 차례(turn)라고 표현했다. 챈과 동료들은 기타를 치면서 미국 노래와 하와이, 일본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이에 화답해 위안부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챈은 “연합군 언론이 센세이션한 보도로 위안부를 크게 만들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깊은 슬픔만을 느꼈을 뿐”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다른 보고서 작성자들과 달리, 챈이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남달랐고 따뜻했다.
1944년 위안부를 심문한 이들은 일본계 미군, 중국계 미군, 본토 미군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군이었지만, 위안부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자신의 출신과 처지 그리고 인종, 성별에 따라 미묘하게 해석이 달라졌다. 어떤 사람은 군사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위안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어떤 사람은 전선에서 여성을 발견했다는 호기심이 컸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완성되지 못한 위안부 사진
버마 미치나의 위안부 사진들은 모든 사실을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조선인 위안부는 자신이 하고픈 말을 심문 군인들에게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마상이라는 중간 통역을 거쳐야만 했다. 사진에서조차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고, 문서에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미치나의 위안부 사진은 완성되지 못한 채, 더 많은 해석과 해설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진은 1944년 8월13일 버마 미치나에서 찍은 미군 4명과 위안부 20명의 모습을 담았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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