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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넘쳐난 신숙주, 단종의 비를 달라고 했다?

淸潭 2017. 2. 10. 11:41

매일경제신문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5]

"좌의정 신숙주가 노산군(단종)의 부인(정순왕후)을 노비로 달라고 주청했으나 세조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논하여 말하노니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를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은 영원히 남을 큰 죄악이다. 그러나 신숙주가 단종의 비를 달라고 청한 것은 간악한 것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것이다. 비록 신숙주의 후손이 후대에 걸쳐 창성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악명이 천지와 함께 존속되어서 큰 강과 바다로도 씻을 수 없으니 '음란한 자에게 화를 준다'는 천도(天道)의 진리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조선 말기 사관(史官)을 지낸 김택영(1850~1927)이 1918년 쓴 '한사경' 1권의 내용이다. 조선 건국에서 한일합병까지 조선시대 역사를 순한문체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대동기년, 연려실기술, 국조인물고, 당의통략, 산남징신록, 기년인물고 등 당대 문헌을 참고했지만 평가에 있어서는 자신의 독자적 시각을 반영했다. 전체 6권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건국을 찬탈에 의한 역성혁명으로 규정했으며 군주의 실정과 부도덕성을 신랄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출판 이후 유림들로부터 사적(史賊)으로 매도됐다.

 정순왕후(1440~1521)는 미인이었다. 신숙주는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이끌려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단종 부인을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런 요구를 묵살했다. 어린 조카를 죽인 비정한 세조였지만 차마 조카며느리까지 남의 첩으로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로도 안심이 안 됐던지 앞으로 정순왕후가 정업원(남편을 잃은 후궁이 거처하는 사찰)에서 살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그녀는 증손자뻘인 중종 18년 8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는 남편 묘가 있는 강원도 영월(장릉)이 아닌 경기도 남양주(사릉)에 묻혔다.

 책은 세조가 조카를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형수(문종비 현덕왕후)의 무덤(소릉)을 파헤쳤다고 썼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택영은 "혹자는 왕(세조)이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꾸짖는 꿈을 꾸고 나서 세자(의경세자)가 죽자 현덕왕후의 무덤을 훼손했다고 했다"고 기술했다.

 성군인 세종대왕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세종은 인자할 뿐만 아니라 용기와 지략이 높았다. 하지만 (태종이 시행한) 서얼금지법을 풀지 못했고 군포법을 부활시킬 수도 없었다. 문무를 함께 양성하고 농상(農商)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지금 세종이 남긴 업적은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빈유(貧儒)를 편안히 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것은 고루하고 고식적인 황희와 허조 같은 무리들이 잘못한 까닭이다"라고 탄식했다. 김택영은 또 이들 두명에 대해 "이들은 혁혁한 사업이 없고 옛 제도만 삼가 지켰을 뿐"이라고 폄훼했다.

 숙종 치세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호시절로 통한다. 김택영은 숙종도 못마땅해 했다. 숙종은 다양한 학문 발전을 가로막은 사문난적(斯文亂賊·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으로 성리학의 질서와 학문을 어지럽히는 도적)의 금법을 만든 장본인이다. 김택영은 "조선은 인재가 매우 적게 태어난다. 숙종이 사문난적 금법을 시행한 이래 학문적으로 크게 퇴보했기 때문이다. 일마다 중국을 배웠지만 일마다 반드시 중국보다 심했다. 주자의 성리에 관해 들으면 다른 사상가는 다 폐하였고 주자도 혹 틀린 것이 있고 다른 사상가들도 혹 옮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녀의 수절에 관한 말을 들으면 가혹하게 개가를 금지하였고 귀천에 관한 말을 들으면 크게 벌열(閥閱·파워엘리트)을 숭상했다. 진실로 견문이 협소하고 비루하다"고 개탄했다.

 영조는 즉위 초기 일어난 소론의 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뒤 핵심 가담자만 처벌했을 뿐 다른 피고발자들은 죄를 묻지 않았다. 이를 두고 김택영은 선조·인조와 비교하면서 왕이 진실로 도량이 크고 넓다고 칭찬하며 "조선의 역대 조정에서 뛰어난 임금을 논한다면 영조는 태조와 세종을 이어 세 번째가 될 만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 만년에 소인배들에게 속아서 아들을 죽인 대악에 빠진 탓에 온전히 아름답다고 하지 못하는 점이 애석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역대 선현으로 칭송받던 사림도 매도했다. 정암 조광조는 학문과 경륜이 짧아 급진적이고 타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서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학문을 좋아했지만 기(氣)는 편벽되고 수양이 낮았는데도 사람들이 지나치게 추존했다고 했다.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한 서인 노론이 조선을 망쳤다는 인식을 이미 그는 100년 전 하고 있었다. "영조 때부터 노론이 국가의 골육이 됐고 정조 이후로는 왕실이 단지 노론과 혼인을 맺었다. 노론이 이를 전후해 국가의 운명을 잡은 것이 200년이었다"고 했다.

 책에는 신숙주가 단종비를 달라고 세조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은 기존 역사서에서 찾기 힘든 내용도 다수 실려 있다. 연산군의 사망 원인을 책은 실록과 다르게 기술한다. 실록은 연산군이 중종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뒤 강화도 교동에 안치돼 있다가 두 달 만에 역병(疫病)에 걸려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한사경에는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연산군을 협박해 자살하게 하고 왕자의 예로서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후환을 뿌리 뽑기 위해 반정의 주모자들이 연산군을 제거했다고 책을 말하고 있다.

 연산군 시절 대규모 옥사를 만들어 많은 선비들을 죽인 유자광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과정도 자못 흥미롭다. 전 이조판서 성희안이 장군 박원종, 이조판서 류순정과 함께 거사를 꾸미면서 사전에 이런 사실을 유자광에게도 알린다. 모사꾼으로 알려져온 유자광이 반정 사실을 폭로했다면 조정에 또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뻔했다. 그러나 유자광은 반정에 적극 참여해 거사 당일 군대를 이끌고 연희궁에 머물고 있던 연산군을 포위해 거사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반정군을 총괄 지휘했던 박원종은 중종 4년(1509) 영의정에 오른다.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박원종을 어려워했다. 박원종이 일을 아뢸 때마다 왕은 선 채로 보고를 받았으며 그가 보고를 마치고 전에서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 앉았다. 박원종은 이에 "내가 일개 무부(武夫)로서 이와 같이 왕을 두렵게 만드니 고이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정에서 물러나 음악과 여색으로 여생을 보냈다.


청나라 최고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고종·재위 1735~1795)가 재위 시절 조선을 영구히 멸망시키는 계획이 진행됐던 사실을 책은 전한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에다 한나라 4군의 고사처럼 군현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조선은 기자의 후예이니 예전의 관례대로 제후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 같은 계획은 철회됐다.

▶김택영(1850~1927)=이건창(李建昌), 황현(黃玹)과 함께 한말 3대 문장가로 이름나 있다. 개성에서 출생했으며 42세(1891)에 진사가 됐고 고려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개성 중심의 충신, 열사, 문사 등 인물의 시와 글 370편을 모은 '숭양기구전'을 펴낸 것을 계기로 45세이던 1894년 총리대신 김홍집에게 편사국(조선말 설치한 역사 편찬을 맡아보던 관청) 주임으로 발탁돼 벼슬길에 올랐다. 46세에는 중추원 서기관을 지내면서 사관으로서 업적과 재능을 독보적으로 공인받았다. 54세(1903) 때 '증보문헌비고'를 편찬하고 정3품 통정대부에 임명됐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한사경' 등 국권 회복과 민족혼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다양한 역사서를 집필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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