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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해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

淸潭 2016. 12. 23. 11:0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慶尙道)청도군(淸道郡)편에서

 

[고려시대 인물] 김지대(金之岱) 처음 이름은 충룡이었다.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때 강동(江東) 싸움에 아버지가 군대에 참여하게 되자 지대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갔다. 전사(戰士)들이 방패 머리에 모두 기이한 짐승을 그렸는데, 지대는 홀로 한 절구(絶句)를 쓰기를,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어버이를 대신하여 보국(報國)하면 충과 효를 다 닦을 수 있네.”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군사를 점열하다가 보고 놀라서 그 까닭을 묻고, 그 사람됨을 알아서 일을 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규례에 따라 전주 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드센 자를 누르고 외로운 자를 돌보아주며, 귀신같이 일을 적발하였다. 뒤에 전라도를 안찰(按察)하러 나가서는 최항(崔沆)이 보낸 중 통지(僧通知)를 강 속에 빠뜨려 죽였다. 최항이 아버지를 이어 정권을 잡자 비록 전의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삼가서 허물이 적었기 때문에 해칠 수 없었다. 지위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조선시대; 효자]

김극일(金克一)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를 위해 종기를 빨고 아버지를 위해 설사를 맛보았다. 전후로 여묘살이 6년을 했는데, 한 호랑이가 무덤 곁에서 새끼를 젖먹이니, 극일이 제사지내고 남은 것을 먹이기를 가축을 기르듯이 하였다. 아버지에게 천첩(賤妾)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와 같이 섬겼고, 그들이 죽자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천순(天順) 갑신년에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문하였다.

김극일(金克一) 본관은 김해이며, 벼슬은 지평인데, 집의를 추증하였으며, 사시(私諡)는 절효(節孝)이다.

 

이관명(李官明) 그 어머니가 밤에 범에게 물려 가는데,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천지가 칠흑같이 어두워 이웃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 나오지 않으니, 관명이 13살인 누이 연가(延加)9살인 조카딸이 있는데, 혼자서 이 두 아이와 함께 범을 쫓아갔다. 오른손에 도끼를 잡고 왼손에 횃불을 잡고서 5, 6리쯤 가서 불이 꺼지자, 솔가지를 따서 횃불을 만들어 다시 1, 2리를 쫓아가서 범을 꾸짖고 어머니의 시체를 빼앗아 돌아오니, 동네 사람들이 슬퍼하고, 관을 만들어서 장사 지냈다.

 

박윤손(朴閏孫) 수군(水軍) 박동(朴同)의 아들이다. 17살에 어머니가 빨래하는데 따라갔다가 범이 어머니를 물어 가자, 윤손이 왼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돌을 던지며 5리 남짓 쫓아갔다. 이웃 사람들이 듣고 와서 구하자, 범이 드디어 버리고 갔는데, 그 어머니는 한밤중에 이르러 죽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旌閭= 효자. 열녀등을 표창하는 일)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종비(從非)는 군리(郡吏) 김군산(金郡山)의 아내이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죽어서는 상을 마치자 영당(影堂)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제사 지내기를 살아 있을 때에 섬기듯이 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旌閭)하였다.

 

현명한 처녀

 

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얻기 위해 나라 곳곳에 방을 붙였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규수를 일일이 심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마지막 후보로 열 명의 처녀를 발탁했습니다.

 

왕은 열 명의 처녀에게 소량의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왕이 나눠준 쌀의 양은 성인이 아무리 아껴먹어도 부족한 양이었기에 모두 놀랐습니다.

 

어떤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죽을 쑤어 먹었고, 또 어떤 처녀는 열 등분 하여 조금씩 조금씩 한 달 동안 아껴 먹었습니다.

한 달의 지나고 처녀들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들 비실비실하였고, 어떤 처녀는 쓰러져서 업혀 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처녀는 얼굴이 아주 환하고 통통해졌을 뿐 아니라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전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왕이 그 처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적은 쌀로 한 달 동안 먹고, 또 떡까지 해서 왔느냐?”

 

그러자 처녀는 왕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쌀로 떡을 만들어서 장터에 가서 장사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해서 저도 먹고 집안사람들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쌀이 가지고 임금님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