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野談,傳說,說話,등

우산보의 아이 울음소리

淸潭 2016. 12. 22. 10:33

우산보의 아이 울음소리

순천설화 / 설화


예로부터 순천 상사면 흘산마을은 풍족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한 곳이었다. 이곳은 맨 처음 양천 허씨들이 터를 잡은 곳으로 이사천을 끼고 있어서 물이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농사짓는데도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해 가뭄이 들더니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거듭 가뭄이 계속 되었다. 물이 좋다던 이사천도 말라버려 농사지을 물이 부족한 지경이었다. 어쩌다 비가 와도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 농사짓기에는 쓸모가 없었다.


평화롭던 마을 분위기도 이내 흉흉해졌다. 몰래 남의 식량을 훔쳐가는 일도 잦아졌고 이로 인하여 다툼도 많아졌다. 어린 아이들조차 뒷산에 가서 이것저것 캐 먹는 바람에 이름 모를 피부병에 걸리는 아이들도 생겼고, 독초를 먹었는지 탈이 나서 죽어가는 이들도 생겨났다.


“상석아, 우산이 못 봤니?” 어머니께서 부르는 소리에 상석이 달려왔다. “아니, 또 우산이가 안 보여요?”


그랬다. 네 살 밖에 안 된 우산이는 걸음걸이도 신통치 않은데 종종 보이질 않아 가족들이 애를 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난 해부터 가뭄에 흉년이 겹쳐 우산이는 네 살이 되도록 무엇 하나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태어난 직후에도 엄마 젖이 나오질 않아 젖도 제대로 먹질 못하였다.


그런 우산이가 불쌍했는지 가족 모두가 우산이를 끔찍이도 아꼈다. 특히 열 살 난 큰 오빠 상석이는 여동생 우산이를 업고 다닐 정도로 가장 정이 많았다. 사실 가족이 아닌 남이 보기에도 우산이는 불쌍해보였다. 네 살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키도 작은데다 비쩍 말랐고 심지어 걸음걸이조차 비척거릴 정도였다.


한참을 동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상석이가 마을 어귀에서 우산이를 발견하였다. 마을 입구에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앉아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천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가까이 가서 우산이 옆에 앉아 우산이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니 이사천에서 동네 어른들이 모여 일하는 모습이었다.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 보를 쌓기로 하고 해마다 돌로 보를 쌓았다. 그런데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힘들게 돌로 보를 쌓았는데 쌓을 때마다 보가 자꾸 허물어지곤 하였다.


지난해에도 서너 차례 보를 쌓았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한 번은 겨우 완성되었는가 싶었는데 큰 물이 오자 한꺼번에 흔적도 없이 쓸고 가 버렸다. 올해도 벌써 세 번째다. 아예 농삿일은 뒷전이고 보 쌓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가 또 무너져내렸다.


보가 무너지면 그날 마을 어른들은 죄다 술에 취해 탄식을 늘어놓곤 하였다. 이러다가 마을 사람 모두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오늘도 또 술독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술만 취하면 어른들의 눈빛이 무서워보였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것이다.


상석이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스님이 두 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장탄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쯧쯧쯧, 장차 이를 어찌할꼬. 마을 사람들을 살리자니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찌할꼬.”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 상석이가 본능적으로 우산이를 끌어안았다.


스님이 지나가면서 또 돌아보며 탄식을 한다. 그때 축 늘어진 어깨로 마을 어른들이 마을 어귀로 다가왔다. 불안에 떨고 있는 남매를 본 아버지가 황급히 달려와 물었다.


“상석아, 무슨 일이니? 우산이가 무슨 일 있어?”


상석이가 말문을 열자 이내 가까이 다가온 마을 어른들도 귀를 기울인다. 상석이가 스님 이야기를 전하자 마을 어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상석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멀리 스님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마을 어른 몇이 뛰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마을 어른들은 무슨 말을 하더냐고 캐물어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그날은 유독 분위기가 흉흉하였다.


“도대체 아까 그 스님이 뭐라 그랬던 거야?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말을!”


멱살을 잡히면서도 말을 하지 않자 술판은 이내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한참을 치고받고 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래, 어쩌란 말이야! 말을 하면? 말을 하면 뭐가 될 것 같아?”


스님을 만나고 온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버럭 화를 내며 말을 하였다. 누가 들어라 하는 것 같지도 않게, 그렇다고 혼잣말도 아닌 그런 말투였다.


“어린 아이를 넣으래... 그래야 된데... 보가 무너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야... 그것도... 우산이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의 말을 듣던 마을 사람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별안간 우산이 아버지가 몸을 날려 그의 멱살을 잡더니 다짜고짜 휘갈겼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이 나쁜 놈의... 이... 이...”


우산이 아버지 역시 말을 제대로 못하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들 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우산이 아버지는 더 그래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산이 아버지가 아내를 불렀다. 말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우산이 아버지의 눈물샘은 마르질 않았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가뭄이 들었는지 우산이 아버지 눈물샘이 말라버렸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퀭한 눈으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우산이 어머니가 버럭 화를 내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또 며칠이 지났다. 마을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우산이를 물속에 넣고 보를 쌓아야 보가 완성되고, 그렇지 않으면 마을에 화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는 스님의 이야기가 계속 귓전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상석이도 이내 눈치를 채게 되었다. 그날부터 상석이는 우산이를 꼭 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잘 때도 곁에서 잤다. 아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자고 있을 때 꼭 누군가가 우산이를 데려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상석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던 상석이는 환한 햇빛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깜짝 놀라 곁을 보니 우산이가 없었다.


“우산아!”


목이 터져라 우산이를 불러대며 마을 어귀로 뛰쳐나갔다. 그러다 상석이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더니 마치 장승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하였다.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마을 어른들의 축 쳐진 어깨에서 이미 상석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마을 앞 이사천으로 뛰어간 상석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잘 쌓여진 보였다.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우산이를 불러대는 상석이를 그의 부모가 가로막았다. 상석이의 글썽이는 눈에 보이는 엄마 아빠의 눈은 이사천처럼 깊어보였다.


보가 완성된 후에는 마을에 풍년이 계속되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보를 우산보라 불렀다. 죽은 우산이를 기리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어쩌다 가뭄이 들 때면 우산보 근처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우산이를 봤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럴 때마다 우산이 부모는 물론 상석이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상석이는 우산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우산이도 우산이지만 우산이 가족이 불쌍하여 우산이 넋을 기리는 제를 지내기로 하였다. 한 바탕 우산이 넋을 기리는 제를 지낸 날 밤 상석이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꿈에 자라가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우산이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우산이는 상석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오빠, 사실 저는 이사천 용왕의 딸이에요. 이사천 물이 계속 말라 용궁이 위기에 처하자 막내인 저를 흘산마을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저를 돌아오게 하려고 우산이를 희생시켜 보를 완성케 한 거랍니다. 그러니 오빠, 너무 슬퍼마세요. 언제나 오빠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 후로 우산보 근처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없었고, 마을에는 풍년이 계속되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