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빈 바랑

선과 악의 차이는

淸潭 2016. 12. 14. 09:47

선과 악의 차이는

 

 

 

선과 악의 차이는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타락과 진보라는 기준에서의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과거 생에 만든 상념이 다가왔을 때 그것과 직면 또 다른 상념을 만들어 내느냐

아니면 그것을 해체시키고 다신 만들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어떤 사람의 무리 속에 있든 과거생에 만든 상념체와 만나는 것은 똑 같다.

 

 

그러나 악의 길에 서 있다 함은 무의식적으로 상념체와 만나게 되고

그에 따라 또 다른 염체를 창조 한다는 것이다.

 

 

선의 길에 있다 함은 인과 응보의 법칙을 이해하고 과거에 만든 자신의 찌꺼기들과의 만남을

깨닫는 것을 이해하여 그것을 한 점까지 완전히 녹여 내지 않고는 완전한 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하나하나 녹이는 사람은 선의 길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또는 종교적 교리를 실천함과는 상관 없이

그가 무의식적인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의식적인 깨여 있음을 통하여 염체를 녹여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종교인이라 하여 선의 길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인의 옷을 걸치고 있을 수는 있으나 각성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어떤 마당에 있건 간에 무의식적 삶을 살고 있다면

사망의 마당에 있는 것이요 각성의 마당에서 살고 있다면 생명의 마당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결정해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군중의 것이 될 수 없고 개인 한 사람의 것이다.

 

 

 

 

 

 

상념체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가?

이는 중첩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

 

 

 

현실과 꿈은 하나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꿈은 에너지고 좀더 정밀하며  좀더 활동적이라는 것과

현실은 에너지가 좀더 농밀하며 좀더 비활동적이라는 차이이다.

 

 

 

현실보다는 꿈이 더욱 진실 되고

보편적으로 다가선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꿈의 세계에 다가갈수록

본질을 파악하기 쉽고

현실이 꿈과 같아 질 때

그 사람의 진화 정도가 나아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차이(꿈과 현실간에)가 줄어든다는 것은

현실적 삶을 더욱 깨치고 각성하고  파악했음을 나타낸다.

 

 

 

현실과 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람은

현실적 삶을 파악하는데 각성함이 보족하거나

또는 왜곡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증거이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은 시간

삶을 그리고 진실을 볼 수 있기 까지

삶의 현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각성. 깨쳐 간다 함은

자신의 참 된 영혼의 첫째 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발견하고 알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삶 속에서의 생활이 꿈 속에??/span>

그대로 꾸어지거나

또는 꿈 속에서 본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사람은

보다 꿈과 현실의 거리를 좁힌 사람이 되며

꿈 속에서

자신이 꾸는 꿈을 의식하거나

그 꿈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꿈의 지배자가 된다.

 

이 말은

환영, 꿈, 현실 등의 현장에서

자신의 본질을 얼마 만큼 파악해 내느냐

여기에 포커스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어떤 목적 자체에만 도취되어 있다 보면

자아상실적 상태에서 사는 것이 되고

결국 자멸감에 빠져 번뇌와 갈등 속에서 살게  된다.

 

 

 

번뇌 갈등 혼돈이란

상위차원의 빛(지혜)이 모자라는 데서 오는 마음의 상태이다.

 

 

 

목적과 과정 중 어떤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하느냐 하면

과정에 비중을 둘 때

거기 깨달음의 열쇠가 있다.

 

 

 

이렇게 될 때

그 과정은 순간순간

깨달음의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에 집착하다 보면

욕망을 향한 대상만이(그 대상이 현실의 것이든 비 현실의 것이든)

중요하게 되고

그것을 간파하는 힘이 약해지게 되어

상념을 녹여 낼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해탈, 천국, 영적 보상, 수행의 결과 등과 같은

목적 보다는 과정을 얼마 만큼 중요하게 집중하면서

간파할 수 있느냐 즉 현실에서 다가온

순간의 상황들을

얼마 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룰 수 있느냐에 따라

상념체의 실상을 파악하고 녹여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깨여 있음이여

그것이 각성이며

그것이 존재함이다.

 

 

 

업과 습의 차이

 

 

염체를 쉽게 해체시킬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주 거대한 힘을 가진 염체도 있는데

이는 과거 수없이 반복하여 습이 된 염체이다.

 

 

 

업이란

하나의 씨앗과 같은 것으로

쉽게 해체가 가능하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어

커다란 상념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습이다.

그러한 습은

한 번에 해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고 악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 욕망에 따라 계속 반복적인 행위를 하게되면

상념체의 크기와 힘을 계속 증가하게 되며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마귀가 되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안에 있는 염체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며

그것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고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염체를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은

산이나 동굴속에서 보다는

현실 속에서가 더 유리하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이러한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염체는 형체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럴 경우 즉 잠복해 있던 염체가 다가올 때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소

영적 역량을 길어놓는 것(鍊)

또는 공력(功力)을 길러놓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깊은 심층의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또 가장 크고 힘 있는 상념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작은 잎사귀만 ?터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밑 바닥의 문제를 꺼내어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요

해탈로 가는 길이다.

 

 

 

이렇게 가장 밑 바닥의 카르마를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그 만큼 밝은 빛이 필요한 것인데

빛 즉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화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열쇠가 되며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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