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갈내(早渴川)
창원시 의안동(義安洞)에서 상북동(上北洞)으로 가는 길목에 "조갈내"라는 조그마한 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 사화동(沙火洞)박씨 문중(門中)에 우곡선생(愚谷先生)이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선생이 젊었을 때 윗 명곡(上明谷)마을의 서재 낙성연(落成宴)에 고을의 사우(社友)들과 초대되어 갔다. 모든 사람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홀로 우곡선생(愚谷先生)만이 수저를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훈장(訓長)이 그 이유를 물으니 병석에 누워 있는 노모(老母)걱정으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감동(感動)한 훈장이 그의 효성을 크게 칭찬하고 연회가 끝난 후에 집에 가져갈 음식을 따로 마련해 두었음을 말하자 그제서야 선생은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때는 여름철인지라 선생이 노모에게 드릴 음식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 넘쳐서 건널 수가 없었다. 선생인 탄식하며 하늘을 우러러 “하늘이 나의 불효(不孝)를 꾸짖어 죄(罪)를 준다.”하며 애통해 하시고 글을 써서 물에 띄우니 물결이 갈라지며 징검다리가 나타나 선생이 무사히 내를 건넜다 한다.
그 후로 냇물이 갈라졌다 하여 이 내를 조갈내(早渴川)라 하였는데 지금도 비가 와서 홍수(洪水)가 날 지경이라도 이 조갈내는 한 나절만 날이 좋으면 징검다리가 보여 내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부자상호비(父子相互碑)
조선시대(朝鮮時代) 순종(純宗)때 지금의 창원 시지귀동(知歸洞)사람이었던 김우진(金禹振)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별세(別世)하자 생전(生前)에 어머니 봉양(奉養)이 정성이 부족하였음을 스스로 탄식하면서 평소에 고기반찬을 자주 해 드리지 못한 점을 깊이 뉘우쳐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며, 또한 이에 감동하였음인지 그 집에 기르던 개도 고기 뼈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별세한 후 삼년 동안 비바람을 무릅쓰고 무덤 옆에 막(幕)을 지어 묘(墓)를 돌보는 일에 충실하였는데, 어느 때인가 사나운 폭풍우가 불어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야간에 시묘(侍墓)하려고 나갔다가 바람은 잠잠하였으나 비가 오는 어두운 밤인지라 그만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앞에 불빛이 나타나 길을 밝혀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효자(孝子)의 지성(至誠)에 감천(感天)하여 귀화(鬼火)로써 신이 가호(加號)하였다는 것이다.
뒤에 김우진(金禹振)이 나이가 많아 목병으로 신음하게 되자 아버지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했던 그의 아들 김창용(金昌溶)은 목병에는 뱀의 알이 양약이라는 말을 듣고는 이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으나 때마침 겨울철이라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피로에 지쳐 잠시 언덕에서 쉬고 있는데 까치가 요란하게 짖으므로 그곳에 가 보았더니 뱀의 알이 있더라는 것이다.
또한 김우진이 죽은 뒤에 묘지(墓地) 이장(移葬)을 하려고 밤중에 작업을 하였더니 우연히 불빛이 이 일대를 비춰 주더라고 하며 이장(移葬)을 마치자 불빛도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뒷날 사람들이 이 부자(父子)의 효성을 추모(追慕)하여 이곳에 “부자상호비(父子相互碑)”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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