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등극한 배경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 때 황희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때문일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 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4대왕
세종이다. |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야사에의 실록 기록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굴 뜰에 새덫 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 세종의 업적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 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 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 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 을 이루어냈다. 이와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흘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 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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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산김씨 전북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 孤巖/準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