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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몰락

淸潭 2016. 8. 17. 10:10

고려의 몰락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 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이후 이성계일파는 조민수가 세운 아홉살의 창을 폐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웠으며 또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라로 방출되었으며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 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실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그 시작과 끝


처음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 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 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 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