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가 낳은 죄, 알고 지은 죄보다 가벼울까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 김재혁 옮김 / 시공사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읽어보셨나요? 영화로도 제작되어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과 서른여섯 살 난 여자 한나와의 진한 애정으로 시작합니다. 외로움에 찌든 여자가 아직은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청소년을 욕정의 대상으로 삼아 맘껏 농락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소년이 책 읽어주던 한나
7년 만에 법정에서 재회
유대인 여성들 죽음 이끈 죄로
법관된 소년 앞에 죄인으로 서
문맹 숨기고자 애쓰다 종신형
수감 중 글자 배워 죄 무게 자각
가석방 다음날 스스로 목숨 끊어
학교를 다니는 미하엘과 전차 차장인 한나의 데이트는 거의 매일 이뤄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미하엘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게 되었습니다. 어서 빨리 그녀와 침대로 가고 싶지만 한나는 먼저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미하엘은 한나의 현재 직업만 알고 있을 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고향은 어디고,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춥니다. 미하엘에게는 단 한 마디 인사도 남기지 않았지요. 미하엘은 사실 나이 많은 한나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던 터라 자연스레 그녀를 잊었습니다. 문득 문득 한나의 아파트에서 그녀의 몸을 탐하며 만끽했던 안락과 열정이 사무치게 그립기도 했지만 미하엘은 아직은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장난치고 숙제를 하면서 자라나야 할 나이였던 겁니다.
소설은 이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세월은 흘러 7년 뒤에 미하엘은 법과대학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전범 앞잡이들을 심판하는 법정에서 피고인 한나를 만납니다. 피고인들 이름이 하나씩 불리는 가운데 미하엘의 정신이 번쩍 들 이름이 나온 것이지요.
“한나 슈미츠!”
오래 전 소년의 가슴에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고 홀연히 사라졌던 그 한나가 맞습니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 나치의 앞잡이로서 미하엘 앞에 선 것입니다. 한나는 엄청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유대인 여성들을 선별해서 가스실로 보냈고, 유대 여성들을 가둔 교회가 폭격으로 불이 났을 때 밖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의 여성들을 고스란히 불에 타 죽게 한 혐의입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
초라한 아파트에서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 한나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그녀 자신의 과거에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반인륜적인 범죄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수용소 경비원으로 있으면서 똑똑해 뵈는 소녀들을 가려내서 자신을 위해 책을 읽게 하는 일까지도 했습니다.
재판은 교회 폭격 당시 수백 명을 죽게 만든 혐의에 무게가 놓여졌습니다. 열쇠로 문을 열어주기만 했으면 대부분의 여성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나와 그녀의 동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나와 함께 법정에 선 여성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적극적으로 항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좀 달랐습니다. 왜 나치 친위대에서 일했느냐는 처음의 질문부터 자신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했습니다. 한나의 엉거주춤한 답변으로 인해 법정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피고석에 있던 동료들은 일제히 한나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국 폭격 당시에 관한 보고서 작성도 한나의 행위라고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부인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극구 부인하는 한나를 지켜보던 재판관은 필적 감정사를 부르기로 합니다. 이때 한나가 말합니다.
“전문가까지 부를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이후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한나는 끝내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같은 혐의로 피소되었던 다른 사람들은 한결 가벼운 형을 받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정말 그 보고서를 썼을까요?
법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한나를 위해 책을 읽어준 미하엘입니다. 그녀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한나는 무척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테지요. 그래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을 테고, 어찌 되었거나 먹고는 살아야했기에 독일 지멘스사에 경비원으로 취직을 했고, 거기에서 진급 시험이 있자 나치 친위대 경비원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지요. 시험을 보려면 글을 알아야 하는데 문맹인 그녀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문맹이란 걸 떠벌일 일도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나치의 앞잡이로 일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수시로 이사를 하며 지냈고, 전차의 차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어린 미하엘을 만났던 것입니다. 홀연히 모습을 감춘 것은 차장으로 일하다가 운전수로 진급을 앞두었을 때, 역시 자신의 무지가 들통 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그녀는 늘 동경했습니다. 지식, 문학, 예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동경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글을 모르던 그녀에게 마련된 일자리는 나치 친위대의 앞잡이 노릇이었습니다. 무지한 한나가 자신의 일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저 일이 있어서 좋았고, 봉급을 받으니 좋았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며 유대 여성들을 겁주고 통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결국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쓴 한나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길고도 외로운 수형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한나에게 미하엘은 <오딧세이아>를 비롯한 좋은 책들을 낭송해서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보내주었습니다. 한나는 어린 연인 미하엘의 낭독 테이프를 들으면서 글자를 터득했고, 그리고 마침내 글씨를 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자 한나는 스스로 책을 선택해서 구해 읽었습니다. 그녀가 읽은 책들은 대체로 나치의 잔학한 행위에서 살아남은 유대작가들의 책이나 혹은 전범재판과 관련한 제법 묵직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해온 덕분인지 그녀는 가석방 신분이 되었는데, 하지만 풀려나는 날 새벽에 목을 맵니다. 소설은 미하엘이 한나의 유언대로 그녀의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모아서 피해자 여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한나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읽어가던 나는 책갈피 속에 비어져 나오는 그 인생이 안타까워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한나는 법정에서 “왜 나치 친위대에서 일했느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문맹이 들통 나면 직장에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할뿐더러, 설마 나치 친위대에서 했던 일이 그렇게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나입니다.
자신은 그저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교회 폭격이 벌어지자 그때까지 그녀 위에 군림하면서 지시를 내리던 자들은 모조리 도망갔고, 자신은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글을 몰랐어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건만 세상은 한나 편이 아닙니다. 해야만 하는 일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뭔 줄은 알아야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글자를 깨친 한나가 구해서 읽은 책들이 나치 행위와 관련된 책이었다는 소설 속 대목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한나는 그제야 알았던 것입니다. 문맹인 자신, 무지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요,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고 항변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 행위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무지가 어떤 패륜을 불러 들였는지를 깨닫는 순간 한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책에는 쓰여 있습니다. 모르고 지내는 게 속편하고 좋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강물에 발을 적신 이상 우리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인간은 너나없이 그 시대의 무게를 똑같이 나눠진 구성원입니다. 현명한 자도 무지한 자도 역사의 열차에 동승한 승객입니다. 한 시대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난 몰랐다”라는 항변은 무의미합니다.
가석방이라는, 죄에서 자유로워지기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나는 아마도 그걸 알아차렸던 것일 테지요. 무지의 상태에서 깨어났으니 이제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모르는 상태로 행복했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깨어난 자는 무지의 상태에서 행한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자각합니다. 자각한 자에게는 지독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은 너무나 무겁고 무섭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눈을 떠야 하고 알아차려야 하고 직시해야 합니다. 인간은 깨어나야 할 운명을 지닌 존재입니다.
깨어나기를 지독하게 원했던 한나는 자신의 문맹을 들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숨기기 위해서 늘 싸우고 또 싸워온” 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너무나 뒤늦게 알아차린 한나. 깨어나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뒤늦게 수행한 한나. 자신이 승산 없는 싸움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고, 모르고 저지른 행위가 학살을 도왔고, 결국은 얼마나 자신을 망쳤는지를 통렬하게 깨달았습니다.
알고 짓는 죄, 모르고 짓는 죄.
‘죄’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그릇된 행위인 줄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알고 짓는 죄가 더 무겁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겁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을 깨치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버린 한나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이미령 cittalm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