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를 바꾼 법원 판결, 일본은 보고 있나?
KBS 구본국 입력 2015.08.21. 06:10
■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네덜란드 군인의 대학살
5천 명 vs 4만 명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라와게데 지역. 이 지역의 한가운데 잘 꾸며진 공원 묘지가 있습니다. 이 공원묘지에는 라와게데 주민 431명이 잠들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이 한창이던 1947년 12월에 네덜란드 군인들이 이 마을에 들이닥쳤습니다. 독립운동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도자를 찾지 못한 군인들은 비무장한 마을 주민들을 잡아다 무차별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학살된 주민이 431명. 현지에서 만난 와르조씨는 초등학교 시절을 뚜렷이 기억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네덜란드 군인에게 끌려가 학살을 당했지만 와르조씨는 다행히 도망을 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가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아 군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와르조씨는 다행히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공원묘지를 '영웅들의 무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비록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만큼 영웅이라 불러도 마땅하다는 게 인도네시아인들의 한결같은 생각입니다. 당시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군인들은 술라웨시 등에서 최대 5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5천 명은 네덜란드 측이 추산한 숫자고 인도네시아인들은 4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학살 65년 만의 배상, 그리고 네덜란드의 사과
1602년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이 시작됩니다. 1824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 전체가 네덜란드의 직할 식민지가 됐습니다. 1942년~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합니다. 1945년 8월이 돼서야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재식민지화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4년 동안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위한 무력 항쟁을 벌입니다. 그 투쟁의 기간에 수많은 주민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겁니다.
독립 후 인도네시아 피해자들은 끝없이 네덜란드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일본과 같이 자신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네덜란드 법원이 먼저 잘못을 인정합니다. 학살 65년이 지난 2012년, 사과를 거부하던 정부를 대신해 네덜란드 법원이 유족 10명에게 2만 유로씩을 배상하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네덜란드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하기에 이릅니다. 2013년 9월 12일 치어트 드 즈반 인도네시아 주재 네덜란드 대사가 자카르타에서 열린 학살추모식에 참석해 학살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라와게데 등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지방법원은 지난 3월 11일 또 다른 소송에서 네덜란드 정부는 학살의 책임이 있다며 유족 9명에게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특히 이 판결은 미망인뿐만 아니라 유자녀들에게도 배상할 것을 명령하는 등 배상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네덜란드 법원이 소송에서 계속 인도네시아인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물론 사과와 반성, 배상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가해국의 법원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 판결을 받아들여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하는 모습은 지금의 일본과는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 사과와 보상에 '용서와 화해'로 화답
라와게데 지역을 찾은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1947년 학살 당시 남편을 잃은 사킷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팔순을 훨씬 넘긴 사킷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취재진의 질문에 똑똑히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줬습니다. 네덜란드 군인들이 남편을 데려 가 무릎을 꿇린 뒤 총을 쐈다는 겁니다. 총을 맞은 남편은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당시 할머니의 배 속에는 6달 지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희 옆에서 인터뷰를 도와주던 중년의 여인이 당시에 배 속에 있던 아이였습니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다른 미망인들과 함께 소송을 벌였고 네덜란드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2만 유로, 한국 돈 2천6백여만 원을 받았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덜란드 정부의 사과였습니다. 취재진은 네덜란드에 대한 감정은 이젠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제 네덜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없어요. 이미 잊었어요. 상처는 괜찮아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남편을 잃은 상황. 누구도 쉽게 용서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65년이 지난 후에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또 계속되는 법원의 배상판결에 용서와 화해로 대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럽국가들이 제국주의 시절 만행에 대해 잇따른 반성과 보상에 나서는 상황에서 이제 일본도 전쟁범죄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배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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