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뭐요? 스님이 되셔 가지고..
어려서 출가하신 고암 큰스님이 스무 살 무렵.
고향에 들리러 가셨을 때의 일이다. 도를 닦겠다는 한 생각으로 출가하신
고암큰스님께 무슨 세속적인 미련이 남아 있었다기보다는 다만 노부모님의 안부가 앞섰기 때문이었다.
고향집에선 민며느리를 두고 고암 큰스님이 언젠가는 집에 들리리라는 한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즉석 결혼식을 치를 만반의 채비를 다하고 있었다. 효행심이 두터운 고암 큰스님이 고향집에 닿자마자 결혼식이 치뤄졌다.
밤이 왔다. 신방에는 창사초롱이 내걸렸다.
고암 큰스님이 신부의 원삼 족두리를 거두어 내리고 말씀하셨다.
"출가승인 내가 당신의 지아비가 되어 미안하오. 이젠 잘났거나 못났거나 당신을 위해 힘닿는대로 이끌어 주겠소. 그럴터이니 내 말을 잘 따라주겠소?"
"............"
신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 말을 잘 따라 주겠소?"
이렇게 재차 묻자 신부가 응답의 표시로 살푸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 모두 안심하고 잠에 떨어져 있을 때.
고암 큰스님은 신부의 손을 이끌고 뒷담을 넘어서 줄행랑을 쳤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신부는 서울 개운사 비구니 절에 맡겨져서 스님이 되었는데 그 이후 딱 한 번 고암스님과 회우가 있었다고 한다.
정화불사의 바람이 휩쓸 때였다. 조계사에 청담 큰스님. 고암 큰스님 등 종단대표 원로 대덕 큰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암 큰스님이 가사 장삼을 수하신 채 조계사 입구에서 막 들어서시는데 대중 가운데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어 서며 조용히 합장을 올린 비구니가 있었다.
아주 인색이 맑고 담백한 기풍이 서린 초로에 접어든 비구니였다.
고암 큰스님은 잠시 눈길을 주고 비구니를 바라보셨다.
아!!! 그 신부의 모습이었다.
합장을 받으시고 고암 큰스님이 입을 열으셨다.
"당신도........ 많이 늙었구려...."
이때 비구니가 합장한 손을 풀지 않은 채, 불쑥 내던지는 말이 있었다.
"당신이 뭐요? 스님이 되셔 가지고......."
이것으로 살아생전의 회우는 끝났다. 부부 인연으로 말하자면 참 좋은 도반의 인연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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