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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와 과학 초끈이론(2)

淸潭 2015. 3. 20. 09:40
2. 불교와 과학 초끈이론(2)

(2)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넘어서

 

웰빙지 연재(정신 세계원 2004.7~12)/조현학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

“어떤 체계가 주어졌을 때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항상 존재한다.따라서, 어떤 정리가 참이라 해도 그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 할 수 있다.

괴델은 20C 천재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20C초반 수학계는 근본 공리로부터 발전해나가는 완벽한 수학적 체계를 완성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가 완성되려는 시점에 괴델은 불확정성원리라는 폭탄 선언을 한다.

여기서 괴델은 주어진 체계의 한계가 존재한다면   정말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체재의 한계 때문에   이해할 수 없거나 증명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제의 한계의 의미를 간단한 기호 논리식으로 살펴보자

⇒ 은 ⊙로 의미할 때     ⇒ ⊙ 표현하기로 약속하자.
⊙⇒ 은 ☎ 을 의미할 때    ⊙⇒ ☎ 표현하기로 약속하자
☎⇒ 은
을 의미할 때    ☎⇒ 표현하기로 약속하자
그러면 ((
⇒) ⇒) ⇒의 결과는 뭘까?
(⊙⇒) ⇒ 되고
☎⇒이 되고.
결국
가 되는 것이다.
 

로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놀랄 필요가 없다우리가 약속한 그 논리를 따랐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에서 ○가 되는 과정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가운데 점 하나 없애면 그렇게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체계 내에 있는 기호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서 ○가 되는 과정은 약속된 논리 체계 밖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논리 체계의 한계의 의미이다.

지금 전재하는 추론은 사실 축소 과장되었지만,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란 사실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한계는 수학적 집합 체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먼저 유명한 페러덕스크레타섬 사람은 거짓말 쟁이다.을 살펴보자

크레타 섬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그 말은 진실이 된다.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이 된다.

어떤 경우도 모순을 낳고 만다.

이런 자기 함축적 모순이 수학의 집합 세계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고, 그건 수학 체계의 한계가 가져다는 주는 운명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학 체계의 불완전성이원론적인 모순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이런 모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20C수학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21C인 지금까지 이런 모순은 근본적으로 현재 수학의 체계의 한계라고 많은 수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벽은 정말 넘을 수 없는 한계인가?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의식의 한계로는 궁극의 신의 영역  접근할 수 없다는 걸까?   괴델의 논리라면 분명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엄에서의 대답은 반대다.

괴델이나 칸토어 같은 천재 수학자들은 인간의 한계가 가져다 주는  필연성 앞에 무릎을 꿇고 신의 영

역에로의  진입을 포기했는지 모르지만, 화엄의 종사들은 그 벽을 넘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그럼, 무엇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의 영역에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할까

그 해답은 시간이었다.

다음 그림은 시간의 역동성을 나타낸 그림이다.

대문자 A에서 회전하면 다시 A와 만난다.
이런 단순한 회전에서는 역동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A 에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모서리에 있는 4개의 다이아몬드 형태의 소문자를 지날 때마다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나간다면 이 계는 역동성을 갖게 된다. 카오스 정보이론에 따르면 이런 시계와 반시계 방향의 카오스적 회전은 정보(엔트로피)를 증가시켜 그 계를 역동적으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시간은 이렇게 회전하면서 미시 영역의 또 다른 회전을 하는 프랙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카오스적인 회전은 시간의 역동성을 증폭시키고, 회전할 때 마다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해 나가는 중중 무진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비밀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화엄경의 한 구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 겁  안락세계 아미타 부처님의 하루,

안락 세계의  일겁성복당 세계 금강부처님의 하루,성복당 세계의 일겁  불퇴전음성륜부처님의 하루요……

이와 같이 백만 아승지 세계를 지나 최후의 일겁 승련화 세계 현수 부처님의 하루인데,

 모든 보살이 그 안에 있습니다.” ….. <화엄경 수명품에서>

이렇게 시간은 무한의 순환()통해 사바 세계(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승련화 세계(현수 부처님)까지 진화해 나가고 있다. 이런 시간관은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 수비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수비학에서는 시간을 아이스크림 처럼 위로 갈수록 점점 원의 간격이 좁아지는 축소하는 나선형 구조로 파악했는데, 맨 꼭대기 시간의 최종점(최후의 무한)은 바늘 끝처럼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늘끝(최후의 무한)에 과연 얼마나 많은 천사가 춤을 추고 있을까?” 하고 고민 했었다. 최후의 무한과 승련화 세계 그리고 천사와 보살 표현은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동. 서양 모두  시간에 대한 인식이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시간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의상의 스승 지엄은 임종시 아미타 세계를 초월해 더 높은 화엄의 시간 차원으로 돌아간다고 제자들에게 밝혔었다. 마조가 그랬듯이 지엄 역시 달의 시간을 살면서 태양의 시간을 살았었다. 그리고 중중무진의 시간을 관통해 무한한 화엄의 세계로 되돌아 갔다.

이렇게 역동적이면서 진화해 나가는 중중 무진의 시간 속 에서 우리는 장엄한 화엄의 파노라마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엄 세계의 역동적 시간은 괴델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벽을 훌쩍 뛰어 넘어 무한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

괴델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인간의 정신은 제한된 우주 안에 존재하므로 그 체계의 울타리 넘어로 확대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실체는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고뇌에 찬 영혼에 평화를 안겨주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화엄의  종사들은 그 무한의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칸토어와 괴델이 무한의 벽에 막혀 정신 착란증을 보일 때 의상과 원효 같은 대선사들은 파라독스란 화두를 베게삼아 불굴의 정신으로 무한의 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외친다.

“無明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證智所指 非如境 증지소지 비여경”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그리고 무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오직 깨달은 지혜로만 알뿐 어떤 경계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