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공간찧기(Conifold transi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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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지 연재(정신 세계원 2004.7~12)/조현학 | ||||
거북이는 물질계를 이루는 4대 원소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의미하고 그 위의 뱀의 꼬리와 머리는 물질계의 대립상을 표현하고 있다. 뱀의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모습에서 대립되는 세계가 사라진 하나의 일원상의 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이스 시대의 문향 베니카피니시스는 모나드(하나)로부터 디아드(둘)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팔메초는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두 개의 줄기로 부터 하나의 꽃이 탄생하고 있다.
그러나 원형으로 춤추는 쉬바에선 생멸의 모든 대립되는 세계가 사라지고 있다. 쉬바의 춤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과학적 증명의 한계를 떠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끈이론은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아인쉬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찢어지거나 붙여질 수 없다. 그러나, 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찢어지거나 붙여질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초기에 끈이론 학자들도 이게 수학적인 결과인지 실제 공간이 찢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공간이 코니폴드 변환에 의해 찧어지거나 붙여질 수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공간찢기 과정(Conifold transition)> 수학적으로 코니폴드 변한을 통해 토러스 모형의 시공간의 도형(a)이 찢어지면서 그림(c )에서 하나의 점이 되었다가 ,그림 (d)에서 두 개의 점으로 분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모양도 전혀 다른 공모양의 형태로 되었다. 마치, 튜브를 양쪽으로 잡아 당기면 튜브가 가늘어지면서 끊어졌다가, 완두콩이 자라듯이 평등의 원리에 의해 펴져 나가 구형을 이룬다. 이번에 그림을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보면 f,→e→,d 과정에서 분명히 2개의 점이 c순간에서 하나로 합쳐지면서 다시 원형구조를 회복한다. 이렇게 코니폴드 변환이라는 공간 찢기를 통해 원형구조는 분리되었다가 역과정에서 다시 하나의, 원형의 순환 구조를 회복한다. 이렇게 우리의 시공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물거품의 표면처럼 찢어지거나 붙여지질 수 있는 유동적인 구조인 것이다. 바로 우리의 시공간은 위 그림처럼 찢어지거나 붙여지는 과정에서 그 순환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회복하기도 한다. 토러스 모양의 시공간을 한 예로 들었지만 더 복잡하고 다양한 실제의 시공간에도 공간 찢기(코니폴드변환)의 원리는 적용될 것이다. 어떤 시공간이라도 찢어진다면 순환성을 사라지고 끊긴 두 지점이 남게 될 것이다. 그 두 지점은 열쇠와 자물쇠처럼 위상학적으로 딱 맞는 구조일 것이다.아래 에셔 그림의 천사와 악마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시공간은 찢어지는 순간 천사와 악마처럼 이원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찢어진 시공간 구조가 결합하면 이원성이 사라진 원래의 모습을 되 돌아간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시방(十方)세계라 부르고 있다. 끈이론 역시 우리의 공간이 10차원 공간(공간 9차원+브레인 1차원)임을 확인했다. 우리의 우주는 에셔의 그림처럼 대립되는 세계가 무수히 반복되면서 전 시공간을 메꾸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에셔의 그림의 원판을 평면이 아닌 굽은 구형 구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순환하는 원융한 세계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법성계의 첫 구절을 다시 음미해보자 法性圓融 無二相 법성원융 무이상 諸法不動 本來漃 제법부동 본래적 원융함 속에서 대립의 2원상이 사라진 세계를 법성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법의 근본자리에서 모든 대립되는 2원상이 사라졌다면 그 궁극적 세계는 단순한 기하학적인 원형 구조는 아닐지라도 분명 전체가 하나가 되는 원융한 순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 궁극의 법의 세계로의 진입에도 코니폴드 변환의 숨겨져 있는 것이다. 코니폴드 변환이라는 단순한 수학적 개념을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인 법의 세계로의 진입 과정에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공간은 다차원(11차원 시공간)으로 되어있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힐버트 공간을 화엄의 여래장의 개념까지 확대해 나간다면 현재 수학 수준으로는 설명될 수 없지만 분명 디아드(둘)이 모나드(하나)가 되는 코니폴드변환 원리는 소립자에서 궁극의 법의 세계까지 통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물질계가 절대계의 하위 단계이거나, 절대계가 홀로 고고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립자를 우주와 동일하게 우주 그 자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는 “여기 한 움큼의 먼지가 없어진다면 나머지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머지 우주는 무로 한원될 것이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게 화엄의 총체성인 것이다. 의상의 스승인 지엄은 “화엄 일승 십현문”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제 하나로부터 열까지의 비유를 통해 그 가르침을 설명해보자. 만일 반복해서 열까지 세고 다시 열부터 하나까지 거꾸로 세워나간다면, 하나가 열 가운데 있고 열이 하나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가 열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라는 단어는 의미를 지닌다. 만약 열이 없다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 우주에 단 하나만이 있다면 이른바 이 하나는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미는 여럿에 의존하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모든 연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하나만이 그 자성 안에 존재한다면 열 혹은 여럿의 성립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열 혹은 여럿이 없다면 하나의 성립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 하나는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은 하나가 아니니, 그 것은 단지 숫자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설해졌을 뿐이다. 천한 지혜로 인간은 제법을 움켜쥔다…. 집착하는 그들의 무지한 마음은 하나를 틀림없이 하나로 여긴다.” 여기서 지엄은 우리의 천한 지혜가 하나에 대한 집착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가 자성(집착)이 없기 때문에 그 자성 없는 하나가 연에 의해 열을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소립자 역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연에 의해 팔메초도 우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팔메초나 우주도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연에 의해 역으로 소립자로 변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만물은 자성이 없는 그 본성 때문에 서로 투영하고 감싸면서 거대한 화엄의 파노라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엄의 총제성은 먼지 하나에도 팔메초의 꽃잎 하나에도 쉬바의 손끝의 세포에도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인연이라는 끈의 힘으로 연결되어있으면서 시바의 춤이라는 원형의 무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공의 세계로 사라지기도 하고 색의 세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코니폴드 변환이야말로 시바의 춤이며 시공간 변형의 마술이다. 이 마술을 통해 우리는 대립의 세계에서 원융한 세계로 공의 세계에서 색의 세계로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코니폴드 변환의 원리는 가장 하부의 물질계에서 생명계 더 나아가 법의 세계까지 어디 하나 통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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