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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가

淸潭 2015. 1. 6. 11:07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재  호

왜 사는가? 우리는 이러한 우리 삶의 질문을 하게 되거나 또 가끔 의문을 갖을 때가 있다.

현대 물질문명의 발달은 분명 의미 있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러나 자살만큼 허무하고 무책임한

삶의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샤르댕에 따르면 내 존재 의미는 사랑에 있다고 했다.

사랑하러 왔다가 사랑에 이바지하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세상의 물질 속에 있던 사랑이라는 의식이 우주의 진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역사의 완성이 있고, 샤르댕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말한 바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르는

종말이 있다. 어쩌면 인간의 탄생 비밀은 그 종말에 이바지하러 이 땅에 온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우주 역사의 완성을 볼 텐데, 나는 그것을 꿈꾸며 거기에 이바지하기 위해 자살 충동이라는 우울증을 해소할 수 있는 문학이란 절대성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이 다음 세대에서 더 크게 자라 마침내 후손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영생하게 된다.


나는 비록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내 속의 사랑의 연장선에서 역사가 완성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하러 온 나는 영원히 사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란 곧 정신적인 사랑이다. 문학적 인생의 의미는 그 종말에 있다. ‘마침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는 것인가?

샤르댕은 역사의 ‘마침’이 있다고 보았고, ‘마침내’ 일어나는 현상, 거기에 인간 현상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존재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없다면 사랑도 존재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만사는 ‘결국’ 그렇게 되고, 그리로 간다. ‘결국’이 중요하다. 현재의 실존은 분열되어 있지만, 결국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면서 각 개인도 통합될 것이고, 현재의 실존에는 미움이 있지만 결국에는 현상학 적으로 사랑이라는 문학이 관계를 완성할 것이다.


‘결국’을 보는 개인은 지금의 내가 아니지만, 나도 지금부터 그 결국 쪽으로 향해 있는 만큼 결국에 참여한다.

나도 마침과 결국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의 낙이요, 기쁨이다. 자살이나 종말 때문에, 인생의 의미는 사랑에 있고, 인생의 낙도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만큼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며, 그만큼 존재의 밀도가 더해진다.


그만큼 내 속의 비존재 곧 죽음이 사라지고 생명이 충만해진다. 그만큼 영생한다. 결국 문학적 사랑은 영생하는 것이며 내 안에 있는 사랑만큼 내가 영생하는 것이다. 샤르댕은 예수회 신부요 또한 과학자였다.

자라면서 베르그송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를 말하면서 생명 현상을 과학으로 다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과학적 지성은 생명체를 무기력한 사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분석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필름과 같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사람의 연속된 동작을 보지만, 사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순간 동작을 찍은 사진을 이어 놓은 것이다. 행위와 사건 그 자체를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기계론적 관점도 그와 같다. 과학의 분석이란 것은 생명 현상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다. 생명 현상 안에서 일어나는 비약도 과학은 보지 못한다. 불연속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샤르댕은 고생물학자로서 과학적 안목을 가지고 진화를 보았다. 많은 화석을 발굴하고 북경 원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그는 진화론을 믿었다. 그리고 진화의 자연사가 인간의 등장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과학적 진화론에만 따르면 인간 이후에 다른 진화는 없다. 사람이 진화한다면 지금의 모습과 다른 인간이 생긴다는 얘기다.


진화론이 자연과 인간을 연속선에서 보았듯이, 샤르댕도 과학자로서 인간의 진화를 자연의 진화와 별개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이루는 역사는 자연사의 연장에 있고 자연사 안에 포함된다. 결국 인간 의 자리는 그러한 자연사 속에 있다.


인간의 진화는 정신세계의 진보로 나타나는데, 그런 정신의 진보가 이미 자연에서 보인단 말인가?

인간 정신사를 자연사 안에 둠으로써 샤르댕은 자연 과학자의 위치를 지켰다. 인간 정신의 진보는 문학 속에서

바라보는 자연이 바라던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 그토록 바라던 희망의 열매다. 열매는 자살하지 않는다. 익어서 떨어질 뿐이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는 거기에 있다. 인간의 출현이, 유구한 자연사에서 문학적으로 줄곧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바람과 희망?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샤르댕은 우주 탄생 당시 생긴 미립자에도 이미 어떤 넋이 있다고 보았다. 기계론에 따른 물리학은 겉만 보지만 이미 전자와 중성자 같은 알갱이에도 속이 있다.

흔히 속 깊은 사람 또는 속이 좁은 자살행위라는 말을 한다. 이 때 속은 남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힘을 가리킨다. 문학적인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처음부터 그런 속이 있다고 보았다.


미립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가 보여 다시 거대분자가 되고, 다시 유기체가 생기고 세포가 생긴다.

세포는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는 갈수록 더욱 복잡한 기관을 지닌 생명체를 이루며 인간에까지 이르렀다.

더욱 복잡한 물체가 탄생할수록 그만큼 속이 깊어지는 것이다.


복잡한 물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개체들이 화합을 이루고 하나로 통일된다. 분자가 되려면 개체 원자가 많이 뭉쳐야 한다. 원자보다는 분자가, 분자보다는 세포가 더 큰 통일체요, 그만큼 더 큰 통일 에너지가 작용한 것이다. 그처럼 개체들이 모여 통일체를 이루면서 속이 깊어진다. 개체들의 속도 하나로 뭉치기 때문이다. 원자 덩어리보다는 바위 덩어리가 속이 깊다. 바위 덩어리보다는 바다가 속이 깊다. 결국 진보란 그처럼 속이 깊어지는 것을 뜻한다.


물리적 에너지는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가용 에너지가 언젠가 끝이 난다. 그러나 속이 깊어져 통일을 이루는 정신 에너지는 갈수록 더욱 커진다. 인간에게는 생각이 있다. 생각이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돌아볼 자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 개체의 속이 굉장히 깊음을 뜻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의 속은 그렇게도 깊고 깊은 것이다.


알 수 없는 속으로 악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깊은 속은 깊은 사랑의 가능성을 뜻한다.

생각이 등장하면서 자기가 생기고, 자기가 생기면서 진정한 개체가 생긴다. 사람 이전의 동물까지 개체는 종을 위해 존재한다. 자연의 관심은 종의 번식이지, 개체의 행복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누리기 바란다.


개인이 사회를 위해 있지 않고 사회가 개인을 위해 있는 것이 된다.

그만큼 개인의 속이 깊어지는 것을 뜻하면서, 동시에 전체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을 뜻한다. 떨어져서 나간다고 하는 이 자살 행위는 우주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인간은 곧 우주라고 할 만큼 속이 깊다. 한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요, 그래서 원칙적으로 사람 수만큼 우주의 중심이 있는 셈이다.


한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것은 분명히 진화다. 한 개체의 속이 굉장히 깊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원숭이와 사람의 해부학적 구조는 다를 것이 없지만, 속의 깊이에서 볼 때 엄청난 비약과 불연속이 있다. 베르그송이 생명 현상을 두고 말한 불연속적 연속이요, 연속적 불연속이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진화는 더 큰 속의 형성을 위해 나간다.


개인 수만큼 세상의 중심이 있지만, 더 큰 중심을 가지고 그 개인들이 모인다. 개인이 강화되기 위해 ‘나는 나다’고 하고, ‘남남’을 강조하면서 서로 떨어져 나갔지만, 다시 모인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간다. 하나의 큰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모든 사람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개인과 개인이 화합하고, 민족과 민족이 화합하고, 온 지구촌이 하나가 될 것이다.

개인의 독자성이 유지되면서 모든 인간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 될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인이 하나 된다는 것은 모두 똑같아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서로 주체로 존재하면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것이 샤르댕이 내다보는 종말 곧 역사의 완성이다.

지금 지구촌이 점점 가까워지고 접촉이 빈번해지는 것은 인터넷이란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인류의 등장 이후 전쟁이나 폭력도 많았지만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오메가 포인트에서 사람은 ‘새 사람’이 된다. 또 한 번의 비약이 있는 셈이다.


새 사람이 되면서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사람은 이미 사람이지만 사람이 되어야 할 기본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행위란 자기 삶의 거짓말과 같은 일이다. 다시 한해가 시작하는 을미년이다. 새해가 왜 나의 삶에 있어 한 권의 책을 읽혀주듯이 나는 내 삶을 완성해 나갈 수 있고 또 이루어지는 이 시점에 문학이 정신세계라는데 동의한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될 일이다.

가져온 곳 : 
카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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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안동 이재호|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