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소설 ‘검은 책’ 출간 앞둔 노벨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
16일 이스탄불 저택에서 인터뷰를 한 지난해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 씨. 그는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듯 도시와 문화에도 풍요로운 이야기가 있다”며 “(한국에 발매될) ‘검은 책’을 통해 이스탄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탄불=김지영 기자 |
16일 터키 이스탄불 시내의 한 건물. 입구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허리에 총을 찬 경찰은 한국 기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뒤 좁은 엘리베이터로 안내하면서 층수를 알려 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무크(55) 씨가 나와 있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잘 생긴 이 작가는 밝게 웃으며 집필실로 안내했다. 창밖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고 사방 벽은 책으로 가득했다.
오르한 파무크 | |
△1952년 터키 이스탄불 출생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출간해 ‘오르한 케말상’ 수상 △1984년 ‘고요한 집’으로 ‘마다랄리 소설상’ 수상. 프랑스의 ‘유럽 발견상’ 수상 △1985년 ‘하얀 성’을 발표해 국제적 명성을 얻음 △1985∼88년 미국 컬럼비아대 방문교수 △1994년 소설 ‘새로운 인생’ △1998년 소설 ‘내 이름은 빨강’으로 프랑스 ‘최우수 외국문학상’ 등 수상 △2002년 소설 ‘눈’ △2005년 소설 ‘이스탄불: 추억과 도시’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
파무크 씨가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는 처음이다. “전 세계 기자 수천 명이 인터뷰를 요청하는 e메일을 보냈지만 너무 바빠 답장도 할 수 없었다”며 “그중 만난 사람은 1% 정도”라고 말했다.
“들어오는데 경비가 삼엄하더라”라고 했더니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올해 초 흐란트 기독교 신문 기자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비판적 견해를 밝힌 뒤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뒤 사상의 자유를 위협받는 사람들을 법률에 따라 정부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 역시 같은 문제를 언급해 국가모독죄로 기소됐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그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경찰들이) 지키는 것은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라는 것이겠지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은 재미없다’는 통설이 있다. 파무크 씨는 이를 뒤집었다.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은 수상 이후 한국에서만 10만 부 넘게 팔렸다. 기현상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남자가 미인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게 아닐까?”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다른 장편소설 ‘검은 책’(전 2권·민음사)이 18일 국내 출간된다. 1990년 터키에서 출간돼 7만 부가 팔렸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공세에 휘말렸던 작품이다. 소설은 변호사 갈리프의 아내 뤼야와 그의 이복 오빠인 칼럼니스트 젤랄이 사라지자 갈리프가 두 사람을 찾아 이스탄불 전역을 헤맨다는 내용이다. 추리소설 같지만 ‘나는 유럽인인가 아시아인인가’라는 터키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곳곳에 스며 있는 작품이다. 이는 작가가 일관되게 고민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198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 머물렀을 때 ‘터키인으로서 미국에 있다는 것’에 대해 심한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는 미국에서 이슬람 고전을 파고들면서 “고전의 스타일을 포스트모던하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검은 책’은 그 결실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가 밤마다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듯 작가는 젤랄의 칼럼들을 통해 이스탄불의 신화와 역사에서 터키의 현재와 미래까지 아우른다.
“현대화되기 위해 서구 문화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나라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터키도 서구화되고 싶어 하지만 전통적인 정체성도 보호하고 싶어 합니다. 모순이지요. 서구 이외의 모든 나라가 겪는 일일 겁니다. 한국 독자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주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은 내 작품이 ‘동서 문명의 충돌을 그렸다’고 말하지만 양쪽 문명이 충돌한다고 믿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문화는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 아닌가요. 순수한 하나의 문화란 없습니다. 그렇게 문화가 섞여 드는 오늘의 터키를 그림 그리듯 보여 주려는 겁니다. 정치적인 사안을 (소설에서) 다루려는 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듯 문화도 스스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는 그는 그 문화의 이야기를 옮겨 적는 사람이다. 문학이라는 현대의 그릇 속에 이슬람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담겠다는 것이다.
“현대 이전에는 이야기로 충만했던 것 아닙니까? 요즘은 그 이야기를 ‘문학’으로만 제한해 버렸지요.”
올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던 그는 “영화는 문학의 형제이며 영화를 볼 때 항상 소설을 생각한다”며 “영화는 문학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표현한다”고 말했다. 여우주연상(전도연)을 받은 ‘밀양’에 대해 그는 “인상 깊게 봤고 스토리가 좋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왜 소설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게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하고 혼탁한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소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내가 화가를 꿈꿨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문학은 내 삶이고, 세상이며, 단어로 그림을 그려 가는 것입니다.”
이스탄불=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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