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만화가 등용문 日지바테쓰야賞외국인 첫 대상 김정현씨
지난해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만화가 등용문 중 하나인 지바테쓰야상 대상을 수상한 김정현 씨. 그는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말할 정도의 지독한 집념으로 만화대국 일본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오른쪽은 김정현 씨가 그린 캐리커처. 교토=천광암 특파원 |
‘그림 실력과 구성의 테크닉이 뛰어날 뿐 아니라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정열이 심금을 울린다.’
일본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가 지난해 말 교토세이카(京都精華)대에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 김정현(23·대학원 1년) 씨의 만화 ‘다마키무치’를 지바테쓰야상 대상작으로 결정하면서 내놓은 심사평이다. 지바테쓰야상은 일본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신인만화가 등용문 중 하나.
일본은 연간 발행되는 만화잡지 부수만 8억 부에 이르는 ‘만화왕국’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낼 수 있는 프로 만화가를 꿈꾸는 아마추어가 2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김정현 | |
△1984년 서울 출생 △경기 남양주시 진건초교, 진건중 △한국 애니메이션고 △일본 교토세이카대 만화학과, 동 대학원 △입상 경력: 제57회 쇼가쿠칸 주최 신인만화대상 가작(2005년), 제19회 고단샤 주최 만화오픈 우수상(2006년), 제50회 고단샤 주최 지바테쓰야상 대상(2006년) |
프로가 되기 위한 지름길로 통하는 고단샤, 쇼가쿠칸(小學館), 슈에이샤(集英社) 등 3대 만화출판사의 신인공모전 입상은 바늘구멍 통과만큼 어렵다.
2005년 쇼가쿠칸의 신인만화대상에 가작으로 입상한 데 이어 지난해 외국인 중 처음으로 지바테쓰야상 대상을 거머쥐어 일본 만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김 씨를 교토세이카대에서 만났다.
―만화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만화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또래 친구들에 비해 유별난 편은 아니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탈선’이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만화 ‘드래건 볼’을 봤을 때부터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장풍(掌風)을 날리는 만화 속의 세계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이자 충격이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고 나면 손에서 만화책이 떠날 틈이 없었다. 수업시간에도 만화책을 책상 아래에 숨겨두고 몰래 읽었다. 웬만한 만화책을 다 섭렵하고 난 다음엔 그림 베끼기를 시작했다. 몇 번씩 덧칠한 만화 그림 때문에 교과서는 먹지가 되다시피 했다. 그 다음 단계는 창작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그린 만화를 친구들이 재미있게 읽는 모습을 보면서 큰 기쁨을 느꼈다.”
―부모님이 내버려 두던가.
“많이 혼났다. 하지만 혼을 내는 아버지의 손을 보면서 반성하기는커녕 만화에서 어떻게 표현할지를 궁리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아버지가 ‘최후의 담판’을 요구했다. 직업 만화가에게 그림을 보여준 뒤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만화가의 길을 걷되 재능이 없다는 판정이 나오면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기 구리시에 있는 중견 만화가 P 화백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P 화백이 ‘큰일 낼 놈’이라며 소질을 인정하자 그 다음부터는 부모님이 적극 지원해 주셨다. 한국 애니메이션고 진학이나 일본 유학도 아버지가 적극 권유하신 것이다.”
―애니메이션고에 진학한 뒤 소질을 인정받았는가.
“성적은 늘 바닥권이었다.”
하지만 김 씨의 친구와 후배들의 평가는 달랐다고 한다. 현재 교토세이카대에 유학 중인 고교 후배 유수경(21) 씨는 “화실 한 번 제대로 다니지 않은 정현 선배의 그림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면서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몇 배씩 부풀려진 소문으로 떠돌 정도로 후배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지바테쓰야상을 받은 것도 놀랍지만 외국인이 일본어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어는 언제 배웠나.
“고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오사카(大阪)에 있는 일본어학교에 연수를 와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웠다. 사전 실력테스트를 한 결과 초급 상 중 하 가운데 ‘하’그룹에 배정됐지만 억지를 부려서 ‘상’그룹에 들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숙소와 학교를 오가는 중에도 손에서 단어장이 떠날 때가 없었다. 비가 오면 물에 젖는 종이 대신 손바닥에 단어를 써서 외웠다. 방만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밥은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일본에 올 때 생활비로 4만5000엔(약 36만 원)을 가져왔는데 3개월 뒤 돌아갈 때 1만 엔이 남아 있었다.”
―어떤 만화가가 되고 싶은가.
“일단 일본에서 프로만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작품을 발표하고 싶다. 장르는 다양하게 시도해 본 뒤 내게 맞는 것을 찾을 계획이다.”
김 씨는 7월부터 고단샤의 웹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작만화를 발표한다. 지바테쓰야상을 받았다고 해도 프로가 되기까지는 통상 2, 3년이 걸리는 관행에 비춰 보면 상당한 파격이다.
그는 “일본에서 최고의 프로만화가로 성공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꼭 해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교토=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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