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개심사와 예미 향교를 거쳐서 날이 밝아 이제 오늘의 처음 목표인 수덕사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새로 난 산길과 터널은 강원도를 달리는 기분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높은 다리를 지나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더니 이제 수덕사 입구 쪽인 수덕 고개를 넘어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을 하였다. 수덕사입구 관광지구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는 성산의 아우를 만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상가를 빠져나가 수덕사 일주문 앞 매표소에 도달한다. 이곳에는 의외로 사찰 방문객 보다 덕숭산 등산객이 훨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 유명한 역사적 고향 격인 수덕 여관은 수리 중인지 비닐을 뒤집어 쓰고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어서 빨리 헐리던가 아니면 다시 복원이 되어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다리를 건너 매표소 앞에서 그윽한 커피를 한잔하며 역사를 뒤집어 보며 옛 시절을 생각해 본다. 그시절 수학여행을 수덕사로 와서 이곳에서 떠들며 사찰 구경을 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변하지 않은 나무와 돌, 그리고 산세를 보지만 영 낯설기만 한 것은 전부 새로이 만들어 지고 눈에 익은건 대웅전뿐이니 그래도 친해지려 이렇게 부산을 떨어본다.
[덕산 도립공원임을 알리는 안내판...]
[주차장에서 경내까지 가는 길엔 엄청만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부도군 안쪽 아름다운 부도...]
[수덕사 부도군이 자리하고...]
[수덕사 입구에 매표소와 일주문...]
[수덕사 입구 안내도...]
[덕숭산 수덕사 일주문...]
덕숭산 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 쓰인 수덕사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일주문엔 멋진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네군데나 있어 잠시 눈길을 멈추게 해준다. 안쪽 현판엔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이라고 쓰여 있는데 소전 손재영님의 글씨란다.
[수덕사 금강문 앞뜰...]
[금강문 입구 왼쪽에 자리한 수덕사 사적비...]
[수덕사 금강문...]
[아금강역사...]
[음긍각역사...]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 동자보살...]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 동자보살...]
[수덕사 사천왕문...]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에 거주하면서 부처니�ㄹ 수호하는 신을 사천왕이라 한다고 항상 적어놓는다. 불교 성립 이전에 인도에 존재하였던 신이었기에 고대 인도 바르후트 탑에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기전 2세기 경에는 이미 불교의 신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북방다문천왕,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복천왕을 일컫는데 이들은 보탑, 검, 용, 비파, 창 등을 손에 쥐고 있으나 보탑을 쥐고 있는 다문천왕을 제외하고는 일정한 형식을 찾기에 매우 어려운점이 있다. 사천왕의 갑옷과 또 무장한 옷, 그리고 험상굳은 얼굴들, 그리고 부릅뜬 눈이 인상적일 것이다. 사천왕이 밟고 있는 악귀들을 보면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사천왕문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중창천왕...]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사천왕문 안에서 올려다본 황하정루...]
[수덕사 감로수...]
[수덕사 칠층석탑...]
이 탑은 1931년 만공대선사가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 면석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 하였고, 면석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옥신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면석과 지붕들은 별개의 돌로 이루어 졌고, 면석마다에는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들은 2단의 지붕돌 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반전이 매우 심하다. 상층부에는 장주, 보주, 보륜이 올려져 있다.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그런 탑이다.
[수덕사 칠층석탑...]
[수덕사 포대화상과 동자승들...]
[수덕사 황하정루(현지종찰수덕사라는 현판-원담스님 글씨)...]
[황하정루에서 내려다본 사천왕문...]
[경내로 오르는 계단엔 금강보탑신이...]
[중앙계단 좌측엔 백연당이...]
[중앙계단 우측엔 종무소가...]
[멀리 대웅전앞뜰에 금강보탑이...]
성역화 중창불사 도중 전탑좌대가 현위치에서 발견되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탑을 세우고 금강보탑 이라고 칭하였다. 금강이란 불기신의 불, 법, 승 삼보와 게체의 상징으로 이름하게 도었으니 신앙의 대상이다. 이 탑 내부에는 1988년 덕숭총립 방장 원담대선사 께서 스리랑카국을 예방했을 때 스리랑카 종정스님으로부터 한.스간의 우의를 견고히 하는 뜻으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증정함으로 10수년간 친견법회를 거쳐 본 탑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불상 1000불과 탑 모형을 동으로 주조하여ㅏ 999탑을 소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천불 천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 탑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세계평화는 물론 청풍납자(淸風衲子) 속성정각(速成正覺)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고 박복자(薄福者) 복덕구족(福德具足) 하여 고통받는 이 모두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할 것을 발원 하면서 2000년 7월에 세웠다 한다.
[수덕사 범종각엔 종만 혼자 덩그라니...]
[수덕사 무이당...]
[화소굴...]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건물...]
[관음바위앞...]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해 공 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 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 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 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 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 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 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 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고 관광공사에서 전한다.
[관음바위앞 관세음보살상...]
[수덕사 관음바위...]
[관음바위에서 본 대웅전앞...]
[수덕사 청련당...]
[수덕사 백련당...]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의 창건연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창건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것으로는 백제 법왕 1년 지명대사(智明大師)에 의한 북부수덕사 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설이 있으나 지명대사는 신라승이므로 북부수덕사 창건과는 관련이 없다. 또한 동명으로 지명대사(知明大師)가 있는데, 그는 백제 위덕왕(554~598)대의 인물로 미륵사 창건과 관련되어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있어 수덕사 창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또한 신라 문무왕 2년(662) 원효조사의 창건설과 백제말 숭제법사(崇濟法師)의 창건설도 있으나 이 또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을 세운 연대는 상량문에서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1937년 수덕사 대웅전을 수리 공사를 할 때 발견된 화반 하단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名)에 의하면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덕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백제후기 또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1528년(중종 23)에 단청보수, 1751년(영조 27)과 1770년(영조 46). 1937년에 각각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적사 삼층석탑...]
이 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되었으며,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 된다. 기단은 2층으로 위층은 4매의 돌로 명석을 조립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의 탱주가 표현되어 있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은 5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으나 2,3 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상면에서는 1단의 받침으로 그 의에 몸돌을 받고 있으며,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보륜만 남아 있었으나. 철주 보개 복발 노란을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상대갑석과 지붕돌 및 3층 몸돌 일부가 파손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이를 갖춘 석탑이다. 라고 안내판에서 알려준다.
[수덕사 종무소이며 조인정사...]
[종무소에 걸려있는 수덕사 현판...]
[종무소 앞에 서있는 33관음 보살 그림들...]
[수덕사 감로수...]
[수덕사 법고각엔 삼물만, 목어, 법고, 운판...]
[수덕사 코끼리 석등...]
[수덕사 금강보탑 탑신의 아름다움...]
[수덕사 삼우당...]
[수덕사 명부전...]
[수덕사 대웅전을 옆에서 보면...]
명부전 앞에 서야만 대웅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는 공부를 하고 온 터라 대웅전의 옆에 서 보았다. 흔히 말하는 맛배 지붕의 극치이다. 어느쪽 아니 각도도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보이는 그런 대웅전이다. 특히 좋아지는 것은 단청없는 그냥 그대로의 나무기둥 때문일 것이다. 단청보다 더 고운 생각이 드는 내 마음은 늙어서 일까?... 옆 벽에 아무 벽화도 없고 또 그 흔한 틀그림 줄도 없는 이 대웅전 옆모습이 어찌도 그리 아름다운지 한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사진엔 컴컴해서 안보이지만 우미량이라고 해서 소꼬리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는 나무 틀의 모양과 또 끼워짜 넣은 곡선 기둥들이 모양은 무아지경으로 초대를 하는 것 같다.
[염화실(주지스님이 거처하시는 곳)...]
[요사채 기와선과 맛배지붕의 아름다운 선...]
[대사님의 지팡이...]
[복고를 받치고 있는...]
[목어의 항의?...]
[편안한 수덕사의 경내...]
[멀리 내려다 보이는 황하정루...]
[황하정루 현판...]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 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있다.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 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 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 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 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 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 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라고 관광공사에서 역사적으로 전해주는데 정말 정기가 흐르고 역사가 흐르는 그런 사찰임에는 틀림없는 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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