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다녀와 정신없이 일터에서 보낸날이 몇날인지 기억에 없다
오늘이 몇일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목요일일 뿐이다
그리고 답사가 있는날,
카메라만 겨우 챙겨 나오는 나에게
남편은 오늘 비가 온다며 굳이 우산을 건네 준다 넣을 곳도 없는데...
어디로 가냐는 질문에
경허스님 만나러.... 천장암, 수덕사
천장암?
답사길전에 간단한 브리핑을 해 줄 정도로 관심이 있는 남편이
천장암은 잘 모르는 듯 했다
수덕사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같이 다녀 온 기억이 있을뿐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루쯤 집에서 쉬라 하고 쉬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문화유산을 찾아 나서고 수덕사도,
단편적으로 들어온 경허선사의 이야기도 궁굼하고...
오늘의 일정에 설레는 호기심이 있는데 몸은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이크 잡으신 선생님
경허선사의 입산서 부터 입적 하실때 까지의 차중 강의가 시작 되었다
간간히 경허 선사의 선시도 낭송해 주시고...
해박한 지식과 막힘이 없는 이야기에 옛날 이야기 듣는 어린아이가 되어
피곤함도 잠시 잊고 열중할 수 있었다
***** 천장암 *****
서해바다를 옆에 두고 능선이 겹겹이 쌓인 곳,
수행처 답게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 서니 길 끝에
소박하게 보이는 인당이 보인다
백제 무왕 33년 에 담회(曇和)선사가 창건했다는 천장암(天藏庵)이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세운탑이라 한다 고려시대 석탑양식이다
이곳은 백제 고찰의 이야기는 별로 전해 오는것이 없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산천의 세계가 다 내집이로다 라고 말한
경허 선사와 세 제자인 수월(水月)과 혜월(慧月), 월면(月面 : 滿空)의 이야기들이 길손을 맞이 한다
수월은 북쪽에서, 월면(만공)은 중부에서, 해월은 남쪽에서 '자비의 달'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허스님은 계룡산 동학사 토굴에서 정진하던 중
코구멍 없는 송아지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은 뒤,
이듬해 봄이 되어 친형인 태허 선사가 있는 천장암을 보림처 삼아 찾았다고 한다.
보림, 한번의 깨달음 이후 그것을 굳게 다지는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비탈길을 올라와 법당앞에 서니 매서운 바람 한줄기 지나 간다
천장암에는 염화의 미소를 띤 관세음보살이 인자하게 앉아 있었고
양쪽으로 경허선사와 만공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우리시대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었던 선사와 제자들...
가만히 엎드려 예를 들여 본다
선생님의 설명이 다시 시작 되었다
염궁문을 시작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겨냥해서 활을 쏘는 문,
마음의 화살을 쏘는 문,
경허 선사의 친필을 들여 다 보며
나는 무엇을 향해 어떤 마음으로 활을 쏠까?
천장암을 한바퀴 돌며 벽화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부처님과 제자 가섭이 눈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염화의 미소
달마대사와 제자 헤가가 그의 팔을 잘라 도를 구하는 이야기
부처님의 탄생 등등....
그리고 경허스님이 보림의 시간을 보냈던 골방 "원구문"
한평도 안되는 골방에 누더기 한벌만 가지고 들어가 장좌불와를 했으며
일년여 보림의 기간 동안 한발짝도 그 골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다
이가 들끓어 몸이 헐었지만 개의치 않았으며
배 위에 앉은 구렁이를 보고 놀란 만공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쉬었다 가도록 놔 두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깨닳음이 확고 해진 선사가 문을 박차고 나와 오도송을 불렀을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한다
"오도송"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 (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巖山下路)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골방을 들여 다 보니 한평이나 돨까
눕지 안아도 들어 앉으면 한방 가득 찰 것 같으다
지금도 어느스님이 선사의 뜻을 받아 이곳에 머물고 계신듯 하다
서해가 낮게 내려 다 보이는 산 정상에 섰다
경허선사와 세 제자가 법문을 나누며 보냈다는 제비 바위,
선생님이 들려 주는 선사와 만공의 법문대결 이야기를 들어 보며
범상치 않은 그들의 경지를 어찌 소화해 이해를 할수 있을지...
불어 오는 솔바람을 맞으며 아련하게 낮게 드리워진 저 바다를 바라 보며
그들은 무엇을 놓아 버렸을까 이 허공에....
제비 바위를 내려 오며 경허선사와 그의 제자들이 머물렀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천장암을 다시 바라 보았다
수덕사에 도착한 우리는 대웅전을 보기에 앞서 성보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만공스님의 거문고 부터 찾았다
만공스님이 일본의 패망을 전해듣고 기뻐하며 무궁화 꽃봉오리를 붓삼아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편액
** 성보 박물관에 있는 만공스님 거문고 **
고려 공민왕(1330~1374)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자 악공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게 하였는데 신품(神品)이었다.
공민왕이 신하에게 시해당하고 거문고는 충신 길재의 손에 넘어간다
고려가 망하자 충신 길재는 달 밝은 밤이면 거문고를 타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다
길재가 죽자 거문고는 조선왕조의 가보로 전해지기 시작하고
대원군을 걸쳐 명성황후가 시해당할 때 명성황후의 시신 옆에 피에 흥건히 젖은 거문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거문고는 운현궁으로 되돌아와 고종황제의 둘째아들인 의친왕 이 강이 즐기게 되었다
1930년대경 만공스님을 만난 의친왕 이강은 불법에 귀의할 것을 맹세하고
만공스님을 스승으로 사제의 예를 올리고 그 신표로 거문고를 건네 주었고
이때 만공스님은 자신의 스승인 경허선사로부터 받은 염주를 이강에게 신표로 주었다 한다
거문고를 가지고 수덕사로 돌아온 만공스님은 덕숭산 중턱에 소림 초당을 짓고 한적할 때마다 거문고를 탔다고 전한다
***** 수덕사 *****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 49호 ) **
고려충렬왕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의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라 한다
오랜만에 선생님으로 부터 들어 보는 목조 건축 설명을 들으며 문화유산 답사의 기쁨을 느낀다
설명에 집중하다 보니 우미량을 당겨서 카메라에 담는것을 잊어 버렸다 아쉬움이 남는다
수덕사 대웅전의 설화도 들으며 잠시 미소를 짓고
본격적으로 덕숭산의 이곳 저곳 답사를 위해 발길을 돌린다
** 관음바위 **
수덕사 대웅전 불사때 관세음 보살이 낭자로 변신하여 헌신했다는 설화가 있다
1080계단을 올라야 정혜사를 만날 수 있단다
** 소림초당 **
정혜사로 오르는 길 중간, 깎아지른 절벽 밑에는 그림같은 초가가 있는데,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소림초당이다
한적할때 마다 이곳에서 의친왕 이강이 건넨 거문고를 탔다는
소림초당은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한다
** 향운각 **
만공스님이 세운 관음보살상을 관리하고 있다한다
** 관음보살상 **
산길을 오르며 무거웠던 발걸음을 쉬게 하고 갈증을 풀어주었던 감로수
** 만공탑 **
만공스님은 1871년에 전북태안에서 태어나 1946년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14세에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에서 행자생활을 하시다 천장암에서 경허선사의 사미계를 받았다 한다
만공탑 비문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 가며 설명을 해 주신다
다 기억에 남지 않지만 첫머리에 남기신 글은 나를 깨닳아 참다운 나를 찾으라는 글귀로 기억하는데...()
** 정혜사 **
대웅전에서 1080계단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정혜사
조계종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 수덕사를 대표하는 능인선원이 있다 동안거에 들어가 고요했다
혹시 스님들께 폐 될까 발끝을 들어 가 본 정혜사 뜰은 고요하기만 하고 내려다 보는 경치는
속인 조차도 마음을 비우고 싶은 허공속의 그림이었다
** 전월사 **
만공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기거하시던곳, 옛 모습은 오 간데 없이,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전월사 옆으로 돌문을 지나면 스님이 솔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다듬던 좌선대가 있다
** 금선대 **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 정혜사 바로 밑의 금선대(金仙臺)는 한때 선방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진영을 모신 진영각이다.
내리는 사락눈에 모두들 마음이 들뜨고 선생님은 다시 경허선사와 만공의 법문대결 이야기를 하신다
답사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 눈이 우리를 감싸고 돈다
가기를 아쉬워 하는 듯, 겨울은 우리에게 눈을 내려 준다
수덕사 7층 석탑 1931년 만공선사가 건립한 7층석탑
봄의 시샘에 겨울이 당황한듯,쉼 없이 눈을 뿌리고 있다
수덕사는 5대 총림의 하나일 뿐 아니라 쇠퇴하던 근세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이은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곳이다
경허선사와 세달(수월, 혜월 만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문득, 정곡사의 정곡스님이 낭랑하게 들려 주시던 참선곡 소리가 귓가에서 머문다
"다시 할 말 있아오니 돌 장승이 아이나면 그때에 말하리라."
*** 수덕여관 ***
고암 이응로 화백의 부인이 50년대 부터 운영했다는 정 깊었던 초가 집은 간데 없고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초가집앞에는 수덕여관 이라는 간판은 옆으로 비켜난 채
"수덕사 선 미술관"이라는 낯선 간판이 나를 맞이 한다
옛 흔적이라고는 수덕교에 세겨진 수덕여관 이란 글씨와 여관을 둘러 싸고 있는 나무와 돌 그리고 바람,
이응로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잠시 귀국하여 문자체를 형이학적으로 암각화로 남겨 놓은 바위밖에는....
산천은 그대로 이건만 옛 사람은 오 간데 없고 내리는 눈속에 그들의 흔적만 느낄 뿐이다
덕숭산 자락 곳 곳을 헤집고 다녔던 하루,
돌아가는 차 속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마음과 머리속이 풍요롭고 깔끔하게 들어찬 느낌, 행복한 답사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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