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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설립된 최초의 총림인 ‘가야총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체됐고,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됐다. 사진은 해인사 전경. |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승가를 중국말로는 중(衆)이라 한다.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고 이름한다. 비유하면 많은 나무가 모인(叢) 것을 숲(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은 많은 스님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 마치 많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것과 같다는데서 총림(叢林)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말뜻에 비춰볼 때 총림이라는 개념은 인도에서부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총림은 중국에 와서 비로소 성립되었고 총림의 규율인 청규가 성립된 것도 중국이다. 총림이라는 표현이 선(禪)과 관련되어서 사용된 첫 사례는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나타난다. 『대승의장』에 “선은 중국말이다. 이것을 번역하여 사유수습이라고 하고, 또 공덕총림이라고도 한다.(…) 공덕총림이란 과보로부터 이름한 것이다. 즉 지혜, 신통, 사무량 등이 공덕인데 많은 공덕이 모여 있으므로 총림이라고 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와 관련 정영식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중국 총림의 성립과 전개」에서 “총림이란 다분히 중국적인 말이며 중국에 와서 성립된 제도이고, 본격적인 총림의 형성은 당대 백장회해가 백장청규를 제정하고부터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정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중국 총림제도의 형성시기로 인식되고 있는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백장청규(百丈淸規)에는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 그 자체를 하나의 수행으로 인식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청규 내용이 나타난다. 백장청규에 기록된 총림의 직책은 10개의 직무에 그쳤으나 송대에 편찬된 선원청규에는 직책이 40개로 늘어난다. 따라서 총림의 규모가 송대에 이르러 대형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 형성된 총림은 한국불교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중국에 유학해서 백장회해의 고청규(백장청규)를 접했던 선승들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대거 귀국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보고 배운 것을 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총림과 관련지을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려 용문사중수비에 첫 기록
다만 고려중기부터 나타나는 총림, 총림회와 관련된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학자들은 12세기와 13세기에 개최되었던 총림회를 종합수행도량으로서의 총림이 아니라 구산선문의 개별 선문 차원에서 행해진 특별법회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상영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는 「한국불교 총림의 전개양상과 그 역사적 의의」에서 “고려후기 자료를 보면 총림은 대부분 선찰(禪刹) 또는 선종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총림은 선찰의 범주를 벗어나 일반 사찰을 칭하는 고급용어처럼 인식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고려시대 불교에서 총림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려불교에서 총림의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총림의 표현은 12세기 중반 선종계에서 통용되었고, 이 시기 관련 자료인 ‘청도운문사원응국사비’, ‘광지대선사지인묘지명’, ‘산청단속사대감국사탑비’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담진(曇眞)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용문사중수비’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탄연(坦然)의 스승 담진(曇眞)과 관련된 ‘용문사중수비’에는 “신사년(1161) 경북산 대흥사에 머무를 때에도 재산을 희사하여 건물을 중수하고서 총림회를 열어 혜조국사가 중국에서 전해온 좌선의궤와 배발(排鉢) 등의 일을 행하면서 낙성했다. 계사년(1173)에는 왕명으로 명봉사 총림의 법주가 되었고, 을유년(1165) 김주(金州) 안국사에서 열린 50일 담선법회 때에도 법주를 맡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진 총림회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즉, 1161년 고려불교에는 분명하게 총림이나 총림회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기록이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담진이 전했다고 하는 좌선의궤와 배발이 바로 중국 총림의 청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상영 교수는 이와 관련해 논문에서 “용문사중수비에서 계사년에는 왕명으로 명봉사 총림의 법주가 되었다는 표현은 이 시기 선종계에 총림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러한 총림은 청규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시기 총림이나 총림회가 청규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면 지금의 총림과 형식이 다르기는 하나 중국에서 형성된 총림의 모습이 투영됐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용문사중수비’는 이러한 이유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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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구산 스님을 방장으로 개원한 조계총림 송광사 전경. |
고려시대 총림은 이규보가 지은 『용담사총림회방()』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산의 승려들이 이 대회가 있기 1년 전에 각기 그 산문으로써 지방의 절들을 점유하고는 법회를 열어 겨울을 지냈는데, 이것을 총림(叢林)이라 이른다”는 내용을 비롯해 “『대장엄론(大莊嚴論)』에 이른바 이와 같은 중승이 곧 중지의 총림이니, 일체 선문이 그 가운데 모여 있다”는 표현이 있고, “올해 병술년(1226)에 총림대회를 용담사에서 열었다”는 내용도 있다.
용담사 총림회는 가지산문 소속 선승들이 모여 개최한 법회였다. 자료에서 보듯 담선법회가 열리기 1년 전부터 선문 별로 함께 모여 법회를 열었고, 이때의 법회를 총림회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상영 교수는 “대흥사 총림회가 사굴산문과 연관이 있고, 용담사 총림회가 가지산문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총림회는 특정 선문의 범주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의 억불 상황은 총림에도 영향을 미쳐 그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백암(栢庵) 성총(性聰, 1631∼1700)이 지은 『치문경훈주(緇門警訓註)』에서 “수행은 반드시 완전한 수행이라야 총림의 도반들에게 나눌 수 있다.(총림은 많은 승려들이 모여 살며 도를 닦는 장소이다)… 여러 비구가 화합하여 모두 모인 곳이라야 총림이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때의 총림이 지금의 모습과 같은 총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정확하게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조선 백암의 치문경훈주에도 언급
이후 총림에 대한 기록은 경허(1846∼1912) 스님이 1902년 10월 15일 작성한 『범어사학명암수선사방함청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청규의 이름을 정확하게 밝히면서 10개의 청규 가운데 “총림에서 도를 행함에 사무를 분담하고 일을 맡아보는 이가 있어야 하나니 그 소임을 맡은 선화(禪和)는 마땅히 남다르게 자기 소임에 충실해서 게으르지 말고…”라고 적고 있다. 이에 비춰볼 때 경허 스님은 당시 결사도량을 총림으로 인식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총림에 대한 기록은 이후 1939년 3월 선학원에서 열린 조선불교선종의 정기선회에서 나타난다. 수좌들은 당시 교단의 성격을 갖고 있던 교무원 측에 ‘모범총림’ 건설을 위해 지리산, 가야산, 오대산, 금강산, 묘향산 등 5대 명산을 청정비구 전용 사찰로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모범총림 건설은 1945년 9월 전국승려대회에서 다시 제기된다. 당시 승려대회에서 교단의 4대 중요사업 중 하나로 모범총림 건설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1946년 10월 가야산 해인사에 모범총림의 성격을 지닌 ‘가야총림’이 설립됐다. 그러나 가야총림은 6·25 전쟁으로 인해 해체됐다.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에 의미 있는 총림 건설이 두 차례 추진되기도 했다. 1959년 8월 1일 서울 조계사에 예과 1년 본과 3년 과정의 중앙총림이 개원한 것. 그러나 이 중앙총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1963년에는 부산 범어사에서 본격적으로 총림 건설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때 추진됐던 총림은 수행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하고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전형적 모습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1967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제16회 임시종회에서 해인총림 설립이 결의됐고 성철 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해서 총림이 문을 열었다. 드디어 가야총림의 뒤를 이어 개설한 해인총림에 의해 총림의 역사와 전통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1967년 해인총림 개설에 이어 1969년 순천 송광사에 구산 스님을 방장으로 조계총림이 설치됐다. 제2 정혜결사운동을 제창한 구산 스님은 송광사를 일신했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현재 조계종에 5대 총림 존재
해인총림, 조계총림에 이어 1984년 통도사에 영축총림이 개원돼 초대 방장으로 월하 스님이 취임했고, 같은해 수덕사 덕숭총림이 개원됐다. 덕숭총림 수덕사는 백제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사찰이며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만공 스님에 의해 사격이 크게 신장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널리 알려진 견성암과 환희대 등의 비구니 도량이 있는 총림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현재 조계종에 존재하는 다섯 총림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1996년 백양사 고불총림이 개원됐고 서옹 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됐다. 이곳은 1947년 만암 스님을 중심으로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갖고 전라도 지역 20여 사암과 포교당이 참여해 고불총림을 결성했다. 그러나 총림의 형식을 갖추고 공식 총림으로 인정받은 것은 1996년이다. 하지만 총림의 역사에 대해서는 현존 각 총림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다.
여하튼 현재의 총림은 선종을 지향하면서도 간경과 주력 그리고 염불과 운력 등을 모두 담보하는 한국불교의 특성이 다 녹아있는 도량이다. 따라서 총림의 역할을 어떻게 극대화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는 것이 현재의 한국불교를 어떻게 발전시켜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987호 [2009년 02월 23일 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