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 전설과 경순왕
도라산 전설
장단읍내 뒤 백학산 서맥내령 맑고 맑은 사천내가 흐르는 냇가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156m 도라산 고지는 주위 수목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여름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 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국난시에는 봉화 신호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곳은 남북이 갈라진 38선을 지키기 위하여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 한국군들이 수호하고 있으며, 실향민과 여러 지역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창화사는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경순왕릉은 영조대왕이 복원한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군인들이 수호 관리하고 있다가 최근에 개방되었다.
경순왕릉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고랑포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에 단독으로 위치하며 곡장을 두르고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규모는 직경 630㎝, 높이 200㎝이다. 봉분전면에는 410㎝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하단의 계체석에 상석(너비 103㎝, 폭 44㎝, 두께 23㎝)과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높이 160㎝)이 직전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쌍(좌측 높이 52㎝, 길이 123㎝, 우측 높이 60㎝, 길이 115㎝), 망주석 2기(높이 좌측 160㎝, 우측 145㎝), 능표 등의 석물들이 놓여있다. 능표(비좌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는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을 갖추었으며 묘표전면에 종1열로 “新羅敬順王之陵”의 비문이 있다. 이는 모두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재질이다, 묘가 위치한 구릉 좌측하단에는 경순왕릉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내에 있으나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경순왕은 신라 제56대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문성왕의 6대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이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 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이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하여 이곳 장단 고랑포 성거산에 왕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모셨다. 그 후 임진왜란 등으로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 영조 23년(1747)에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이곳을 지키던 국군장병에 의해 발견되어, 수차례의 정비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순왕릉비
왕릉의 동남쪽 비각 안에는 경순왕릉 비로 전해오고 있는 비가 있는데 이는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또한 비문의 내용도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후손 김빈(金?)과 김굉(金?) 등이 경순왕릉 인근의 민가에서 비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경순왕(敬順王), 김(金), 십월여친지국(十月輿?至國, 경순왕이 10월에 고려에 손국하러 왔다는 의미임)】십 여자 정도 남아있는 비를 발견하여, 이 비가 경순왕릉 비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당시 비는 임진왜란 이후 경순왕릉의 관리가 소홀해 지면서 왕릉과 함께 방치되면서 실전되었다.
1973년 경순왕릉이 재발견되면서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의 노력으로 이듬해 고랑포마을 내에 방치되어 오던 비를 발견하고, 이를 고랑포 초등학교에 가져다 놓았다가 1987년에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비는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귀부에 박혔던 부분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며, 규모는 너비 67㎝, 두께 15~18㎝, 높이 132㎝이며 비신 윗부분 16㎝부분에서 모죽임 하였다.
'참고실 > 慶州金氏'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왕릉은 (0) | 2009.07.29 |
---|---|
왕릉으로 가는 솔밭길 - 흥덕왕 (0) | 2009.03.19 |
경순왕 후손 (0) | 2008.11.26 |
경순왕은 누구인가? (0) | 2008.11.26 |
경순왕 임금이 머물던 신안사 (身安寺 (0) | 2008.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