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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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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시등공덕경(佛設施燈功德經)』에서는 “비록 신심이 없어 여래를 비방하던 자라도 등불을 받들어 올리면 현세에 3종의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임종할 때는 3종의 밝은 마음을 얻고, 4종의 광명을 볼 수 있다. 죽어서는 33천에 태어나며 다섯 가지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고 등(燈) 공양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상과 탑 뿐만 아니라 경내를 밝혀온 석등(石燈)도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석등은 주로 법당 앞에 탑과 함께 조성되었고, 등불이 들어앉은 화사(火舍·불의 집)에서 퍼져 나오는 빛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진리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불교가 전래된 이후 진리를 밝히는 상징물로 석등이 조성됐던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한 각종 고서에서 석등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하게 밝힌 기록을 전하고 있지 않아,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조성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익산 미륵사터에 ‘미륵사지석등하대석’이 남아 있어 삼국시대에도 석등이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미륵사터 하대석은 백제때 제작
미륵사지석등하대석(문화재자료 143호)은 석등 받침돌의 일부로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이 중 1기는 동쪽에 새로 복원해 놓은 석탑과 법당 터 사이에 있고, 또 다른 1기는 중앙의 목탑 터와 법당 터 사이에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쪽에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 지붕 돌과 머리장식을 얹어두는데 미륵사터에는 3단의 받침돌 가운데 아래받침돌까지만 남아 있다. 아래 받침돌 윗면을 두르고 있는 8잎의 연꽃무늬는 이 절터에서 발견된 연화문 수막새와 비슷하고 지금의 위치가 본래 자리인 것으로 미루어 미륵사 창건시기(610∼624년 추정)와 비슷한 백제 무왕 때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미륵사지석등하대석을 포함한 석등 부재들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일부만 갖추고 있으나 석등의 처음 양식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연꽃의 모습은 누구의 마음이라도 풀어줄 듯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시대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석등인 미륵사터 석등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 반면, 삼국시대를 잇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중 26기 정도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부석사 석등은 8각의 화사석에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맛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8각으로 조성된 일반형 석등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석등의 전체 높이는 2.97m로 부석사를 창건(676)할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 석등은 “100번만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 부석사에 온 불자들이 그 둘레를 돌기도 하고, 부처님오신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밤에 이 석등을 돌며 복을 빌기도 한다.
쌍사자 중 가장 오래된 건 법주사에
그리고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석등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으로, 전체 높이가 6.4m에 달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석등은 국내 최대의 규모뿐만 아니라 형태에 있어서도 하대석과 상륜부의 조각이 세심하게 만들어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석등 역시 조성시기나 배경을 밝힌 명문이 새겨진 경우가 거의 없어 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석등 가운데 제작연대가 확실하게 나타난 것은 담양 개선사지 석등이 유일하다. 개선사지 석등은 신라 48대 경문왕 8년 때인 함통 9년(869)에 세워졌다는 내용이 명문에 새겨져 있다.
석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각각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석등 양식의 주류는 통일신라시대에 성행된 팔각이 기본형이다. 보통은 팔각을 기본으로 하대석은 연꽃을 엎어놓은 복련(覆蓮) 모양이고, 상대석은 연꽃이 하늘을 떠받치는 모양의 앙련(仰蓮)으로 연꽃 두 송이가 피어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석등의 주요부분인 팔면의 화사석에는 사면에 창을 내어 불빛이 퍼져나가도록 하고 다른 사면에는 보살상이나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석등은 이러한 형식을 기본으로 발전했으나, 고려 초기에는 일시적으로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육각의 모양이 발전했으며 고려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각의 모양이 유행하고 있다.
또 아래 연꽃과 위쪽의 연꽃을 잇는 간주석 역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호남지방에서는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이나 임실 용암리 석등(보물 제267호)처럼 고복형(鼓腹形)의 간주가 나타나 지방적인 특색을 보이기도 했고, 쌍사자형, 단사자형, 인물상형, 육각형, 사각형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했다.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두 마리의 사자가 엎어놓은 연꽃(하대석)에 올라서서 위쪽 연꽃(상대석)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한 쌍사자 석등이다. 쌍사자 석등으로는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국보 제103호),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 중에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조성된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가장 오래됐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에 남아 있는 발해 석등도 희귀 석등으로 꼽을 수 있다. 옛 발해 영역인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6.3m에 달하고 하대석과 상대석에 장식돼 있는 연꽃무늬가 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옛 석등이 대략 280여기로 이 중 60여기가 완전한 모습이며 북한 지역에 10여기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시대 석등이 26기, 고려시대 석등이 31기 정도다. 그리고 국보로 지정된 석등이 5기,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21기이며 이들 보물급 이상 26기 중 간주석이 팔각 모양을 한 것이 12기로 가장 많다. 그리고 장고 모양으로 생긴 석등이 8기, 사자형 석등이 6기다. 문화재로 지정된 석등 이외의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석등은 대부분 팔각형이며, 석등이 발달하지 않은 인도와 중국, 일본 역시 현존 석등이 모두 평면 팔각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성제·팔정도 진리 표현 상징물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팔각을 팔정도로 풀이하고, 화사석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추도록 조성된 사방의 화창(火窓)은 사성제 법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의 연꽃 두 송이가 피어 있는 석등은 연꽃에 흙탕물이 묻지 않듯이 팔정도를 올바로 수행하는 구도자에게 세속의 그릇됨이 결코 침입할 수 없다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화사(火舍)에서 발한 진리의 불이 사방으로 난 화창을 통해 뿜어져 나와 어둠에 쌓인 중생세계를 밝혀주는 것이니 이 또한 예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7호 [2008-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