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6. 당간지주

淸潭 2008. 7. 1. 14:37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6. 당간지주
 
밀교의식으로 唐군 물리친 사천왕사
기사등록일 [2008년 07월 01일 화요일]
 

신라 문무왕 14년(674). 당나라는 신라가 자신들의 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고 트집을 잡아 50만 대군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뒤늦게 당나라의 술책을 눈치챈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급하게 계책을 구했고, 명랑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했다. 그러나 당의 침략이 예상보다 앞당겨지면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부족하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추게 하고 12명의 명승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했던 밀교의식)을 사용하자,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고 말았다.

당나라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짓기 시작했던 사천왕사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고 3년이 더 흐른 679년에 완성됐으며, 이는 곧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세운 절이 됐다. 당시 신라에는 당의 불교문물이 많이 전해졌으며 이 때 당에서 절을 장엄하는데 이용했던 장엄물 중 하나였던 번찰(幡刹)과 번간지주(幡竿支柱)도 신라에 전해졌다. 그

 
현존 최고의 당간지주로 불리는 사천왕사지 당간지주(위)와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이전에 세워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삼랑사지 당간지주(아래).
리고 그 번찰과 번간지주는 사천왕사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당간지주에 명문이 없고 고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어디서 세워지기 시작되었는지 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여러 가지 귀중한 물건을 보냈을 때 번을 함께 보냈다는 내용이나, 623년 신라가 일본에 관정번과 소번을 보냈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 지장대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번당(幡幢)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 등에 따라 번이나 당을 걸기 위한 당간과 당간지주가 삼국시대부터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여러 기록에 근거해 당간지주가 통일신라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해 고려시대까지 유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통일신라 최초 창건 사찰인 사천왕사지에서 나온 당간지주(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음)를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 관련 연구분야에서 선구적 입장을 보이며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를 펴내기도 한 엄기표 씨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조성 시기를 추정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첫 사찰이라는 점이 사천왕사지 당간지주를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는 이유”라고 학계의 입장을 설명했다.

유일하게 명문 남긴 중초사지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으며,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한 삼랑사지 당간지주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오래된 것을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며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보물 127호)의 경우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보다 앞선 600년에서 65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사찰 창건 연대뿐만 아니라 양식면에서도 삼랑사지 당간지주가 통일신라보다 오래된 양식”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당간지주가 세워진 사찰의 창건 시기가 사천왕사보다 앞서는 곳은 5곳 정도다. 따라서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현존 최고의 당간지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당간지주에 조성 배경이나 시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유일하다. 보물 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서쪽 지주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이며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에 건립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 자체가 희귀한 예로, 조성한 연도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역시 옛 불교문화재가 그랬듯이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해왔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 중 하나로 꼽히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융성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크게 쇄락했고 끝내 풍기군수 주세붕이 절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우면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다. 현재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 숲에 있으며, 소수서원 내에 숙수사 유물이 여럿 남아 있다.

당간지주의 규모 면에서는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86호)가 5m 40cm로 가장 크다. 신라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 터에 있다. 이 당간지주는 전반적으로 소박하면서도 규모가 거대해 웅장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 가운데 기단부와 당간 받침을 완전하게 갖춘 최고의 작품으로는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보물 28호)가 꼽힌다. 지주의 면에 새겨진 조각 수법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정연하게 다듬어진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들이 현존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수많은 당간지주가 조성되었으나, 이 시기에 조성된 당간지주 가운데 80여기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당간지주는 북한 지역에도 몇 기가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북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로는 중흥사 당간지주가 꼽힌다. 북한 보물급 문화재 7호로 지정돼 있는 중흥사 당간지주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 1동에 있으며 바닥돌 위에 세운 두 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깃발대를 끼워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중흥사는 1590년에 편찬된 『평양지』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때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고려사찰로 추정하고 있어 이 당간지주의 조성시대 역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북한 최고는 중흥사 당간지주

 
현존 최고의 갑사 철당간.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주다. 그러나 당을 걸었던 당간은 현존하는 것이 극히 드물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당간은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256호)이지만, 1893년 7월 25일 벼락으로 철당간 상단 마디가 부러지는 불운을 겪었다. 따라서 보존상태가 우수한 것은 물론 당간을 세운 기록이 남아 있는 청주 용두사지철당간(국보 41호)이 더 귀중한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된 사찰로 당간은 밑받침 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 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했고, 세 번째 철통 표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본래 철통이 30개였다. 갑사와 용두사지 이외에 철당간이 남아 있는 곳은 안성 칠장사 정도다.

당간은 당을 걸기 위한 시설로 일종의 장엄, 장식, 경계 및 상징적 의미로 세웠고 목조, 석조, 철조 등으로 제작됐다. 당간은 주로 사찰의 장엄과 공양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배치돼 사찰의 위상을 나타내고 불법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전법과 교화의 상징물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5호 [2008-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