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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부터)1308년 건축 수덕사 대웅전. 화재로 소실된 후 1376년에 다시 지은 부석사 무량수전. 1200년대 초에 조성된 봉정사 극락전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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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불·보살을 봉안한 전각을 이르는 법당. 법당은 본래 선종(禪宗) 사찰에서 법을 설하는 집으로 불렸고, 교종(敎宗)의 강당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사찰에서는 법당(法堂)과 불전(佛殿)을 하나로 만들어 그곳에서 예배·설법 등 각종 행사와 의식을 병행해왔다.
법을 설하는 건물인 법당은 어느 사찰에나 한 채 이상은 꼭 있고, 법당에 봉안된 불·보살에 따라서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약사전, 원통전, 지장전, 나한전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다. 이 법당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각종 고서에서 전하는 사찰 건립과 법당 신축 및 중수 기록 등을 통해 법당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당은 375년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 초문사와 이불란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어떤 법당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법당은 고려시대 나무로 지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을 꼽고 있다. 극락전은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했다는 내용이 담긴 상량문이 발견되면서 조성연대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학자들은 전통 목조건물의 경우 신축 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고려해 봉정사 극락전의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법당을 한국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고 있는 것.
봉정사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그리고 내부 구조물의 고풍스러운 품격이 이 법당의 특징으로 손꼽히고 있고, 부재 하나 하나가 모두 국보적 기법을 갖추고 있어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봉정사에는 신라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 스님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봉정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능인의 수행력에 감동한 천상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수행 중이던 굴을 환하게 밝혀줌으로써 수행을 도왔다고 한데서 기인해 천등산(天燈山)이 되었다. 그리고 능인이 종이 봉황을 접어 날린 후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산문을 열었다고 해서 봉황이 머무른 절이란 의미로 봉정사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봉정사는 봉황의 품속에 들어앉은 모습으로, 풍수지리에서는 천하의 명당으로 꼽기도 한다.
봉정사 대웅전 10세기 作 가능성
봉정사에는 극락전 이외에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등 옛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마치 고건축박물관을 보는 듯하며, 이 때문에 건축물 종합선물세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봉정사 대웅전은 지난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중 중국연호인 선덕 10년(조선 세종 17년, 1435)에 쓴 글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면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가 썼다는 상량문에는 ‘신라 때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한다’는 문구가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시기보다 500년 앞선 건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고증을 통해 이 기록이 인정을 받게 될 경우 극락전보다 앞서 건축된 법당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법당 중 가장 오래된 법당의 영예을 안게 된다.
사찰 창건 시기가 봉정사보다 앞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도 고려시대에 지어진 법당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661∼681)때 지었으나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단청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916년 해체·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에 우왕 2년에 재건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밝혀졌다.
무량수전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 법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정면을 향하고 있는 법당의 모습과 달리 불상이 법당 옆면으로 봉안된 게 특이하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부석사 창건 설화도 흥미롭다. 당나라에서 유학중인 의상을 흠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 의상이 귀국하는 뱃길이 안전하도록 도왔고, 이곳에 이르러서는 여기에 숨어사는 도적 떼(이교도)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침으로써 부석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는 것. 이때 도적 떼를 물리친 바위가 무량수전 뒤쪽에 있으며 부석(浮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역사적 입장에서는 현재까지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법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건물 규모나 구조방식, 법식의 완성도 면에서는 부석사가 더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 때문에 고대 사찰 전각의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부석사 무량수전이 기준이 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선 시기에 건축된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도 법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배다. 수덕사 대웅전은 1936년에서 40년까지 진행된 중수 중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해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법당이기도 하다.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우리나라의 목조건축물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수덕사 대웅전은 옆면에서 볼 때 5개의 기둥이 건물을 정확하게 4등분하고 있으며,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게 이어진 맞배지붕은 기둥과 맞물려 균형미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곡선형의 휘어진 들보는 예술적 감각의 백미로 꼽힌다. 대웅전은 백제의 기술적 토양 위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건축의 걸작으로 불릴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계통 最古
삼국시대에 건축된 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은 고려시대의 신앙적 모습과 건축미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고려시대 법당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는 또 하나의 법당이 조선 초기 건립한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다. 조선 초기 주심포 건축 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를 갖고 있어 하나의 건축양식이 정착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으면서 국보로 지정됐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세워졌으며 정면 3칸에 측면 3칸, 주심포 맞배지붕 형식이다.
법당은 대부분 목조건축물이어서 관리·유지에 어려움이 많았던 탓으로 옛 자취를 간직한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수가 다른 유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삼국시대 이후 6·25까지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수없이 소실되었고, 사람의 실수로 인한 화재 피해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몇 남지 않은 옛 법당이 잘 보전될 수 있는 대안 마련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8호 [2008-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