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의 바닷길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던 삼국시대에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양 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백제 무령왕(462∼523)은 아버지 동성왕이 좌평 백가에게 살해되자 왕위에 올라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백제 재건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는 첫째가 백제의 옛 땅을 되찾는 일이었고, 이어 문화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백성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무령왕은 이에 따라 중국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며, 이 과정에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됐다. 때문에 사신과 함께 백제의 스님을 양 나라에 유학 보내 중국의 불교를 배우도록 했는데, 그 첫 번째 유학승이 발정(發正) 스님이다. 무령왕 치세(501∼523) 중반이라고 할 수 있는 510년 경 중국에 들어간 발정은 30여 년 동안 공부하고 사비천도를 전후해서 백제로 돌아왔다. 이 발정이 곧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첫 유학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정에 관한 소식은 1918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미륵불광사사적」에서 겨우 존재를 확인하게 된 겸익(謙益)의 발자취를 따르는 과정에서 얼핏 엿볼 수 있는 정도여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때문에 발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승이라는 점 역시 공인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겸익, 522년 첫 인도 유학
발정보다 12년 늦은 522년 최초로 인도에 유학한 겸익 역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근거해 주로 무령왕대와 성왕대(524∼554)에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겸익이 인도로 유학하기 전 백제 불교는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경전에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한역되지 않은 경전이 있는 불교 교학에 대한 이해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 겸익은 당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무령왕의 도움을 받아 인도에 가서 직접 범본을 구해 번역할 것을 발원했고, 드디어 522년(무왕 22)에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최초로 인도 유학 길에 오르게 됐다.
불교문화의 원류를 찾아 백제의 발전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길을 나선 겸익은 서해바다를 건너 남중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미 양 나라에 유학중이던 발정을 만나 후일을 기약한 겸익은 다시 해로를 이용해 인도에 도착,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범어와 율장을 배웠다. 그러나 인도에서 배움에 열중하던 겸익은 중국에서 온 승려들로부터 고국의 왕(무령왕)이 이미 몇 해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겸익은 당초 인도에 유학할 때 배우고자 했던 목적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과거 자신은 물론 불교중흥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무령왕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백제의 상황을 알 수 없어 결국 귀국을 결심했다. 백제를 떠난 지 5년만에 귀국 길에 오른 겸익은 율장의 경전과 다른 경전 등을 배에 싣고,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더불어 백제로 돌아왔다. 이 때가 백제 성왕 4년(526)이다. 그러니까 무령왕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나 지난 후였다.
고구려 승랑은 유학 아닌 교화승
겸익은 백제로 돌아와 흥륜사에 머물면서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명을 불러들여 인도에서 가져온 범어로 된 아비달마에 관한 논소와 5부의 율장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고, 드디어 이를 신률(新律) 72권으로 완성했다. 이 때문에 후세인들은 겸익을 백제율종의 비조(鼻祖)로 불렀다. 당시 전륜성왕을 꿈꾸던 성왕은 이 신률의 서문을 직접 지을 정도로 불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무렵 중국 양 나라에 유학중이던 발정도 겸익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교화에 전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백제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고 계율 사상이 널리 확산되면서 백성의 삶도 계율을 지키는 데에 바탕을 두도록 했다.
결국 발정과 겸익은 각각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인도에 유학한 최초의 유학승이면서 백제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보다 먼저 중국으로 간 고구려 스님이 있었다. 승랑(僧郞)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그는 장수왕(재위:413∼491) 말년 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을 공부하고 중국 삼론종의 종주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에서 태어난 승랑이 이미 고구려에서 삼론학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활동은 구법(求法)이 아니라 교화(敎化)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승랑 연구에 있어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동국대 김성철 교수는 “승랑은 고구려에서 이미 높은 학식을 갖춘 인물로 중국행은 유학이 아니라 교화차원으로 보는 것이 맞다”며 “승랑은 삼론학, 천태학, 남종선, 유식학에 밝아 중국불교를 대승불교로 변화시키는 등 동아시아 불교의 새벽을 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승랑은 최초의 유학승이 아니라 최초의 해외 교화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스님들의 해외유학, 즉 구법행은 신라에서 봇물 터지듯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신라에서의 초기 유학승이라고 하면 원광(圓光)법사를 떠올리기 쉬우나, 신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유학을 간 승려는 원광법사가 아니라 각덕(覺德)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원광은 진평왕 11년(589)에 중국으로 유학해 불법을 배우고 600년에 귀국했으며 이때부터 신라에서 대승법문을 펴고 교화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속오계를 설한 인물로 유명하다. 때문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해동고승전』,『조선불교통사』 등에서는 원광에 앞서 양 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각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10년(549) 어느 화창한 봄날에 큰 경사라도 난 듯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 앞길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조정의 백관들 역시 왕명을 받들어 길 양편에 늘어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 군중들 사이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양 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후 부처님 사리를 받들어 모시고 귀국한 각덕이다. 양 나라 사신 일행과 함께 돌아온 각덕은 최초로 부처님 사리를 이운해 온 신라 첫 구법승이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각덕에 대한 언급이 없어, 귀국 후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최초 유학승은 각덕
하지만 각덕이 양 나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진흥왕 1년인 540년으로, 유학 길에 오르기 전에 도반들에게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남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중국에 유학한 이후 9년여 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불법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옛 시절에 구법 유학승이 언제부터 어느 정도 규모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 나라와 교류할 수 있는 서쪽의 바닷길이 제대로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으로 유학하는 것 자체가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9호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