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상응하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진다는 뜻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는 분명히 있다.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 곳곳에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노블레스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12대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는데,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 가문은(''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말이 ‘성경’ 말씀에도 있는 것 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렵지만,)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더 유명한!!)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진사는 일명 생진(生進)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소과(小科)의 종장(終場)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생원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일테면 생진과보다 더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두 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으므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다.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자집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윈-윈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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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이 남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는데, ‘적선지가(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해서,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던 시대에, 흉년은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니까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하는 ''흰죽 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인내하면서 ‘떨이’ 물건을 기다렸으나,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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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 집의 창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처럼,이곳에 쌓인 곡식들은 최씨 일가만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0석은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 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또한,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준과 그의 둘째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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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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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유일한 만큼 인생의 편차가 큰 인물도 없을 것이다. 한 세기 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는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1895년 1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부친의 영향으로 1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유일형''이었던 이름을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그의 의지대로 ''유일한''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인 자유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자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 결의문''을 작성하고 발표, 그 결의문대로 실천하며 평생 조국을 사랑하며 살았다.
192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 동양 현지 총 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편안하게 살기 보다는, 민족에 봉사하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1924년 승승 장구하며 성공을 거듭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회사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동포들의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일한 박사는 1926년 12월에 자신의 이름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1945년 1월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세에 미군의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계획(Napko Project -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들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침투, 폭파, 통신, 낙하산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코드명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유일한은 후에 미 국무성의 비밀문서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평생 동안 한마디도 이 작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 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또한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시절의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아야 했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킨 그는, 1968년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자,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위 내용은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님이신 예종석 교수의 글에서 참고했습니다. -
"행복의 비결은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소용이 없다."
"사회 자원이 일종의 특혜가 돼 대물림돼서는 않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버릴 때 자신을 얻을 수 있다."
"사회에서 번 돈과 재능은 사회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