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성재의 수덕사 편액

淸潭 2008. 2. 25. 18:59
 

성재의 수덕사 편액

 

수덕사…칠보문 단청 변죽 달아
 

◇예산 수덕사 조인정사의 <수덕사> 편액.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 1875~ 1953)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일찍이 중국, 일본 등을 왕래하며 견문을 넓히고 작품 활동도 하였다.

그가 중국에 머물던 38세에는 당시 총통이었던 원세개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국무원 비서직에 있으면서 옥새(玉璽)를 비롯한 수많은 인각(印刻)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년 동안을 중국에 체류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대동한묵회’를 조직하여 전람회를 여는 등

서예와 전각을 통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재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으며,

해서(楷書)는 안진경체를 본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등과 함께 근대 전각의 오대가로 꼽히며,

한국 근대의 전각을 현대로 이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성재의 사찰 편액은 예산 수덕사 <수덕사>, 안성 청룡사 <명부전>,

하동 쌍계사 국사암 <명부전>, <칠성각>, <옹호각> 등이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해인사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가 그의 글씨이다.

 

예산 수덕사 청련당 아래쪽, 조인정사에 걸려 있는 <수덕사> 편액에는

‘불기이천구백칠십이년 칠십이수 성재 김태석

(佛紀二千九百七十二年 七十二  惺齋 金台錫)’

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2과의 방인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성재가 72세 되던 1946년에 쓴 글씨로,

액판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은 칠보문 단청의 변죽을 달고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조형미가 돋보이는 예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만공의 수덕사·부석사 편액
 

백 련 당…유려하고 통쾌한 행서
부 석 사…담대한 기상 잘 나타나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

◇서산 부석사 ‘부석사’편액.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은 전라북도 태인 출생으로,

1883년 김제 금산사에 갔다가 환희심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고,

이듬해 공주 동학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유발동자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그는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鏡虛)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였고,

그 뒤 수년간 천장사에 머물다 아산 봉곡사, 서산 부석사,

부산 범어사 계명암, 공주 마곡사 등을 돌며 오로지 참선에 전념하였다.

그는 1905년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가 수덕사 금선대에 머물면서부터

40여 년 간 수많은 납자들을 지도하며 선풍을 진작하였다.

만공은 경허의 의발을 받아 한국불교의 커다란 선맥을 형성한 근대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그의 글씨는 그의 성품만큼이나 지정(至精)한 서미(書美)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당시 제일가는 서예가로 꼽히던 김돈희(金敦熙)와도 글씨로 교유하였다고 하는데,

예산 수덕사 <백련당>, <청련당>, <향운각>, 정혜사 <쌍수루>, 견성암 <견성암>,

아산 강당사 <관음전>, 서산 부석사 <부석사> 편액 등

주로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사내 암자와 인근 사찰에 글씨를 남겼다.

예산 수덕사 <백련당> 편액에는 ‘2961(二九六一)’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인, 만공(宋月面印, 滿空)’이라는 백문, 주문의 방인 2과가 찍혀 있다.

백련당은 대웅전 우측에 청련당과 마주하여 자리한 ㄷ자형의 요당으로,

편액은 만공이 수덕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던 시기인 1934년에 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방필(方筆)로 통쾌(痛快)하게 써 내린 행서이다.

서산 부석사 심검당에 걸린 <부석사> 편액에는 ‘칠십옹(七十翁)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송월면, 만공(宋月面, 滿空)’이라는 도서가 있다.

나무결이 드러난 느티나무 액판의 가장자리를 파서 변죽을 대신 한 이 편액은

만공이 덕숭산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는 띠집을 짓고 지내던 1940년에 쓴 것으로,

아마도 그 무렵에 절을 중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강직(剛直)한 성정과 담대(膽大)한 기상이 잘 드러난 심후(深厚)한 필선의 행서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소전의 수덕사 편액

동방제일선원 회화성 강한 전서 대표작
 

◇수덕사 일주문 편액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1903∼1981)은 전라남도 진도 출생으로

1925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했다.

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예서로 처음 입선했고,

특히 제10회 때에는 특선을 수상했다.

또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분리된 제1회‘조선서도전(朝鮮書道展)’에서는 다시 특선을 했고,

제2회 때에는 심사위원이 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소전은 고향인 진도에 진도중학교를 설립했으며

예술원 회원, 민의원 의원,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예술원 부회장, 국회의원 등을 지내기도 했다.

소전은 김돈희(金敦熙)로부터 글씨를 배워 글씨와 문인화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회화성이 강한 전서를 잘 썼으며

한글 전서를 창안하는 등 현대 한국 서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서예가였다.

소전은 당시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였던 만큼 명승고적에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사찰에 걸려있는 편액으로는 남양주 봉선사 <칠성각>,

예산 수덕사 <덕숭산수덕사>, <동방제일선원>, 경주 불국사 <관음전>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예산 수덕사 일주문 뒤쪽에 걸려 있는 <동방제일선원> 편액에는

‘임인장월 소전산인(壬寅長月 素筌散人)’이라는 관지와 2과의 도서가 있다.

이것은 소전이 1962년 절에 들려 일주문 앞에 걸려 있는 산문사액과 함께 쓴 것으로 보인다.

세로 9개의 쪽판을 연결한 이 편액은 변죽을 청색으로 액판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조선 시대의 편액 형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그가 즐겨 썼던 회화성이 강한 전서로 금문(金文)의 결구를 차용하여 쓴 것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